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211건

  1. 2006.06.10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7. 파라미르
  2.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6. 세오덴
  3.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5. 에오메르
  4.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4. 에오윈
  5.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3. 갈라드리엘
  6.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2. 엘론드
  7.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1. 아르웬
  8.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0. 빌보 배긴스
  9.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9. 간달프
  10.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8. 아라곤
  11.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7. 보로미르
  12.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6. 레골라스
  13.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5. 김리
  14.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4. 페레그린 툭
  15.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3. 메리아독 브랜디벅
  16.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2. 샘와이즈 감지
  17. 2006.06.09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 프로도 배긴스
  18. 2006.04.28 ▶◀반전무죄 손님은 왕
  19. 2006.04.01 4월 1일은
  20. 2006.02.23 에이린 이야기 제 1부 : 그녀의 기사단 등장인물
  21. 2006.02.22 세상이 그녀를 떠났습니다.
  22. 2006.02.22 에이린 이야기에 대한 더 많은 정보들
  23. 2006.01.29 謹弔
  24. 2005.06.21 미소녀 예찬 (7) 오가타 리나
  25. 2005.06.21 미소녀 예찬 (6) 시바히메 츠바사
  26. 2005.06.21 미소녀 예찬 (5) 치세
  27. 2005.06.21 미소녀 예찬 (4) 나오 마리오타 프라데이리
  28. 2005.06.21 미소녀 예찬 (3) 헤르미온느 그레인져
  29. 2005.06.21 미소녀 예찬 (2)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30. 2005.06.21 미소녀 예찬 (1) 아우크소


데네소르의 아들 파라미르
곤도르의 대장
엘레사르 왕의 섭정 대신
에뮌 아르넨의 영주

제3 시대 말엽 곤도르에는 왕족의 혈통을 잃어버린 지 천여년이 지난 뒤였다. 섭정의 가문인 '후린 가'의 자손들은 대대로 섭정을 맡으며, '왕이 귀환할때까지' 왕권을 맡아 다스린다는 선서와 함께 왕좌 밑의 섭정의 자리에 앉아 통치했다. 섭정은 곧 곤도르의 주인이었고, 미나스 티리스와 도성 수비대로 대표되는 힘의 중점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을 참칭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을 비롯해 모든 곤도르 인의 마음 속에는 요정의 피가 흐르는 누메노르 혈통의 진짜 왕족이 왕이어야 한다는 거의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대대손손 이어져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파라미르는 제3시대 2983년, 불길에 몸을 던진 최후의 통치 섭정 데네소르 2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저 '용감한 샘와이즈 시장 나리'와 동갑이며, 형 보로미르와는 다섯살 차이가 난다. 그는 젊은 시절 이방인 소롱길과 함께 곤도르의 대장으로서 용맹을 떨쳤던 부친과는 많이 달라서, 학식과 음악을 사랑했고 부친으로부터 영예를 얻기보다는 종종 찾아오곤 했던 회색의 순례자 미스란디르, 그러니까 간달프로부터 지혜를 얻기를 좋아했다. 이런 점이 부친에게는 몹시 못마땅해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지혜롭고 강하며 모든 것을 보고 안다고 생각했기에, 간달프에게서 배우려는 아들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보로미르는 내게 충실했어! 너처럼 마법사의 제자는 아니었다고!"

그의 형은 어린시절 잃어버린 어머니의 성격을 몹시 닮은 파라미르를 무척 아꼈고, 파라미르 역시 형의 일이라면 뭐든지 따를 만큼 형제의 우애는 깊었다. 앞 뒤 재는 일 없이 용맹과감하고 자신감에 넘치며 또한 그 것을 뒷받침할 만큼 강했던 형은 그에겐 늘 동경의 대상이어서, 형이 처음 갑옷을 입고 앞장서 출정할 때는 아직 소년이었던 그 역시 따라나서고 싶어 부친을 몹시 졸라 갑옷까지 얻어냈다고 한다. 물론 그 역시 곧 자라나 또 한 명의 곤도르의 대장이 되었고, 그 때의 조그만 갑옷은 페레그린 툭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곤도르의 대장으로서, 형제의 처신은 그 성격에 따라 무척 달랐다. 보로미르는 위압적인 사우론의 존재감을 이겨내기위해 치열하게 싸웠다면, 파라미르는 그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부하들과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는데 더 주력했다. 보로미르는 그런 동생을 인정했고, 또 필요로 했지만, 아버지 데네소르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파라미르는 늘 패장으로 인식되었고, 그 뒷수습을 하는건 보로미르의 몫이 되곤 했다. 사실은 보로미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작지만 중요한 일들을 파라미르가 지켜내려 했을 뿐인데도.

