-해롤드 라스키, <현대 국가에서의 자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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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01 권력
- 2006.12.31 음유시인은 2
- 2006.12.30 글을 쓰려면 12
- 2006.12.30 개념 18
- 2006.12.30 츠메카린 이야기 AU : 누님이 줄었어요 (4) 12
- 2006.12.29 Extreme Dream Master 10). 플레이 레무리아!
- 2006.12.26 미녀는 괴로워 VS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 2006.12.25 12월 25일은 15
- 2006.12.13 게임, 레무리아 온라인 구상 16
- 2006.12.05 작가가 하는 일 (2) 6
- 2006.11.30 츠메카린 이야기 AU : 누님이 줄었어요(3) 8
- 2006.11.28 진주만 감독판 VS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 10
- 2006.11.26 츠메카린 이야기 AU : 누님이 줄었어요 (2) 18
- 2006.11.24 츠메카린 이야기 AU : 누님이 줄었어요 13
- 2006.11.22 결정하는 방법
- 2006.11.06 그만 좀 패 13
- 2006.10.25 작가가 하는 일 2
- 2006.10.25 왜와 어떻게 2
- 2006.10.22 20자평 - 눈물을 마시는 새 13
- 2006.10.19 에어리어 88 4
- 2006.10.17 Extreme Dream Master 9). CSI 츠메카린 2
- 2006.10.13 보통, 개미는 '여자'다. 2
- 2006.10.10 10월 10일, 쌍십절 4
- 2006.10.10 End of the Broken Wing 8
- 2006.10.04 믿는 자 2
- 2006.10.03 푸트웍 좀 해보자 개새끼야. 4
- 2006.09.29 어머니, 아버지 4
- 2006.09.26 아저씨 17
- 2006.09.21 팬픽 : 츠메카린이야기 AU 10
- 2006.09.21 이영도의 초기작에 대한 잡상 8
-해롤드 라스키, <현대 국가에서의 자유> 中
그들의 슬픔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면서 그들을 위로한다면 말도 되지 않지.
로느친님의 말씀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음유시인은 꿈을 노래하는 사람들이라네.
-렐시아, <하얀 로냐프강> 中
그렇다면 나는 그들을 사랑했는가.
1. 돈을 주고 내 글을 살 사람들에게, 그 돈보다 더한 즐거움을 줄 것
*글을 쓰기 위한 산술식 두 가지
1. 원본 x 0.9 = 퇴고본
2. 자신이 쓴 분량 x 10 = 그 글을 쓰기 위해 읽은 책의 분량
*글을 쓰기 전에 대답을 준비해야 할 질문 세 가지
1. 글의 예상 독자층은?
2.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3. 글이 가진 흥미요소는?
....오늘 갑자기 포스팅이 폭주하는 이유는 새 글 구상이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씁.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 라는 성경의 말은 신(진리)를 인식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의 중요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공자는 옛날, 그가 만약 제왕이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곘는가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서 서슴지 않고 "바른 말을 쓰는 습관을 백성에게 가르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버릇" 이겠다. 정확한 언어로 표시되지 않은 개념은 대상의 정확한 전달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이 인식과정은 순환적으로 확대재생산되어 결국은 인식하는 주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왜곡하게 된다.
-리영희, <전환 시대의 논리>(1974년) 中
그러니까
된장녀
일빠
~빠, ~까
이뭐병
안여돼(안여멸)
초딩(초글링)
개마초↔꼴페미
같은 스스로도 그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단어, 쓰지 맙시다.
빨갱이 다 때려잡아라 하던 시절 지난지가 언젠데, 이다/아니다 이분법은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요.
요즘 게임할때 느낀 그런 정서와 만들고 싶어하는 게임에 대한 비주얼이 꿈속에서 이리저리 섞여서 이상한 잡탕 스토리가 됐네요.
게임 레무리아 온라인에서 가장 득템이 잘되는 필드, 노르하 사막.
오늘도 올드 유저들은 파티를 맺고 몹 몰이에 여념이 없습니다. 수염이 허연 노인이 열심히 고수준 마법을 캐스팅하는 동안, 젊은 전사들은 낮은 스킬로는 별로 데미지를 내지도 못하는 괴물같은 몹들을 유인해 맵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끌어옵니다. 계곡 안에 몹들끼리 서로 몸이 걸려서 오도가도 못하는 사이 체인 라이트닝이 시전되고, 마스터 레벨의 전격이 몹들을 날려버립니다. 쓰러지는 시체들을 향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남녀 캐릭터들. 루팅할때마다 옷이며 금화가 후드득 떨어집니다. 이미 죽을 나이가 지났는데 그 비싼 생명약으로 한달 한달을 사는게 틀림없는 저 노인 캐릭터의 뒤에 앉아있을 유저는 분명 피식피식 웃고 있을 거 같습니다. 파티원들마다 자기에게 일정량의 돈을 주고 가니까 말이죠.
"저럼 재밌나."
계곡 위에서 한마디 툭 내뱉고 지나가는, 긴 검을 어깨에 걸머지고 까만 머리칼을 양쪽으로 질끈 묶은 여자. 니니엘입니다.
"심술나요. 저희들끼리만 다 헤쳐먹고."
옆에서 소녀 캐릭터가 한마디 내뱉습니다. 이름은 '귤'. 니니엘을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지만 사실 게임상의 관계는 그냥 동등한 유저캐릭터입니다.
"돈 저렇게 모아서 뭐에다 쓰려는지 원. 퀘스트도 안해. 던전플레이도 안해. 그렇다고 몹잡으려고 열심히 스킬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마망. 나, 재밌는 생각났다?"
니니엘은 귤을 돌아보았습니다. 핑크빛 머리칼이 흔들리며 싱긋 웃는 귀여운 얼굴을 살짝 가렸다가 올라갑니다.
"저 속에 뛰어들어서 몹 흩어버리는거예요!"
말과 동시에 도도도도, 달려갑니다. 이미 한쪽에 잔뜩 모여있는 백마리 가까운 몹들 사이로, 귤이는 신나게 달려서 전부 흩어버렸습니다. 몹들이 귤이를 인식하면서 하나 둘 서로를 밀치고 계곡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등 뒤에 잔뜩 몹을 달고 전력 질주로 도망오는 귤이를 보며 니니엘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검을 뽑아들어 일격에 첫 몹을 베어버립니다. 한번에 한 마리씩. 어려울 것 없는 싸움이네요. 등 뒤에서 귤이는 얼른 죽은척합니다. 몹들 인식이 전부 니니엘로 옮겨왔어요.
"이거나 저 인간들이나 뭐가 다른데?"
"이건 마망 실력이고 저건 쟤네들 스킬빨이잖아요!"
