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키님의 [츠메카린 이야기] AU팬픽인 OmegaBass 님의 [Broken Wing]의 EU팬픽입니다!(헉헉) 그러니까, 원작 츠메카린 이야기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Broken Wing]이 OVA 정도의 이야기라면, 이 건 그 후속으로 이어지는 극장판이랄까요.
참고로,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 패러디가 살포시 끼어 있습니다. :)
"허억, 허억."
츠키에테라는 이름의 소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검을 집어들었다. 피를 흘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베어울프의 시선이 차갑다. 전격의 주문을 외우자마자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커다란 손이 얼굴을 향해 다가온다. 앳된 소년의 여린 손이 전격을 발출한 것과, 커다란 베어울프의 거친 손이 소년의 얼굴을 후려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아아악!"
비명인지 고함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며 소년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피에 젖은 온 몸은 더 이상 한 걸음도 옮겨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쓰러져 숨을 거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깊은 상처였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금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다시 기억났다.
*
"가지 마십시오. 왕자님."
부기사단장 니니엘의, 마치 엄마같은 배려가 담긴 목소리에 츠키에테는 힘없이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건 주군에 대한 충언인가요? 아니면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 나온 걱정인가요."
니니엘은 답하지 않았다. 어느 쪽도 아니기에.
"난 인정받고 싶어요."
"제가 인정합니다. 그러니 그만두십시오. 여왕님의 그 명령은..."
원인 무효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저 궁전 안의 옥좌에 앉아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화도 내고 냉소도 던지며 움직이지만 그건 사실 이미 생명이 없는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 그녀 자신조차 처음에는 믿지 않아 하그나스의 목을 일격에 날려버릴 뻔하지 않았던가. 이 어린 아이가, 과연 믿을까. 그 말을 하면.
"가면 안됩니다. 신하로서 충언하는게 아닙니다. 스승의 권한으로 명령하는 겁니다."
"니니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단호한 위엄이 서린 목소리. 어느새 이렇게 자라났던가.
언제까지나 새장 안에 갇혀 노래하는 새가 아니었던가.
"그녀가 원하는 것이 나의 죽음이라면, 난 그녀에게 그걸 주겠어요."
*
걸리적거리는 나무를 부수며 발굽에 채이는 풀이파리들을 모두 흩날리며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츠키에테를 노려보고 돌진해 오는 커다란 고르곤. 두개의 큰 뿔이 몸에 부딪히는 날이면 츠키의 작은 몸 같은건 산산 조각나고 말 것이다. 온몸이 금속질 피부로 덮여서 마법도 통하지 않는 이 괴물의 돌진을, 츠키에테는 피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검을 들어 막았다.
콰콰쾅! 강한 충격이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 숲에 먹혀들어 풍화되어 가는 고대의 석벽이 방금 전과 똑같은 힘으로 다시 츠키의 등을 후려쳤다. 다리가 땅에 닿질 않는다. 몸이 미끄러지며 벽에 핏자국을 남기며 츠키는 흘러내려 쓰러졌다.
고르곤은 숨을 내쉬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발굽을 바닥에 긁고 있었다. 다시 한번 돌진할 기세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츠키에테는 다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두 다리에는 더 이상 그 작은 몸을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흙과 풀이 뒤엉킨 바닥 위에 핏물이 흘러서 고였다. 츠키에테는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줄줄이 이어진 핏자국들.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리면 보통은 의식을 잃고 곧 죽게 된다고 단테이레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아직은 생생하게 나는 걸 보면 그의 몸은 분명 마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어린 소년의 입에서 자조섞인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이 고르곤에겐 자신을 향한 비웃음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고르곤은 머리를 들어 깊은 저음으로 표효하더니,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고 날듯이 달려들었다.
이제 끝났다.
츠키에테는 눈을 감아버렸다.
퍼어억!
"전투중에 눈 감지 말라고, 제가 몇 번을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부기사단장 니니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소유인 전설의 검 드래곤 블레이드가 일격에 고르곤을 날리고도 티하나 묻지 않고 눈부신 검광을 뿌렸다.
드래곤 블레이드.
보통 때라면 니니엘은 어느 대장간에서나 하나 쯤은 굴러다닐 평범한 클레이모어를 들고 왔을 것이다. 아니 사실 평범한 나무막대기라도 그녀의 손에 들려 있으면 수백의 마수를 몰살시킬 흉기가 된다.
