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상한 세르반도니가'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08.01.16 X-Men 재감 후 드는 단상들 2
  2. 2007.12.30 트랜스포머 vs 춘향뎐
  3. 2007.11.15 화려한 휴가 vs 라파예트 2
  4. 2007.09.17 이백년의 약속 - '당신의 소중한 것을' 죽이기 위해 2
  5. 2007.07.20 이반나 린치, 소녀여 신화가 되어라 6
  6. 2007.07.08 킹콩 관련 망상 6
  7. 2007.07.05 영화 <향수>에 대한 짧은 감상 8
  8. 2007.05.13 거미남 - 영원히 바보같을 남자들의 표상 5
  9. 2007.04.15 300개의 복근, 그 섬뜩한 공포 8
  10. 2007.03.24 루루슈를 위한 변명 8
  11. 2007.02.15 코드 기어스 : 총체적인 가면극 6
  12. 2007.01.10 트릴로지 4
  13. 2006.12.26 미녀는 괴로워 VS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14. 2006.11.28 진주만 감독판 VS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 10
  15. 2006.10.22 20자평 - 눈물을 마시는 새 13
  16. 2006.10.19 에어리어 88 4
  17. 2006.10.13 보통, 개미는 '여자'다. 2
  18. 2006.09.21 이영도의 초기작에 대한 잡상 8
  19. 2006.08.18 나니아 연대기 VS 게드전기 2
  20. 2006.08.10 반지의 제왕과 기독교 2
  21. 2006.07.04 야수 VS 공공의적1,2
  22. 2006.06.29 무기에 대하여 13
  23. 2006.06.22 독창성에 대하여 12
  24. 2006.06.13 스타워즈 클래식과 반지의 제왕, 그리고 마비노기 C2
  25. 2006.06.12 스타워즈 : 프리퀄→클래식으로 보자
  26. 2006.06.12 다빈치 코드, 왜 한기총을 화나게 했을까
  27. 2006.06.12 스타워즈 VS 반지의 제왕
  28. 2006.06.12 킹콩 VS 왕의 남자
  29. 2006.06.12 킹덤 오브 헤븐 VS 더 독
  30. 2006.06.12 킹콩 VS 매트릭스
*. 영화 속에서는 찰스 사비에가 이상주의자, 매그니토(에릭 렌쉬어)가 현실주의자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마치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를 대조하는 것 같죠. 그러나 실제 그들의 행동을 살피면, 사비에야말로 현실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만들고 돌연변이 아이들을 거두어 정상적인, 아니 오히려 일반적인 미국의 교육보다 훨씬 수준높은 교육을 받게 해주고 있는데, 모르긴 몰라도 사비에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힘을 감출 수 있는 만큼 감추고 하버드나 예일에 진학하여, 사회 상류층으로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3편에 나온 돌연변이부 장관 행크 맥코이처럼, 아예 감추지 않아도 될 정도의 '실력'과 '간판'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반면 매그니토는 '모두를 돌연변이로 만드는 장치'를 고안하거나, '단번에 인간을 멸종시키는 역습'을 가하는 등, 그와 사비에의 엄청난 초능력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는 비타협적이고 그래서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상주의적인 혁명가인 겁니다.

*.  실제로 돌연변이들이 사회에 있고, 그들로 인해 이러저러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면 저는 돌연변이 등록 법안에 찬성할 겁니다. 제가 돌연변이라도 말이죠. 돌연변이의 능력은 인간에게도 위험하지만, 같은 돌연변이에게도 위험합니다. 아예 돌연변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위험한 능력들도 어딘가에는 있지 않겠어요? (1편에서 로그는 돌연변이의 힘을 흡수하고, 2편에서 찰스 사비에는, 비록 현혹당해서였지만, 전 세계의 모든 돌연변이를 죽일 뻔했고, 3편의 돌연변이 억제제 '큐어'의 원 소스가 되었던 꼬마는 가까이 닿는 것만으로도 어떤 돌연변이에겐 위험합니다.) 총기 등록법에 찬성하듯이, 저는 돌연변이 등록법에 찬성하며, 제가 돌연변이라면 저부터 등록하겠습니다. 스파이더맨에서도 나왔지만 '거대한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아니겠습니까.

*. 부단히 노력하여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인격까지도 갖추게 되는 거대한 힘들 - 무공 혹은 마법 - 과는 달리 돌연변이의 능력은 날때부터 갖고 태어나며 어느날 갑자기 발현됩니다. 즉,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초능력을 갖게 된 돌연변이들이 그걸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버리는게 좋습니다. 만약 파이로 같은 녀석들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받는다면 우린 한겨울에 전기 스토브도 맘대로 못 켭니다. 녀석 신경을 거슬렸다간 다 타죽게요? 그래서 돌연변이를 일반인과 격리한다는 주장 자체에는 그닥 잘못된 점이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는 돌연변이들끼리의 관계와 달리, 돌연변이와 인간의 관계는 일방적 위험성밖에 갖지 않거든요. 사비에 학교의 학생들과 달리 바깥 세상의 많은 돌연변이들은 자신들이 좀더 '진화된' 그리고 '우월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생명과 인권을 경시하는 건 보통의 인간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죠. 그들의 격리는 나치즘적 인종 차별이 아닌, 그저 행한대로 받으리라, 정도에 불과합니다.

*. 힘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돌연변이들은 대부분 특정한 지점에서 인간보다 우수합니다. 예를 들어 투시 능력을 가진 아이가 있다면, 비록 바로 주변의 아이만 투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린 이 녀석이 수능 시험을 보러 가면 독방에 앉혀야 합니다. 그게 다른 아이들과 공정하게 경쟁하게 하는 방법이니까요. 돌연변이 격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자작 소설 <에이린 이야기>의 설정에도 개입되었습니다. 지극히 폐쇄적인 종교단체에서, 힘을 타고나는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끌어모아 종교적 규율에 맞게 힘을 통제하면서 사제의 의무로 사회에 봉사하도록 하는 그런 식의 설정이었죠. 우린 다 같은 인간이라고 돌연변이들이 주장할지 모르지만, 돌연변이와 그렇지 않은 인간의 구별은 백인종, 흑인종의 구별과는 다릅니다. 나치의 우열인종 이론은 거짓이지만, 돌연변이가 그렇지 않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이미 눈으로 보아 입증되고 있으니까요.

*. 그렇다고 해서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무조건 찾아 격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모든 사람이 유전자 검색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거든요. 즉 평범한 인간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모두 자신의 유전 정보를 정부에 공개해야 합니다. 돌연변이를 통제한다는 것은 곳 인간을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출생신고를 할때마다 유전 정보를 기록하려면 우리는 정부에 대해 엄청난 제한을 가해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 그래서 생각한 게, 돌연변이에 대한 일방적인 규제정책보다는, 오히려 스스로가 돌연변이임을 밝히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죠. 연금 지급이나 국가 기관에의 우선 채용, 그리고 그와 반대편에서는 등록되지 않은 돌연변이의 힘을 사용한 범죄에 대해 무거운 가중처벌이 따른다면, 아마 돌연변이 문제는 시민들에게 '위험'보다는 '선물'로 와닿기 시작할 거예요. 돌연변이 등록법은 인간과 돌연변이 사이의 동반자적 관계에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훌륭한 가이드라인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지만 인간은 그렇게 착한 생물종이 아니죠. 다른 존재를 말살시키려 하는 인간의 습성은 이미 네안데르탈 인을 멸족시킨 크로마뇽인 시절부터 유전되어 내려온 겁니다. 우리는 코르테즈와 아즈텍 문명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지난 200년간 어떤 대접을 받아왔는지도 잘 알고 있고요. 인간은 그런 식으로 지금의 '문명'을 이루어 왔습니다. 대부분은 '우월한 인간'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아니 승리했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판정받은 거겠죠. 위대한 이상주의자 매그니토는 비록 힘없는 인간으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전쟁은 계속 될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돌연변이가 승리한다면, 그건 네안데르탈 인들의 전멸에 대한 위대한 복수가 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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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여년 전, 일본의 타카라 社에서 개발하고 미국 하스브로 社에서 수입하여 배경 스토리와 애니메이션 G1 등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장난감 시리즈 '트랜스포머'를 영화화하는 것은 마치 십수가지 이본을 갖고 있는 판소리 춘향가를 영화화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복잡한 작업이었을 겁니다. 춘향의 성과 신분은 각 이본마다 수없이 변합니다. 변학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제각각이죠. 구비문학의 특성상 청중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수많은 이본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아무리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변해가도 춘향전은 영원히 몽룡과 춘향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2000년, 임권택은 그 어떤 메시지도 함의하지 않은 채 오직 탐미적인 시각으로 이 커플을 다루어 <춘향뎐>을 찍었고, 대성공했습니다.

'트랜스포머' 역시, 인간이 없이 오직 변신하는 로봇들만의 이야기였던 G1과 극장판, G2와는 별도로, 인간과 만나 함께 행동하거나 혹은 인간을 돕거나 하는 이야기도 있으며, 차량이나 기계류가 아닌 공룡이나 동물로 변하게 되는 이야기 '비스트 워즈'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극장판에서 옵티머스 프라임은 죽고 메가트론은 갈바트론으로 변형당하기도 합니다. 장난감을 팔아야하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입장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이본들이 있으나, 언제나 이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시청하고 집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팬들에게 이 이야기는 영원히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마이클 베이는 임권택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이야기가 바뀌어도 끝까지 변하지 않는 커플링,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을 아무 메시지도 담아내지 않은 지극히 탐미적인 시각으로 잡아냅니다.

물론 마이클 베이 감독은 이 영화를 '한 소년과 그의 첫 차에 대한 영화' 로 만들었다고 DVD 서플먼트와 언론사 인터뷰에서 항변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이 영화는 옵티머스 프라임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입니다. 카메라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몇번이고(!) 피터빌트 트럭으로 형상화된 그의 모습을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각도에서 잡아내며, 트랜스폼하는 그의 모습을 항상 발끝에서부터 머리위까지 감아올리며 비추고 있습니다. 아무리 권총에서 성간전투기로 바뀌는 등 완전히 새로 디자인되었어도 20년된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파라오 혹은 다스베이더를 연상시키는 메가트론의 피라미드같은 머리모양은 여전히 남아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아내며, 냉동이 풀리며 제정신을 찾고 처음 내뱉는 대사부터가 "나는 메가트론이다." 일 정도로 강렬한 자의식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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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소년과 그의 첫 차는 도대체 뭐였을까요.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뜻밖에도 '학교에서 시켜서 별로 흥미는 없지만 억지로 판소리를 감상하러 극장을 찾은 학생들'로 시작합니다. 춘향과 몽룡의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결국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니죠. 그러나 지금 우리들에게도 바짝 다가올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임권택 감독은 그래서 우리들 세계에 속한 안내자라는 의미로, 점차 판소리에 동화되어가는 학생들과 다른 관객, 그리고 그들 모두를 춘향과 몽룡의 남원으로 안내하는 소리꾼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샘과 미카엘라와 범블비, 그리고 블랙아웃과 특전대 군인들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들'을 20년이나 된 낡은 과거의 이야기로 안내하는 역할이죠. 지금의 우리들은 대부분 판소리를 즐겨듣지도, 트랜스포머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도 않으니까 이러한 안내자 역할을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맡아야 했던 겁니다.

임권택은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잡아내는 감독이며, 따라서 그가 지극히 한국적 정서를 자아내는 춘향과 몽룡의 이야기를 탐미적으로 다룬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마이클 베이는 자동차와 비행기 등 움직이는 인공물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잡아내는 감독이며, 따라서 그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피터빌트 트럭과 성간 전투기의 이야기를 탐미적으로 다룬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옵티머스 프라임의 아름다움, 그리고 메가트론의 강함에 대한 찬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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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니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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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FLY BOYS>, 1차대전 당시 프랑스에 의용군으로 지원한 미국인들을 모아 편성된 '라파예트' 비행단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실재했던 인물들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지만,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거의 사실입니다. 성능은 고사하고 안정성조차 검증되지 않았던 당시의 복엽 전투기를 타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방탄 유리로 된 캐노피는 물론 낙하산조차 없었죠. 하나 혹은 두개 달린 9mm 기관총은 늘 불량 탄환으로 중간에 막혀 망치로 때려가면서 다시 쏘곤 했습니다. 이 공중전의 시대, 1917년은 라이트형제가 최초의 비행기를 12초동안 하늘에 띄운지 겨우 12년 후입니다.

지금이야 저부터도 제가 사는 곳에서 차 타고 한시간만 달리면 공군 기지가 있고(한때 거기에 친구가 근무했죠. 저도 국방 의무 수행하느라 면회 갈수는 없었지만.) 거기서 발진한 전투기나 헬리콥터를 이따금 볼 수 있을 만큼 비행기는 우리에게 흔한 물건이 되었지만 아직 킹콩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기도 전이었던 당시 미국인에게 '프랑스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우주에 가서 우주선을 타고 전쟁에 나간다는 것'과 비견될 만큼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며, 또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또 아무나 하려고 하던 일도 아니었죠.

농장이 파산해 오갈데 없게 된 카우보이, 비행에 반해 나이도 속이고 들어온 16살 철부지, 하버드에서 짤려버린 부잣집 외아들, 최고지만 흑인이기에 늘 평가절하되던 권투 선수, 그리고 어설픈 전과자. 각기 출신도 다르고 사연도 제각각인 미국 소년들(BOYS)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을 도운 프랑스 의용대장 '라파예트'의 이름을 딴 비행대(FLY)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한 만큼 비행단 내부의 갈등도 많이 겪지만 그보다는 함께 하늘을 난다는 우정을 교류하고 그를 통해 갈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영화는 현실에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가상의 인물들을 통해 하나하나 엮어가며 시간 순서대로 풀어나갑니다. 심지어 적군인 독일 조종사들까지도, '같은 하늘을 나는 사람'으로써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만났더라면 저 '어중이 떠중이' 미국인들을 본척도 안했을 프로이센 귀족 청년들이 하늘에서는 자신을 죽이거나 자신이 죽여야 할 적에게 정중히 경례하지요.

영화의 마지막, 계속해서 관객들이 응원해왔던 '카우보이'의 사랑은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는 한줄 멘트로 끝납니다. 그것과 완전히 동격으로 비행단원들의 뒷 이야기를 하나씩 한줄 멘트로 정리하고 실제 라파예트 비행단원들의 기념사진으로 마무리지을 때 이 영화가 전하려 했던 것은 어떤 극적인 감동이 아니라 다만 '그 어떤 영화보다도 극적이었던'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적이라면, 이 영화는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잘 살려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전쟁에는 어울리지 않을 약간의 낭만적 시선도 가미된 것 같긴 하지만, 추억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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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 사건을 정면으로 그린 첫 장편 영화일 겁니다. 영화 제목인 '화려한 휴가'는 당시 신군부가 입안한 광주 진압 작전의 작전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군인의 시선이 굉장히 많이 가미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각을 지우고 선량한 사람들을 죽여야 했던 스무살 청년들에게 광주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계엄군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고 집에서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을 텐데, 그들이 어째서 '인간이 아닌 놈들'이 되어야 했을까요. 어째서.

그러나 영화는 그것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날의 참상 이후 27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광주에 대해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 알고 있는 것들을 늘어놓습니다. 영화의 인물들은 허구지만, 그들이 광주의 마지막 날 했던 일들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전직 특전사 장교 출신 택시회사 사장과 해병대를 나온 순수한 청년과 월남전 방위 출신 택시기사와 동네 양아치와 간호사와 고등학생. 그들은 모두 광주에 있었고 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정을 끌어안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외신에까지 보도되었지요. 마지막날 밤 거리 곳곳에서 울려퍼지던, 광주 시민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위대한 광주 시민 여러분'을 찾는 애절한 가두방송까지, 영화는 여기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우린 <모래시계>와 <박하사탕>의 강우석과 김영호까지 알고 있지만,

영화는 그런 거 모릅니다.

제목이 무색하게도 <화려한 휴가>에는 '화려한 휴가'를 온 사람들이 없습니다. 애국가에 당연스레 가슴에 손을 얹는 순수한 시민들은 있으되, 그런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라는 명령을 따라야 했던 그 청년들은 없습니다. 다만 얼룩무늬 하이바와 곤봉과 총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작, 명령을 내린 사람은 없습니다. 영화에는 계엄령을 내린 인물은 없고, 그 명령에 따르는 '총알'만이 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광주에 대한 영화인데, 그 옛일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철저하지 못했습니다. <라파예트>에서 손에 사전을 들고 서툰 프랑스어와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던 '카우보이'와 그의 프랑스인 연인과 달리, 분명히 광주 시민일 그들 중 제일 중요한 인물들은 오히려 전남 지방 방언을 쓰지 않습니다. 핏덩이마냥 목으로 넘기기 뜨거울 만큼 구성지고 찰진 사투리는 오직 조연들이 선사하는 짤막한 웃음들에서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과거를 오늘에 되살리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두 영화가 택한 것은 똑같이 가상의 인물을 통해 실재했던 에피소드를 재구성하는 방식이었고, <라파예트>는 실재했던 에피소드에 더 집중했던 반면 <화려한 휴가>는 가상의 인물에 오히려 더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그들은 '가상의 인물' 로서 훌륭했던 것이지, 모두가 완벽한 '광주 시민'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광주를 직접적으로 다룬 첫 장편 영화인데 너무나 아쉬운 점이 많은 작품이네요. 뭐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무조건 다 '뜻깊은 일'을 '처음 시도'한다고 해서 영화처럼 그것이 최고가 되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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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우리들의 이야기

'프랑스 기사들의 용기'는 아쟁쿠르에서 단 일천개의 영국 장궁 앞에 꺾였습니다. 영국의 기병대는 발리클라바에서 러시아군의 대포를 향해 돌진했다 짓이겨졌고 콜렌소에서 보어인들의 독일제 모젤 소총을 향해 돌진했다 벌집이 되었습니다. 제일 끔찍했던 것은 몽골에게서 기마전술을 배웠던 폴란드의 창기병대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70년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첫 말을 떼거나 첫 걸음마를 옮기거나 첫사랑에 빠지거나 첫 아이를 낳았을 쯤에 그들은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독일 제3제국의, 지금 우리가 보기엔 '코딱지만한' 1호 전차들을 향해 돌진해 역사도 전설도 신화도 되지 못한 채 흘러가는 잡담거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세기 초, 참호를 뒹굴며 질병과 허기와 기관총과 독가스와 철조망과 그 모든 것을 향해 자신의 목숨을 전력으로 돌진시키라고 하는 맛이 간 지휘관들의 미친 명령에 시달리던 소년병들의 머리위에는 두 세 겹의 날개로 창공을 수놓던 하늘의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거리를 달리는 경차 한 대의 엔진보다 가벼웠던 엔진을 손으로 돌려 시동을 걸어 날아오른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상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싸웠습니다. 오늘날, 100년전 그들이 내질렀던 함성이나 비명'소리'보다도 빨리 날아가는, 하늘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그저 화면 속의 점 하나로 인식하며 버튼을 누릅니다.