다시 한번 베고, 찌르고, 또 베어내니 나머지 몹들은 공포심이 생겼는지 주춤 하고 물러납니다. 그러는 사이 등 뒤에서 쫒아온 뉴비들이 니니엘을 손가락질하면서 다시 몹에게 인식을 끌어 데려갑니다.
"오래 했음 다야!"
"뉴비도 돈좀 쉽게 벌어보자는데 방해나 하고!"
"니가 그렇게 잘났음 너도 파티맺고 몹 몰아다 쓸어!"
한숨이 나오는 소리들. 니니엘은 귤이를 슬쩍 돌아봅니다.
"잘하는 짓입니다? 따님?"
"에이, 그래도 저사람들 쉽게 쉽게 돈버는 건 보기 싫어. 우리 첨에 얼마나 고생고생하면서 스킬 올리고 옷사입고 그랬어요."
"전력질주랑 죽은척만 마스터 레벨까지 올리느라 참 고생했지요."
"컨셉이라니깐 컨셉!"
귀여운 이모티콘 웃음 때문에 니니엘은 또 웃으며 넘기지만, 금방 표정을 굳힙니다. 아까의 그 노인이 살기등등한 눈길을 보내며 천천히 등 뒤에 수많은 뉴비들을 달고 걸어오고 있어서요.
"칼질 하는거 보니 꽤 한참 하셨나본데, 둘이서 이 많은 뉴비들 고생한걸 헛일로 돌리고도 잘했다고 생각하나?"
"잘못한 것도 아니죠. 그리고 고생이란건, 그런걸 고생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퀘스트 망해서 흉터도 생겨보고 혼자서 던전 돌다가 함정에 빠지고 그러는 걸 고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니니엘은 검을 들며 일어났다.
"호오. 난 이 게임 오픈베타때부터 했어. 어지간한 스킬은 다 마스터했고. 그런 나와 싸우시겠다?"
"오픈베타 때부터 하신 분이 그래 이 게임 본질은 잊어먹고 뉴비 지원한다는 핑계로 돈이나 모으고 그걸로 또 생명약 시세조작하고. 잘하는 짓입니다. 결혼도 안했죠? 호감도가 쌓여야 결혼을 하지. 원."
"즐기는 방법은 여러가지야."
"내가 보기엔 당신이 그 여러가지 중 오직 한가지만을 사람들한테 퍼트리는 걸로 보이네요."
"더 이상 못참겠군!"
노인으로부터 전격이 날아들어서 니니엘은 몸을 굴려 피하며 앞으로 뛰어듭니다. 노인이 스태프를 들어 검을 막는것과 동시에 몸을 뒤집어 발로 노인을 차내고, 절벽 뒤로 노인이 떨어집니다. 몹들이 모여 있었고, 노인을 향해 동시에 달려듭니다. 끄아악 하는 비명소리. 살려줘 하는 애처로운 이모티콘.
옆을 돌아보니 뉴비들이 다들 웅성거리며 서로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너 부활 스킬 있어? 아니 없는데. 아직 못배웠어. 난 배웠는데 한번도 안써봐서 비활성화야. 누구 부활스킬 있는사람? 아무도 없어? 니니엘은 또 한번 피식 웃었습니다. 누구나 제일 먼저 배운게 부활스킬인데 하여간 요즘 뉴비들이란.
"가요. 마망."
"부활 시켜 주고 갈까 말까."
"뭘 부활시켜줘요. 저기서 시체 녹을때까지 누워 있어봐야 저런 작자들은 정신차려요."
"그래도 정신 못차릴거 같은데."
니니엘은 귤이에게 이끌려서 걸어가다 아직 루팅 안시킨 시체를 보고 멈춰섰습니다. 귤이가 얼른 시체를 열어 아이템을 꺼냅니다. 비싸고 예쁜 프릴 원피스가!
"와! 나 이거 갖고 싶었는데! 마망 최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니니엘은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PvP 승리 때문에 좀 사회레벨이 깎이긴 했지만 뭐 그정도야 늘상 있는 일.
다음 날 귤이가 접속하자마자 방긋 웃으며 맞이합니다.
"마망! 오늘 또 몹몰이 깨고 놀자. 뎅군도 데려왔어요! 오늘은 남자옷 이쁜거 안나오려나? 응응?"
딱 보니까 거의 질질 끌려온 분위기인 귤이의 남편 데이티아군. 본명보단 늘 '뎅'군이라고 불려서 참 불쌍한데요. 니니엘은 모여있는 몹을 향해 다시 전력 질주를 시작하려는 귤이 어깨를 덥썩 집으며 나직히 말했습니다.
"부부 동반 퀘스트부터 깨고 와야 하지 않겠어요? 바로 요 옆 동굴이잖아요?"
"마마아앙! 그거 무섭,"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방긋 웃으며 윙크하는 금색 눈동자 위로 퀘스트 파티 창이 찰카당, 열립니다.
강한나가 아닌 Jenny의 첫 콘서트
최면에 걸린 홀의 눈에 비친 로즈마리는 더없이 아름답지만...
기네스 펠트로가 그랬듯 김아중도 몸무게가 두배도 넘을 것 같은, 전혀 같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의 특수분장을 하고 직접 열연을 펼쳤습니다. 무대 뒤에 숨은 대창가수와 성형수술을 통한 변신, 그리고 화려하게 피어나는 미녀 신인가수 같은 매력적인 소재들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단순하게 NGO 활동 정도로 제시되는 '마음씨 아름다운 여자'에 비해 훨씬 구체적으로 매력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최면에 걸린 홀과 같은 특정한 인물이 아닌, 극장에 앉아 있는 관객들이지요. 변신이 끝나고 처음 거리를 나서면 보는 사람마다 Beautiful Girl! 우리들도 김아중의 모든 매력을 담아내려 애쓴 그 화면을 바라보며 똑같이 공감하게 되고, 콘서트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콘서트장에 와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죠. 네. <미녀는 괴로워>에서는 우리들이 바로 '홀'이에요. 어쩌면 우리도 최면에 걸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라는 최면에요.
하지만 두 영화의 가장 큰 대칭점은 역시 결말이겠죠. 로즈마리는 원래의 삶 그대로를 살아갑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날씬한 모습이었던 적이 없었고, 그런 모습을 동경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의문을 품은 적도 없습니다. 다만 홀과의 관계만이 그녀가 의심하고 고뇌했던 문제였지요. 그러나 강한나는 다릅니다. 그녀는 이름마저 바꾸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강아지도 아버지도 친구도, 오직 아름다운 '자연 미인' 제니이기 위해 전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제니'는 첫 라이브 콘서트에서 결국 울어버립니다.