반지 운반자 프로도를 그냥 보낸 일은, 사실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의 갈등은 반지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와 같은 말초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형이었다면 어찌 했을 것인가,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형처럼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보로미르가 아니었고, 군사 구역에서 배회하는 수상쩍은 반인족을 대의를 위해 그냥 보내는 정도의 규정 위반은 재량으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유연했고, 엄정한 규정보다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할 것이라는 그 실날같은 믿음이 오히려 더 곤도르와 부친과 인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나라의 법을 알고 계시죠? 포로를 놔주면 사형을 받게 됩니다."
"받아야만 한다면 받겠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그렇지 않았다. 죽은 형의 몫을 하지 못한 그를 질책하는 건 너무한 일이겠지만, 자신과는 너무 다른 파라미르를 인정하지 못했던 데네소르에게, 처음부터 아들은 하나 뿐이었고 이제는 죽고 없는 셈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냐마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라는 건 또 다른 법이다. 자손을 남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이어갖길 바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정과 달리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인간은, 이렇게라도 그 모습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걸 우린 전통이라고도 부르고, 유전이라고도 부르고, 혈통이라고도 하고 여러가지 용어로 지칭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의 이유는 하나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뛰어넘고 싶은 것이다.

파라미르의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그의 모친은 침착하고 섬세한 아들의 면모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가 제대로 철이 들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자신을 감싸주는 건 형 뿐이었다. 외롭게 세상에 던져진 채 출생을 이유로 그의 섬세한 면으로는 감당못할 곤도르의 대장 직에 앉혀진 그는 비록 백성들로부터는 무한한 사랑을 받았지만, 아버지로부터는 한 터럭의 사랑도 받지 못한 외로운 존재였다. 아버지를 닮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미 아버지를 꼭 빼닮은 형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들 입장이 바뀌었길 바라시죠? 제가 죽고 형이 살아있는."
"....그래. 그랬길 바란다."
"....형을 원하신다면, 제가 형의 몫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살아서 돌아오면, 더 귀한 아들로 대해주십시오."
"결과에 따라서. 네가 지느냐, 이기느냐."

그때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던,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하는 파라미르는 이미 그 자신이 아니었다. 부모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데, 어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부모에게서 자신의 길을 허락받지 못하는데, 어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까. 그는 본디 보로미르가 가야만 했던 그 길로 들어섰고, 보로미르 만큼의 용맹은 가졌지만 그 만큼의 자신감이 없었던 그에겐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스스로 내버렸던 목숨이건만, 그런 목숨이라도 망설임없이 불에 뛰어들어 구해내 준 반인족 페레그린 툭은 그에겐 평생의 은인이었다. 가까스로 불길에서 벗어난 그는 병실에서 회복하면서 마침내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가 그리도 사랑을 갈구했던 아버지처럼, 그리고 형처럼 용맹하고 저돌적이면서도, 어릿하게 기억에 남은 어머니처럼 무척 아름다운, 에도라스의 백색 숙녀가 전장에서 쓰러져 병실에 남은 것이다.

사랑하는 형과 싸워 부모의 사랑을 얻어야만 하는 세상의 모든 둘째들. 파라미르는 그들의 슬픔을 대표한다. 다시한번, 사랑받기에 늘 뒤에 남겨져야 했던 여자와 사랑받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남자. 그들은 마침내 서로 그토록 바라던 사랑을 만났다. 형이 죽어 그에게 돌려지게 되어버린 다음 통치 섭정이란 자리도, 이젠 그에게 강요되지 않는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일어났으니까. '왕의 귀환'으로 인해 그는 그의 삶을 온통 괴롭혔던 통치 섭정의 지위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고, 사랑도 얻었다. 그리하여 에뮌 아르넨의 영주는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모든 영민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으며 장수하다 평안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돌격을 바라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제 아버지도 둘째시거든요. 이렇게 사랑받지 못한, 형과는 너무 다른 둘째.)
,


