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옛날 드라클에 올라왔었다는 칼립소님의 폴라리스 랩소디 캐릭터 일러스트. 지금은 네이버나 이글루스 어딘가에서 '~펌' 이란 말과 함께 멋대로 떠돌아다닙니다. 이렇게까지 이미지가 선연한 캐릭터를 우글우글 만들어내는 작가도 흔치 않습니다. 팬이라면 누가 누구인지 맞춰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워낙 뒤틀린 성격이라 그런지 저는 유명하다, 소문났다, 잘팔린다고 알려진 작품은 보통 잘 손대질 않습니다. 봉신연의나 강철의 연금술사 같은 작품이 그랬지요. <드래곤 라자>(이하 DR) 그리고 <폴라리스 랩소디>(이하 PR)도 그래서 손을 대지 않았던 작품이지요. 하지만 올해 들어서 이 작품들을 지인들의 추천에 의해 가능한 한 편견을 지우고 진지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 자신은 이 글을 <하얀 로냐프강>과 같은 작품처럼 마구 좋아하지는 못합니다. 늦게 접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많은 표현이, 한국어 문장답지가 않아요. 책을 소유하지 않은 관계로 일일이 예를 들지는 못하지만, 영어 문장을 직역한 느낌을 갖는 문장이 굉장히 자주 드러납니다. '가장 ~한 것들 중의 하나' 와 같은 표현 말이에요.

두번째로는 캐릭터예요. 분명히 매력적인 면모를 가득 가진 다양한 캐릭터가 열 손가락은 우습게 넘는 양으로 출연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아무도 이야기에서 핵심을 이루지 못합니다. 개별 캐릭터가 뜻하고 추구하는 어떤 방향과,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려는 방향은 계속해서 어긋나요. DR은 마침내 어떻게든 끝에선 만나지만, PR은 모든것이 산산히 흩어집니다. 분명 의도된 것이겠습니다만 너무나 자기 캐릭터에 애정을 안보인다는 점은, 이야기를 캐릭터를 통해서가 아닌 작가가 직접 말하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저 도구에 불과했던 캐릭터에 애정을 느끼게 만들다니, 조금 배신감마저 느끼기도 했지요.

게다가 그들은 모두 너무 달변입니다. DR의 주인공 중에 자기 표현이 부족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는 인물은 거의 아무도 없어요. PR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달변과 극단적인 과묵함으로 양분되는데, 그나마도 달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플라톤의 대화편에 출연해도 될 만큼 재치있고 언어 유희에도 능하며 논리와 수사학의 달인들입니다. 게다가 그 모든 복잡한 기교가 동원된 표현을 그다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해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존재론 강독이나 인식론 강독 수업시간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귀여니' 이윤세가 자기 소설을 만들기 위해 어떤 텍스트를 참조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다 보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이영도가 글을 쓰기 위해 어떤 텍스트를 참조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관계와 언어, 존재 등 다양한 철학적 문제제기가 담긴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은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직설적으로 캐릭터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데 그 때문에 작가 스스로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것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도의 타자 이영도의 글은 부드럽게 창공을 날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을 연상하게 만드는 커다란 흐름이 있습니다. 그의 글은, 그의 이야기는 자유롭습니다. 캐릭터도, 독자도, 심지어 작가 자신도 그의 이야기에는 관여하지 못합니다. 이야기는 때로 산들바람처럼 조용히, 혹은 폭풍우처럼 거세게 완급을 조절하며 보이지 않는 손처럼 캐릭터와 그 캐릭터에 이끌린 독자들을 붙잡고 모으고 또 놓아줍니다. 이러한 느낌은 그의 글이, '라이트 노벨'이라고 불리는 캐릭터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쓰여졌다는 걸 암시합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가벼움이 없습니다. 그의 캐릭터는 경박하고 가벼울 수 있어도, 그 캐릭터에 이야기가 따라가지 않는 한 이야기는 언제나 처음과 끝을 깊은 무게를 가지고 가로지릅니다. 심지어 1인칭인 DR마저도 화자인 후치 네드발의 경쾌함이 이야기를 경쾌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야기의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방식을 셋으로 나눕니다. 첫번째, 팬픽에서 흔히 보이는, 어느 캐릭터를 위해 바쳐지는 이야기가 가장 쉬운 이야기의 방식입니다. 쉬운 만큼, 그 캐릭터에 버닝하지 않는 독자들에겐 어필하기 힘들어지죠. 그 다음의 이야기는, 어느 극적인 사건을 위해 모아진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선 캐릭터도, 플롯도 모두 그 방향을 향해 통일되지요. 한번 읽으면 재미있지만, 두번째 읽을 때는 이미 알아버렸기에 더 이상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세번째이자 가장 어려운 단계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독자를 빨아들여 그 안에 포함시키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캐릭터는 독자에게 실제 인물이 되고 사건은 독자에겐 역사가 됩니다. 이 단계의 이야기에서 개연성을 따져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작가는 신이고, 그래서 그건 그냥 그렇게 있는 거니까요.

이영도는 초기작에서 이미 이 세번째 단계를 아주 능숙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위에서 보다시피 저는 거기서 개연성을 따지는 어리석은 짓을 해버렸지요. 좀더 일찍 이 초기작들을 접했더라면 하는 후회와, 저런 세계에 빠져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그의 글을 읽고난 솔직한 소감이었습니다.

이제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를 읽어볼 차례입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겠죠. 매료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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