한나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로즈마리의 본 모습을 알고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홀처럼, 그녀에게 '괜찮아' 라고 외치게 되지요.
네 괜찮아요. 한나의 노래는 처음부터 계속 괜찮았어요. 영화라는 최면 때문이 아니라도요. 그리고 영화는 처음부터 충격요법 등으로 면밀하게 계산되었던 그 감동을 향해 달려갑니다. 계산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구려는 아닌 그 감동을 향해서. 결국 로즈마리처럼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했어야 하는 거였다는 그 결말을 향해서.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자, 감동하세요!' 가 강하게 느껴졌던 클라이맥스도 별로 없었지만, 그 감동에 정말로 취해 울어버린 경우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홀의 말대로, 영화란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내 눈에만 미인이면 그걸로 족한' 거죠. 그런 최면에 걸리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벽을 넘어 티켓을 끊고 영화관이라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거고요.
제3시대 3019년 12월 25일, 그들은 시대를 바꾼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그 위대한 시작을 기념하며.
※절대로 솔로라서 하는 포스팅이 아닙니다.
※실현 가능성 전혀 없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망상입니다. 구상중인 소설 <드래곤의 딸>과 기본 설정을 공유하기에 이 카테고리에 올려둡니다. (2007년 7월 21일 고유 카테고리 생성)
번역 하는 분들이 영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생물학도들이 전공 개그를 해도, 그림 그리는 분들이 작업과 과제 한탄을 해도,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부동산과 주식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고시생들이 시험 이야기를 해도 다 알아듣고 같이 수다를 떨며 즐거워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걸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그런게 나 자신에 대한 요 몇 년간의 이상향이었는데, 현실은 이렇게 그저 누구나 한번쯤 할 법한 생각을 무슨 대단히 기발한 생각인 줄 알고 몇시간씩 매달려 위와 같이 보기도 피곤한 잡문으로 만들어놓는 삽질이나 하고 있죠.
나 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없으면 안되는 일 같은건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 내가 무슨 대단한 천재인줄 알고 엉뚱한데 시간을 날리곤 해요.
글을 쓴다고 애쓰지만 이것조차 남들 반 만큼도 못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날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계속 읽어줄 수가 없는 글을 쓰고 있잖아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거예요. 내가 정말 즐겁게 해줘야 하는 사람들, 내 글을 읽다가 라면을 태워먹게 만들어줄 사람들, 내 글 보느라 다음날 기한인 과제도 못하게 만들어 줄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인데 말이죠.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내 생일을 기억해주는 사람들, 내가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하고 어디가서 엉뚱한 짓을 해도 웃으면서 타박주는 사람들, 아무리 보기 답답하고 한심해도 만나주고 같이 식사를 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 내 글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안된다는 것이, 내가 글을 못쓴다는 증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써 온 글 전부가, 구상하고 있는 <드래곤의 딸>까지 포함해서 사실은 위 게임 망상처럼 철 지난 헛소리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어요.
영화가 어째서 2시간 내외라는 분량 제한이 정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 등을 제외하고 일반 상업 영화의 대세는 2시간 라인인 듯 합니다. 그래서 감독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수많은 장면들이 "Cut the chase!(추적장면만 남기고 잘라!)" 라는 편집자의 외침에 잘려나가곤 하지요. 다행히도 요즘 세상에는 DVD 발매라는 편리한 수익성 사업방향이 있기 때문에, 잘려나간 장면을 영영 볼 수 없었던 1933년 <킹콩>의 시대와는 달리 편집당한 장면에 있던 배우들도 더 이상 안타까워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완전판 DVD에는 사루만의 최후에 대한 피터 잭슨 팀의 재해석 장면이 담겨 있지요. 극장판에서 이 긴 장면이 잘려나간 걸 알게 된 크리스토퍼 리는 시사회 참석을 거부할 만큼 실망했다지만, 그래도 우리는 언제라도 볼 수 있잖아요?
자, 오늘 비교해볼 영화 둘은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세밀한 고증을 거쳐 아름다운 화면으로 재탄생한 보석같은 영화들입니다. 먼저 이 두 영화를, 특히 <진주만> 같은경우는 혹평이 자자하지만 저는 모두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오늘의 비교는 '감독판'에 한정된 겁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 은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이벨린의 발리안이라고 거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완전히 허구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히말라야에선 박쥐남자를 가르치고 옛날 옛날 먼 옛날 저 먼 은하계에선 '협상자' 케노비 장군을 가르치더니 나니아에선 핀칠리에서 온 피터 페번시를 가르친 리암 니슨이 이번에는 이벨린의 곳프리 역을 맡아 함정임이 뻔한 곳에 아무 생각없이 뛰어드는 천연바보기사의 피가 흐르는 발리안을 가르쳤습니다.
한때 기마병으로 전장을 달렸지만(극장판에서는 언급이 없던 설정) 이제 대장장이가 되어 사제가 된 배다른 동생의 꾸준한 압박에도 불구하고(역시 극장판에 언급이 없던 설정) 성실히 살고 있다가 토끼같은 아이와 여우같은 아내를 잃은 발리안. 곳프리는 후계자가 없기에 고향에 돌아와 환영을 받았지만(역시 극장판에 없...), 아픈 상처를 계속 건드리며 떠나게 만들려는 동생을 죽이고 도망쳐버린 발리안이 그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자마자 추적자가 따라붙고, 결국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맙니다.
발리안은 속죄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지만 더한 혼돈의 땅만 보게 되지요. 광신적인 십자군을 이끄는 기 드 뤼지앵과 악당 레이날드는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애쓰고, 그들을 막아 평화를 지키려는 예루살렘의 국왕과 그의 여동생 시빌라는 어떻게든 발리안을 이용해 기 드 뤼지앵을 내치려 하지만 발리안의 순수한(이라고 쓰고 '천연바보라서' 라고 읽습니다) 마음은 이용당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 여기서부터 감독판만의 이야기.
킹덤 오브 헤븐, Dts.
시빌라에겐 아이가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인 국왕은 어린 시절 촛농을 손등에 떨어뜨리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걸 곳프리에게 들켰었고, 곳프리는 부왕에게 그 사실을 울며 고했댔지요. 예루살렘의 국왕은 그 천형을 짊어진 채 내내 가면을 쓰고 살다 젊은 나이에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고, 이 소년이 위에서 보듯 국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시빌라가 발리안을 그토록 원했던 것은 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줄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죠. 이벨린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흙투성이가 되어 메마른 땅에서 수맥을 찾아 뛰어다니던 발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빌라의 시선은 아이 아빠를 찾는 엄마의 것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이 역시 나병을 가지고 있었어요. 촛불에 손을 얹었다가 손바닥이 검게 타는 장면, 인장을 찍기 위해 명령서에 납을 흘리다 손등에 떨구고도 아무렇지 않은 장면들을 보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요. 시빌라는 평생 지켜본 오빠의 고통을 아이가 감내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만 독으로 자기 아이를 죽이고 맙니다.