마크의 제17대 왕
셍겔의 아들 세오덴
"부활한 세오덴"

마크의 제1 왕조는 철권 헬름 왕의 대에 이르러 끊기게 되고 그의 조카가 뒤를 잇는데, 그 8대손이 세오덴이다. 헬름은 정치 지도자라기보다 패할 줄 모르는 무인이었으며, '긴 겨울'의 시기 던랜드인과의 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고, 혼버그 요새에 적은 수의 병사들과 갇혔다가 단신으로, 맨손으로, 적진에 들어가 수많은 적을 패죽이고 선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를 기리며 로한인들은 혼버그 요새가 있는 협곡을 '헬름 협곡'이라 칭했다. 그러나 던랜드인은 마치 트롤처럼 인육을 먹고 무기로 찔러도 상처가 나지 않는 공포의 대명사로 오랫동안 언급했다고 한다.

세오덴은 곤도르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의 모국어는 마크의 언어가 아니라 곤도르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를 따라 모든 것을 곤도르 식으로 하려고 했던 부왕과 달리, 마크의 전통에 철저한, 왕좌에 앉은 왕이 아닌 말 위에 앉은 왕이 되었다. 곤도르에서 태어난 누나 둘과 로한에서 태어난 여동생 둘에게 사랑받으며 자라난 외아들이고, 그의 삶에서 아마 유일한 그늘은 왕비 엘프힐드가 출산 중에 세상을 떠난 일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왕비가 죽은 후로 재혼하지 않았고, 사랑하던 막내동생이 남편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 젊은 나이에 죽자 막내동생의 아이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 외아들 세오드레드와 조카 에오메르, 에오윈 셋은 친남매처럼 함께 자랐고, 이 세 아이에게 세오덴은 누구에게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사랑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자라며 받아온 사랑을 고스란히 나누어주었던 셈이다.
그러나 장수의 축복을 받은 누메노르 혈통의 인간이 아닌 까닭에 그의 노년은 급격하게 찾아왔고, 믿을만한 부하라고 생각했던 '뱀혓바닥' 그리마는 사루만에게 매수되어 그를 점점 사루만의 꼭두각시로 물들여간다. 덧붙여서 황금궁전 또한 그리마의 부하들에게 장악되고, 늦게 얻은 외아들과 어려서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점점 밀려난다.

"어둠이 머릿속을 지배했었소."

어둠은, 어린 시절 보았던 전설의 용사 소롱길이 흰색의 마법사 간달프를 데려오면서 끝났고,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검을 쥔 그는 비록 사랑하던 외아들을 잃었지만, 혼버그 요새에서 그 '소롱길' 아라곤과 함께 수많은 우루크하이들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 철권 헬름의 전설이 그대로 되살아난 셈이다.

전투 지휘관이나 왕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았던 듯 싶다. 전성기의 로한에서는 한번 징집하면 기마병 일만 쯤은 하루 아침에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반지전쟁의 시대에 로한은 북으로는 변절자 사루만, 서로는 던랜드인, 동으로는 고블린과 오크 떼, 남으로는 산맥의 야인과 거친 들짐승으로 인해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왕의 소집령에도, 각 영지에서는 쉬이 군사를 뺄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우 수천의 군사만을 모아서, 세오덴은 너무 늦기 전에 곤도르를 지키고 서부의 자유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말을 달린다. 5일을 달려 아침과 함께 미나스 티리스의 성벽 앞에 도착한 그는,

세상이 아직 젊었을 때 발라르 전투에 나선 위대한 오로메와도 같이, 고대의 신(神)과도 같이 스노메인을 몰고 질주했다. 그의 황금 방패가 드러났다. 그것은 흡사 태양처럼 반짝이고 그가 탄 말의 하얀 말발굽 아래 풀잎들은 녹색 화염으로 타올랐다.
- 소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中(한기찬 옮김, 황금가지)


Forth, and fear no darkness!
Arise, arise, riders of Theoden!
Spears shall be broken, shields shall be splintered!
A sword day, a red day, ere the sun rises!
Ride now, ride now! Ride for ruin and the world's ending!
Forth, Eorlingas!
돌격! 어둠을 두려워 말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세오덴의 기마대여!
창은 부러질 것이고 방패는 박살날 것이다.
칼의 날, 피의 날, 해가 떠오르기 전에!
돌격 준비! 돌격 준비! 잔해와 세상 끝까지!
에오를의 후예들이여 돌격!