저 검은, 최악의 전장에 나설 때만 들고 가기로 되어 있는 그런 검이다. 모든 마족의 봉인이 저 검 하나에 달려 있다고 했던가. 츠메카린의 피가 흐르는 자가 원할때 마족의 봉인을 풀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 츠키에테는 의아함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강한 팔을 느끼며 신음했다.
"일어나요. 여기서 나가야겠습니다."
니니엘은 잡티 하나 없이 까만 갑주 위로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소년을 들쳐 업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소년은 전신을 엄습하는 고통에 몇번 전율하다 이내 의식을 잃고 니니엘의 등 위로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한 걸음도 더 옮길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커다란 얼음의 창을 반짝이고 있는, 그녀가 충성을 바쳐야 할 소녀가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츠메카린 츠뮤.
"그건 내 역할이야. 부기사단장."
"알고 있습니다. 공주님."
"그럼 그 애를 거기 내려놔."
"못합니다."
"죽고 싶다는 말이지?"
얼음의 창이 붉은 옷의 소녀가 손짓하는 대로 빠르게 날아들어 니니엘의 눈 앞에 멈추었다. 냉기가 이마를 타고 온몸으로 흘러내린다. 니니엘은 입을 꾹 다문 채 드래곤 블레이드를 한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츠뮤는 그 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아주 위대한 검이야. 썬더 드래곤의 이빨을 깎아 만들었어. 우리 왕가의 기보, MSN 기사단의 신기."
"쓰는 사람의 뜻에 달린 위대함이죠. 단장님이 이걸 저에게 전하면서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것으로 츠메카린을 멸할 수도, 이것으로 츠메카린을 지킬 수도 있다고요. 저는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결코 공주님을 이것으로 멸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멸한다고? 웃기지 마! 그건 전격만 막아낼 수 있어. 빙결계 마법은 불가능하지. 그리고 난 빙결 마법의 마스터야. 알고 있지? 저리 비켜. 그 애는 아직,"
"이제 그만하십시오."
츠뮤의 등 뒤에서 커다란 클레이모어를 겨누고 있는 건 사이버트, 녹색의 검사. 그리고 그 동생 하그나스는 곁에서 한 손에 전격을 움켜쥐고 있었다. 다시금 아무 표정도 감정도 없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니니엘의 눈 앞에서 얼음의 창이 치워졌다. 다시금 츠뮤의 머리위로 돌아간 그 창날은 천천히 녹아내리듯 흩어져 사라졌다.
"마국의 지배자는 나다. 날 너희들이 어찌 하겠단 거야!"
"츠메리카 여왕 살해의 죄목으로 당신을 심판할 겁니다. 이제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됩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하그나스의 목소리였다.
"하그나스, 네 오빠가 흉측한 괴물이 되어 동료의 손에 죽어도 좋다고?"
"그건 츠메카린 츠뮤,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힐러 단테이레가 이세느와 함께 천천히 숲 사이에서 걸어나왔다.
"당신은 여기 있어선 안돼!"
"이세느 스승님과 연구를 거듭해서 해독제를 찾아냈습니다. 사이버트는 지금 완전히 정상입니다. 공주님의 계획은 이제 끝났습니다."
"단테 군이, 여왕이 이미 죽었다는 걸 계속 모를 줄 알았나요? 공주님?"
이세느의 말도 이어졌다. 그들을 향해 츠뮤는 아이스볼트를 날렸다. 평소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분노에 차서 힘의 조절도 되지 않은 거친 솜씨로 날아간 아이스볼트는, 누군가의 커다란 방패에 막혀 힘없이 부서졌다.
"공주님. 이제 그만하십시오."
미르시네스의 은색 갑주가 부서지는 아이스볼트의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츠뮤는 이빨을 뿌득 부딪히며 돌아섰다. 니니엘이 츠키에테를 바닥에 내려놓고 검을 들고 있었다. 아직도 의식이 없는 츠키에테를 향해 천천히 이세느와 단테이레가 걸어갔다. 츠뮤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하하하하...."
피오드 숲 속에 공허하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조금씩 퍼져나가다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건, 반역이야."
"반역자는 당신입니다. 츠메카린 츠뮤."