레이날드 : "아이는 천국으로 갔소?"
극장판에서는 왕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인 것처럼 편집되었던 대사가 제자리를 찾는 거지요. 이후는 모두 같습니다. 반지의 제왕 완전판 DVD와 달리 액션 장면이 더 추가된 것도 없으며, 결말도 같습니다만, 시빌라와 발리안의 결합은 단지 '동방의 순수에 의한 결합'이 아니라 둘 다 아이가 있었기에 좀더 설득력이 더해집니다.
자, 그런데 <진주만>의 감독판을 볼까요.
플라스틱 재질인 속 케이스에 기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는 정도일 뿐인 다소 평범한 킹덤 오브 헤븐 케이스와는 달리, 진주만 감독판의 케이스는 상당히 화려합니다. 일단 단순한 박스형이 아니라 마치 미 육군 항공대의 보급품이었던 가죽 장정된 다이어리같은 외형에, 주요 등장인물을 메인으로 삼고 2차대전 당시의 징병 포스터를 패러디한 우편엽서도 들어있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짤막한 선전포고 결정 연설문도 프린트되어 담겨 있고, 일부 스크린샷도 상당히 좋은 화질로 프린트되어 있어요. 네 장의 디스크는 각각 비닐팩에 담겨 한장 한장 종이 슬릿에 들어가 있고요. 딱 열어봤을 때 '우와'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지요. 그런데,
그게 다예요.
경고2 : 어떤 분들에게는 아마 감당하기 어려운 잔인한 스크린샷이므로 접어둡니다.
극장에서 위와 같은 장면을 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저 잘려나간 신체 부위는 극장판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폭격장면에서는 제로센의 기관포에 찢겨지는 수병들의 모습, 콕피트 안에서 터져버리는 일본군 조종사의 모습, 동맥 출혈을 일으킨 한 장교의 목 부위 상처 등 섬세한 잔인함이 감독판에서는 모두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날, 1941년 12월 7일의 참상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듯 느낄 수 있게요. 이건 참 다행이에요. 쿠퍼 감독의 <킹콩>에서, 협곡 아래서 거대한 벌레들에게 잡아먹히는 선원들의 모습은 너무 잔인해서 잘려나갔고 이젠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에서 재해석된 그 장면을 통해 상상할수밖에 없지만 말이죠.
그러나 그게 전붑니다.
뭐 레이프와 에블린의 로맨스는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복원하는 좋은 시도였지만 말이죠. 가장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츤데레(응?)레이프와 대니의 공식대로 가는 로맨스(응?), 대니와 에블린의 주말연속극처럼 뻔한 로맨스에 대해서도, 베티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심지어 흑인 최초로 미 해군 십자 훈장을 받은 실존 인물 도리 밀러(쿠바 구딩 주니어가 연기)에 대한 이야기나, 침몰한 USS애리조나 안에 갇혀버린 승무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더 자세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그대로예요. 심지어 가장 호평을 받았던 격렬하고 아름다운 공중전 장면에도 추가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화 상영 시간의 길이는 물론 원래도 거의 3시간에 달할 만큼 굉장히 길긴 했지만 더 길어진 것 없이 그대로였지요. 이래서야 감독판으로 편집한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요.
물론 DVD에는 서플먼트라는 것이 있고, <진주만> 감독판의 서플먼트는 2개의 디스크에 나누어 담긴 만큼 제법 풍성한 편이었습니다. 극중에서 알렉 볼드윈이 열연했던 실존인물 두리틀 중령이 책임을 맡았던 도쿄 공습 작전과 그 작전에 참전했던 실제 용사들의 향방에 대한 서플먼트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였습니다마는, 메인 타이틀은 본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편집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화면을 만드는데 급급한 나머지 발생했던 수많은 옥의 티도 전혀 수정없이 그대로 남아있고 말이죠. CG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진주만 공습이 있기도 전의 장면에서 벌써 애리조나 기념관이 살짝 보이는 그런 짧은 장면조차 수정을 안했다는 건 정말이지.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을 영화를 통해 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DVD는 극장보다 훨씬 내밀하게 그런 이야기를 담기 좋은 매체입니다. 영화에서 못다한 이야기도 담아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원래 그리 더 많지 않았다면 굳이 감독판이라는 이름을 달아줄 의미가 없는 거지요. <킹덤 오브 헤븐>은 감독판이 아니라 완전판이라는 이름마저 아깝지 않지만, <진주만>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아쉬운 타이틀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구상을 많이 해보고 이리저리 참 고민하면서 쓰는데, 여전히 씨리어스함을 지우기가 힘드네요. 이건 제 본능 같은 그런 건가봐요. 치잇. 그나저나 포스팅할 것도 많이 있는데 제 글도 써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버닝하고 있스빈댜? 어쩌겠어요 ^^;
누나와 남동생 만큼이나, 청년과 로리 역시 각별히 애틋한 관계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상반되면서도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모습들을 어떻게 그릴수 있을까 참 여러가지로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제 버릇인 '쓸데없이 씨리어스해지기'를 날려버리는 연습으로도 좋을 것 같아 가볍고 발랄하게 써보기로 했습니다.
-by 제인 구달
200번의 구타 ←나는그네님 이글루스에서 트랙백
애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얘기를 하는 분들이 주위에도 많이 발견되곤 합니다. 더 끔찍한 건 저와 같은 세대 사람들, 혹은 더 어린 분들 사이에서도, 심지어 그 '맞아야 말을 듣는 애들' 속에 들어갈 중고생들 중에도 그런 논리를 펴는 분들이 있어요.
'사랑의 매'니 '정신봉' 이라고 매직으로 쓰여진 막대기들이 제게 어떤 교육적 효과를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적어도 "Spare the rod, spoil the child." 라는 말은 교육 현장에서는 정론인 것처럼 지난 40년간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게 아니죠. 유럽이나 미국의 학교들도 곧잘 정도가 심한 체벌 때문에 논란이 일곤 합니다.
매를 때리는 것도 그 교사의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로 곧잘 합리화되곤 합니다. 분명 매질은 힘든 일이고, 그 대상이 전교생이라면 더욱 말할것도 없을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라는 직업은 보수도 대단치 않고, 사회적인 대우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벌과 같은 힘든 일을 자처하는 그런 열정을 보이는 교사들을 우리는 인정해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군대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이제 체벌 안합니다. 규정에 따른 '얼차려'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체벌을 가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들 알기 때문입니다.