그러나 이 전쟁을 지휘한 적장은 던랜드 깡패두목도 아니었고, 오크나 다른 어떤 적이 아니었다. 어둠의 하수인이며 어둠 그 자신이나 다름없는 마술사왕이었다. 결국, 세오덴은 마술사왕에게 쓰러졌지만, 그로 인해 에오를과 헬름과 같은 위대한 선조의 영 앞에서 결코 부끄러움 없을, 아니 그들보다 몇배는 더 자랑스러운 위업을 이루어냈다.

그의 군대는 그를 전투 지휘관으로 여기기보다, 자랑스러운 왕이며 아버지와 같은 이로 여겼다. 지휘관은 높은 곳, 등 뒤에 서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지시한다. 지휘관은 나의 생명과 죽음, 그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 따르고 싶어 따르기보다 따라야 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아버지는 내 앞에 서서 나를 이끄는 사람이다. 내게 등을 보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이다. 뒤쳐지면 안된다. 모든 이에 앞서 달려나가는 그 등은 꼭 붙어서 따라오라는 무언의 사랑이다. 펠렌노르 평원을 가로지른 로한인들은, 명령에 따라 맡은 일을 하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하려는 자식들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사랑받으며 자라났으나 불운한 시대에 노년을 맞았지만, 깊은 슬픔을 딛고 일어나 여전히 넘치는 사랑을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지극히 아버지다운 이 왕은, 로한 땅에서 태어나 걸음마보다 먼저 말에 오르는 아이들에게는 에오를과 헬름의 이름과 나란히 '부활한 세오덴'의 전설이 되어 전해지게 되었다.
,


마크 제 3 원수
로한 제 3 왕조의 시조, 에오메르 에아디그 왕


로한 왕가는 본디 북방에 살던 에오세오드 족의 후손이다. 청년 영주 에오를이 이끄는 이 부족은 용맹한 전사이며 노련한 기마병이었다. 키리온 섭정의 시대에 위기에 처한 곤도르를 도와준 보답으로, 당시 주민이 거의 없었던 지금의 마크 땅을 하사받은 에오를 왕은 로한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이 후에 긴 역사를 거치며 던랜드 인의 습격이라든지 여러 위험으로부터 자신들과 곤도르를 지켜왔다. 봉화는 그 시절부터 유지되어온 로한과 곤도르의 연락수단으로, 그들은 서로가 원하면 언제든 출정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온 사방이 외적으로 둘러쌓여 있던 곤도르는 그 약속을 쉽게 지킬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냐면 거의 한번도 지켜본 적이 없다. 그러나 로한인들은 끝까지 우정을 버리지 않았고, 그리하여 제 3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번 크게 곤도르를 구해낸다.

에오메르는 왕가의 직계손이 아니다. 세오덴 왕은 그의 외삼촌이며, 그는 곤도르인의 피와 로한 왕가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보다는 역시 마크의 원수들중 하나였던 아버지 에오문드를 좀더 많이 닮았다. 지나치게 열정적이어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 에오문드와는 달리 어머니를 닮아 약간은 더 신중했지만, 방패에 얹힌 시체로 돌아온 아버지를 본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적들에게는 한없이 무자비한 장수였다. 오르크든 던랜드의 인간이든 우르크하이든 로한의 적에게 있어 그는 죽음 이외의 것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로한인들이 믿고 따르는 왕가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자신 휘하의 모든 이들에게 그 믿음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펠렌노르 평원에서 그들은 외친다. "죽음을!"

그는 충성스런 신하이며, 분명 사랑받는 조카였을 것이다. 동생 에오윈과 함께 왕궁에서 살면서 주군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사랑을 한 대상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단순하고 순수하기까지 한 남자에게는 축복의 시간이지만, 시련은 모든 행복한 이야기가 그렇듯,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마의 활약으로 세오덴 왕은 자기 정신을 잃어버렸고, 마침내 에오메르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다.

"로한 왕국으로부터 추방한다. 에.오.문.드.의 아들 에오메르. 돌아오면, 그땐 사형이다."