전쟁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변해갑니다. 강강약. 강강강약. 중강약이죠. 항상 똑같은 리듬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때리고 차고 찢고 부수고 베고 꺾고 돌리고 누르고 만들고 겨누고 맞추고 일어서고 엎드리고 땅을 파고 헤엄치고 날아오르고 뛰어내립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우리 세계에서 이미 '기사'들은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한때 그들은 명예와 약자 보호, 주군에 대한 충성과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정의'였으니까요. 그것이 그들에게 소중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들이 지켜야만 했던 것들이니까요. 우리는 그들을 죽이고 그들로부터 정의를, 그 소중한 것을 빼앗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에게 그렇게 '소중했던 것들'을 그들만큼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 걸까요.

둘) 그들의 이야기

카발리에로의 예식을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검은 갑주의 물결을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핏빛 절망의 시를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황금의 아카르드와 정열의 베락스를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마법의 황혼을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소중한 것을'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아이들의 놀이 속에, 서민들의 장터에, 부엌이나 서재나 침실에, 학교나 연병장이나 골목길에, 산이나 강이나 숲이나 여기 뒹구는 바위나 흙먼지 속에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떠한 전쟁에도 정의는 없어.'

'기사' 라이디엔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입니다. 오, 사타루스여! 당신의 아내가 저기서 지금 뺨을 맞았습니다! 우리 고귀했던 기사님들은 오래전에 정의를 잃어버렸습니다. 늙은 자엘라딘의 휘파람과 함께. 아니면 바위 아래 꿈을 묻어야 했던 정열의 베락스와 함께.
어쩌면 하얀 로냐프 강까지 달려갔던 파스크란과 함께. 어쩌면 자기 하녀의 카발리에로가 되어 도주한 섀럿 가의 마지막 기사 나이트 레이피엘, '당신의 소중한 것을'과 함께. 어쩌면 명예와 사랑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했던 그들의 '바람'과 함께, 아니 어쩌면 잠자는 크실 기사들을 찌르라고 명했던 위대하신 져런스타르 기사대장과 함께. 지켜야 할 것을 잃어버린 기사들은 이제 이름만 남았습니다. 데로스 기사대장이여. 기사도는 이제 정녕 기사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소중한 것을'의 어린 날의 추억이 담긴 저택을 허물며 기사의 꿈을 꾸던 젊은 건설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저택 뿐 아니라 사랑, 명예, 충성, 그 밖에 기사들의 모든 것을 허물고 나서야 비로소 기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 남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 저택처럼 이미 주인을 잃어버린 것들입니다. '바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없듯이. '그 남자'는 그냥,

가짜였을 뿐입니다. 건설 노동자 시절 가짜 세르시아 출신이었듯이, '그 남자'는 가짜 기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름뿐인 가짜 기사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입니다.

벤도루우젤의 성문 앞에는 이제 수비대가 없습니다.

로냐프 강은 피에 젖어, 더 이상 그날처럼 하얗게 반짝이지 않습니다.

아슈벨의 늪에선 더 이상 하야덴의 검광이 Pellocs의 불길에 번뜩이지 않습니다.

헤라인드 성, 아니 이제 헤라인드 유적에선 더 이상 아아젠의 자장가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퓨론사즈의 성벽 위에 아무리 오래 서 있어도, '당신의 소중한 것을'은 전령 레페린을 앞세우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니, 이제 서서 퓨론사즈 평원을 내려다볼 성벽이 없습니다.  

'그 남자'의 진짜 얼굴을 기억하는, 수천명이나 되는 루우젤의 '왕'들은 자신들을 죽였던 가짜 기사들을 죽이고 가짜 기사인 '그 남자'를 죽이고, 자신들의 마지막 하나 남았던 '진짜' 기사를 위해, 그들의 장례 예법에 따라 돌을 던지고 돌아갔으니까요.

'당신의 소중한 것을' 죽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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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눈동자와 꿈꾸는 듯한 목소리, 이상한 악세사리와 엉뚱한 잡지책. 미친 (=lunatic) 러브굿이라고도 불리는 루나 러브굿은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의 여러 새로운 여성 출연진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아가씨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역을 맡은 아일랜드 소녀 이반나 린치는 15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캐스팅되었다네요. 성인 출연진에 한해서는 단 한번 나오고 마는 배역에도 굉장히 호화캐스팅인 이 시리즈는 어째서인지 아역 캐스팅에선 알려지지 않았거나 거의 신인에 가까운 아이들을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뭐 여기까지라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극장에서 루나 러브굿이 출연하는 장면을 볼때마다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저 소녀는 루나 러브굿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루나 러브굿'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어떤 몰입감 말이에요.

단지 연기를 너무 잘해서인가? 아니면 단지 백금발 소녀라서인가!
궁리하다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런 포스팅이 검색에서 걸리는군요.

http://www.kimjihee.com/tt/242
세계일보 김지희 기자 블로그 포스팅(2006년 2월 3일)

하단에 나온 대로 이반나 린치는 오랫동안 해리 포터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합니다. 영화에 참여하면서 그녀는 동경하던 신화 속으로 걸어들어간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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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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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변했습니다. 'ㅁ'b



 이반나 린치를 비롯해서 <해리 포터> 시리즈에 출연하는 어린 배우들은 대부분 원작 <해리 포터>의 애독자였거나 애독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꿈은 이루어진다~☆고만 하기에는 이러한 이야기 뒤에 숨은 진실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대중 예술을 접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 - 평론가나 미학 연구자 포함 - 이 갖는 착각 중의 하나가, 이것이 일방적이고 소통이 불가한 형태의 상업 활동이라는 망상입니다. 물론 지극히 일방적인 사례들도 얼마든지 있지요. 각종 로맨틱 코미디물 같은, 예상 수요층의 기호에 철저히 맞추는 영화들이나 선정적인 무대 의상과 적당하고 쉬운 리듬으로 군인과 예비역들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가수들의 음반과 뮤직비디오처럼, 얼마든지 순수 상업적인 활동도 대중예술의 세계에선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되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대중예술이 신화와 접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한번 포스팅을 했는데, 신화의 특징 중 하나가 수용자가 또한 전달자가 된다는 점이지요. 전달 과정에서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추가하고 재해석하기도 하며 그런 것들이 적층되어서 수백년이 흘러 완결되는 것이 신화입니다. 단지 이상한 여자아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루나 러브굿을 신비한 매력을 가진 소녀로 바꿔놓은 배우 이반나 린치는 그러한 반복 재생산의 나선 상에 올라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신화들 중 하나인 <해리 포터> 신화에 진정 '참여'를 하고 있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는 아직도 더 남았고, 우리는 이 재능있는 배우의 성장을 지켜볼 시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전달하는, 조앤 롤링이 전해준 것과는 또 다른 신화를 받아들일 시간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산업사회의 비인간적 물결 앞에 사람들은 대부분 신화를 잃어버렸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산업 사회의 막바지부터 일구어진 대중예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다시 한번 신화의 시대처럼 기대감을 갖고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국경과 언어의 장벽도 넘어서서 말이죠. 소녀여, 신화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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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섬의 원주민들은 왜 금발의 여성을 콩의 신부로 바치려 할까.

*.공룡들은 왜 그렇게 앤을 못잡아먹어서 안달이었을까.

*.킹콩은 왜 앤의 생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걸까.

이런 의문은 쿠퍼 판이나 로렌티스 판이나 잭슨 판 어디서도 해답을 안 주죠. 판타지 영화인 '킹콩'에서 이런 건 단지 그냥 그런 겁니다. 굴속에 호빗이 살았다는 거만큼이나 당연한 얘기로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치만 다 이유가 있을 거 같단 말이죠. 그래서 해본 망상이 이런 겁니다.

해골섬에는 아득한 고대부터 번성했던 문명국가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샤머니즘과 인신공양이 결합된 형태의 제정일치 국가라고 하자면, 이들을 통치하던 무녀 - 여왕이라 불릴만한 여성들에게 성인식과 왕위 계승, 그리고 무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 통과의례를 겸하던 절차가 '콩'과 친구가 되는 거였던 거지요. 지배층은 폴리네시아 원주민과는 다른 이주민이었으며, 금발의 백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콜롬부스 이전에 아메리카까지 진출했던 바이킹의 후손일 수도 있고 더 먼 곳에서 왔을 수도 있습니다. 공룡과 거대한 동물, 벌레들 속에서 간신히 생존하던 원주민들은 우수한 문명과 무기, 그리고 단련된 신체와 함께 온 이주민들을 환영했고 수백년에 걸쳐서 함께 문명국가를 이룩해냅니다. 처음 이 섬에 왔을 때 이주민들을 이끌던 그들의 '무녀'가 일행과 떨어졌을 때, 원주민들이 '콩'이라 부르는 거대 유인원을 혼자 만나서 길들이게 되고 그 후로 그것이 해골섬에 온 이주민들의 전통이 된 거예요.

당시에 해골섬은 훨씬 더 넓었습니다. (피터 잭슨판 '킹콩' DVD의 서플먼트에 속한 가짜 다큐멘터리를 참조 'ㅁ') 30m도 넘는 높이의 방벽을 쌓고 그 안에서 로마나 아즈텍에 뒤지지 않는 문명 세계를 이루고 살던 그들은 차츰 세월이 흐르자 타락하게 되고, 이주민들은 충실한 친구에서 점점 폭압적인 지배자로 변해갑니다. 검은 피부의 원주민들은 점차 흰 피부의 이주민들에게 존경과 감사보다는 증오와 분노를 느끼게 되고, 그러던 중에 고대 주술을 비밀스레 간직하고 있던 소수의 원주민들이 피의 저주로 공룡을 길들여 반역을 일으키는 거예요. 광활한 해골섬의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던 공룡들이 저주로 인해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이주민들을 공격해 잡아먹으려 들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고, 무녀 - 여왕은 자신의 '콩'과 함께 저주받은 공룡들과 반역자 원주민들에 대항해 맞서 싸웁니다.

전쟁은 길게 이어졌고,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검은 피부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방벽 밖으로 내몰렸고, 이주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한 순간, 오래전부터 예언되었던 거대한 지진이 일어납니다. (피터잭슨의 가짜 다큐멘터리 그대로) 해골섬은 이 강도높은 지진으로 인해 바다 밑으로 조금 가라앉아, 섬의 많은 부분이 침수되고 30m의 방벽은 거의 모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주민들도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무방비로 저주받은 공룡들에게 노출되었고, 무녀 - 여왕은 섬을 벗어나기로 결심합니다. 파국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이끌고 '콩'의 도움으로 무사히 배를 타고 섬을 떠날 수 있게 되지만, 본래는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장례 의식용으로 만든 작은 배로는 '콩'과 함께 갈 수는 없었지요.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그녀는 떠나갑니다. 콩은 다시 해골섬에서 가장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그들 무리의 서식지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여왕을 잊지 못하고 늘 해질녘이면 수평선을 바라봅니다. 세대를 이어나가며 그의 자손들도 그 행동을, 아마도 의미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따라하는 거예요.

원주민들도 대부분은 섬을 떠났습니다만, 일부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이제 기억속에만 있는 무녀 - 여왕에 대한 존경과 공포, 증오를 담은, 고대의 왕위 계승 의식과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의 인신 공양을 계속 거행했고, '콩'의 무리도 그 의식에 계속 참여하게 됩니다. 물론 그동안 바쳐진 원주민 여성들은 무녀 - 여왕의 자격이 없었기에 콩에게 모두 죽었겠지요.

먼 땅으로 떠나간 무녀-여왕은 자신의 '콩'이 기다리는 섬의 위치를 기록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그 기록은 전설이 되어 이리저리 필사되다가 마침내는 얼치기 모험가이자 야심많은 영화 감독 칼 덴햄의 손에 들어갑니다. 그사이 세월은 흘러 '콩'의 무리도 그 수가 줄어들어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쯤, 칼 덴햄의 인도로 마지막 무녀 - 여왕,  앤 대로우가 해골섬에 도착한 겁니다.




뭐 그냥 해본 망상일 뿐이지만, 언젠가 확 삘받으면 저 전쟁과 지진을 겪고 해골섬을 탈출하며 '콩'과 이별했던 최후의 무녀-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쓸지도 모릅니다(...)




...근데 나 셤보는 날 새벽에 일어나서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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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절대 안나오는 장면.

<청소년을 위한 XXX> 시리즈가 재미없는 이유는 책 제작한 이들 자기네끼리 재미있고 유익할 거라 생각하는 대목만 골라서 일일이 해설까지 붙인 뒤 나머지는 대충 책 모양만 되도록 짜깁기해 내놓기 때문입니다. 영화 <향수>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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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을 지도 모릅니다. ^^;

한줄 요약 :

하여간 남자들이란.

스파이더맨은 이제 원숙한 영웅이 됐습니다. 1,2편에서는 겨우 거리의 음유시인들에게서나 칭송받던 붉고 푸른 '여러분의 친절한 이웃' 거미남은 이제 어린이들의 우상이며 여자들의 꿈이자 범죄 퇴치에 일조한 결과로 경찰청장 따님이신 아름다운 모델 지망생한테 뉴욕 시민 공로상을 받는데다가, 스파이더맨 티셔츠가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기도 합니다.

피자배달을 하다가도 교통사고 당할 뻔한 아이들을 구출하던 순진한 영웅대신, 집에 경찰 무전기를 놔두고 위급상황이 생길때만 거미줄을 뻗고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여유'도 생겨버렸습니다. 어느새 '열심히'보다는 적당히, 그리고 '생색나게' 할 줄 알게 된거죠. 사실상 스파이더맨 활동은 '자원봉사'도 아닙니다. 피러 파커는 스파이더맨 전속 사진사로서 여전히 데일리 뷰글 지에 사진을 팔아 용돈을 챙기고 있거든요. 위험부담에 비해선 물론 적은 돈이긴 하지만 이익이 나오는 '일'이죠.

게다가 학교에선 이제 수업도 안빼먹는 우등생이며, 모델 지망생인 경찰청장 따님과 실험 파트너가 되니 적당히 친절하게 대해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여자친구 공연도 꼬박꼬박 챙겨봅니다. 2편의 정신없이 바빠서 불쌍한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매사에 긍정적이고 즐거우며 자신의 인기를 자랑스러워하는 피러 파커예요.

반면에 무대위의 스타로 이름 날릴 뻔하던 메리 제인 왓슨에겐 혹평이 쏟아지고, 결국 극단에서 퇴출됩니다. 좌절하는 그녀에겐, 이미 자신이 뭐든 잘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차 있는 피러 파커는 정말이지 도움이 안돼요.

한 장면. 뭔가 대화를 하러 찾아온 메리 제인 왓슨은 대화 도중에도 계속 시끄럽게 떠드는 경찰 무전기를 가리킵니다.

"잠깐, 그거 좀 끄면 안돼?"

사고 소식, 곧 스파이더맨의 일거리이자 피러 파커의 사진 건수를 전해주는 경찰 무전기를 가리키며 메리 제인이 말합니다. 그러자 우리의 피러 파커는,

볼륨을 줄입니다.

메리 제인 왓슨과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 거미남, 피러 파커는 아주 평범한 보통 남자입니다. 여자친구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을 거라 믿고 자신도 여자친구만 바라보고 있는 거라 믿으며, 언제나 여자친구와는 이렇게 저렇게 돼서 좋은 결말만 있을 거라고 혼자 망상에 잠겨 있었던 덕분에 실제로는 일이 틀어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처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우선이고 친구와의 관계 회복이 더 급하며 정작 그것 때문에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있어도 자신만큼 자기 여자친구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혼자 멋대로 상상하는 그런 보통 남자, 그게 피러 파커입니다.  

사실상 여자친구한테 잘해주는거라곤 '남자친구 있다' 라는 사실 확인밖에 없으면서 말이죠.

잘해준 것도 없으면서 '다른 남자가 있어' 라고 차이고 나자 찌질찌질, 다른 여자를 끌고가서 보란 듯이 앞에서 춤춥니다. 더욱이 화내면서 메리 제인을 때리기까지 해요. 너무 평범한, 어쩐지 사귀다 깨진 어느 커플에 대한 뒷담화 같은 피러 파커의 행동에 웃음마저 나옵니다. 친구가 '다른 남자'라는 사실을 알자 이젠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도 막 때리고 말이죠. 어린애 같죠?

근데 거기 계신 여친 있는 남자분 당신은 어떤데요? :)

결론 : 커플 분은 꼭 보세요. 여자들은 남자들 심리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남자들은 자기 반성을 위해서 말이죠.

덧 : 어떤 글씨가 굵어보이는 건 아마도 눈의 착각일 겁니다. (생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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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형이거나, 어디가 좀 모자라면 버려집니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7세 때부터 시작되는 군사교육은, 어린 소년으로 하여금 굶주린 늑대를 함정에 빠트려 무력하게 버둥거릴때 서슴없이 찔러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실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사람 목숨 동물 목숨 어느게 더 소중한지 몰라요. 적어도 비겁하게 좁은 틈으로 숨어들어간 소년 레오니다스는, 늑대보다 몇배는 흉칙해보였습니다. 저 시작부터.)

피를 가지고 웃으며 노는 남자들의 나라 스파르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동방의 대국 페르시아가 보낸 대군. 흙과 물을 보내 충성의 서약만 하면 살던대로 살게 해주겠다는 사신의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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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질 한방에 묵과당합니다.

뭐가 이성이고 뭐가 자유입니까. 입으로 열심히 이성과 자유를 부르짖어도, 그들은 절대로 이성적이지도, 자유민이지도 않습니다. 출생부터 전사이길 강요당하는 그들이, 자유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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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출생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기형이라 스파르타를 떠나 자라난 이 사람. 에피알테스. 스파르타인으로서 싸울수 있다고 말하는 그를 레오니다스는 '불구의 손으로는 방패를 들어 네 옆의 동료를 지킬 수 없다.'며 내칩니다. 300개의 복근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밀집 진형이 스파르타 군의 강점이었죠. 혹독한 훈련으로 잘 정돈된 300개의 육체와 전혀 다른 이 사람에게 스파르타는 함께 싸울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기회따위 존재하지도 않았죠. 원래 스파르타에서 기형으로 태어난 그는 죽었어야 했으니까요. 스파르타에 그의 자리는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스파르타에서는 전열을 이탈하면 죽고 맙니다.