체벌이 학생에게 동기를 부여할까요? 체벌이 학생으로 하여금 교사의 권위를 인식시켜줄까요? 체벌이 학생 마음을 바꾸게 할까요? 체벌이 학생의 게으름을 없애줄까요? 체벌이 학생의 반항심을 누그러뜨릴까요? 체벌이 학생을 반성하게 할까요? 체벌이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부 '아니오'입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확신하냐고요?
내가 안그랬거든.
체벌은 학생을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때릴까요.
비단 체벌 뿐 아니라 두발 문제, 수업 정상화 문제를 비롯해 이 나라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의 원인은 단 하나예요. 학생을 사람으로 안보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요. 학교의 주인은 이사장일지 모르지만, 학생은 사람입니다. 교사의 일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도 누구에 의해서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나는 작가였고, 글을 쓰고 있었다. 성공은 내가 글 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음을 의미했다.
지금 그때 일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옳은 일을 했음을 깨닫고 있다. 성공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성공을 생각하면 글쓰기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다. 정말로 글을 쓰는 사람이 하는 일은 글쓰기 하나 뿐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글로 쓰여지지 않은 계약이 존재한다. 누군가 서점에 들어와서 작가의 책을 사기 위해 힘들게 번 돈을 내놓을 때, 작가는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즐거움과 그 밖에 자기가 줄 수 있는 한 가장 많은 것들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그동안 줄곧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이었다.
-프랭크 허버트, <듄의 이단자들> 서문 中
장애물이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이 보이는 최초의 반응은 <왜 이런 문제가 생긴거지?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찾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에게 부과해야 할 벌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똑같은 상황에서 개미는 먼저 <어떻게,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다.
개미 세계에는 <유죄>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 라고 자문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일이 제대로 되게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생기는 것은 자명하다.
현재 인간세계는 <왜>라고 묻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떻게>라고 묻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中
남동생을 사랑한 누나, 누나를 사랑한 남동생.
전통도 음모도 역사도 그들을 벌하지 못했다.
...저한테 뭘 바랬나요. ㄱ-
츠키, 츠뮤
니니, 파피
버트, 하그
츠메카린 왕궁 1층의 한 방에서 한 남자가 머리에 공구용 망치를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된다. 남자의 신원 검색 결과 그는 언제나 무표정을 유지하는 점이 매력인 CSI 요원 하그나스의 생부로, 하그나스는 남자가 살해된 시점에서 실종된 상태. 항상 45도 각도로 머리를 기울이며 말하는 츠키에테 반장과 인용구를 좋아하는 니니엘과 파피엘, 그리고 늘 성실하지만 약간 맹한 사이버트 등의 CSI 츠메카린 요원들은 함께 수사에 나선다.
(먼저 이 글은 채널예스 예스칼럼, 듀나의 투덜투덜 최근 연재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개미>, <벅스라이프> 모두 '개미'를 소재삼은 3D 애니메이션입니다. <1984년>을 떠올리게 하는 <개미>, 그리고 어릴적부터 자주 들었던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변용한 <벅스라이프>에 이어, 이제는 아득한 옛 영화가 되어버린 <아이가 줄었어요> 를 생각나게 하는 최근작 <앤트불리>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들은 '개미'라는 소재상의 공통점 이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개미 사회에 대한 집요한 왜곡이에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데뷔작 <개미>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좀더 잘 와닿을 겁니다. 개미 사회에서 수컷은 오로지 생식을 위해서만 태어나고 길러지는, 여왕개미 후보생을 제외하면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비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특이한 소수 집단입니다. 그들은 그 한 순간의 빛나는 비행을 위해 일생동안 게으름피우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지요. 싸우고 일하며 개미 사회를 존속시켜 나가는 건 모두 생식능력이 배제당한 암컷 개미들 뿐입니다.
그런데 위 애니메이션들에서 보여지는 세 개의 개미 군락들은 어찌된 일인지 수컷 개미들이 날개도 없이 전투에도 나갈 뿐더러 노동에 종사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평범한 개미'로 묘사되고 있는 <벅스라이프>와 <개미>의 주인공들은 둘 다 남자이며 모든 행동에서 남성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아름다운 히로인까지 기다리고 있죠. 우리 모두가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히로인, '공주님' 말이에요.
실제의 여왕개미는, (계층 나누는 걸 좋아하는 인간들이 이름지어줬기에) 이름만 여왕일뿐 자신이 일군 사회에 속한 모든 개미들의 어머니일 뿐입니다. 정치적인 권력은 전혀 없죠. 개미 사회의 모든 개미는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에선 모두가 여왕개미를 떠받들어요. 게다가 위의 두 영화에서 여왕은 늘 무력하며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음모에는 놀랄 정도로 무심하고 무지합니다. 그 가련한 할머니들을 지키는 건 언제나 우리 주인공 남자 개미들. 여성은 고귀하나(정말?)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걸 눈에 띄게 역설하는 두 이야기가 아이들을 위한 것인양 홍보되었다는 것이 더욱 무서운 일입니다. 열 세살짜리 아이들이 '여자는 먹는 거야.' 라고 아무 죄책감도 위화감도 없이 말할 수 있는 이 사회를 만들어낸 건 이런 이야기들이에요.
최근작 <앤트 불리> 역시 이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마법사 개미와 그 여자친구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은 '남자가 무엇인가 해내고, 여자는 그것을 돕거나 방해한다' 는 공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처럼 "전쟁이란게 워낙 지독한 것이라야 말이지." 라는 변명조차 아무도 하지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는 여자를 보조적인 위치에 내려놓습니다.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이야기가 흥행에 성공한 예는 거의 없지요. 언젠가 들은 거지만 '여성 주인공이거나 여자 작가이름이거나 표지에 여성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은 관련 출판사에서는 되도록 취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팔려나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판타지소설의 주 소비층인 10대 남자들에게 전혀 어필할 수 없다는 거죠. 비단 장르소설만일까요? 최근 국내에서 가장 큰 대중예술 시장일 영화 쪽을 봅시다. 요즘 이글루스에서 자주 떠도는 한국 영화 50선 에서 처음 10개 리스트만 보겠어요.