그는 분명 로한인들의 사랑과 믿음을 받는 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크의 제 3원수로 맹활약해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수많은 적을 쓰러트렸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세오덴에게 있어 그는 왕위 계승자 후보라기보다 충성스런 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믿음직한 후계자로 생각했다면, 노년의 세오덴은 분명 아직 어린 자기 아들 세오드레드를 제친 채 자신이 먼저 그에게 왕위를 - 아니면 적어도 섭정의 자리를 - 물려주었을 것이다. 사루만의 마법에 씌이기도 전에 그 일은 이루어졌을 것이고 로한은 사루만의 군대에게 쉽게 유린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오덴은 그를 사랑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믿었던 왕자, 마크의 제 2 원수 세오드레드는 시체가 되어버렸고 충성하는 주군을 따라 신하의 예로 섬기며 또한 동생처럼 아꼈던 세오드레드의 죽음은 에오메르에게 있어 슬픔과 동시에 무거운 짐을 내린다. 이제 그는 마음을 잃어버린 사랑하는 외삼촌을 지켜야 함과 동시에 그 왕좌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로한의 아라곤이다. 적자는 아니지만 왕이 되어야 한다. 자질은 충분하다. 그리고 왕은 제정신이 아니니 로한은 어느새 왕을 잃었고, 섭정 그리마가 모든 걸 쥐고 있다. 그러나 정당성을 입증하진 못하고 있다. 그럼 이제 어찌 해야 하는 걸까. 왕을 몰아내야 할까? 아버지나 다름없는 외삼촌을 몰아낼 순 없다. 감성 가득한 청소년기를 보냈던, 집이나 다름없는 신성한 황금 궁전에서 피를 볼 수도 없다. 그는 이 엄청난 고민을 안은 채 그 스트레스를 우르크하이에게 아낌없이 풀어버린다. 전투를 도발하지도 않고 몰래 야영중인 적군을 개 잡듯 도륙하는 건 분명 기사의 행동, 혹은 군인의 행동이 아니다. 그건 거의 피에 굶주린 비적의 행동이다.

그러나 그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던 이 고민은, 아라곤과 그가 대려온 흰색의 마법사로 인해 풀려난다. 왕은 되살아났고, 그는 (당분간) 왕이 되지 않아도 된다. 지금까지 해왔던대로 단순하고 우직하게 충성만 하면 된다. 얼마나 고마운가. 그는 아라곤과 형제나 다름없는 우애를 맺게 되었고, 주군을 믿듯 그를 믿게 되었다. 왕좌라는 짐에서 헤어난 그는 이제 자유인이다. 이방인 소롱길의 전설로 기억되는 아라곤이 이제 그의 곁에 있으니 그는 전설과 함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원래도 거의 그랬지만)

봉화가 오르고, 부활한 노왕 세오덴의 뒤를 따라 수많은 로한인을 거느리고 그는 전장으로 향한다. 전설의 아라곤은 이제 또 다음 전설을 낳기 위해 돌아오지 않는 길로 사라졌고, 그는 이제 자신이 전설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 대부터 숱한 전투에 함께 해온 노장들이 뒤에 서 있고, 빛나는 눈으로 함께 말을 달려줄 또래의 젊은이들이 곁에 서 있다. 해왔던 대로 용감하게 해치우기엔 짐이 무겁다. 곤도르까지 가는 5일 밤낮의 긴 행군을 지나, 새벽에 이르러 마침내 펠렌노르 평원에 섰을 때까지, 그의 머릿속엔 온갖 부담감이 감돌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이제 사랑하는 외삼촌께서 친히 청소해주신다. "에오메르, 오른쪽!"

사랑하는 주군께서 그 대신 전설이 되어주셨다. 그 누구도 뒤따르지 못할 만큼 영광과 열정에 사로잡혀 수천 로한인의 선두에 서서 달리는 노왕의 등을 바라보며 에오메르는 모든 짐에서 놓여나 피와 죽음의 자유를 얻었다. 사나운 민족들의 지도자로서 그는 칼날처럼 적들을 베어넘겼고, 영광을 몸에 받고 부담스러워하기 보다 왕께로 돌릴 수 있었다. 자유를 얻은 이 단순한 남자에게는 하라드인들이 끌고온 거대한 짐승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질 못한다. 로한인들은 아름답고 무시무시한 전쟁의 노래를 부르며 전장을 휩쓸었고 그 선두에는 에오메르가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 거대한 전장에서 사랑하는 외삼촌을 잃고, 더욱 사랑했던 동생까지 거의 잃어버릴 뻔 했다는 걸 알게 된 뒤에 그는 잠시나마 자신을 놓아준 그 무거운 왕좌라는 짐이 자신을 짓누르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자신 안에 있었음을 알아버린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는 이미 그 자리에서, 왕이 되었다. 아라곤이 원군을 이끌고 펠렌노르 평원에 늦게나마 도착했을 때, 그는 더이상 전설의 아라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대등한 친구로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검은 문으로 나아간다.