츠뮤는 하그나스의 그 말을 듣자마자 검을 들어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한줄기 붉은 빛처럼 날아든 그녀의 검격은 사이버트의 긴 검에 가로막혔지만 동시에 그녀의 다른 손에서 아이스볼트가 사이버트의 몸을 향해 날아가 꽂혔다. 배를 쥐며 쓰러지는 사이버트를 뛰어 넘으며 니니엘이 커다란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 왔고, 하그나스 역시 손에 든 전격을 발출했다. 츠뮤는 검을 빗겨내고 전격은 몸을 눕혀 피해내며 바로 하그나스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니니엘의 강한 힘에 튕겨나간 검은 약간 엇나가 하그나스의 가느다란 팔을 깨끗하게 잘라냈다.
"꺄아악!"
"안돼!"
아이스볼트의 충격에서 일어난 사이버트가 광포하게 츠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츠뮤는 이제 니니엘의 드래곤 블레이드와 사이버트의 클레이모어를 동시에 받아내야 했고, 튕겨나가 벽에 부딪혀 넘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날랜 몸은 두번째 공격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피오드 숲에 원래부터 살았던 짐승처럼 튀어 오른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츠키에테의 검을 같이 집어들더니, 니니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파이널 히트! 엎드려! 사이버트! 미르시네스!"
어째서 마국에서도 손꼽히는 검사만이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저런 파멸의 검기를 공주가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해하기엔 너무 늦었다. 사이버트의 몸이 네조각나 흩어짐과 동시에 어리어리한 츠뮤의 신형이 수풀을 헤치고 미르시네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방패를 들어도 이건 막을 수 없어! 니니엘은 몸을 날려 온 힘을 다해 그 두 자루 검이 교차하는 중심을 내리쳤다.
콰콰콰콱!
잠깐사이에 십수차례나 검이 서로 부딪혔다. 세 자루 검은 모두 불꽃을 튀기며 격렬하게 서로를 밀어냈고, 츠뮤는 다시 저쪽 석벽에, 니니엘은 이쪽 석벽에 날려가 부딪혔다. 미르시네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 손에 든 메이스를 들어 츠뮤를 향해 겨누었다. 니니엘은 천천히 검을 들고 일어나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그만두십시오. 궁정으로 돌아갑시다. 여왕을 죽이고는 그 시신을 능멸하여 여왕을 참칭하고, 그로서 왕자를 해치다니, 그건 아무리 공주의 신분으로도 해서는 안됩니다. 마국이 공주님의 죄값을 물을 겁니다."
츠뮤는 그제야 기억해냈다. MSN기사단은 결코 츠메카린 혈통에 봉사하지 않는다. Maintainers of the Sorcerous Nation. 마국(魔國)을 수호하는 자들. 츠메카린의 핏줄을 지키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마국의 안위를 지키는 자들. 그리하여 츠메카린 혈통의 가보 드래곤 블레이드를 받아, 그 것으로 츠메카린의 이름을 가진 자를 통제하는.
"아니, 내가 마국이야!"
"이젠 아닙니다."
"닥쳐! 죽어어어!!"
한줄기 광포한 전격이 미르시네스를 덮쳤다. 여기사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메웠다.
"죽어! 죽어어어! 죽으란 말야!"
부하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곧장 날아드는 전격을 니니엘은 검을 들어 막아냈다. 드래곤 블레이드. 전격이 검날에 흡수되는 것과는 별도로 강한 충격이 온몸을 밀어냈지만 니니엘의 힘으로 충분히 버텨낼 수는 있었다. 전격은 이제 검날에서 비어져나와 사방 팔방으로 퍼져나갔다. 츠뮤의 얼굴에도 전격은 파고들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츠뮤의 옷이 여기저기 타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웠던 소녀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니니엘은 계속 검날을 들어 전격을 눌러내렸다.
"허억, 허어억!"
츠뮤는 이내 손에 힘을 풀며 눈을 들어 동생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 작은 아이가, 붕대를 온몸에 휘감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러나세요. 왕자님. 아직 위험합니다."
"내, 내 누나예요!"
츠키에테는, 이제 그 금빛 눈동자를 제외하면 조금도 자신이 알고 있는 아름다운 그녀와 닮지 않은 그 쪼그라든 여자를 보며 커다란 두 눈 사이로 눈물을 흘렸다.