레오니다스는 자신의 병사들이 노예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네. 아니에요. 하지만 그들은 독립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스파르탄'일 뿐입니다. 레오니다스 자신이 늘 그렇게 부르잖아요. 300명밖에 안되는데도 이름을 불러주는 게 아니라 '스파르탄!'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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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 페르시아의 관대한 왕이며 '자칭 신'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에게 스파르타의 방식을 존중해줄 테니 그저 충성의 맹세만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오히려 더 많은 명예를 보장하겠다고 하지요. 모든 그리스를 스파르타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그건 페르시아에게도 이로운 일이며, 사실 스파르타에게도 손해볼 게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원로와 흉한 몰골의 제사장들은 뒷거래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레오니다스는 굴복하지 않고 끝없이 싸웠습니다. 아니, 죽였습니다. 어린 시절 굶주린 늑대를 좁은 바위틈에 끼이게 하고 무력해진 늑대를 찔러 죽였을 때처럼, 그렇게 페르시아의 군대를 좁은 테르모필레 협곡에 끼워놓고 무력해진 그들을 300개의 복근으로 이루어진 창으로 찔러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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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세계에서 몰려든, 복색도 전투 방식도 다양한 페르시아의 군대를 보면, 크세르크세스는 진실으로 관대한 왕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는 스파르타가 내친 에피알테스도 받아들였습니다. 두 팔이 없는 사람도 창도 방패도 들 수 없다며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의 군대에서는 두 팔이 없더라도 양 팔에 칼날을 손 대신 붙이고 사형 집행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몇배는 거구인 사람도 그의 군대에서는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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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관대하지 않나요? 그렇게 관대했기에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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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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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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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에게도 무제한적인 충성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노예라서가 아닙니다. 어리석어서도 아니에요. 크세르크세스를 위해 엎드려 몸으로 계단을 만들어주는 노예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왕은 신이다. 그는 우리가 아무리 다른 인간과 모습이나 복색이 다르더라도 자신의 군대로 인정해준다. 그런 믿음 말이예요.

적어도 다양한 문화권의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인정해주는 크세르크세스는, 팔을 들어올리지 못하는 에피알테스를 내친 레오니다스보다 300배는 관대한 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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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알테스를 받아들인 다음에도, 악귀처럼 자신의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는 300명의 '스파르탄'을 죽일 기회가 왔음에도 그는 죽이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레오니다스는 창을 던집니다. 정말이지 말이 안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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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비로소 저 수많은 다양한 인종과 출신의 백성들에게서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크세르크세스는 뺨을 스치며 자신의 피를 낸 레오니다스의 창으로 말미아마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고, 신성을 잃어버린 페르시아 군대는 흩어질 수밖에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오리엔탈리즘을 말하는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이 영화의 괴물은 스파르타예요. 페르시아가 아닙니다. 그들의 잘 정돈된 육체. 다비드의 그림에서처럼 아름답게 정돈된, 암포라에 새겨진 무늬처럼 단정한 300개의 육체가 바로 대화도 통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죽여대는, 물리쳐야 할 괴물인 겁니다. <에일리언>의 단 한 마리 에일리언, <고질라>의 단 한 마리 고질라, <괴물>의 단 한 마리 괴물처럼요.

그리고 그 괴물은 죽지 않았습니다. 100배로 불어나서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는 쓰러졌고, 서구 문명은 팽창했고,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믿으며 세계를 지배하려 들었죠. 페르시아처럼 상대방을 인정하는 관용도 없이, 자기네처럼 정돈된 복근을 갖지 못하면 죽여버리면서. 헬레니즘은 그렇게 확장되었습니다.


자기네처럼 흰 피부를 갖지 못하면 죽여버리면서. 자기네처럼 하느님을 믿지 못하면 죽여버리면서. 자기네처럼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면 죽여버리면서.

지금도 그렇게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혹평하는 사람들은 괴물같은 페르시아와 조각상같은 스파르타의 대조가, 너무 단순한 미적인 악과 선의 대조를 통해 역사를 왜곡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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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가 야만적으로 묘사되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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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라고 별 다르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가 괴물같은 자들로 이루어졌다? 외모가 어떻게 다르든, 그들 모두의 신 크세르크세스의 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페르시아가 저는 스파르타보다 몇배는 이성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의 외모에 눈살을 찌뿌렸던 지금 거기 있는 당신! 그들의 외모가 '악'을 나타냈다고 믿는 지금 거기 있는 당신은 어쩌면 정돈된 신체를 갖지 못하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인간은 누구나 다르게 생겼습니다. 조금 많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네. 송곳니가 좀 튀어 나올 수도 있고, 덩치가 무지하게 클 수도 있고, 팔이 없어서 칼을 팔대신 끼울 수도 있는겁니다. 다 인간이에요.  그러나 그 모두를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 포섭하는 법을 페르시아와 로마, 한 등 대제국들이 멸망해버린 후 암흑시대부터 '다시' 지난 2000년간 배웠습니다.

아직도 덜 배웠어요.

그러니까 이 영화를 인종주의나 오리엔탈리즘으로 보고 있는 여러분들 자신이 인종주의자인 겁니다. 나치식의 인종주의자이기에 여러분들은 이 영화가 묘사한 페르시아의 그 다양성이 나타내는 아름다움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얼굴 한쪽이 일그러진 여자도 여성으로서 인정받고, 절룩거리며 왼팔도 제대로 못쓰는 에피알테스도 남자로서 성욕을 채울 수 있게 해주는 크세르크세스의 처우는 분명 '정당'합니다.  

단지 모습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크세르크세스의 그 온화한 목소리를 가식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관대함은 '영화 속에 근거가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생각과 같은' 모습을 가진 레오니다스의 입에서 나오는 자유와 이성에는 '영화 속에서조차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거짓말이며 가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건가요?

제가 마음에 안들었던 부분은 딱 한가지입니다. 레오니다스의 죽음 직전의 연설. 노예와 자유민의 대비는 <알렉산더>와 같은 영화에서도 나왔습니다. 참 이놈의 연설 하는게 우스워요. 그 시절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치를 그 시대 사람의 입으로 말합니다. 어차피 다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자들 군대가면 흔히 듣는 말이 인권을 보장 받으려면 한 사람 구실을 하라는 소리예요. 즉, '자진해서 복종하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거죠. 똑같은 헛소리인 겁니다. 영화에는 '접전 직전 사령관의 연설'이 참 많이도 나옵니다. 아무래도 선동적인 분위기를 조장하고 관객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내심 응원하게 만들기 좋은 방식이긴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령관 연설' 장면은 <매트릭스 : 레볼루션>에 나오는 캡틴 미퓨네의 연설이에요. We give them HELL before we die! 짧고, 명료하죠. 레오니다스도 조금만 더 짧게, 괜히 자유니 어쩌니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좋아했을 텐데요.  

어쨌든 저 한가지 단점만 제외하면 300은 분명 '공정한 시각으로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린' 잘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여러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한 영화를 보는 그 각도는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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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기어스 - 반역의 루루슈 제 22화를 보고

(미리니름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절대로 읽지 마십시오.)

이글루스 애니 밸리도 그렇고 네이버 블로그들도 그렇고 온갖 곳에서 루루슈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일본 특구'라는 취지 좋고 호응 좋고 전례없는 행사를 처음부터 망가트리기 위해 그 곳에 갔다는 것부터, 어이없는 실수로 유피를 살인마로 만들고는 주저없이 유피를 적으로 선언하며 죽이라고 명령하는 등, 욕먹을 짓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22화의 가장 가련한 피해자는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한 일본인도, 학살의 주범으로 전락해버린 유피도 아닙니다.

이제 계속 발동하는 자신의 기어스를 통제할 수 없게 된, 영영 제로의 가면을 벗을 수 없게 된 루루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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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화 마지막 장면. 영영 꺼지지 않을 기어스의 불꽃 아래 흐르는 눈물.

네. 이제 루루슈는 가면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맨얼굴로는 이제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것, 곧 루루슈 란펠지의 삶, 덧붙여서 루루슈 비 브리타니아의 삶도 이제 영원히 끝장났다는 겁니다.

어렸을때 저는 슈퍼맨 영화를 TV에서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저런 힘을 가지고 뭐하러 저렇게 무보수 봉사활동만 해야 하는 거지. 나라면 차라리 저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겠어. 악당으로 몰려 전 세계로부터 탄압? 내가 지배하는 게 더 세계를 위하는 것인양 그 힘으로 꾸미면 돼. 그래서 부모님도 삐까번쩍하게 살 수 있게 해드리고, 친구들하고도 최대한 재미있게 놀거야. 어렸을 때니까 가능한 생각이죠. 지금 소중한 것을 그대로 가진 채 아무도 그걸 빼앗지 못하게 세계를 바꿀 수 있다. 남자애들은 이따금 하는 얘기입니다. 왜 이런 개인사적 얘길 하냐면,

루루슈, 겨우 고등학생이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전투가 체스처럼 진행될거라고 믿다가 실전을 수도없이 겪은 코넬리아에 의해 간단히 격파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를. 그리고 제로와 흑의 기사단이 발족했을때의 그 퍼포먼스. 그 분위기. 다분히 아이다운 발상 아닌가요? 아니 그보다, 기어스 능력자가 되었다는 걸 안 그 순간 '여동생 나나리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타도 브리타니아를 부르짖으며 행동에 들어갔다는 것부터가 다분히 아이나 할 법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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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파이더맨> 중에서


어느날 갑자기 슈퍼 거미에게 물린 피터 파커에게는 아버지처럼 키워준 삼촌이 있었습니다.피터 파커는 어린애처럼 메리제인에게 잘보이려고 차를 사기 위해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는 프로 레슬링 알바를 뜁니다. 하지만 레슬링 관계자는 돈을 주지 않았고, 복수심으로 그는 레슬링 사무실을 턴 강도를 놓아줬다가 그 결과로 소중한 삼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그는 여러분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되었죠. 어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루루슈는 어떤가요. 어머니는 죽어버렸고 아버지는 그를 방목해버렸습니다. 세계 자체인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도 루루슈는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집니다.(그리고 이 점에서, 황제는 루루슈를 제대로 평가했습니다. 정말로 루루슈는 약한 인간이었으니까요) 그의 주변에는 지켜줘야 하는 여동생 나나리 뿐이었어요. 자신도 어린 아이면서 어른의 흉내를 내야 했던 이 소년에게 어느날 갑자기 기어스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한번도 자라볼 기회가 없었던 아이 루루슈는 마음껏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피터 파커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요. 그리고 그 결과로 소중했지만 몰랐던 이들을 전부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22화 지금.

좀더 끔찍한 것은, 루루슈는 자신이 기어스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기어스가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은 힘은 힘이 아니라 재앙일 뿐입니다. 기어스는 재앙입니다. 쥬라기 공원의 공룡들처럼.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처럼. 타이타닉의 빙산처럼. 모든 이야기에서 재앙이 언제나 그렇듯 기어스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은밀하게 아는 사람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서서히 재앙은 영향을 퍼트리기 시작합니다. 비렛타와 우리 불쌍한 '오렌지' 경을 비롯해 루루슈, 그리고 제로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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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화 중 한 장면. 유페미아 황녀의 예고없는 등장으로 대혼란에 빠진 학교에서 혼자만 계속 기어스 명령대로 벽에 표식을 남기는 소녀.


루루슈에게 주어진 기어스에 대해 다시 한번 짚어봅시다. 루루슈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을 실험 대상으로 연구한 스펙을요.

1. 한 사람에게 단 한번만. 철회는 불가능.

2. 당사자는 해당 행동에 대해 기억상실.

3. 발동 시간은 무제한. 조건이 달성되면 끝난다.

처음부터 기어스는 사용은 할 수 있지만 통제는 할 수 없는 겁니다. 통제란,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한다 안한다 뿐 아니라, 그 결과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을 말해요. 한번 시작되면 철회할 수 없고 중단시킬 수도 없다. 그런게 바로 재앙이죠. 루루슈라는 방출구를 갖게 된 재앙이 서서히 퍼져나오다가 마침내 유페미아 앞에서 폭발한 겁니다. 이건 우연한 일도, 예견할 수 없었던 일도 아닙니다.

우린 이미 무한으로 발동하는 기어스 때문에 미쳐가는 마오를, 그의 죽음을 보았잖아요.

루루슈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 마오와 같은 파멸 뿐입니다. 이미 소중한 것을 많이 잃고 나서야 진정 옳은 것을 하게 된다는 스파이더맨의 선택지는 그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는 '전부' 잃었으니까요.

아름다운 이상을 품었던 순수한 소녀 유페미아의 끔찍한 최후에 건배를.

죽어버린 루루슈와 그를 삼켜버린 제로에게 애도를.

그들을 죽인 것은 어느 누군가 한 인간의 의지가 아닌, 기어스라는 이름의 재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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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
반역의 검은 영웅 vs 순백의 기사

기어스 :
마인드 컨트롤 vs 마인드 리딩

브리타니아 :
인종주의 vs 민족주의

란슬롯 :
슈퍼 메카닉 vs 리얼 메카닉

카렌 :
학교 친구 vs 기사단





빌어먹을. 이렇게 취향마다 직격해도 되는거냐. 코드기어스.



 거대 제국 브리타니아가 일본을 합병, 에어리어 일레븐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배하게 된 지 7년째지만, 여전히 일본 독립의 기치를 내거는 레지스탕스가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황자 루루슈는 불구인 여동생 나나리와 함께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던 중 우연히 레지스탕스에 말려들었다가 신비의 소녀 C.C를 만나 절대 명령의 힘 '기어스'를 손에 넣습니다. 약육 강식을 몸소 실천하는 브리타니아 제국 자체가 무너지지 않는 한, 약자로 규정당한 남매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믿었던 루루슈는 그 놀라운 힘을 이용, 일본 '독립'이 아닌 '타도' 브리타니아를 외치며 자신을 '제로'로 칭하고 검은 가면을 쓰고 일어나 일본 내 레지스탕스 세력들을 '흑의 기사단'이란 이름으로 규합해 브리타니아 제국 전체에 맞서 전쟁을 선포합니다.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 앤더슨과 네오, 아나킨과 다스베이더처럼, 코드 기어스는 루루슈와 제로, 즉 가면을 쓴 검은 영웅의 모티브가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가면과 가명은 우리말로는 아주 작은 발성의 차이밖에 없는데, 사회적인 접촉에 있어서도 이 둘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가면을 쓴 상태와 쓰지 않은 상태의 같은 인물이, 사회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작용하는 두 인물로 보이지요.

특이한 것은, 이 검은 영웅들이 사회에 대해 갖는 태도는 자신을 '감추는' 가면을 썼을 때 '솔직하게' 드러나며, 가면을 벗어 맨 얼굴을 '드러내면' 오히려 모든 것을 '속이는' 가식의 얼굴로 돌아간다는 점이에요. 루루슈와 제로는 이 과정을 그대로 답습해냅니다. 너무 충실해서 오히려 저 위엄넘치는 선배님들보다도 더 원류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반역의 루루슈


재미있는 것은, '코드기어스'의 세계관은 혼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버리는 저 선배님들과 달리 자신만 가면을 쓰는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선 루루슈의 오랜 친구, 스자크가 있습니다. 그의 가면은 거의 슈퍼로봇물의 주역 메카와도 같은 배경을 가진 강력한 나이트메어, '란슬롯'이죠. 명예 브리타니안으로 군에 있는 이 '일레븐' 소년이, 제국의 비밀스런 병기 '란슬롯'의 파일럿이라는 점은 아주 오랫동안 루루슈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카렌, 평범한 귀족 여학생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혼혈인 반정부 테러리스트죠. 이 경우 그녀의 가면은 오히려 병약해서 학교도 잘 못나오는 귀족 여학생 쪽입니다. '흑의 기사단'에서는 에이스로 갈수록 그 입지를 굳혀가지만 오히려 학교에서 힘들게 쓰고 있는 병약 미소녀 가면은 점점 불안해져갑니다.
 
세번째는 학생회장이죠. 겉으로 보기엔 야한 농담으로 후배들을 놀리기 좋아하는 지극히 평범한 '언니' 이미지지만 그건 가면이고, 사실은 몰락한 가문의 딸로 끊임없이 맞선에 불려나가야 하는, 그럼에도 루루슈의 출생의 비밀을 알면서도 숨겨주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이 외에도, 단 한번 자신을 구해줬던 유페미아 황녀에게 연정을 품었지만 사람들에겐 '감사 인사도 못했는데 한번 뵙고 싶어' 라고 말하는 여학생이나, 겉으로는 항복하고 충실하게 브리타니아에게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 정부 단체들을 알게 모르게 지원해주고 있는 '교토' 라는 세력의 수장, 하녀의 가면을 쓴 채 언제나 딸의 곁에 있으려 했던 카렌의 생모, 방송사 보도 담당자면서 동시에 '흑의 기사단' 단원이 되는 남자, 브리타니아의 순혈통 기사였지만 기억을 잃고 흑기사단원과 같이 지내게 되는 여성 등, 이야기는 계속해서 두 얼굴을 가진 이들, 혹은 한 얼굴에서 다른 얼굴로 변해가는 이들을 루루슈와 교차편집해서 보여줍니다.

심지어 브리타니아군의 주 무기인 인형 병기 나이트메어도 일종의 가면처럼 작용합니다. 루루슈, 즉 제로가 나이트메어 안에 탄 채 브리타니아 군 심장부에 숨어서 발각될까 전전긍긍하는 장면에서 특히. ('얼굴을 드러내라!') 브리타니아군은 덧붙여 단순한 보병조차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고, 그건 과거 가면을 착용했던 일본의 사무라이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래서인지 브리타니아는 오히려 과거의 제국주의 일본, 그리고 정복당한 구 일본은 과거의 한국처럼 보이네요. 혹자는 설정에서부터 일본인들의 피해망상이 배어나온다고 말하지만, 이야기 구조상 '일본적'인 것은 오히려 브리타니아 쪽입니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라고 오래된 유행가 가사도 있잖아요. 거의 그러한 발상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반성문인 셈이죠. '반딧불의 묘' 처럼요.