1위.괴물(2006) ---> 12,965,700명
2위.왕의 남자(2005) ---> 12,302,831명
3위.태극기 휘날리며(2004) ---> 11,746,235명
4위.실미도(2003) ---> 11,081,000명
5위.친구(2001) ---> 8,181,377명
6위.웰컴 투 동막골(2005) ---> 8,008,622명
7위.쉬리(1999) ---> 6,209,898명
8위.투사부일체(2006) ---> 6,105,431명
9위.공동경비구역 JSA(2000) ---> 5,830,228명
10위.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2005) ---> 5,635,266명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10위 <가문의 위기> 뿐입니다. 그나마도 여자는 시집을 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깔고 있는 상황이에요. 세상에. 그래요, 6위 <웰컴투 동막골>도 어느정도 인정은 해줄 수 있겠습니다만, 결국 장애를 가진 그녀는 죽어야 했습니다. <왕의 남자>요? 공길의 여성성은 그의 예술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인간 사회는 물론 개미 사회와는 다릅니다. 인간은 개미처럼 의식적인 결혼비행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번식하고, 날때부터 생식능력이 배제된 신분층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의 수컷은 개미의 수컷보다 훨씬 할 일이 많습니다. 네 인정해요. 드라마 내적 요구사항을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것 정도야 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수많은 동물학자들이 다른 사회를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사회에서 부족한 것을 다른 사회에서 발견하기 위함이지, 결코 인간 사회가 그 쪽 사회보다 우월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조차 인간사회의 기본형에 맞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는 <앤트 불리>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서 만났던 두 영화 <개미>와 <벅스라이프> 에서 저지른 실수를 좀더 완벽하게 저지르고 있는 스토리라인을 가진 <앤트 불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덧붙여서 주변에 이 영화를 자녀들에게 보여줄 계획을 가진 부모가 있다면 뜯어말리고 싶습니다. 차라리 좀 오래된 소설이긴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쥐어주는 편이 '아이들 교육'에 좀더 도움이 될 겁니다.
깜박 잊고 지나갈뻔했는데, 오늘은 그녀의 생일입니다.
처음으로 축하해줄 수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축하해주기 위해 11시 59분에 포스팅을 올립니다.
우주를 뒤흔들 아이돌의 열 세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덧 : 어제 핵실험이라고 발표된 그건 사실 마크로스의 비밀 병기 중 하나가 타이머로 작동된 걸 거예요. (정말?)
뮤키님의 [츠메카린 이야기] AU팬픽인 OmegaBass 님의 [Broken Wing]의 EU팬픽입니다!(헉헉) 그러니까, 원작 츠메카린 이야기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Broken Wing]이 OVA 정도의 이야기라면, 이 건 그 후속으로 이어지는 극장판이랄까요.
참고로,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 패러디가 살포시 끼어 있습니다. :)
"나는 말이오, 예수쟁이를 잘 아는데 가장 모범적인 예수쟁이란 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있다고 믿는 자들이거든요. 이게 알짜 예수쟁이구 무서운 거거든.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날은 절대로 없으니까...."
-장용학, <현대의 야(野)> 中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유명한 홍세화님의 칼럼입니다. 사행성 도박기계 '바다이야기' 파문이 한참일때 기고된 칼럼이에요.
정부에서건 국회에서건, 여당에서건 야당에서건 “게임산업을 규제하면 정보기술(IT) 산업 진흥 취지에 어긋날 수 있다”는 주장 앞에서 다른 소리는 잦아들어야 했다. 주류언론은 물론, ‘대학은 산업’이라는 주장에 맞서 ‘짖을’ 줄 몰랐던 대학까지 모두 “게임산업도 산업”이라고 주장한 편과 한통속 아닌가? 말하자면, 이땅의 ‘입’들은 ‘돈벌이’ 논리 앞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선 안 되는 것이다.
후우.
비트겐슈타인이 '게임'을 예로 들며 언어에 있어서 모두 공유할 수 있는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했었죠. 가족 유사성이란 용어를 써가면서요. 야구도 게임이고 체스도 게임이며 솔리테어도 게임이고 테트리스도 게임입니다. 더 나아가자면 쿵푸 대련도 게임이고 이종격투기도 게임입니다. 이들 간에 무슨 공통점이 있겠습니까. 유사점만 있을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논의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주가 되는 용어의 개념부터 새로이 규정하고 그 개념에 대해 합의하고 넘어가야 하는 겁니다.
홍세화님은 '바다이야기' 라는 '게임'을 비판하기 위해 유사성이 극도로 희박한 다른 '게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정부정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물신풍조가 지배하는 괴물적 사회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이런 근거를 가지고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을 겁니다. 홍세화님과 '게임'에 대한 정의를 사전에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이외에는요. 이들의 정의는 아마도 '돈을 내고 컴퓨터로 작동하는 놀이기구' 일겁니다. 네, 세상에! 최초에는 대학생들의 레포트 작성을 돕고 돈을 받으려 창업된 PC방을 고의적으로 '게임방'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니까요. 돈을 내고 컴퓨터로 작동되는 놀이기구를 즐기잖아요.
오늘 홍세화님과 같은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게임물 등급 위원회 출범
게임물 등급위 논란
그리고 그들과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 여기에 있습니다.
루리웹에서 발견한 글
멋진 신세계 -by 황금숲토끼님
게임물 등급위원회의 취지는 굉장히 좋습니다. 영등위에서 게임의 심의까지 맡아온 지금까지의 운영은 확실히 전문성도 떨어지고 공정하지도 못하죠. 그런데, 도박기계 '바다이야기' 때문에 '문화관광부'가 감사를 받아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사실 '문화'와 '관광'이 한 부서에서 한 장관밑에 있다는게 더 웃깁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해명도 마찬가집니다. '바다이야기'를 비롯한 컴퓨터 기반 도박기계를 '게임 산업'으로 분류한 당신들의 개념 체계가 전 국민의 동의를 받기는 했을까요?
물신이 횡행하는 괴물적 사회라고 홍세화님이 불렀던 한국 사회는, 제가 보기엔 공짜 사회입니다. 괴물적 사회? 그렇게 대단하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공짜를 너무 좋아합니다. 모 휴대전화 브랜드 광고에서 공짜아저씨가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는 잊혀진 지 오래입니다.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책은 사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도서대여점에서 빌리는 것이고, 모두들 온갖 P2P 프로그램으로 온갖 불법 자료를 다운받아요. 즐기기 위해선 그 즐기는 대상을 만든 사람에게 돈을 내야 한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조차 잊혀진 사회입니다. 그래서 출판 시장이 죽었고, 패키지 게임 시장이 죽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시장이 죽었고, 그 모든 이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온라인 게임 시장이었습니다. 이것마저도 사실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게임을 즐기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보다 게임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널려 있으니까요. 게임 아이템 거래 시장 규모가 1조를 넘겼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문화'관광부는 여태 뭘 한겁니까. 설마 당신들, '문화'를 '관광'하려고 만든 부서였어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도록 모두들 손놓고 가만히 있다가 정작 사실 '문화'와는 거리가 먼 '바다이야기' 파문에 '문화관광부' 감사를 시작했다지요.