"누, 누나가..."
"왕자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여왕을 이미 죽이고 그 여왕의 시체를 조종해서 왕자님에게 이런 부당한 명령을 내렸어요! 왕자님의 몸과 마음을 모두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아시겠어요?"
"츠키에테! 그대로 버려뒀으면 여왕은 나로 하여금 널 죽이게 시켰을 거야! 난 거부할 수 없었을 거고! 난 널 구하려 했어! 이 모든게 널 위한 거였어!"
한쪽은 검을 가르쳐주고, 동시에 결코 물러서지 말라는 삶의 방법을 가르쳐준 스승님.
한쪽은 평생을 자신만을 위해 지독하게 싸워왔던 누나.
"안돼, 난, 난 이미 끝났어. 이 얼굴을 봐. 제발, 츠키에테! 도와줘!"
"츠메카린 츠뮤, MSN의 이름으로 너를 죽여 마국을 저주로부터 지키겠노라!"
"그만둬요!"
니니엘의 드래곤 블레이드가 번쩍 쳐들어 올라갔고, 츠키에테의 여린 손이 바닥에 떨어진 피묻은 검을 집어들었다.
니니엘의 드래곤 블레이드가 츠뮤의 머리를 향해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츠키에테의 가느다란 롱소드가 섬광처럼 위를 향해 뻗어나갔다.
"아악!"
드래곤 블레이드는 석벽을 쪼개며 박혀들었고, 니니엘의 손은 허공을 날아 츠뮤의 얼굴 곁에 떨어졌다.
쪼그라든 츠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전격과 빙결의 광휘가 폭발하듯 퍼져나가며 손목을 잘린 니니엘을 덮쳤다.
"죽어어어어!"
츠키에테는 노을이 깔리는 숲 속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사이버트의 몸은 조각나 흩어졌고, 미르시네스와 니니엘의 몸에선 아직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팔이 잘린 채 쓰러져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던 하그나스의 여린 목은 아주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힘없는 힐러 이세느와 단테이레의 목도 아주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츠키에테의 검날 아래.
살이 타는 냄새와 피냄새가 츠키에테의 주위를 온통 감싸고 돌았다. 그리고 그 앞에 츠뮤가 앉아 있었다.
핏물이 고인 웅덩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며.
"이, 이건 내가 아냐."
츠뮤는 자신의 어깨를 짚고 있는 츠키에테의 손을 감히 잡을 수가 없었다. 어리디 어리게만 느꼈던 소년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더없이 흉측한 몰골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떨고 있다.
"츠키."
대답은 없었다.
"날 사랑하지? 내가 이렇게 되었어도, 누구의 앞에서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이런 몸이 되었어도, 날 사랑하지? 응?"
츠키에테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내려앉아서 흉한 얼굴 위로 작은 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 떠나지 않을 거지? 평생 내 곁에 있어줄 거지? 말해줘,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츠키에테는 말없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노파처럼 쪼그라든 손을 들어 츠키의 팔을 붙잡았다. 아무 힘도 들어가질 않았다.
이렇게 작은 몸이었던가.
이렇게 힘없는 손으로 날 움켜쥐고는, 놓아주지 않으려 했구나.
모든 마력을 쏟아버린 츠뮤는 이제, 얼굴과 온몸에 흉한 흉터가 남은 힘없는 여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츠키에테는 그녀의 목숨을 구한 한 사람의 마검사로서 당당하게 그 앞에 얼굴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사랑한건 아름다운 누님이었어요."
그 말을 들은 츠뮤의 금빛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날 버릴거야?"
츠키에테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 알아요? 누님이 내가 다치는걸 바라는 것 같아서, 누님이 내가 부서지는 걸 바라는 것 같아서 일부러 이렇게 부서지고 망가졌어요."
츠뮤는 붕대에 쌓인 츠키의 몸을 향해 손을 뻗다가 이내 힘이 빠진 듯 팔을 내렸다.
"그러니 되찾을 거예요. 나의 아름다운 누님을. 그 어떤 댓가를 바쳐서라도."
소년은 일어나, 벽에 박힌 드래곤 블레이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숲의 마신이여! 물의 마신이여! 대지의 마신이여! 츠메카린의 핏줄이 그대들의 봉인을 푸노니, 나의 뜻을 들어주오!"