피지배 민족 취급받는, 이제 더 이상 일본이 아닌 에어리어 일레븐에 사는 이들. 브리타니아인이건, 명예 브리타니아인이건, 한때 일본인이었던 '일레븐'이건, 혼혈이건, 지배와 피지배가 섞여드는 이 불안정한 땅에서 살기에 그들은 두 얼굴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총체적인 가면극은, 다떼마에(겉마음)와 혼네(속마음)의 구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어쩌면 당사자로서는 기분나쁠 수도 있는) 은유로도 보입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네오와 앤더슨이 흔히 원용되곤 했던, '온라인에서의 자아와 현실의 생활'에 대한 은유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처음부터 제로가 가면을 쓴 건 아닙니다. 그의 첫 전투는 통신기기로 모든 전투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도 하듯이요.

'제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역할과 작용이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저없이 절대 명령을 내려 법을 어기고 목숨을 빼앗아요. 그건 우리가 게임을 하거나 온라인에서 블로깅을 하고 게시판에 글을 쓰고 덧글을 달때 의도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주저없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펼쳐보이죠. 하지만, '루루슈'는 나나리에게, 샤리에게, 스자크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를 전전긍긍합니다. 그래서 제로가 한 일의 결과에 흔들리는 거죠. 우리가 부모님이나 학교, 회사 사람들이 자신이 온라인에서 한 일을 보게 되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걱정하듯이요.

이렇듯 비단 다떼마에와 혼네를 구분하는 일본인에게만이 아니라, 인터넷과 로그인이 지나칠만큼 광범위하게 생활화된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반역의 루루슈는 여러가지를 시사하는 듯 합니다. 우리들 역시 제로처럼, 스자크처럼, 카렌처럼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럼 당신의 진실은 어느쪽인가요.

가면?
아니면 맨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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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좋아하는 영화를 10편만 뽑아보라고 하면 정말 갑갑합니다. 스타워즈랑 반지의 제왕만 해도 벌써 9편이잖아요. 여전히 단 한편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 들었다 놓는 영화들도 많이 있지만, 반면 3편까지 이어지며 거대한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들이 이제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 영화들이 매우 잘 만들어졌고 좋은 흥행 성적을 올렸기에 속편을 제작하는 것이 이득이기도 하고, 3편까지 나올 만큼 세계와 캐릭터가 탄탄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결말이 그 세계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는 점도 빼놓으면 안되겠네요. '다음엔 어떻게 되었을까?' 를 한번쯤은 궁금해 하게 만드는 그런 결말 말이에요.

그럼 한번 지금까지 나온 3부작을 10개만 꼽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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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1972~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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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클래식(1977~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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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198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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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퓨처(1985~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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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라기공원(199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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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1998~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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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1999~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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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프리퀄(1999~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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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200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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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2001~2003)


이 중 처음부터 3부작으로 기획되어 나온 영화는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 프리퀄 정도라는 생각이 드네요. 한 편을 만들어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사람들은 속편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3부작이 되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속편도 흥행하여 또 다음 편을 찍어야 하는 경우.
두번째는 처음부터 2편을 연속으로 찍기로 기획하고 만드는 경우.

첫번째 예에는 아마 대부, 터미네이터 등이 들어가겠고, 두번째는 매트릭스, 백 투 더 퓨처 등이 들어갑니다. 특히 이 두 영화의 2편 절단마공은 영화관에서까지 '다음 이시간에(to be concluded)'를 보아야 하느냐는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지요.

물론 첫번째 예의 경우에는 4편, 혹은 5편까지도 나오기도 합니다. 에이리언, 리쎌웨폰, 더티 하리, 록키, 나이트메어, 13일의 금요일, 그리고 올해 4편이 개봉되는 다이하드, 쏘우처럼요. 그러나 '완결편'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기보다, 이런 영화들은 우리 세계에 부속된 하나의 신화처럼 계속 그 내러티브가 이어지는 겁니다. 신화가 사라진 우리 세계에서 그들은 공포와 용기, 정의와 의지의 신들이죠. 그러므로 3부작과는 또 다른 이야기 구조를 갖습니다. 007 영화처럼, 하나 하나가 완결이며 또한 하나 하나가 다음편을 향해 열려있는 거지요.

3부작이라는 제작 관행은 아마도 오래 이어질 것 같습니다. 올해인 2007년에 쏟아져나오는 제3부인 영화들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완결편도 있고, 다음 편을 향해 열린 영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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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 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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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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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즈 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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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이블 : 멸종

물론 일각에서는 영화가 연속극이냐며 비아냥거리는 의견도 있고 (특히 트릴로지 중 2편이 개봉되었을 때 심각하게 제기되는 비판) 한 편의 영화에 이야기를 못담아낼 만큼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소리도 나옵니다만, 그만큼 감독이나 제작진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도 볼 수 있겠죠. 어느 쪽이 진실이든, 올해는 풍성한 3편들 덕분에 극장을 찾는 맛이 좀더 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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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나가 아닌 Jenny의 첫 콘서트

김아중의 도전적인 연기가 눈길을 끈 <미녀는 괴로워>는 여러가지 의미로 기네스 펠트로의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와 대칭점에 서 있습니다. 극중 강한나는 비만이었다가 날씬한 모습의 Jenny로 거듭나고, 로즈마리는 처음엔 날씬하게 보였지만 알고보니 몸무게가 100kg을 넘어갔지요. 강한나는 성형수술과 운동을 통해 1년이나 걸려서 진짜로 '미녀'로 거듭났지만, 로즈마리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유명한 심리상담사 로빈슨에 의해 최면이 걸린 '홀(잭 블랙)'의 눈에만 '미녀'로 보였던 거지요. 네, <미녀는 괴로워>는 변신하는 본인 강한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로즈마리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을 바라보는 연인 홀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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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에 걸린 홀의 눈에 비친 로즈마리는 더없이 아름답지만...


기네스 펠트로가 그랬듯 김아중도 몸무게가 두배도 넘을 것 같은, 전혀 같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의 특수분장을 하고 직접 열연을 펼쳤습니다. 무대 뒤에 숨은 대창가수와 성형수술을 통한 변신, 그리고 화려하게 피어나는 미녀 신인가수 같은 매력적인 소재들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단순하게 NGO 활동 정도로 제시되는 '마음씨 아름다운 여자'에 비해 훨씬 구체적으로 매력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최면에 걸린 홀과 같은 특정한 인물이 아닌, 극장에 앉아 있는 관객들이지요. 변신이 끝나고 처음 거리를 나서면 보는 사람마다 Beautiful Girl! 우리들도 김아중의 모든 매력을 담아내려 애쓴 그 화면을 바라보며 똑같이 공감하게 되고, 콘서트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콘서트장에 와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죠. 네. <미녀는 괴로워>에서는 우리들이 바로 '홀'이에요. 어쩌면 우리도 최면에 걸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라는 최면에요.

하지만 두 영화의 가장 큰 대칭점은 역시 결말이겠죠. 로즈마리는 원래의 삶 그대로를 살아갑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날씬한 모습이었던 적이 없었고, 그런 모습을 동경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의문을 품은 적도 없습니다. 다만 홀과의 관계만이 그녀가 의심하고 고뇌했던 문제였지요. 그러나 강한나는 다릅니다. 그녀는 이름마저 바꾸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강아지도 아버지도 친구도, 오직 아름다운 '자연 미인' 제니이기 위해 전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제니'는 첫 라이브 콘서트에서 결국 울어버립니다.

한나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로즈마리의 본 모습을 알고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홀처럼, 그녀에게 '괜찮아' 라고 외치게 되지요.
 
네 괜찮아요. 한나의 노래는 처음부터 계속 괜찮았어요. 영화라는 최면 때문이 아니라도요. 그리고 영화는 처음부터 충격요법 등으로 면밀하게 계산되었던 그 감동을 향해 달려갑니다. 계산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구려는 아닌 그 감동을 향해서. 결국 로즈마리처럼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했어야 하는 거였다는 그 결말을 향해서.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자, 감동하세요!' 가 강하게 느껴졌던 클라이맥스도 별로 없었지만, 그 감동에 정말로 취해 울어버린 경우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홀의 말대로, 영화란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내 눈에만 미인이면 그걸로 족한' 거죠. 그런 최면에 걸리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벽을 넘어 티켓을 끊고 영화관이라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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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의 미리니름이 많습니다.
영화가 어째서 2시간 내외라는 분량 제한이 정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 등을 제외하고 일반 상업 영화의 대세는 2시간 라인인 듯 합니다. 그래서 감독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수많은 장면들이 "Cut the chase!(추적장면만 남기고 잘라!)" 라는 편집자의 외침에 잘려나가곤 하지요. 다행히도 요즘 세상에는 DVD 발매라는 편리한 수익성 사업방향이 있기 때문에, 잘려나간 장면을 영영 볼 수 없었던 1933년 <킹콩>의 시대와는 달리 편집당한 장면에 있던 배우들도 더 이상 안타까워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완전판 DVD에는 사루만의 최후에 대한 피터 잭슨 팀의 재해석 장면이 담겨 있지요. 극장판에서 이 긴 장면이 잘려나간 걸 알게 된 크리스토퍼 리는 시사회 참석을 거부할 만큼 실망했다지만, 그래도 우리는 언제라도 볼 수 있잖아요?

자, 오늘 비교해볼 영화 둘은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세밀한 고증을 거쳐 아름다운 화면으로 재탄생한 보석같은 영화들입니다. 먼저 이 두 영화를, 특히 <진주만> 같은경우는 혹평이 자자하지만 저는 모두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오늘의 비교는 '감독판'에 한정된 겁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 은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이벨린의 발리안이라고 거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완전히 허구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히말라야에선 박쥐남자를 가르치고 옛날 옛날 먼 옛날 저 먼 은하계에선 '협상자' 케노비 장군을 가르치더니 나니아에선 핀칠리에서 온 피터 페번시를 가르친 리암 니슨이 이번에는 이벨린의 곳프리 역을 맡아 함정임이 뻔한 곳에 아무 생각없이 뛰어드는 천연바보기사의 피가 흐르는 발리안을 가르쳤습니다.
한때 기마병으로 전장을 달렸지만(극장판에서는 언급이 없던 설정) 이제 대장장이가 되어 사제가 된 배다른 동생의 꾸준한 압박에도 불구하고(역시 극장판에 언급이 없던 설정) 성실히 살고 있다가 토끼같은 아이와 여우같은 아내를 잃은 발리안. 곳프리는 후계자가 없기에 고향에 돌아와 환영을 받았지만(역시 극장판에 없...), 아픈 상처를 계속 건드리며 떠나게 만들려는 동생을 죽이고 도망쳐버린 발리안이 그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자마자 추적자가 따라붙고, 결국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맙니다.
발리안은 속죄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지만 더한 혼돈의 땅만 보게 되지요. 광신적인 십자군을 이끄는 기 드 뤼지앵과 악당 레이날드는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애쓰고, 그들을 막아 평화를 지키려는 예루살렘의 국왕과 그의 여동생 시빌라는 어떻게든 발리안을 이용해 기 드 뤼지앵을 내치려 하지만 발리안의 순수한(이라고 쓰고 '천연바보라서' 라고 읽습니다) 마음은 이용당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 여기서부터 감독판만의 이야기.

킹덤 오브 헤븐, Dts.


시빌라에겐 아이가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인 국왕은 어린 시절 촛농을 손등에 떨어뜨리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걸 곳프리에게 들켰었고, 곳프리는 부왕에게 그 사실을 울며 고했댔지요. 예루살렘의 국왕은 그 천형을 짊어진 채 내내 가면을 쓰고 살다 젊은 나이에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고, 이 소년이 위에서 보듯 국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시빌라가 발리안을 그토록 원했던 것은 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줄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죠. 이벨린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흙투성이가 되어 메마른 땅에서 수맥을 찾아 뛰어다니던 발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빌라의 시선은 아이 아빠를 찾는 엄마의 것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이 역시 나병을 가지고 있었어요. 촛불에 손을 얹었다가 손바닥이 검게 타는 장면, 인장을 찍기 위해 명령서에 납을 흘리다 손등에 떨구고도 아무렇지 않은 장면들을 보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요. 시빌라는 평생 지켜본 오빠의 고통을 아이가 감내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만 독으로 자기 아이를 죽이고 맙니다.
레이날드 : "아이는 천국으로 갔소?"
극장판에서는 왕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인 것처럼 편집되었던 대사가 제자리를 찾는 거지요. 이후는 모두 같습니다. 반지의 제왕 완전판 DVD와 달리 액션 장면이 더 추가된 것도 없으며, 결말도 같습니다만, 시빌라와 발리안의 결합은 단지 '동방의 순수에 의한 결합'이 아니라 둘 다 아이가 있었기에 좀더 설득력이 더해집니다.


자, 그런데 <진주만>의 감독판을 볼까요.

플라스틱 재질인 속 케이스에 기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는 정도일 뿐인 다소 평범한 킹덤 오브 헤븐 케이스와는 달리, 진주만 감독판의 케이스는 상당히 화려합니다. 일단 단순한 박스형이 아니라 마치 미 육군 항공대의 보급품이었던 가죽 장정된 다이어리같은 외형에, 주요 등장인물을 메인으로 삼고 2차대전 당시의 징병 포스터를 패러디한 우편엽서도 들어있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짤막한 선전포고 결정 연설문도 프린트되어 담겨 있고, 일부 스크린샷도 상당히 좋은 화질로 프린트되어 있어요. 네 장의 디스크는 각각 비닐팩에 담겨 한장 한장 종이 슬릿에 들어가 있고요. 딱 열어봤을 때 '우와'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지요. 그런데,

그게 다예요.
경고2 : 어떤 분들에게는 아마 감당하기 어려운 잔인한 스크린샷이므로 접어둡니다.
극장에서 위와 같은 장면을 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저 잘려나간 신체 부위는 극장판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폭격장면에서는 제로센의 기관포에 찢겨지는 수병들의 모습, 콕피트 안에서 터져버리는 일본군 조종사의 모습, 동맥 출혈을 일으킨 한 장교의 목 부위 상처 등 섬세한 잔인함이 감독판에서는 모두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날, 1941년 12월 7일의 참상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듯 느낄 수 있게요. 이건 참 다행이에요. 쿠퍼 감독의 <킹콩>에서, 협곡 아래서 거대한 벌레들에게 잡아먹히는 선원들의 모습은 너무 잔인해서 잘려나갔고 이젠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에서 재해석된 그 장면을 통해 상상할수밖에 없지만 말이죠.

그러나 그게 전붑니다.

뭐 레이프와 에블린의 로맨스는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복원하는 좋은 시도였지만 말이죠. 가장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츤데레(응?)레이프와 대니의 공식대로 가는 로맨스(응?), 대니와 에블린의 주말연속극처럼 뻔한 로맨스에 대해서도, 베티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심지어 흑인 최초로 미 해군 십자 훈장을 받은 실존 인물 도리 밀러(쿠바 구딩 주니어가 연기)에 대한 이야기나, 침몰한 USS애리조나 안에 갇혀버린 승무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더 자세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그대로예요. 심지어 가장 호평을 받았던 격렬하고 아름다운 공중전 장면에도 추가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화 상영 시간의 길이는 물론 원래도 거의 3시간에 달할 만큼 굉장히 길긴 했지만 더 길어진 것 없이 그대로였지요. 이래서야 감독판으로 편집한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요.

물론 DVD에는 서플먼트라는 것이 있고, <진주만> 감독판의 서플먼트는 2개의 디스크에 나누어 담긴 만큼 제법 풍성한 편이었습니다. 극중에서 알렉 볼드윈이 열연했던 실존인물 두리틀 중령이 책임을 맡았던 도쿄 공습 작전과 그 작전에 참전했던 실제 용사들의 향방에 대한 서플먼트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였습니다마는, 메인 타이틀은 본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편집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화면을 만드는데 급급한 나머지 발생했던 수많은 옥의 티도 전혀 수정없이 그대로 남아있고 말이죠. CG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진주만 공습이 있기도 전의 장면에서 벌써 애리조나 기념관이 살짝 보이는 그런 짧은 장면조차 수정을 안했다는 건 정말이지.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을 영화를 통해 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DVD는 극장보다 훨씬 내밀하게 그런 이야기를 담기 좋은 매체입니다. 영화에서 못다한 이야기도 담아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원래 그리 더 많지 않았다면 굳이 감독판이라는 이름을 달아줄 의미가 없는 거지요. <킹덤 오브 헤븐>은 감독판이 아니라 완전판이라는 이름마저 아깝지 않지만, <진주만>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아쉬운 타이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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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을 사랑한 누나, 누나를 사랑한 남동생.
전통도 음모도 역사도 그들을 벌하지 못했다.








...저한테 뭘 바랬나요.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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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흘렀어도 그대들은
여전히 최고였습니다
앞으로 20년이 흘러도
아니
영원히
그대들은 최고로 남을 겁니다.

록키
맥코이
보리스
벅시
미키
제스
사키


그리고

카자마 신

그대들의 날개에 영원토록 피와 화염의 바람이 깃들기를









여러분을 위한 작은 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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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 배반의 하늘
Vol.2 불타는 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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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벅스라이프>
(먼저 이 글은 채널예스 예스칼럼,
듀나의 투덜투덜 최근 연재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개미>, <벅스라이프> 모두 '개미'를 소재삼은 3D 애니메이션입니다. <1984년>을 떠올리게 하는 <개미>, 그리고 어릴적부터 자주 들었던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변용한 <벅스라이프>에 이어, 이제는 아득한 옛 영화가 되어버린 <아이가 줄었어요> 를 생각나게 하는 최근작 <앤트불리>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들은 '개미'라는 소재상의 공통점 이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개미 사회에 대한 집요한 왜곡이에요.
<앤트 불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데뷔작 <개미>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좀더 잘 와닿을 겁니다. 개미 사회에서 수컷은 오로지 생식을 위해서만 태어나고 길러지는, 여왕개미 후보생을 제외하면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비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특이한 소수 집단입니다. 그들은 그 한 순간의 빛나는 비행을 위해 일생동안 게으름피우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지요. 싸우고 일하며 개미 사회를 존속시켜 나가는 건 모두 생식능력이 배제당한 암컷 개미들 뿐입니다.

그런데 위 애니메이션들에서 보여지는 세 개의 개미 군락들은 어찌된 일인지 수컷 개미들이 날개도 없이 전투에도 나갈 뿐더러 노동에 종사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평범한 개미'로 묘사되고 있는 <벅스라이프>와 <개미>의 주인공들은 둘 다 남자이며 모든 행동에서 남성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아름다운 히로인까지 기다리고 있죠. 우리 모두가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히로인, '공주님' 말이에요.

