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편집인칼럼]괴물적 사회와 신뢰의 조건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유명한 홍세화님의 칼럼입니다. 사행성 도박기계 '바다이야기' 파문이 한참일때  기고된 칼럼이에요.

정부에서건 국회에서건, 여당에서건 야당에서건 “게임산업을 규제하면 정보기술(IT) 산업 진흥 취지에 어긋날 수 있다”는 주장 앞에서 다른 소리는 잦아들어야 했다. 주류언론은 물론, ‘대학은 산업’이라는 주장에 맞서 ‘짖을’ 줄 몰랐던 대학까지 모두 “게임산업도 산업”이라고 주장한 편과 한통속 아닌가? 말하자면, 이땅의 ‘입’들은 ‘돈벌이’ 논리 앞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선 안 되는 것이다.

후우.
비트겐슈타인이 '게임'을 예로 들며 언어에 있어서 모두 공유할 수 있는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했었죠. 가족 유사성이란 용어를 써가면서요. 야구도 게임이고 체스도 게임이며 솔리테어도 게임이고 테트리스도 게임입니다. 더 나아가자면 쿵푸 대련도 게임이고 이종격투기도 게임입니다. 이들 간에 무슨 공통점이 있겠습니까.  유사점만 있을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논의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주가 되는 용어의 개념부터 새로이 규정하고 그 개념에 대해 합의하고 넘어가야 하는 겁니다.

홍세화님은 '바다이야기' 라는 '게임'을 비판하기 위해 유사성이 극도로 희박한 다른 '게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정부정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물신풍조가 지배하는 괴물적 사회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이런 근거를 가지고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을 겁니다. 홍세화님과 '게임'에 대한 정의를 사전에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이외에는요. 이들의 정의는 아마도 '돈을 내고 컴퓨터로 작동하는 놀이기구' 일겁니다. 네, 세상에! 최초에는 대학생들의 레포트 작성을 돕고 돈을 받으려 창업된 PC방을 고의적으로 '게임방'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니까요. 돈을 내고 컴퓨터로 작동되는 놀이기구를 즐기잖아요.

오늘 홍세화님과 같은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게임물 등급 위원회 출범
게임물 등급위 논란

그리고 그들과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 여기에 있습니다.
루리웹에서 발견한 글
멋진 신세계 -by 황금숲토끼님

게임물 등급위원회의 취지는 굉장히 좋습니다. 영등위에서 게임의 심의까지 맡아온 지금까지의 운영은 확실히 전문성도 떨어지고 공정하지도 못하죠. 그런데, 도박기계 '바다이야기' 때문에 '문화관광부'가 감사를 받아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사실 '문화'와 '관광'이 한 부서에서 한 장관밑에 있다는게 더 웃깁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해명도 마찬가집니다. '바다이야기'를 비롯한 컴퓨터 기반 도박기계를 '게임 산업'으로 분류한 당신들의 개념 체계가 전 국민의 동의를 받기는 했을까요?

물신이 횡행하는 괴물적 사회라고 홍세화님이 불렀던 한국 사회는, 제가 보기엔 공짜 사회입니다. 괴물적 사회? 그렇게 대단하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공짜를 너무 좋아합니다. 모 휴대전화 브랜드 광고에서 공짜아저씨가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는 잊혀진 지 오래입니다.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책은 사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도서대여점에서 빌리는 것이고, 모두들 온갖 P2P 프로그램으로 온갖 불법 자료를 다운받아요. 즐기기 위해선 그 즐기는 대상을 만든 사람에게 돈을 내야 한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조차 잊혀진 사회입니다. 그래서 출판 시장이 죽었고, 패키지 게임 시장이 죽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시장이 죽었고, 그 모든 이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온라인 게임 시장이었습니다. 이것마저도 사실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게임을 즐기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보다 게임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널려 있으니까요. 게임 아이템 거래 시장 규모가 1조를 넘겼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문화'관광부는 여태 뭘 한겁니까. 설마 당신들, '문화'를 '관광'하려고 만든 부서였어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도록 모두들 손놓고 가만히 있다가 정작 사실 '문화'와는 거리가 먼 '바다이야기' 파문에 '문화관광부' 감사를 시작했다지요.

이 사회는 책임을 묻는 사회입니다. 문제가 벌어지면 '왜' 그랬냐고 묻지요. 항상 그래요.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려 합니다. 그리고 그를 벌주려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문제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적'을 찾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어떤 '악'을 찾아나섭니다. 이건 심각한 무지의 소치예요. 사회를 병들게 하는건 '악'이나 '악인'이 아니라, 무지입니다. (차라리 악은 사회를 일시적으로는 발전시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히틀러를 보세요.) '술집 주인인줄 알았다'는 변명이 먹힐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방향의 무지죠. 모두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같은 개념을 공유하며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끔찍한 무지 말입니다.

시민단체라고 스스로를 부르고 있는 이익집단들이 게등위의 구성과 운영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론 투표권을 가진 대한민국 시민이며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될 게등위에 대해 이런 저런 목소리를 내세울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업계 유착'과 '제2의 바다이야기' 파문을 막기 위해 밀어내고 싶어하는 게임업계 사람들 역시 대한민국 시민이며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될 게등위에 대해 이런 저런 목소리를 내세울 권리가 있습니다.

'게임'이란 용어의 개념을 한정하고 그 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건설적인 논의에 함께 참여하는 대신 보이콧하며 그 부정적인 의미로만 가득 차 있는 자신들의 개념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외치는 그들.

시쳇말로 '개념없는 새끼들' 인 셈입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등의 작가 박민규님의 말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네가 당룡이냐? 끄덕끄덕. 삼가 한수를 배우겠소. 오호라 학익(鶴翼)의 품세를, 그렇다면 용호(龍虎)의 권세로! 쿵후라는 이름 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좋은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중략) 얼마전 열린 이종격투기 대회에서의 일이다. 종이 울리자마자, KO로 승부가 난 경기가 있었다. 복서출신의 패자는 습관처럼 푸트웍을 밟아보려다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 선공을 하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뭐랄까 그런 기분이었다. 즉 삼가 한수를 배우겠, 에서의 '퍼벅' 의 느낌. 정신을 차린 그의 표정에서 나는 그런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푸트웍 좀 해보자. 개새끼야.

- 대산 문학 2004년 여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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