이 사회는 책임을 묻는 사회입니다. 문제가 벌어지면 '왜' 그랬냐고 묻지요. 항상 그래요.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려 합니다. 그리고 그를 벌주려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문제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적'을 찾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어떤 '악'을 찾아나섭니다. 이건 심각한 무지의 소치예요. 사회를 병들게 하는건 '악'이나 '악인'이 아니라, 무지입니다. (차라리 악은 사회를 일시적으로는 발전시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히틀러를 보세요.) '술집 주인인줄 알았다'는 변명이 먹힐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방향의 무지죠. 모두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같은 개념을 공유하며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끔찍한 무지 말입니다.
시민단체라고 스스로를 부르고 있는 이익집단들이 게등위의 구성과 운영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론 투표권을 가진 대한민국 시민이며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될 게등위에 대해 이런 저런 목소리를 내세울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업계 유착'과 '제2의 바다이야기' 파문을 막기 위해 밀어내고 싶어하는 게임업계 사람들 역시 대한민국 시민이며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될 게등위에 대해 이런 저런 목소리를 내세울 권리가 있습니다.
'게임'이란 용어의 개념을 한정하고 그 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건설적인 논의에 함께 참여하는 대신 보이콧하며 그 부정적인 의미로만 가득 차 있는 자신들의 개념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외치는 그들.
시쳇말로 '개념없는 새끼들' 인 셈입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등의 작가 박민규님의 말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네가 당룡이냐? 끄덕끄덕. 삼가 한수를 배우겠소. 오호라 학익(鶴翼)의 품세를, 그렇다면 용호(龍虎)의 권세로! 쿵후라는 이름 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좋은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중략) 얼마전 열린 이종격투기 대회에서의 일이다. 종이 울리자마자, KO로 승부가 난 경기가 있었다. 복서출신의 패자는 습관처럼 푸트웍을 밟아보려다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 선공을 하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뭐랄까 그런 기분이었다. 즉 삼가 한수를 배우겠, 에서의 '퍼벅' 의 느낌. 정신을 차린 그의 표정에서 나는 그런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푸트웍 좀 해보자. 개새끼야.
- 대산 문학 2004년 여름호에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아저씨'가 되는 겁니다."
심장이 턱 하고 멈춰버릴 것 같은 끔찍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습니다. 그 뒤에 '자신과 가족에 대해 책임을 지고 조국과 국가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가 이어졌지만 그건 그 당시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저씨가 된다.
내가 아저씨가 된다.
내가 아저씨가 된다.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아저씨'라는 단어를 통해 연상하는 가장 첫번째 이미지는, 지하철 의자 한가운데 눕듯이 앉아 양 무릎은 넓게 쩍 벌리고 머리를 옆으로 꼬며 침을 질질 흘려가며 자고 있는 나이 든 남자의 모습입니다. 양 쪽에 어떤 사람들이 앉아있든 개의치 않고 머리를 주억이고 몸을 기대면서 말이죠.
두번째 이미지는, 후줄근한 잠바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머리를 꼿꼿하게 치켜들고 팔자 걸음을 걸으며 공공 장소에서 코와 입으로 연기를 물씬 뿜어내며 황홀한 듯 담배를 피우다 바닥에 가래침을 퉤에엑 하고 뱉는 그런 나이 든 남자의 이미지입니다. '뭘 쳐다봐?' 내지는 '니가 여기 주인이냐?' 와 같은 인상의 눈빛이 중요해요.
세번째 이미지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 상 앞에 앉아야 하는 음식점에서 밥그릇에 담뱃재를 털면서 웃도리를 벗어 던지고 허리띠도 풀면서 '어이 아가씨!' 내지는 '어이 아줌마!'('어이'가 매우 중요합니다.)라고 아주 커다란 목소리로 손을 들어 종업원을 재촉해대서 겨우 반찬이나 더 내놓으라고 아기처럼 투정을 부리는 그런 나이 든 남자의 이미지입니다. '여기 뭐 서비스가 이래애~ 이럼 다시 안와버려~' 와 같은 목소리에 술기운이 가득 담겨있기도 하지요.
우린 보통 아저씨라는 호칭을 존중이나 존경을 떠나 '인정'하는 대상에게도 잘 쓰지 않습니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보통의 행인 중에서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남자를 향해 약간 비하하는 느낌으로 말하곤 하죠. '어이 아저씨! 여기 들어오면 안돼요.' 물론 모두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상대를 깔보거나 낮춰보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제게는 이상하게 그런 소리가 더 많이 들려왔답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소위 말하는 '나이스 미들'이랄지, '신사분' 이랄지, '선생님'이라고만 불러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중년의 남자는 매우 찾기 힘듭니다. 저만 그런건진 모르겠는데, 거리에서건 학교에서건 직장에서건 정말 보기 힘들어요. 나이가 들고 나면 이상하게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에티켓도, 매너도 다 사라지고 남는 건 '젊은 사람들이 거 왜 이래?' 라든지 '장유유서 몰라? 엉!' 과 같은 호통 뿐이죠.
돈이 많은 '아저씨'들은 비싼 술집에서 젊은 여성들을 양 팔에 감고 히히덕대며 해외 관광을 나가면 현지 여성의 성을 돈을 주고 구매하곤 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전에 물의를 일으켰던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처럼, "술집 주인인줄 알고 그랬다." 는 변명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정도로 세상 모든 여자들을 대상화하고 '먹는 것'처럼 인식하게 되어버리는 거죠. "나이 든 유식한 어른들은 예쁜 인형을 들고 거릴 다니네"(서태지와 아이들 - 시대유감 中)요.
돈이 없는 '아저씨'들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지하철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 앉은 젊은 여성에게 자기 엉덩이를 밀착시키고 붙어 앉아 조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팔꿈치로 가슴을 건드리는 모습을 한두번 본게 아닙니다. 만원 버스 안에서 일부러 여자들 등 뒤에 몸을 붙인다던지, 어린 여학생이 힘들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올라타는데 도와주는 척 하면서 슬쩍 슬쩍 더듬는다든지. 그런 자들은 제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거의 다 '아저씨'예요.