실제의 여왕개미는, (계층 나누는 걸 좋아하는 인간들이 이름지어줬기에) 이름만 여왕일뿐 자신이 일군 사회에 속한 모든 개미들의 어머니일 뿐입니다. 정치적인 권력은 전혀 없죠. 개미 사회의 모든 개미는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에선 모두가 여왕개미를 떠받들어요. 게다가 위의 두 영화에서 여왕은 늘 무력하며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음모에는 놀랄 정도로 무심하고 무지합니다. 그 가련한 할머니들을 지키는 건 언제나 우리 주인공 남자 개미들. 여성은 고귀하나(정말?)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걸 눈에 띄게 역설하는 두 이야기가 아이들을 위한 것인양 홍보되었다는 것이 더욱 무서운 일입니다. 열 세살짜리 아이들이 '여자는 먹는 거야.' 라고 아무 죄책감도 위화감도 없이 말할 수 있는 이 사회를 만들어낸 건 이런 이야기들이에요.

최근작 <앤트 불리> 역시 이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마법사 개미와 그 여자친구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은 '남자가 무엇인가 해내고, 여자는 그것을 돕거나 방해한다' 는 공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처럼 "전쟁이란게 워낙 지독한 것이라야 말이지." 라는 변명조차 아무도 하지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는 여자를 보조적인 위치에 내려놓습니다.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이야기가 흥행에 성공한 예는 거의 없지요. 언젠가 들은 거지만 '여성 주인공이거나 여자 작가이름이거나 표지에 여성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은 관련 출판사에서는 되도록 취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팔려나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판타지소설의 주 소비층인 10대 남자들에게 전혀 어필할 수 없다는 거죠. 비단 장르소설만일까요? 최근 국내에서 가장 큰 대중예술 시장일 영화 쪽을 봅시다. 요즘 이글루스에서 자주 떠도는 한국 영화 50선 에서 처음 10개 리스트만 보겠어요.

1위.괴물(2006) ---> 12,965,700명
2위.왕의 남자(2005) ---> 12,302,831명
3위.태극기 휘날리며(2004) ---> 11,746,235명
4위.실미도(2003) ---> 11,081,000명
5위.친구(2001) ---> 8,181,377명
6위.웰컴 투 동막골(2005) ---> 8,008,622명
7위.쉬리(1999) ---> 6,209,898명
8위.투사부일체(2006) ---> 6,105,431명
9위.공동경비구역 JSA(2000) ---> 5,830,228명
10위.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2005) ---> 5,635,266명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10위 <가문의 위기> 뿐입니다. 그나마도 여자는 시집을 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깔고 있는 상황이에요. 세상에. 그래요, 6위 <웰컴투 동막골>도 어느정도 인정은 해줄 수 있겠습니다만, 결국 장애를 가진 그녀는 죽어야 했습니다. <왕의 남자>요? 공길의 여성성은 그의 예술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인간 사회는 물론 개미 사회와는 다릅니다. 인간은 개미처럼 의식적인 결혼비행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번식하고, 날때부터 생식능력이 배제된 신분층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의 수컷은 개미의 수컷보다 훨씬 할 일이 많습니다. 네 인정해요. 드라마 내적 요구사항을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것 정도야 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수많은 동물학자들이 다른 사회를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사회에서 부족한 것을 다른 사회에서 발견하기 위함이지, 결코 인간 사회가 그 쪽 사회보다 우월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조차 인간사회의 기본형에 맞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는 <앤트 불리>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서 만났던 두 영화 <개미>와 <벅스라이프> 에서 저지른 실수를 좀더 완벽하게 저지르고 있는 스토리라인을 가진 <앤트 불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덧붙여서 주변에 이 영화를 자녀들에게 보여줄 계획을 가진 부모가 있다면 뜯어말리고 싶습니다. 차라리 좀 오래된 소설이긴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쥐어주는 편이 '아이들 교육'에 좀더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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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옛날 드라클에 올라왔었다는 칼립소님의 폴라리스 랩소디 캐릭터 일러스트. 지금은 네이버나 이글루스 어딘가에서 '~펌' 이란 말과 함께 멋대로 떠돌아다닙니다. 이렇게까지 이미지가 선연한 캐릭터를 우글우글 만들어내는 작가도 흔치 않습니다. 팬이라면 누가 누구인지 맞춰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워낙 뒤틀린 성격이라 그런지 저는 유명하다, 소문났다, 잘팔린다고 알려진 작품은 보통 잘 손대질 않습니다. 봉신연의나 강철의 연금술사 같은 작품이 그랬지요. <드래곤 라자>(이하 DR) 그리고 <폴라리스 랩소디>(이하 PR)도 그래서 손을 대지 않았던 작품이지요. 하지만 올해 들어서 이 작품들을 지인들의 추천에 의해 가능한 한 편견을 지우고 진지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 자신은 이 글을 <하얀 로냐프강>과 같은 작품처럼 마구 좋아하지는 못합니다. 늦게 접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많은 표현이, 한국어 문장답지가 않아요. 책을 소유하지 않은 관계로 일일이 예를 들지는 못하지만, 영어 문장을 직역한 느낌을 갖는 문장이 굉장히 자주 드러납니다. '가장 ~한 것들 중의 하나' 와 같은 표현 말이에요.

두번째로는 캐릭터예요. 분명히 매력적인 면모를 가득 가진 다양한 캐릭터가 열 손가락은 우습게 넘는 양으로 출연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아무도 이야기에서 핵심을 이루지 못합니다. 개별 캐릭터가 뜻하고 추구하는 어떤 방향과,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려는 방향은 계속해서 어긋나요. DR은 마침내 어떻게든 끝에선 만나지만, PR은 모든것이 산산히 흩어집니다. 분명 의도된 것이겠습니다만 너무나 자기 캐릭터에 애정을 안보인다는 점은, 이야기를 캐릭터를 통해서가 아닌 작가가 직접 말하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저 도구에 불과했던 캐릭터에 애정을 느끼게 만들다니, 조금 배신감마저 느끼기도 했지요.

게다가 그들은 모두 너무 달변입니다. DR의 주인공 중에 자기 표현이 부족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는 인물은 거의 아무도 없어요. PR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달변과 극단적인 과묵함으로 양분되는데, 그나마도 달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플라톤의 대화편에 출연해도 될 만큼 재치있고 언어 유희에도 능하며 논리와 수사학의 달인들입니다. 게다가 그 모든 복잡한 기교가 동원된 표현을 그다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해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존재론 강독이나 인식론 강독 수업시간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귀여니' 이윤세가 자기 소설을 만들기 위해 어떤 텍스트를 참조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다 보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이영도가 글을 쓰기 위해 어떤 텍스트를 참조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관계와 언어, 존재 등 다양한 철학적 문제제기가 담긴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은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직설적으로 캐릭터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데 그 때문에 작가 스스로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것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도의 타자 이영도의 글은 부드럽게 창공을 날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을 연상하게 만드는 커다란 흐름이 있습니다. 그의 글은, 그의 이야기는 자유롭습니다. 캐릭터도, 독자도, 심지어 작가 자신도 그의 이야기에는 관여하지 못합니다. 이야기는 때로 산들바람처럼 조용히, 혹은 폭풍우처럼 거세게 완급을 조절하며 보이지 않는 손처럼 캐릭터와 그 캐릭터에 이끌린 독자들을 붙잡고 모으고 또 놓아줍니다. 이러한 느낌은 그의 글이, '라이트 노벨'이라고 불리는 캐릭터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쓰여졌다는 걸 암시합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가벼움이 없습니다. 그의 캐릭터는 경박하고 가벼울 수 있어도, 그 캐릭터에 이야기가 따라가지 않는 한 이야기는 언제나 처음과 끝을 깊은 무게를 가지고 가로지릅니다. 심지어 1인칭인 DR마저도 화자인 후치 네드발의 경쾌함이 이야기를 경쾌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야기의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방식을 셋으로 나눕니다. 첫번째, 팬픽에서 흔히 보이는, 어느 캐릭터를 위해 바쳐지는 이야기가 가장 쉬운 이야기의 방식입니다. 쉬운 만큼, 그 캐릭터에 버닝하지 않는 독자들에겐 어필하기 힘들어지죠. 그 다음의 이야기는, 어느 극적인 사건을 위해 모아진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선 캐릭터도, 플롯도 모두 그 방향을 향해 통일되지요. 한번 읽으면 재미있지만, 두번째 읽을 때는 이미 알아버렸기에 더 이상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세번째이자 가장 어려운 단계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독자를 빨아들여 그 안에 포함시키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캐릭터는 독자에게 실제 인물이 되고 사건은 독자에겐 역사가 됩니다. 이 단계의 이야기에서 개연성을 따져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작가는 신이고, 그래서 그건 그냥 그렇게 있는 거니까요.

이영도는 초기작에서 이미 이 세번째 단계를 아주 능숙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위에서 보다시피 저는 거기서 개연성을 따지는 어리석은 짓을 해버렸지요. 좀더 일찍 이 초기작들을 접했더라면 하는 후회와, 저런 세계에 빠져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그의 글을 읽고난 솔직한 소감이었습니다.

이제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를 읽어볼 차례입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겠죠. 매료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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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 사자와 마녀와 옷장> 와 <게드 전기> 에 대한 미리니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언제부턴가 극장가에 걸리는 영화들 중 원작이 따로 있는 영화가 무척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볼 수가 있어요. 리메이크작이든 소설, 연극 등의 영화화든 말이죠. 원작이 있는 경우엔 원작 팬을 스크린 앞으로 끌어당길 수 있으니 기본적으로 흥행이 보장된다는 안전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못만든 경우에는 영화가 엉망이라는 평에 원작을 망쳤다는 비난까지 덤태기로 씌워지죠. 앤드류 아담슨 감독의 <나니아 연대기>는 세계 3대 판타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원작의 후광도 없을 거예요. 영어권 독자들 중에 이 아름다운 동화 7편중 한편이라도 못읽어본 독자는 많지 않을 테니까요. 어른들은 어린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자기 아이들을 극장으로 데려갈것이고, 아이들은 또 책으로만 접할 수 있는 것들을 눈으로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테지요. 그리고 영화는 그들에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화면을 선사해주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7편이나 되는 대작이죠. 이걸 모두 영화화하는 건 시간상으로도 무리에요. 배우의 나이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감독은 5편만 추리기로 하고 과감히 1편 <마법사의 조카>는 건너뛰고 출간 연도가 가장 앞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부터 만들었습니다. 다음 영화는 3편 <말과 소년>이 아니라 4편 <캐스피언 왕자>라고 합니다. 3편을 건너뛰는 이유는 다른 이야기들과 가장 관련이 적기 때문이죠. 시리즈 영화다운 선택입니다. '우리 세계의 아이들이 나니아로 가 모험을 한다'는 메인 줄거리에 충실해서, 그 '우리세계의 아이들' 캐릭터에 집중하는 겁니다. 이야기 하나에 영화 하나. 메인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단일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에서 영화와 동화는 구성이 유사하죠. 원작의 후광을 최대한 활용한 겁니다.

물론 감독 앤드류 아담슨도 수많은 독자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영화는 그의 시점에서 보는 <나니아 연대기>만을 담아냅니다. 사실 원작의 주인공은 루시라서, 피터의 전투는 모든 일이 끝난 뒤 피터의 설명으로만 원작에 드러납니다.그러나 감독은 피터의 전투가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오프닝에서 그는 작가 루이스는 한줄짜리 나레이션으로 넘겼던 런던 대공습과, 군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잠깐이지만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냅니다. 그때 폭격에 시달렸던 아이들이, 이제는 나니아의 전장에 서서 새들을 지휘해 나니아의 적들을 폭격하지요. 어떤 관객들은 그리핀과 새들이 모여 돌로 폭격하는 그 장면이 무척 즐거웠겠지만, 어떤 관객들은 그 장면은 신경쓰지 않다가 루시가 착한 거인 럼블버핀과 만나는 장면이 날아간 것만 아쉬워할 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연대기는 이렇게 상영을 시작했습니다. 누가보아도 페번시가 네 남매 역에 꼭 들어맞는 네 명의 신인 아역배우들이 너무 커버리기 전에, 서둘러 다음 영화가 나오고 또 다음 영화가 나와야겠지요. 감독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하든, 이 아이들의 캐릭터야말로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니까요.




어슐라 르귄의 <어스시의 전설>을 원작으로 하는 미야자키 고로의 <게드 전기>는 이런 점에서 너무 성급했던 겁니다. <어스시의 마법사>, <아투안의 무덤>, <머나먼 바닷가>,<테하누> 4편의 장편 소설로 이루어진 전체이야기를 단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모두 집어넣는다는 건 아무리봐도 만용이죠. 게다가 애니메이션은 영화와 달리 배우의 나이에 연연치 않고 충분히 긴 제작기간을 잡고 작업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진실한 이름에 얽힌 마법에 대한 설정과 자신의 그림자와 싸워나가야 하는 모험, 그리고 어둠의 존재들에게 바쳐졌다 구원된 소녀의 삶,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열어 세계를 잠식하는 자에게 대항하는 싸움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계의 균형을 가져오는 것은 힘만 가진 남자가 아닌 삶을 소중히 여기는 한 여자라는 것까지. 긴 소설은 주인공 '새매(일본어로는 하이타카)'의 삶을 관통하며 그의 여정과 모험을 침착하게 늘어놓지만 2시간 안팍의 애니메이션에선 그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관객도 그런 여유는 없고요.

물론 미야자키 고로 감독도 캐릭터의 중요함은 알고 있기에, 원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네 캐릭터를 뽑아내 애니메이션에 배치합니다. 대현자 새매와 아렌, 테나와 테루. 하지만 원작에서 보여주었던 망망한 어스시의 바다도, 고통스런 모험과 마법의 어려움, '진실한 이름'의 위험성도 설명할 기회 없이 이 네 사람은 만나고 헤어지며, 원작에서 했던 대사를 서로 바꿔 맥락없이 읊조릴 뿐입니다. '새매'가 젊은 시절 겪었던 그림자와의 싸움은 매우 불완전하게 아렌의 몫으로 옮겨가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장애인이었던 테루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였던 테나의 과거는 그저 대사 한마디로 일축되죠. 그래서 <어스시의 전설>이란 제목이 아닌 <게드 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는데요. 문제는 <게드 전기>라는 제목조차 이 애니메이션에 어울리질 않는다는 겁니다. 대현자 새매의 진실한 이름인 '게드'를 제목에 붙였지만 그 이름은 러닝타임 내내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으니 아마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은 대체 왜 <게드전기>인지도 이해 못했을 겁니다.

원작은 항상 양날의 검입니다. 잘 되어도 원작 덕, 못되어도 원작 탓이죠. <게드 전기>는 물론 그 자체만으로 보자면 그다지 나쁘진 않습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색감 좋은 화면에 '테루의 노래' 까지. 썩 괜찮은 애니메이션이에요. 그러나 원작 덕분에 기대치가 한껏 높아진 관객들은 원작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보면서 원작이 표현한 이야기의 10분의 1도 드러나지 못한 이 애니메이션을 비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독립된 작품으로 봐달라'는 건 엄살입니다. 그런 비난은 당연해요. 심지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추억되는 <반지의 제왕> 세 편도 원작 지상주의자들에게 한없는 비난을 받았는걸요.

영화가 원작에 기대고 있는 한, 제작진은 자신들이 원작을 본 수많은 독자중의 하나라는 점을 잊어선 안됩니다. 물론 관객들도 그 점은 생각하고 영화를 봐줘야겠죠. 무조건 자신이 읽은 내용과 다르면 비난부터 하는 관객들도 잘못은 있는 겁니다. 세상은 넓고 같은 텍스트도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 경우는, 아무리 봐도 원작을 '잘못' 읽었거나 '성의 없게' 읽은 것이 드러나는 경우 뿐이죠. 미야자키 고로 감독은 성의없는 쪽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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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을 보면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분명 가운데땅과 발리노르가 속한 세계 '아르다'에는 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들인 '발라르'가 있으며 그들이 보내는 '마이아'가 가운데땅을 활보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든 요정이든 난쟁이든 그 '신성'에 대한 개념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요정이나 인간은 그 어떤 발라의 피조물도 아니고 나중에 온 종족, 더 나중에 온 종족일 뿐이니 (게다가 마이아와 혼인한 요정도 있고, 그 후손인 요정과 혼인한 인간도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쳐도, 난쟁이는 분명 발라 '아울레'의 피조물인데도 그들이 '마할'이라 부르는 이 아울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지요. 기독교가 일상에 깊이 스며든 서구인들이 뭔 일만 있으면 Oh, Jesus! Oh God! 하고 예수를 찾고 신을 찾는 것과는 달리, 난쟁이든 인간이든 요정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신성에 기대는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일상적 대화에는 오히려 예의범절과 인사에 대한 것, 누구의 편이냐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긴밀하게 언급됩니다.

곤도르는 굉장히 오래된 나라입니다. 건국 자체가 몇천년이 넘었고,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누메노르 왕조가 수천년이 이어졌었죠. 이쯤되면 곤도르 인들에겐  곤도르는 나라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예요. 그들은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누메노르의 전통에 따라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보존합니다. 왕이 없지만 누구도 왕을 참칭하지 않고, 정당한 왕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이가 나타날때까지 섭정가가 통치하죠. 끝까지 섭정으로 남아서. 밖에서 보기엔 엄청나게 아름답고 화려해보이는 고대의 유적인 미나스 티리스와는 달리 그들은 검소한 민족이고, 호빗들에겐 간식거리도 안될만한 식사 앞에서 잠시 서쪽을 향해 서서 엄숙히 묵념하는 것이 기본 예의입니다. 손님과 주인에 대한 예의, 주군과 신하의 예의, 친구간의 예의가 수없이 언급되지요. 뭐 생각나는 것 없으세요?

네. 현실 세계에선 바로 중국, 한국, 일본인들이 그렇잖아요. 수천년간 중국은 스스로 세계를 자처하며 살아왔죠. 조상신부터 시작해서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을 비롯해 온갖 미신이 횡행하지만 이 '세계'의 지배자들, 왕과 황제들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질서에 따라 나라의 틀을 유지해왔습니다. 그 질서는 바로 '예의'죠. 한국은 동방 예의지국이라고 불렸어요. 부자간의 예의, 군신간의 예의에 대해서는 거의 남녀간의 사랑만큼이나 애절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지요. 일본의 천황은 신하된 입장에서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국가의 상징을 넘어서서 일종의 신성마저 부여되어 있고요. 그 전통은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곤도르인들은 이런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에요. 미나스티리스 도성에 엄청난 수의 적군이 쏟아져들어오는데도 절망을 말하는 이는 있을 지언정 구원을 바라는 이는 없습니다. 섭정부터 말단 병사까지 임무에 충실하며 혹 상급자가 그러지 못한 면모를 보인다 해도 자신은 상관없이 임무 수행에 충실합니다. 그 때문에 섭정이 아들을 죽이고 자살한다 해도 도성 수비대는 위치를 이탈해 그들을 말릴 수가 없었던 거지요.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임무니까요. 자신의 자리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시작이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또 눈여겨볼 건 곤도르라는 지명이에요. Gon은 돌, ~dor는 ~의 땅이란 뜻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의 지명과 비슷한 방식이죠? 石地라고 번역해도 돼요.  물론 요정어를 그대로 쓰는 것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요정어의 어휘 생성법은 중국어와 비슷합니다. 같은 의미를 가진 어간이 별다른 어형변화 없이 놓이는 위치에 따라 발음이나 의미의 연결이 달라지죠. 일상어는 아니지만, 인명 지명등에 많이 쓰이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인이 한자를 자주 쓰는 것과도 또 유사합니다.