룬다와 피오드, 바리와 코일의 모든 봉인이 일순간에 풀리며 방대한 마력이 드래곤 블레이드의 검날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마력은 잠시 츠뮤의 몸에 머물렀다가, 일 순간에 피오드 숲을 벗어나 츠메카린 마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몇년이 지났다.
이제는 당당한 청년처럼 자라난 츠키에테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놓인 흔들 의자 팔걸이에 한 소녀의 손이 사뿐히 걸쳐져 있었다. 매끈하고 하얀 피부가 마른 햇빛에 반짝였다. 츠키에테는 그녀에게 다가가 앞으로 돌아가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누님."
대답은 없었다. 금빛 눈동자만이 살짝 돌아갈 뿐.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이 매끈하게 흘러내려 있는 그 머리는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져서 츠키에테를 바로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그날 피오드 숲에서의 일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뜻으론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오직 눈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오늘은 별 일은 없더군요. 성 밖 사정도 내내 조용하고요. "
대답은 여전히 없었지만, 츠키에테는 자신의 누님을 번쩍 안아들었다.
"이제 쉬셔야죠. 누님. 바깥 경치는 그만 보고요."
침대를 향해 들고가는 누님의 몸은 무척이나 가뿐했지만, 몇 년 전의 그 일이 있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움을 발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 표정도, 여전했다. 몇년 전과 똑 같이. 그래서 지금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는, 자신의 동생인 이 큰 키의 청년과 거의 동년배로 보였다.
츠키에테는 그녀의 옷깃을 천천히 풀며 입을 열었다.
"편하게 해드릴게요."
대답없는 금빛 눈동자가 살짝, 미묘하게 흔들렸다.
검은 머리칼의 청년은 그 말을 속삭이며 머리 숙여 붉은 머리칼의 소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소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 청년의 손짓은, 지난 몇년 내내 그래왔듯 소녀의 옷깃을 파고들어 하얀 살결을 쓸어내렸다. 거친 숨결이 소녀의 입가와 귓가를 떠돌았지만, 소녀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고 있을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츠키의 몸짓을 따라 츠뮤의 몸과 함께 흔들리는 침대에서는 언제나 그랬듯 먼지냄새가 날렸다. 삐걱이는 소리, 그리고 죽은 식물들이 말라서 바스러져가는 작은 소리들이 방 안을 떠돌았다. 장미 화분 위엔 마른 가시들만이. 데이지 화분 위에는 말라 비틀어진 가는 줄기만이.
절정의 순간이 지나고도 한참을 츠키의 몸은 그대로 츠뮤의 여린 몸과 엉겨 있었다. 이대로 영영 녹아들어 하나가 되기라도 원하는 것처럼.
츠뮤의 눈이 다시 떠질때까지, 츠키는 그렇게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알았어요 누님. 다녀오겠습니다."
죽은 여왕의 시체는 아직도 왕궁의 옥좌에, 그지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신하들은 모두 산 채로 말라 비틀어져 수년 동안 쌓인 먼지를 덮어가며 그 아래에서 스러져가고 있음에도. 츠키에테는 방금전까지 처절하도록 누님의 몸을 탐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그 옥좌 앞으로 걸어오다 잠시 멈추었다.
"평안하십니까."
물론 죽은 여왕은 아무 말도 없었다. 츠키에테는 그 어머니라는 이름의 시체를 향해 조소를 던지며 홱 돌아섰다.
문이 닫히고 어두운 옥좌 아래 놓인 여왕의 시체가, 그때만 아주 살짝 입을 열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어떤 마수가 너희들의 마력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려니.
씁쓸하게 웃음지으며 여느 날처럼 힘겹게 드래곤 블레이드를 들고 마수를 찾아 왕궁 정문 밖을 나서는 츠키에테의 앞길에는,
츠뮤가 내내 창가에 앉아 하루종일 내다보고 있는 그 바깥에는,
한때 츠메카린 마국이라고 불리웠던 시든 폐허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
새는 새장을 벗어나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새를 가두려 날개를 꺾으려 했던 그 새의 천사는, 도리어 자신의 날개가 꺾인 채 자신의 방이라는 더 커다란 새장 안에 갇혀버렸다.
창공을 날며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의 노래를 눈으로만 쫒으며, 그녀는 영원히 그 새장을 벗어나 날아오르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