그들에겐 아무런 염치도 남아있지 않은 걸까요? 집에 돌아가면 그 '아저씨'들은 아이들에겐 아버지고, 선량한 '아줌마'들의 남편일텐데. 어째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오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거죠? 아니, 설마 그 많은 남자들이 다 아이들에겐 관심도 없고 아내를 마구 부려먹으면서 속으로는 바람필 궁리나 하는 그런 추악한 존재들인 건가요? 그러면서 누군가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용감하게 제재를 하려 나서면 자신들이 얼마나 개발독재 시대에 그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이 사회를 일으켜 세웠는데 그 열매는 우리들이 다 따먹고 있다든지, 그러니 어른공경을 할 줄 알아야지 너희들이 이렇게 어른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바락바락 할 말 못할 말 다 챙기면 안되는 거라든지 하는 소리를 해가며 자신들은 끝까지 아무 잘못도 없고 오히려 희생자, 피해자, 순교자인 양 시늉을 합니다. 최연희처럼 '다 잊고 싶다'면서요. 토할 것 같아요.
담배를 너무 피워서 "검게 물든 입술," 술이라면 아무거나 막 들어가는 튀어나온 배 위에 걸쳐진 까만 가죽 허리띠, 땀냄새 나는 멀건 와이셔츠. 살집에 눌려 길게 찢어진 눈속에 희미하게 탐욕이 가득 배인 눈동자. 온 세상 남자들을 예비 성범죄자로 만든 그 한심하게 훤한 머리 속과 손가락.
전 결코 그런 '아저씨'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절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아줘요 ;ㅁ;
뮤키님의 츠메카린 이야기 팬픽입니다.
AU는 Alternative Universe의 약자인데, 본래는 스타워즈 팬픽 중에서 원작의 스토리와 배치되지만 같은 캐릭터라면 이랬을 수도 있겠다는 가정으로 쓰여진 팬픽들을 분류하는 말이에요. 즉 지금 쓰는 이야기는, 뮤키님의 오리지날 스토리와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덧 : 19금은 조금 안되고, 15금은 조금 넘습니다.
츠메카린 이야기 AU
<저주가 낳은 아이>
워낙 뒤틀린 성격이라 그런지 저는 유명하다, 소문났다, 잘팔린다고 알려진 작품은 보통 잘 손대질 않습니다. 봉신연의나 강철의 연금술사 같은 작품이 그랬지요. <드래곤 라자>(이하 DR) 그리고 <폴라리스 랩소디>(이하 PR)도 그래서 손을 대지 않았던 작품이지요. 하지만 올해 들어서 이 작품들을 지인들의 추천에 의해 가능한 한 편견을 지우고 진지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 자신은 이 글을 <하얀 로냐프강>과 같은 작품처럼 마구 좋아하지는 못합니다. 늦게 접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많은 표현이, 한국어 문장답지가 않아요. 책을 소유하지 않은 관계로 일일이 예를 들지는 못하지만, 영어 문장을 직역한 느낌을 갖는 문장이 굉장히 자주 드러납니다. '가장 ~한 것들 중의 하나' 와 같은 표현 말이에요.
두번째로는 캐릭터예요. 분명히 매력적인 면모를 가득 가진 다양한 캐릭터가 열 손가락은 우습게 넘는 양으로 출연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아무도 이야기에서 핵심을 이루지 못합니다. 개별 캐릭터가 뜻하고 추구하는 어떤 방향과,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려는 방향은 계속해서 어긋나요. DR은 마침내 어떻게든 끝에선 만나지만, PR은 모든것이 산산히 흩어집니다. 분명 의도된 것이겠습니다만 너무나 자기 캐릭터에 애정을 안보인다는 점은, 이야기를 캐릭터를 통해서가 아닌 작가가 직접 말하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저 도구에 불과했던 캐릭터에 애정을 느끼게 만들다니, 조금 배신감마저 느끼기도 했지요.
게다가 그들은 모두 너무 달변입니다. DR의 주인공 중에 자기 표현이 부족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는 인물은 거의 아무도 없어요. PR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달변과 극단적인 과묵함으로 양분되는데, 그나마도 달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플라톤의 대화편에 출연해도 될 만큼 재치있고 언어 유희에도 능하며 논리와 수사학의 달인들입니다. 게다가 그 모든 복잡한 기교가 동원된 표현을 그다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해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존재론 강독이나 인식론 강독 수업시간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귀여니' 이윤세가 자기 소설을 만들기 위해 어떤 텍스트를 참조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다 보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이영도가 글을 쓰기 위해 어떤 텍스트를 참조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관계와 언어, 존재 등 다양한 철학적 문제제기가 담긴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은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직설적으로 캐릭터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데 그 때문에 작가 스스로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것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도의 타자 이영도의 글은 부드럽게 창공을 날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을 연상하게 만드는 커다란 흐름이 있습니다. 그의 글은, 그의 이야기는 자유롭습니다. 캐릭터도, 독자도, 심지어 작가 자신도 그의 이야기에는 관여하지 못합니다. 이야기는 때로 산들바람처럼 조용히, 혹은 폭풍우처럼 거세게 완급을 조절하며 보이지 않는 손처럼 캐릭터와 그 캐릭터에 이끌린 독자들을 붙잡고 모으고 또 놓아줍니다. 이러한 느낌은 그의 글이, '라이트 노벨'이라고 불리는 캐릭터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쓰여졌다는 걸 암시합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가벼움이 없습니다. 그의 캐릭터는 경박하고 가벼울 수 있어도, 그 캐릭터에 이야기가 따라가지 않는 한 이야기는 언제나 처음과 끝을 깊은 무게를 가지고 가로지릅니다. 심지어 1인칭인 DR마저도 화자인 후치 네드발의 경쾌함이 이야기를 경쾌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야기의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방식을 셋으로 나눕니다. 첫번째, 팬픽에서 흔히 보이는, 어느 캐릭터를 위해 바쳐지는 이야기가 가장 쉬운 이야기의 방식입니다. 쉬운 만큼, 그 캐릭터에 버닝하지 않는 독자들에겐 어필하기 힘들어지죠. 그 다음의 이야기는, 어느 극적인 사건을 위해 모아진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선 캐릭터도, 플롯도 모두 그 방향을 향해 통일되지요. 한번 읽으면 재미있지만, 두번째 읽을 때는 이미 알아버렸기에 더 이상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세번째이자 가장 어려운 단계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독자를 빨아들여 그 안에 포함시키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캐릭터는 독자에게 실제 인물이 되고 사건은 독자에겐 역사가 됩니다. 이 단계의 이야기에서 개연성을 따져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작가는 신이고, 그래서 그건 그냥 그렇게 있는 거니까요.
이영도는 초기작에서 이미 이 세번째 단계를 아주 능숙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위에서 보다시피 저는 거기서 개연성을 따지는 어리석은 짓을 해버렸지요. 좀더 일찍 이 초기작들을 접했더라면 하는 후회와, 저런 세계에 빠져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그의 글을 읽고난 솔직한 소감이었습니다.
이제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를 읽어볼 차례입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겠죠. 매료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