자, 이제 방향을 바꿔서 모르도르를 볼까요. 마이아 사우론의 권세가 일구어낸 어둠과 암흑, 먼지와 재와 유독한 대기의 땅. 더러운 오크들이 자신들의 온갖 악행을 서로에게 거듭하며 수없이 번식하고, 사우론의 꾀임에 넘어가거나 힘으로 정복당한 어둠의 인간들이 모여드는 곳. 정복지에서 납치한 노예들이 광활한 평야를 일구고 눈꺼풀 없는 붉고 거대한 외눈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강요당하는 곳.

모르도르가 단일한 국가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우론과 그 종복들의 술수는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었던 겁니다. 앙그마르의 마술사왕이 남왕조와 북왕조의 왕들을 차례차례 제거한 것도 반지전쟁으로부터 천년 전이지요. 동쪽으로는 룬, 남쪽으로는 하라드, 서쪽으로는 움바르를 차례차례 복속시키고 국력을 모으는 데만도 몇백년이 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마이아인 사루만을 끌어들이기까지 했지요. 이렇게 끌어모은 거대한 연합군이 인간세계의 마지막 자유왕국 곤도르를 친 겁니다. 곤도르를 침과 동시에 또 한무리의 오크 군단은 북방 난쟁이 왕 다인의 영지와 그 인근 인간 마을을 공격했고, 다른 무리는 요정이 사는 로스 로리엔과 리벤델을 향해 공격해들어갔지요. 거의 가운데땅 전체를 향해 모든 병력을 동시에 내리친 겁니다. 이 어마어마한 군단이 섬기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룬과 하라드와 던랜드의 인간들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단일한 전략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눈꺼풀 없는 눈의 공포였지요. 실체조차 없는 이 존재가 자신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눈의 직속 부하들인 나즈굴이 섬뜩한 공포를 소리내어 퍼트리죠.

우리세계에서 이와 가장 비슷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네. 바로 "복수의 하나님 여호와" 께서 계십니다.

신이 두렵지 않느냐고 말하는 우리 세계의 인간들처럼, 오크들은 끊임없이 '루그부르즈'(원작에서 수없이 언급된 이것.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교회당과 같은 일종의 장소나 조직인지, 아니면 사우론과 만날 수 있는 오크 대 족장인지) 와 그 뒤에 버티고 선 커다란 눈동자를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합니다. 서로의 배에 칼을 쑤시는 것이 당연한 사이끼리도 그 말만 나오면 어느정도 수긍하고 말지요. 사루만의 우루크하이들과 모리아의 오크들이 싸우는 걸 보면, 자신들이 누굴 섬기는지, 그리고 그들 중 누가 더 위대한지를 겨룹니다. 꼭 자신의 믿음을 설파하려는 광신도들처럼 말이죠.

실체가 없는 눈꺼풀 없는 눈동자라는 존재, 아무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심지어 가장 의로운 자 모세조차도 보고나서 눈이 멀었던 그 실체없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신이 유일자이며 자신에게 선택받은 종족들에게 선민의식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도 비슷해요. 결코 그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며 구체적인 행위는 나즈굴을 시키는 것도, 천사를 보내고 성령으로 역사하는 하나님과 비슷하죠?

서로 참호를 파고 들어앉아 아침이면 저쪽에서 이쪽으로 자살돌격을 하고, 저녁이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살돌격을 해야 했던 1차 세계대전 때, 그들은 양쪽 모두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습니다. J.R.R. 톨킨이 몸소 겪었던 전쟁이었죠. 그는 평생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살아왔지만, 사실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미 사라졌음을 소심하게 드러낸 걸지도 모릅니다.  

덧 : 그럼 이(↓) 남자는 우리 세계의 마술사왕인 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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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야수'에 대한 치명적인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안보신 분은 스크롤을 내리지 마세요.
설경구라는 배우의 힘으로 완성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개의 '공공의 적' 시리즈입니다. 형사 강철중은 시종일관 약한 이들을 괴롭히고 범인 잡는데는 딱히 열성적이지 못한 불량 형사지만 자기 투자 이익을 지키려고 부모를 죽이는 반인륜적 범죄 앞에 분노하며 날뛰지요. 2편의 검사 강철중은 그렇게까지 불량하진 않지만 다들 등 뒤에선 한마디씩 할 정도로 답답한 사람입니다. 고교시절부터 악연을 맺은 부잣집 둘째아들이 역시 가문의 재산을 노리고 형을 해치려 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에 분노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포에 나섭니다. 두 영화 모두, 좋게 끝나지요. 정의로운 주인공은 승리하고 공공의 적은 결국 잡히고 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외로운 싸움의 끝에 승리가 오는 그 카타르시스가 두 영화의 골조예요.

이제 '야수'를 보겠습니다. 범인을 체포하는 것보다 두들겨 패는게 먼저인 폭력형사 장도영. 그리고 나쁜놈 잡아쳐넣기 위해 가정도 아내도 소홀히 한채 매달리는 검사 오진우. 마치 공공의 적 1, 2편에 나온 두 강철중이 한 자리에 모인 것만같은 이들의 회합은, 폭력조직의 우두머리 유강진을 잡아넣기 위한 연합이었죠. 그는 '공공의 적'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반인륜적 범죄 같은건 저지른 적이 없지요. 오히려 가정에 충실하고 종교활동도 하고, 겉보기에는 완전히 교화되어 사회 봉사활동까지 성실히 하는 기업의 회장님이십니다. 정계진출까지 노리고 계세요. 그는 우리 사회에서 행복의 지표로 여겨지는 것을 다 가졌습니다. 그림으로 그린듯한 가족과 믿고 따르는 부하 직원들, 그들의 기업체. 사회적 선망까지.
반면 우리의 두 주인공은 어떨까요. 검사 오진우는 농촌에서 자라 간신히 출세했지만 일에 매달리는 사이 아내는 결별을 선언하고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지방으로 한참 뺑뺑이까지 돌았죠. 형사 장도영의 어머니는 몸져 누웠고, 자신이 직접 감방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다른 동생은 어머니 수술비 때문에 유강진의 조직에 손을 벌리다가 '제껴' 지죠. '공공의 적'에서 두 강철중이 가졌던 믿고 따라주는 소수의 동료조차 그들에겐 없습니다. 오진우는 검찰의 위신을 생각하는 동료나 선배 검사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장도영은 폭력적인 체포 방식 때문에 정직처분 당합니다. 말 그대로 '야수', 버림받은 이들입니다.

"헤어져?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최소한 악화되지는 않아!"
"나도, 행복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주말에 갈비도 뜯고 말야."

유강진은 적이라기엔 너무나 강했습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간신히 모든 증거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순간, 유강진의 하수인들은 손바닥 뒤집듯 그 것들을 박살내고 오히려 두 사람을 피의자 인권 유린의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만듭니다.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나본데, 그거 알아? 이기는게 정의야."

오진우는 모든 삶을 걸고 있던 검사 신분을 박탈당하고, 장도영은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살던 어머니를 잃고 맙니다. 그들에겐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야수'를 궁지에 내 몰면, 발악하며 사냥꾼을 무는 법. 그들은 주저없이 유강진을 향해 총을 쏩니다. 법이라는 무기도, 수갑이라는 무기도 이제 더 필요 없습니다. 그 무기는 더이상 그들에게 아무 힘도 되어주지 못하니까요.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을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두 야수는 그렇게 결말을 짓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로.
형사였던 장도영은 유강진을 향해 총을 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죽고, 검사였던 오진우는 국회의원 유강진 살해범이 된 채로 영화가 끝납니다.

그렇습니다. '공공의 적'과 같은 해피엔딩은 없습니다.
두 명의 강철중은 '공공의 적'에게 승리하여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적들은 '공공' 의 적이라는 점이에요. 누구라도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적들이었죠. '인물'이었습니다. 유강진은 이 영화에서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한 권력을 대변하는 하나의 운명이죠. 마치 고대 그리스비극의 영웅들처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향해 두 야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고, 그리하여 파멸했습니다.

인간은 한 인간과 투쟁하여 이길 수는 있지만, 운명 앞에선 한없이 무력합니다. 하지만 운명과의 투쟁은, 그 것 자체로도 그 인간을 고귀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파멸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을 자신의 방법으로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른 이들처럼 그저 세계가 그들에게 부여한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거죠.

행복하지 않을 지 몰라도, 의미있다면 그것으로 그 삶은 충분합니다.
그것이 '공공의 적' 을 잡아 행복하게 자신의 존재를 지킨 두 강철중과, 야수처럼 표효하며 모든 것을 불사르고 사라져간 오진우, 장도영의 차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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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란 사람 혹은 동물을 살상하는 도구류를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무기는 원거리 무기와 근접무기가 나뉘어지고, 근접무기는 절삭계와 관통계, 타격계가 또 다르겠지요.
절삭계 무기는 주로 도검류가 되는데, 서구와 중근동을 통털어서 고대로부터 항상 가장 중요한 무기였습니다. 길이와 크기, 날의 방향 또한 매우 다양하여 손안에 쏙 들어오는 단검류부터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든 거대한 도검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그것만으로 한권의 책이 되어버립니다.
도검류는 다루기가 힘들고 익히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익숙해지면 그 파괴력은 굉장한 위력이 있습니다.
서구의 군왕들이 왕권의 상징으로 검을 주로 사용했고, 또한 전장의 장수들 역시 검을 쥐고 있었습니다. '칼자루를 쥔 사람' 이라든지 하는 관용구도 수없이 많지요. 오늘날에도 검은 모든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관통계 무기는 주로 창과 그 변형인데, 사용법이 매우 단순해서 손쉽게 익힐 수 있어 일반 보병들의 가장 주요한 무기였습니다. 2미터 안팍의 것부터 나중에는 5미터가 넘는 pike 까지도 만들어지지만, 원거리 무기의 개량 덕분에 적의 돌진을 막을 이유가 없어져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타격계 무기는 아마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무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돌멩이(이건 원거리무기이기도 한가요?)와 굵은 나뭇가지 시절부터 타격 무기는 이미 시작된 거니까요. 무거운 물체와 그 손잡이로 이루어지는 이무기 역시 사용법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지만 개인의 솜씨와 체력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 단점이지요. 모든 도구가 결국 타격계 무기가 될 수 있으니 오늘날의 소총 등도 총알이 떨어지면 이러한 무기가 되는 셈입니다.

원거리 무기는 돌팔매부터 슬링샷, 투창(javellin) 등 투척계와, 활, 석궁, 총포 등 발사계로 나뉩니다. 적이 나에게 오기 전에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원거리 무기의 의미는 굉장히 크지만, 그만큼 사용법을 익히는 데는 시일이 많이 걸립니다.
투척계 역시 타격계 만큼 오래된 무기류지요. 돌멩이부터 시작된 투척계 무기는 발사계에 밀려 이미 중세 이전에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만, 올림픽 경기 등을 통해 여전히 남아있기도 합니다.
발사계 무기는 투척계까지 이르는 '인간의 힘을 이용하는 도구' 였던 무기의 개념을 벗어나, 이제 '도구 자신의 동력을 이용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활과 석궁은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았고, 이는 그대로 투석기와 대포, 소총과 권총 기관총을 비롯한 모든 현대 무기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민족만큼은 유달리 이 발사계 무기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일본이나 중국, 혹은 서구와는 달리 우리나라엔 딱히 '신검의 전설'이랄 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검은 1대1 대결이라면 매우 효율적인 무기지만 전쟁에 있어서는 딱히 훌륭한 무기가 아닙니다. 내구도 약하고 오래 사용하기엔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하니까요. 하지만 활은 다릅니다. 그리고 단 한발로 전투의 흐름을 바꿔놓는데는 활만큼 두려운 것이 없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저격수들이 그 자리을 이어받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엔 유독 주몽을 비롯해 '신궁'이라 불리는 이들의 기록이 유난히 많이 전해집니다.

무기는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 도구이기 때문에 가장 인간의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문자나 법률보다도 무기에 들어간 노력이 훨씬 클 테니까요. 무기를 아는 것은 곧 그 무기를 사용하는 인간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숱한 환타지 소설에는 그저 전설의 신검만이 널리 이름이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의 전투가 마법이 더 확실하게 위력이 발휘된다든지, 온갖 기계장치들이 동원된다면 신검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할 의미가 없어지지요. 어째서 마탄의 사수나 신궁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환타지 소설에서 쓰지 않는걸까요. 궁수는 치사하니까?
검이 물론 매력적인 아이템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한 법입니다. 단지 우리 세계에서 검이 멋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말하는 소설에 검을 높이는 행위는 그저 독자에 영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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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 Zera, SUN, 최근 공개중인 국내 신작 온라인 게임입니다. 규모도 상당하고, 투자금도 지금까지 출시된 게임보다 몇배는 되는 대작들이에요. '그래픽은 정말 괜찮다.' 랄지, '스케일은 대단하다'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하나같이 듣는 말이 있어요. 그건 바로,
"아직은 리니지, 리니지2의 자리매김을 할 수 없다."

위 게임의 캐릭터들은 물론 상용화 근 10년째가 되어가는 게임 '리니지'의 캐릭터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풍성한 컨셉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고, 그 캐릭터로 모험해야 할 세계도 훨씬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합니다. 독특한 스킬과 재미난 조합과 더 편리하고 신선해진 인터페이스 등, 무척 공을 들였다는 생각이 들지요. 하지만 여기서, 세계적인 게임 개발자 라프 코스터의 말을 한번 다시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쁜 캐릭터와 아름다운 세계는, 본질적으로는 눈길을 끌고자 하는 포장지에 다름아닙니다. 팩맨이 먹이를 먹고 귀신을 무서워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이 게임들 모두 게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게임 상의 '몬스터'를 학살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리니지도 마찬가지죠. 이 게임들은, 리니지까지 포함해서,

"장애물을 해체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법"

을 가르칩니다.

장애물이 얼마나 다양해지는지, 해체하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해지는지, 목적지가 얼마나 다양해지는지는 그 게임을 독창적이게 하는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독창적이 되려면, 게임이 가르치는 것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필자가 하는 게임 '마비노기'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결국 이 게임이 가르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마비노기는 물론 위 목표처럼 장애물을 해체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법도 가르치지만, 그에 첨부되어 '좀더 독특하고 예쁜 캐릭터를 만드는 법'을 가르칩니다. 캐릭터의 특성에 따라 외형이 거의 다 결정되어 있는 위 게임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죠. 주어진 다양한 선택권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캐릭터와 그 캐릭터의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인형놀이'가 마비노기의 가장 큰 장점이 되는 거지요. 독창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고.

온라인 게임이야말로 제대로 장사가 되는 게임이라고 합니다. 패키지 게임은 한국에서는, 다들 워낙 재미있으면 받아본다는 사고방식이 굳어져서 아무래도 무리겠지요. 그럼 말이죠, 컴퓨터 기반 게임이 없던 시절부터 오래도록 있어왔던, '장애물을 해체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법'을 가르치는 온라인게임보다는 이제, 좀더 다양한 온라인게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죠. '대상의 성격을 파악하여 대상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법' 이라든가*^^* '조직하고 지휘 통솔하는 법' 같은거 ㄱ-. 온라인 미연시라든가, 온라인 전략 게임 같은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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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같은 기준으로 보자면, 소설을 쓰는 저 자신도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잘난 것이 없습니다.
'에이린 이야기' 말이죠. 독창적으로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계절이 뒤집힌 세계와, 갑옷대신 군복을 입고 머스킷을 쓰는 군대와, 하늘을 나는 동물들, 슬라임에서 드래곤에 이르는 전형적인 몬스터들이 아닌 판타지소설에서는 본 적도 없을 야생동물들과, 배워서 캐스팅하는 마법이 아닌 일종의 에스퍼처럼 타고나는 원소력을 발휘하는 마법사들, 그리고 과학자를 연상시키는 연금술사에 이르기까지 독특할 법한 설정을 수없이 하지만, 이건 다 그냥 설정이에요.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아닌거죠. 예쁜 캐릭터와 아름다운 세계처럼 그냥 포장입니다.

본질은, '고대의 아티팩트를 가지고 다양한 출신의 여러 멤버와 파티를 이루어 목적지에 도달하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상태로는 노력하고 도전해봐야, 결국 흔한 요즘판타지에 불과한 거죠.
이대로는 안됩니다. 무언가가 더 필요합니다.
아주 절실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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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클래식과 반지의 제왕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의 규모면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한때 위대했고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잊혀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마 두 이야기를 더욱 진중하고 위엄있게 보이도록 하는 거지요.

"제다이라, 그거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요정의 시대는 끝났고 우린 이제 이 땅을 떠날 겁니다."

템플에서 강도높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공화국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온 은하계를 헤집고 다녔던 제다이들에 대한 수많은 기록들은 제국의 20년 철권 통치에 의해 깨끗하게 잊혀져 버렸고, 그 걸 되돌리는 건 정식 입문도 못한 한 젊은이의 서툰 광검 솜씨와 진실한 마음 하나 뿐이었지요. 위대한 요정들의 빛나는 검은 오래전에 부러져버렸고, 요정의 피가 흐르는 순혈의 누메노르 왕도 오래전에 잃어버린 시대에, 절대 반지를 파괴하는 것은 요정의 선물인 에아렌딜의 별빛이 담긴 병 하나를 고이 품고 있는, 연약한 두 젊은 호빗이었습니다.

마비노기는 넥슨에서 퍼블리싱하는 DevCAT 팀의 다중 접속 온라인 게임입니다.

게임이지만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비노기 Generation 1 여신 강림, Generation 2 팔라딘, Generation 3 다크나이트의 제목과 이야기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메인스트림'이란 이름으로, 모든 캐릭터가 한번은 거쳐가게 되는, 에린의 이야기들이지요.

그리고 제너레이션이란 구분처럼, 이야기의 업데이트 일자에 따라 그 것을 겪어나간 유저의 캐릭터들 또한 세대가 갈리게 됩니다. 이유는 하나지요. 다음 패치가 진행되면서 기존의 힘들고 어려웠던 메인스트림은 하향되거나, 혹은 넘어갈 수 있도록 바뀌니까요. 그리고 유저들도 쉬운 길을 찾아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하기 바쁘구요.

G2 팔라딘 2시즌때 마비노기를 시작한 저와 저의 길드 멤버 다수는, 길마님을 제외하면 이미 하향된 G1과 G2를 클리어했습니다. 길마님도 G1은 하향이었지요. 그런 우리가 보기에, 하향 전의 극악의 G1과 G2를 클리어해낸 기존 유저캐릭터들은 그야말로 전설처럼 보였습니다.

G3이 하향되었습니다.

G2에서 시작한 우리 '세대'는 G3에 얽힌 추억들이 가장 많습니다. 루아가 나오길 기다리며 베안루아에 모여 보낸 시간들, 겁없이 뛰어들어갔다 공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이지페카. 영혼의 포션을 만들고 항마의 로브를 만들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생산을 하려고 온 사방 뛰어다닌 기억들. 그리고,

잠입.

3층 30개의 구슬방을 통과해야 하는, 그 치열했던 순간들. 타고다닐 말도 없던 시절, 날아오는 가고일, 뛰어오는 헬하운드를 피해 죽어라 두 다리로 달렸던 그 시간들. 몹렉을 유도하기 위해 수십명이 모여 함께 통행증을 던질 때의 기묘한 쾌감. 그리고 마침내 클리어했을 때 보게 된 동영상의 허무함과, 그동안 지겨웠으면서도 결국 정이 들어버린, 지정 염약으로 염색까지 해서 입고다녔던 항마의 로브와의 싸한 이별.
2005년 7월 31일. 지독했던 잠입의 추억.


끝으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 최종 던전.

2005년 8월 20일경, 이세느의 최종 던전 서포터를 갈 무렵. 당시의 닌니는 스매시를 제외한 모든 전투스킬 9랭이었다. 지금은...

그러나 이지페카는 사라졌고, 루아가 출몰하는 시각표가 마비노기 웹진에 퍼져 알려졌고, 온갖 퀘스트 아이템의 생산은 NPC가 대신 해주고, 잠입은 1층 10개로 줄었으며, 최종 던전을 둘이서도 가뿐히 클리어할 수 있는 대괴수들이 돈을 받고 관광버스마냥 클리어해줍니다.

마비노기 챕터 2가 진행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고, 좋아지고 있고, 편해지고 있습니다.
2005년 9월 2일. 지금은 뚫려있는 길.


우리들은 초보자 퀘스트에 있던 거대 흰늑대를 잡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했지만, 요즘 시작하는 뉴비들에게 거대 흰늑대란 생소한 이름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프라이스의 '어이쿠, 다리가 부러졌네' 를 말하며 낄낄 웃고 에스라스의 윈드밀을 기억하며 이를 갈지만, G2를 스킵하고 그냥 팔라딘이 된 뉴비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겠지요.

에린의 2세대인 우리들은 이제 스타워즈 에피소드4의 오비완 케노비가 된 걸지도 모릅니다.

"메인스트림이라. 그거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A New Hope는 있을까요.
프로도 배긴스는, 있을까요.

마비노기 Chapter 2에 온 지금, 우리들은 요다와 메이스 윈두(베타테스터와 하향전 G1클리어 캐릭터)의 무용담을 전설처럼 전하며, 우리들 스스로도 그 전설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것만 같아 슬픕니다.

슬픈데, 좋아요.

전설의 주인공이 됐으니까요.

빌어먹을.
2006년 4월 28일. 근접공격스킬 전1랭 달성. 어느새 닌니도 전설속의 그 사람들처럼 되었다.


그런 이야기들 많이 듣습니다. 특히 오래 하신 분들은요. 마비노기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는 이야기.
제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끝났고, 우린 이제 이 땅을 떠날 겁니다."

그래서 많이들 떠났지요. 베타 때부터 하시던 분들은 특히나 많이들 가버렸어요.
전설은 전설답게. 라는 걸까요.
2006년 4월 30일. 현존 최강 던전 페카 하급 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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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프리퀄 3부작이 발표된 이후로 아마 계속된 논쟁이, 이야기의 진행을 클래식 4,5,6 다음에 플래시백으로 1,2,3으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순서대로 1,2,3,4,5,6으로 봐야하느냐 하는 논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를 발표한 순서대로라면 당연히 4, 5, 6, 1, 2, 3 순의 감상이 정공법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사실, 촬영 기법이라든지 액션이나 효과, 규모 면에서는 분명 저 순서대로 무한대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실 말이지 클래식에선 제대로 된 광검 듀얼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각종 기계들이 출몰하는 전투신 또한 20년 전 기술이니 어딘가 화면에서 삐그덕거리는 느낌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20주년 기념으로 리마스터링을 하고, DVD 발매 기념으로 다시 세팅을 했는데도 베이스는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그것이니 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아나킨과 오비완의 광검 듀얼, 황제와 요다의 광검 듀얼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대결도 클래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코루스칸트의 웅대한 대도시도, 에피소드 3 초입의 대규모 함대전도 볼 수 없지요. 클론 전쟁 당시의 드로이드 군대와 클래식 시대의 반군 세력은 굉장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결국 이 재미있는 영화를 갈수록 더 재미있게 보려면 제작 년도 순으로 4, 5, 6, 1, 2, 3 순서로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에는 프리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고풍스런 멋? 저 시대에 저걸 어떻게 찍었담? 그런 식의 결론이 아닙니다. 조지 루카스는, 프리퀄을 만들면서도 사실 스타워즈 최대의 매력은 클래식, 특히 에피소드 6, 제다이의 귀환에 담기도록 안배를 해 두었습니다.

자. 프리퀄에서는 놀라운 광검 듀얼이 넘칩니다. 에피소드 1의 다스 몰과 오비완의 결투. 에피소드 2의 제다이'들'과 드로이드 군대와의 대결. 그리고 에피소드 3에선 훨씬 더 많지요. 오직 광검 듀얼을 위한 영화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말이죠. 그에 비해 클래식에서는 3부작 내내 총 세번밖에 듀얼이 없습니다. 그나마도 듀얼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단순하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에피소드 4의 유일한 듀얼, 다스 베이더와 벤 케노비의 듀얼을 생각해봅시다.
한 사람은 사지 절단에 호흡기로 호흡하는 장애자입니다. (기계 팔다리가 더 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요다님 말씀대로 포스는 생명체와 연동하는 에너지장이며 그만큼 포스의 관점에서는 불구라고 봐야 합니다)
한 사람은 황야에서 20년 넘게 은거한 60이 넘은 노인이며, 상대방이 자기 옛 제자예요.

두 사람 다 20년 전엔 젊었고, 그 힘의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자신의 신념에 취하다시피 열중해 있었지만 이제는 얘기가 다르죠.

그들의 광검 듀얼은, 듀얼이라기보다 그저 서로 검을 툭툭 맞대며 대화를 하는 시간이었을 뿐입니다. 목숨을 빼앗을 의도는 둘다 처음부터 없었던 거지요. 다스 베이더는 다시 만난 옛 스승 앞에서 끝까지 '날 인정해줘' 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로 돌아갔을 뿐인데도, 그저 오비완은 끝까지 그를 용서하지 않고 포스와 하나되어 가버렸습니다.

가련한 우리 아나킨. 결국 사랑하던 스승에게 완전히 버림받았어요.

두번째 듀얼, 에피소드 5의 루크와 다스베이더의 듀얼을 봅시다.

한 손으로 루크의 검을 척척 받아내고 동시에 포스로 물체를 던져 공격하는 다스 베이더의 모습. 그리고 멀리 떨어진 전함에 있는 부하를 포스만을 써서 죽이는 그의 위압감을 보면 아실 거예요.

애초에 다스 베이더는 루크를 가지고 노는 수준의 검기인 겁니다. 반면에 루크는, 겨우 제다이의 수련을 시작한 단계이고 그것도 너무 나이들어서 시작해서 항상 고정관념의 한계에 부딪히지요.

스타크래프트 경기 중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두 사람의 실력차이가 엄청나버리면 경기 재미없습니다. 비슷한 실력이어야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런 과정에서 관전자들은 손에 땀을 쥐는 재미를 얻는 거지요.

그리고 마지막 듀얼, 에피소드 6의 다시 만난 루크와 다스 베이더의 듀얼에서, 루크는 많이 성장했지만, 그래도 다스 베이더의 위용엔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두 사람 다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20년만에 만난 아들을 죽이고 싶어할 아버지가 어디 있을 것이며, 어릴 때부터 평생 그리워한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프리퀄에서는 '볼거리'로서 광검 듀얼이 존재했지만, 클래식의 듀얼은 단지 드라마의 요소일 뿐이므로 그 대결 장면이 화려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는 건 곤란합니다.

두번째. 드라마적 요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I'm, your father." 라는 유명한 베이더의 대사가, 이미 그가 아버지임을 알고 보게 되는 프리퀄 - 클래식 순의 감상에서는 전혀 그 충격과 느낌이 살지 않는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 충격이란 건 루크 쪽에서 감정이입한 채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겁니다. 철천지 원수가 아버지라니! 세상에 충격이죠.

그러나 클래식 자체도, 가만히 보면 주인공은 루크보다는 다스베이더입니다.

기억해보세요. 에피소드4에서 루크가 먼저나왔나요? 다스 베이더가 먼저 나왔죠.
에피소드 5에서는 루크가 먼저 나왔나요? 다스 베이더의 전함이 프로브를 뿌리는 장면이 먼저 나왔습니다.
에피소드 6에서도 다스 베이더가 먼저 나옵니다.

프리퀄 - 클래식 순의 감상이라면 이 여섯 편의 영화는, 아나킨 스카이워커 - 다스 베이더의 일생이 되고, 클래식 3부작 역시 다스 베이더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럼 에피소드 5에서 충격을 받게되는 부분은, I'm your father.가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루크의 비명과 뛰어내림이겠지요. '우리 함께 은하계를 지배하자'는 말에 사랑하는 파드메도 고개를 흔들며 물러났는데, 그 아이 또한 똑같이 그렇게 하다니.

요다는 루크를 보며 '지 애비랑 똑같애' 라고 혀를 찼지만, 베이더 - 아나킨은 루크를 보며 '에미랑 똑같이 하다니'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보다도 가장 충격받은 장면은 에피소드 6의 아나킨의 마지막 대사였습니다.

"마스크를 벗겨다오. 아들아."
"그럼 죽게 되잖아요."
"누구도 죽음을 막을 순 없다."

절대로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절규하던 에피소드2와 3의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이제는 담담하게 포스와 하나되어 죽음을 바라봅니다. 저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대사, 클래식만 보아서는 그저 슬플 뿐인 대사가 이렇게도 가슴을 치는 포인트가 될 수 있었던 건 프리퀄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지요.

자아. 물론 프리퀄이 훨씬 예쁘고 멋지고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프리퀄의 주요 드라마는 전부 코루스칸트에서만 벌어졌다는 겁니다. 물론 코루스칸트 웅대하고 아름다운 도시지요. 그러나, 클래식에서는 타투인과 얼데란과 숲의 달, 얼음의 행성 호스와 방대한 운석지대, 그리고 구름의 행성 베스핀에서 숲의 행성 앤도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곳을 오가며 우주의 광대함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이렇게, 규모면에서는 사실 클래식이 훨씬 장대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6에서 황제가 죽은 뒤에 수 많은 행성에서 축하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 또한, 에피소드 1부터 봐 와야 그 감흥이 살겠지요.

그리고 광검 듀얼이 적은 대신(당연하지 않습니까? 제다이가 다 죽고 없어진 마당에) 클래식에서는 화려하고 긴박한 공중전으로 그 빈자리를 메꿉니다. 웨지 안틸레스, 한 솔로, 랜도 카리지안, 그 외에 수많은 우주의 영웅들이 있는데 왜 그리도 볼 거리가 부족하다고들 생각하시는지. 볼때마다 손에 땀을 쥐는, 초를 다투는 데스스타 공략이, 에피소드 3의 그 '여유 만만' 공중전보다 재미없다고 생각하신다면 곤란하지요.

프리퀄을 보고 난 다음에 클래식을, 이렇게 보면, 예전에는 그저 절대악으로만 보이던 다스 베이더가, 그렇게도 불쌍하고 서글프게 보일 수가 없더라구요. 어머니도 연인도,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 갈구하다 결국 그 갈망 때문에 잃고 어둠의 노예가 된 불쌍한 소년을, 냉정한 스승은 20년만에 나타나서는 조금의 어리광도 받아주지 않고, 생사도 몰랐던 아들네미는 내가 아버지라니까 안믿고 도망가고.

그 슬픔 속에 아들마저 잃어야 하는 상황에 닥친 그에게,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죠.
이 모든 악의 근원인 황제를, 죽일 수밖에.
그리하여 그는 포스 라이트닝에 온몸이 휩싸인 채로 황제를 던져버렸고, 마침내 예언대로 포스의 균형을 잡았습니다.

클래식만 봐서는 단지, 아들 덕에 개과천선한 아버지의 당연한 희생처럼 보였을 지 모르는 그의 죽음이, 참 슬프고도 안타까운, 위대한 초즌 원의 결말로 보이는 거죠.

자, 오늘 밤, 스타워즈와 함께 지새보는 건 어떨까요.
1~6편을 순서대로 감상하며 밝아오는 새벽과 함께, 다스 베이더의 죽음이 아닌 아나킨의 죽음에 눈물을 펑펑 흘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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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빈치 코드'가 한기총의 심기를 건드린 부분은 아마 신성모독 이라고 알려져 있는 모양입니다. 오래전부터 집에 굴러다니던 책인데, 요즘 이슈가 되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근데 사실, 다빈치 코드에서 말하는 시온 수도회라든지, 오푸스 데이 같은 내용들은 '사실'이기도 하고, 다빈치가 그린 수많은 종교적 회화들이 실제로는 다른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얘기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에선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얘기인데다, 예수가 대단히 독특한 인간이었고 결혼도 했었다는 이야기는 셰익스피어 시대부터 이미 널리 알려졌던 이론인데 이런게 이제와서 기독교 단체의 심기를 건드려서 상영 금지일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 건 진짜, 생 트집에 불과해요.

하지만 이 책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상영 금지 요청을 받고 있는 이유는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적 주제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신성한 여성성'의 파괴와 '남성성의 권위 확립'이라는, 일종의 거대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고발하고 있거든요. 이 소설은 풍부한 상징과 기호학적 함의를 통해, 수만년간 이어져 내려온 신성한 여성성에 대한, 남성성의 이천년간의 반란과정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반란이 거의 성공해서 이제는 덮어진 것 같지만, '시온 수도회'는 여전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성성을.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남자,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라는 말이 있지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 제목도 있고,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성차를 소재로 하는 수많은 인터넷 유머가 책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흐름은 남성성이 사회적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남근 숭배를 하는 말리의 원시적 조각상과 조지 부시의 기도하는 두 손은 본질적으로 같은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마녀 사냥을 통해 신성한 여성성의 숭배가 종교적 전통 하에 남아있던 예수 이전 시대 종교들의 모든 메시지는 박멸당했고, 여자는 남자의 부속지로 전락한 지 천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크고 배우기 쉬운 언어인 '영어'를 봅시다. prince왕자에 ess를 붙여야 princess왕녀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man인간이란, 남자를 가리킵니다. 영어로 쓰여진 최고의 고전, 반지의 제왕을 볼까요?
"War is the province for men."
에오메르는 에오윈에게 말합니다. 호빗 '메리'가 전장에 뛰어들겠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냄과 동시에, woman여자인 에오윈이 전장에 뛰어들려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는 충고지요.
"No man can kill me."
마술사왕이 에오윈에게 하는 말이지요. '인간'은 나를 죽일 수 없다는 의미지만, '남자'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의미로도 보입니다. 에오윈은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당연히.

언어는 그 언어가 사용되는 세계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가장 보편적인 척도지요. 그리고 이렇게 성차별적인 언어인 영어가 지배적인 오늘날의 세계는 남자를 위주로 짜여져 왔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여성을 원합니다. 여성이란 인격체를 함께 살아갈 배우자로 원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프로이트적으로 본질을 따지면 그 여성은 결국 성욕의 충족과 유전자의 보존을 위한 도구로 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0살도 안된 어린 소녀부터 60세가 넘은 노파에 이르기까지, 이 욕구에서 자유로운 여성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가장이란 권위를 틀어쥐고 있는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고 길들여집니다. 아버지는 남자고, 남자의 기준에서 여성을 길들이는 과정은 결국 '다른 남자에게 가장 가치있어보이는 성욕 충족 및 자녀 생산 도구' 로 보이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정숙한 여성과 현모 양처가 여성의 이상향으로 보여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구조에서 비롯합니다.

하지만 도구로서의 여성을 남자들은 하나만 원하지 않습니다. 유인원 중에서, 오직 인간과 긴팔원숭이만이 일부 일처제를 지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주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습니다. 일부 다처제가 오히려 더 오랜 시간동안, 권위를 가진 우두머리 인간man에게 이어졌지요. 침팬지와 오랑우탄과 고릴라처럼, 인간도 본질적으로는 일부 다처제를 원하는 동물인 셈입니다. 이 4종의 수컷은 모두 자위행위를 합니다. 성욕의 충족이 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종족 보존을 위한 최선의 여성을 선택하긴 하지만, 인간은 성욕을 충족시킬 다른 여성을 원합니다. 여성을 먹는것에 비유하는 인간man의 표현들은, 수많은 언어에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밥만 먹고 어떻게 살아. 반찬도 먹어야지. 라고 말하는 그들의 자기 합리화는 본능에 대한 합리화지 일탈행위에 대한 합리화가 결코 아닙니다.

성욕의 충족 도구로서 바라보는 여성은 결국, 다양한 입맛에 맞춰지는 여러가지 식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항상 여성에겐 이중성이 강요됩니다. 교복미소녀가 전통적인 성적 판타지인 이유를 알겠지요? 맛있게 보이도록 속살이 비치는 교복 블라우스를 어린 학생들에게 입히고, 내 가족이니 그 위에 조끼를 입혀 그걸 가립니다. 맛있게 보이도록 바람이 불면 속옷이 보이기도 하는 스커트를 입히면서, 내 가족이니 다리를 오므려 앉는 등 자세부터 정숙하길 요구합니다. 완전히 공개되어 있는 도구는, 내 것이 아니게 됩니다. 불편합니다. 공공 화장실이 더러우면 볼일을 보면서도 불쾌한 것처럼, 창녀는 불편합니다. 하지만, 교복 미소녀는 (검증은 별도로 하고) 위의 이중성 덕분에, 내가 처음 사용하는 것이고 그 효용이 월등합니다. 이 판타지는 결국 남이 입댄 음식보다는 처음 나온 음식이 맛있다는 원칙에서 비롯하는 겁니다. 손을 대면 이중성이 깨집니다.

이렇게, 남성 위주의 사회 구조에서 모든 남성은 변태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변태라는 단어의 기준이 일부 일처제보다 일부 다처제를 선호한다는 점, 혹은 일반적인 식사보다 특이한 식사를 원한다는 점에 있다면 말이죠.

여성성이 신성하게 여겨지던 농경시대에는 이러한 변태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대지와 같이 생명을 창조하고 양육하는 여성은 신성한 것이며, 성교는 영육의 결합이고 인간의 능력으로 신과 닿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수많은 포르노 산업의 결과물이 남자에게 성교를 오락으로, 여성을 그 도구로 보이게 합니다. 산업 자체가 남성 위주로 짜여져 있습니다. men남자은 (여성을 포함한) 자연물을 이용하여 노동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냅니다. 해체하고 가공하고 변화시켜 일부는 버리고 일부는 본래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는 등의 '파괴'를 '가치 창조'라고 부르는 이 멋진 사회 구조는 men남자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men이 무얼 창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에오메르의 대사를 변형하자면, Creation is the province for women.

여성은 신성하고, 위대하며, 그녀들의 2세를 양산하기 위해 일부 유전자를 분리해 떼어놓은, 걸어다니는 정자주머니일 뿐인 남성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위대한 혼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어머니도, 아내도, 딸도, 걸레도, 퀸카도, 먹이도 아닙니다.

여성은 여성입니다.





한기총의 주 멤버는 남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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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두 영화니까, 무어라 내용에 대해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평범한 소년이 세상의 운명을 지게 되지만 자기 스스로의 길을 자신의 방법으로 개척해 나간다는 이야기라는 점은 비슷하고, 사랑과 우정과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라는 점도 비슷해요. 헐리우드 대형 영화사에서 대 자본을 투자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도 그렇고요. 하긴, 이정도까지 추상화했을 때 비슷하지 않은 이야기가 몇개나 남을 지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두 영화에는, 한쪽은 여섯편짜리고 한쪽은 세편짜리, 한쪽은 편당 두시간 한쪽은 편당 세시간 반이라는 분량상의 차이 외에도, 서로 절대 넘을 수 없는 깊은 골이 존재합니다. 그 차이는 '한국에서도 흥행했다.'와 '한국에서만 흥행하지 못했다.'의 차이지요.

한국은 굉장한 나라입니다. 헐리우드 영화가 수입 배급되는 나라 중에서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이렇게 높은 나라가 또 있을까요. 또한 그 자국 영화가 타국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도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질 것도 없다는 점도 그렇구요. 그만큼 문화적 잠재력도 깊고 전통도 확고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런 한국에서 스타워즈는 흥행하지 못하고 반지의 제왕은 흥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보의 차이를 예로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타워즈는 첫 개봉부터가 본토에 비해 너무 늦은데다가 홍보 자체도 잘 안되었고, 드라마적으로 가장 긴장감넘치고 중요한 부분인 에피소드 5 - 제국의 역습 편은 국내 개봉 자체를 못했었지요. 이렇게 첫인상을 구긴 영화가, 90년대 말에 재개봉을 하고 그 뒤를 이어 개봉을 한다 해도 관객들이 기억해주고 다시 극장을 찾을 리 만무합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공짜로 (불법으로!)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면 되는 한국 사회의 편리한 정보 인프라 구조상, 어지간하게 재미있거나 '극장'만의 메리트가 없는 영화는 장사가 안될 수밖에 없지요. 물론 반지의 제왕처럼 국내 배급사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원작 소설 등의 주변 상품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마도 국내에서 처음 스타워즈를 받아보게 되는 배급사나 영화관 관계자 여러분들에게도 '첫인상'이 나빴던 게 이유가 되지 싶네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를 '아무도 안본'게 아니라, 스타워즈도 분명 극장에서 보고 나온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평은 반지의 제왕을 보고 나왔을 때와는 달랐지요. "그냥 그래. 화면은 멋있더라."

왜 그렇게 말할까요. 그건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의 이야기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긴 호흡으로 여유있게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웅장하고 아름다운 화면 속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반지죠.

반지를 파괴해야 하는 사람들. 반지를 되찾아야 하는 족속들이 서로 극명하게 대립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배경 이야기를 잘 모르더라도 모든 것은 반지로 귀결된다는 그 하나 만큼은 이해를 하게 되고, 모든 주인공에게 닥친 상황을 절박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3편 왕의 귀환에서 마침내 반지가 파괴되었을 때, 많은 관객들이 안절부절 못했던게 저거만 부서지면 얘기 끝날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3년동안 (일년에 3시간이나!) 극장을 찾아줬는데, 반지가 부서지고도 도무지 끝날 기미를 안보이니 일어섰다 다시 앉기를 반복할 수밖에요.

하지만 스타워즈는 긴박하고 경쾌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면서도, 재기 넘치는 독특한 화면 속에는 그다지 분명한 목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포스? 라이트 사이드와 다크사이드의 대결이 그 목적이 될 수 있다고 믿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런 추상적인 개념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캐릭터를 형성하는 데는 도움이 될 지 몰라도요.

스타워즈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목적이 다 따로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한 편에서 귀결되는 게 아니라 전편, 혹은 그 이전 편부터 계속해서 의도되고 추진되어온 목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포스의 균형을 잡는다는 예언 하나 믿고 미래도 보이지 않는 위험한 아이를 받아들인 제다이 카운슬의 마스터들이나, 단지 다크 사이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라이트 사이드를 밀어낼 뿐 아니라 은하계 전체를 지배할 권력을 노리고 있는 팰퍼틴이나, 다시 은하계에 정의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레아 공주나, 그들의 목표는 너무 거대하고 또한 주인공의 개인적 목표와도 서로 나란하지 않기에 그저 배경 이야기처럼 보일 뿐입니다. 정작 여섯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아나킨과 그 아들 루크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향해 행동하지요. 아나킨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리고 루크는 갓난아이 때부터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그림자를 뒤쫒기 위해, 영화에 보여진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영화와 영화 사이, 영화가 끝난 뒤에서 살아갑니다. 관객은 누군가 한 사람, 감정이입을 하거나 공감해줄 사람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냥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열광하기엔 저들이 왜 저렇게 싸우나 하는 식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거지요.

납득이 가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두 영화에서 드러나는 '아버지 상'의 차이에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버지, 혹은 그 대신이 될 삼촌이나 왕의 모습은, 늙어 약한 모습도 보이지만 위엄있고 단호하며, 리더쉽을 갖추고 앞장서서 이끌어줄 사람입니다. 빌보도 그렇고, 엘론드도 그렇고, 세오덴도 그렇고, 데네소르도 그렇고, '아버지'라는 이름과 권위에 모두 어울리는 인물들이죠. "물론이지. 그애도 배긴스니까." 와 같은 빌보의 대사. 세오덴의 "부모가 자식을 묻는게 아니라오." 와 같은 슬픈 대사. 그리고 "저희들 입장이 바뀌었길 바라시죠? 제가 죽고 형이 살아있는." 과 같은 파라미르의 대사를 보고 공감이 가지 않는 한국의 부모와 둘째들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네요. 그들은 제3시대 말엽의 가운데땅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한반도의 수많은 큰아들 빠돌이 아버지이자 둘째나 조카에겐 냉정하기만 한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스타워즈는 기본적으로 아버지가 없습니다. 프리퀄에서는, 제다이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벗어나 무예와 학문과 포스를 연마하는 독특한 수행자 집단이며, 권력의 중심과 닿아있고 극도로 절제를 요구하는 자들입니다. 아버지보다 마스터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그들에게, 아들/딸 보다 파다완이란 호칭이 더 익숙한 그들에게 아버지상을 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제일 근접한 이야기구조라면, 이제는 한물 간 무협영화의 사제관계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프리퀄 스타워즈는 포장은 화려한 우주 판타지일지는 몰라도, 한국인에게는 한물 간 무협지로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들을 전부 베어넘겨버린 아나킨이 아버지가 되어 있는 클래식에서는, 다스 베이더의 잊지못할 그 한마디 대사를 남기죠.

"I'm, your father."

충격적인 반전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이는 70년대부터 수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온 이야기구조입니다. 출생의 비밀 말이에요. 드라마에선 모두가 한 가족이지요. 뻔한 이야기 아닙니까. 모르긴 몰라도, 클래식만 본다 해도 저 장면에 딱히 충격받을 한국인이 그리 많진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반지의 제왕을 지배하는 정서는 한국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반지 원정대 편에서 간달프를 끌어들이려는 사루만의 모습이란, '우리가 남이가' 라고 말하는 부정한 권력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우리가 남이가'는 원정대를 통해서도 수없이 반복됩니다. 요정과 난쟁이의 반목 정도는, 지역감정에 빗대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가부장적인 로한 왕과 곤도르 섭정의 모습은 '군사부일체'와 같은 성어가 생각나게 하고, 사우론의 군대가 사람들을 덮치는 모습이란, 화적패나 오랑캐가 덮쳐오는 사극의 그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스타워즈의 전투는 화려하긴 하지만, 절박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군이 아니라서일지도요? 제다이가 너무 강해서일지도? 혹은 적군이 너무 바보같아서일지도요. 신나게 온 우주를 뛰어다니지만, 너무나 많은 문화권의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주기에 관객으로서는 저 많은 이들이 다 어쨌다는 걸까 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지긋지긋한 시골짝 박차고 세상에 나와 뭔가좀 해볼 요량이었다든지, 친구를 구하려고 위험을 자초했다든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든다든지 하는 주인공의 사명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알아서 벌어집니다.

요약하자면, 반지의 제왕은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여운을 주지요. 흥행하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타워즈는, 북미 신화이기에 영화를 보는 잣대로 평가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그다지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이 두 영화의 흥행 성적에 있어 크게 갈리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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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녕 이 나라의 왕이 맞느냐?"
궁궐 속에 곤룡포로 박제되어 유배된 연산의 외침은, 정글의 왕임을 애써 주장하려는 고독하고 외로운 킹콩의 표효.
"나, 이거 하고싶어. 이런건 여기서밖에 못하잖아." VS "돈은 문제가 아니야. 난 연극을 사랑했어."
오직 광대놀음을 사랑하지만 타고난 미모 때문에 몸을 팔길 강요받던 공길은, 인정받는 글을 쓰고 싶지만 돈의 압박에 굴복하는 잭 드리스콜.
"왕을 가지고 노는 거야." VS "네가 영화를 알아?"
한양을 향해 떠나 큰 판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려 했던 장생은, 미지의 해골섬으로 가 아무도 담지못한 영상을 담아오려 했던 칼 덴햄.

온 저자거리에 왕 이야기만 넘실대는 한양은, 오직 콩을 섬기는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해골섬.
수많은 중신들에게 둘러싸여 살아남으려 애쓰는 연산은, 수많은 공룡들 속에서 외로이 살아남으려 애쓰는 킹콩.
연산은 장생의 눈을 지지고, 킹콩은 칼 덴햄의 카메라를 박살냈습니다.
연산은 공길의 인형극에 취하고, 킹콩은 잭 드리스콜의 글을 이해하는 아름다운 앤에게 취합니다.
아픈 기억들을 헤메이며 거친 싸움을 통과하며 그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갈구 끝에 연산은 결국 녹수에게 묶이고, 킹콩은 결국 커다란 쇠사슬에 묶입니다.
장생은 자신의 눈을 지진 연산에 대한 복수로, 공길과 함께 목숨을 걸고 마지막 한탕의 줄놀음을 넘고, 칼 덴햄은 자신의 카메라를 박살낸 킹콩에 대한 복수로 그를 쇠사슬에 묶어 무대에 올립니다.
연산은 광대놀음에 마음을 빼앗긴 채 중신들의 반정으로 목숨을 잃고, 킹콩은 앤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미 육군 항공대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던, 결코 통제할 수 없는 두 왕의 최후는, 그렇게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자유를 주었던 것은, 바로 아름다움. 예술가의 혼이 부어진 그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칼 덴햄에게서 피터 잭슨을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장생에게서 이준익을 읽었습니다.
1933년 작 '킹콩'과 피터 잭슨의 '킹콩'이 다른 것만큼이나, 연극 '이'와 이준익의 '왕의 남자'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름을 추구한 결과,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던 이 두 이야기가, 예술가의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꽃에 대한 터질 것 같은 사랑을 노래하는, 자화상과 같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광대! 광대지!"
그리고 공길은 다시 태어나 광대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연극을 사랑했다면 바다에 뛰어들었겠지."
그리고 잭은 앤에 대한 사랑으로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제 죽음보다 더한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을, 말하고 싶은걸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갈망을 이해합니까?
셰헤라자드가 죽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멈추던 그 치열한 끊음을,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모자장이의 절규를, 이해할 수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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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 감독, 올란도 블룸 주연. '킹덤 오브 헤븐'의 배경은 십자군 전쟁입니다. 유대교 사원이 있는 예루살렘,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이 자리한 예루살렘, 이슬람의 사원이 자리한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자는 그 '이름'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성벽아래에서 죽어갔습니다.
영화는 십자군 전쟁 최악의 졸전이라고 평해지는 '하틴의 뿔' 전투가 일어나기까지의 배경, 그리고 그 이후만을 다룹니다. 하틴의 뿔 언덕에 가득한 까마귀 떼만이 어이없는 패전을 보여줄 뿐. 우리의 주인공 발리안은, 자신이 십자군으로서 예루살렘 근방에 영지를 가진 높은 기사 고프리의 아들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저 아이와 아내를 잃은 불쌍한 대장장이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신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생부에게 이끌려 기사가 되고, 생부가 죽자 영주가 됩니다. 발리안은 성지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곳에도 신은 없었습니다. 남편이 있는 공주가 자신을 유혹하고, 사랑은 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이용당하기 때문이겠지요.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용당하기 때문에 결코 발리안의 고결한 마음은 도구로서의 자신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기사 기 드 뤼지앵은 결국 공주를 아내로 삼았기에 왕이 되고, 곧바로 전쟁을 도발합니다. 그리고 '하틴의 뿔' 전투에서, 물도 공급받지 못한 그의 부대는 간단하게 쓸려버립니다. 이제 이슬람의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은, 그동안 평화를 위해 기독교도의 지배를 인정해 준 예루살렘을 자신의 발 아래 두려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했던 그대로 응징을 가하려,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신은 핑계였지. 다만 영토와 이익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어."

기사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그저 학살 앞에 벌벌 떨고 있을 뿐. 하지만 우리의 발리안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분연히 일어서, 싸웁니다.

신을 위해서도, 영토와 이익을 위해서도, 사랑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죄없는 이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당연히 질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시체를 태우면 종말의 날이 와도 부활하지 못해요!" - 예루살렘의 주교
"놔두면 전염병으로 다 죽어요. 신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이해 못한다면, 신도 아니니 상관 없겠죠." - 우리의 발리안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고, 빌리안은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발리안이 본래 살던 마을에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찾아옵니다. 성지를 되찾으러 간다고 말하죠.

"자네가 살라딘에 맞서 예루살렘을 지켰다는 그 고프리의 아들 빌리안인가?"
"전 그냥 대장장이입니다."

네. 얼굴과 손목에 긴 흉터가 남았지만, 그는 대장장이로 돌아왔습니다.
더이상 공주가 아닌 새 아내와 함께요.
3차에 걸친 사자왕 리처드의 원정은 씁쓸한 협상으로 끝났고, 엄밀히 말해서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이 '성전'은 계속되고 있고 그 자리에, 우리 친구들, 우리 동생들, 우리 아들들이 서 있기도 합니다. 아르빌에 말이죠.
그들은 왜 거기 서 있는 걸까요?
왜 미국과 한국과 이라크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버려야 할까요?




제트 리, 이연걸로 더 잘 알려진 최고의 액션배우의 또 하나의 역작입니다. 'Danny the Dog' 어릴때부터 갱들에게 '사육'되어 목줄을 풀면 맹견으로 돌변하는 대니. 인간으로서의 감정이나 사고가 배제된 그의 눈 앞에 맹인 피아노 조율사 샘(모건 프리맨)이 나타납니다. 피아노 소리에 그의 안에 남아있던 작은 인간이 깨어났고, 우연한 기회에 갱들로부터 놓여난 그는 그저 피아노를 찾아갔다가 샘과 그의 수양딸 빅토리아가 사는 작은 자취집에서 살게 됩니다. 음악과 대화와 사랑이, 그를 조금씩 인간으로 돌려놓고, 마침내 그는 절대로 스스로는 풀 수 없던, 맹견으로서의 자신을 묶어두던 그 목줄을 풀어내리고 진짜 인간이 됩니다.

그때서야 눈앞에 나타난 자신을 키워준 갱들. 파이터들로 하여금 서로 죽일때까지 싸우게 하는 불법 클럽에 끌려간 그는 더이상의 살인은 하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살인을 강권합니다.

탈출하여 샘과 빅토리아에게 돌아간 대니는, 빅토리아의 피아노 연주로 마침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찾고, 자신을 키워준 갱단 두목이 어머니를 상습강간하다가 죽이고 만 원수라는 걸 깨닫습니다. 갱들이 샘과 빅토리아가 사는 아파트를 덮치고, 이제 대니는 다시금 싸워야 합니다. 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하나요?
아니면 어머니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 싸워야 하나요?

거대한 전쟁이건, 일 대 일의 격투건,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할 때 그 이유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정당한 이유가 없는 싸움은, 사육되던 대니의 지난날처럼, 기 드 뤼지앵의 '하틴의 뿔' 전투 처럼 승패를 가리지 않고 비참할 뿐이지요. 주체가 아닌 싸움. 발사된 화살. 부러져나가는 검날. 빗나간 창처럼 의미없이 손실될 뿐입니다.

어쩌면 삶은 그 사람에게 있어 기나긴 싸움입니다.
당신의 싸움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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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가장 잔혹한 것도, 가장 강한 것도

가장 끔찍한 것도

가장 지독한 것도


인간입니다.




"너흰 질병이야."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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