세오덴 왕의 장례 행렬 선두에 서서 에도라스에 돌아온 에오메르 왕은 그 후로 65년간 왕위에 머물렀다고 한다. 로한의 선왕 중에는 노왕 알도르를 제외한 그 누구보다도 긴 기간이었다. 그는 반지전쟁으로 우정을 쌓은 아라곤과 돌 암로스의 임라힐 등 곤도르의 영주들을 이따금 방문했고, 임라힐의 딸 로시리엘과 혼인하여 그 아들 엘프위네가 왕위를 이었다. 그의 통치 하에 이르러서 마크의 백성들에게는 그렇게도 염원하던 평화가 찾아왔고, 말과 사람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엘레사르 왕은 이 후에도 수없이 정벌에 나섰고, 절친한 친우였던 에오메르 역시 천년의 우정을 제 4시대에도 이어나가 룬의 대해 너머와 하라드의 먼 벌판까지, 그가 세오덴처럼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푸른 들판을 배경으로 선 백마의 깃발을 나부끼며 엘레사르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함께 나아갔다.

왕의 얼굴을 가졌으나 그 이름을 갖지 못했던 버려진 왕은, 이렇게 해서 로한의 역사에 위대한 군왕으로 기억되었다.
,


에도라스의 백색 숙녀
로한의 여전사 (Shield-maiden of Rohan : 방패-처녀 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Shield-maiden은 본디 바이킹의 여전사들을 지칭하는 집합적 고유명사다. 물론 마술사왕 앞에서 세오덴의 방패가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방패의 처녀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므로, 아마 톨킨은 중의적 표현으로 썼던 듯.)

세오덴의 선왕 셍겔 왕은 결혼을 대단히 늦게 했다. 그의 아내는 곤도르의 롯사르나흐 출신으로 이름은 모르웬이라고 했다. 슬하에 세오덴을 비롯해 2남 2녀를 두었고, 그들은 궁정에서 주로 로한의 언어 대신 곤도르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신하들이 많았다.

에오윈은 제3시대 2995년 마크의 총사령관 이스트폴드의 에오문드와 셍겔 왕의 딸 세오드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오드윈과 남매간인 세오덴 왕은 그녀의 외삼촌이 된다. 에오문드는 대단히 열정적인 장수여서, 적이 나타났다는 소문만 있으면 주변에 있는 소수의 부하들만 모아서 득달같이 말을 달려 적을 잡아 없애곤 했다. 그러다 3002년, 에뮌 무일 경계에서 매복에 걸려들어 죽음을 당한다. 에오윈은 겨우 일곱살이었다. 얼마 후 세오드윈까지 병으로 죽게 되자 에오윈은 오빠 에오메르와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왕자 세오드레드와 형제처럼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자라나며 세오덴과 그의 황금 궁전에 어둠이 드리우는 것을 보아야 했다. 뱀혓바닥 그리마의 추파를 견뎌내면서, 말도 잘 안통하는 하인들과 부하들과만 접해야 하는 삶은 지독한 외로움,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빠인 에오메르의 추방과 세오드레드의 죽음으로 절정에 다다른다.

"이미 혼자가 아니던가? 오열하는 널 누가 위로해주지? 밤은 싸늘하게 널 감시하고 있고, 화려했던 네 인생은 무척이나 초라하도다. 침실의 벽들은 네 숨통을 틀어막고, 자유를 꿈꾸는 널 감금하도다."

살아가는 일에 지쳐갈 때쯤 나타난 아라곤은 그녀에겐 신비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 셍겔 왕과 함께 전장에 나서 야만인들을 멸하기도 했다는, 전설로만 전해듣던 장수의 축복을 입은 두네다인 족장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아버지나 다름없는 왕을 되살린 간달프와 함께.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엔 자신과는 비할수 없이 고귀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고, 에오윈은 사랑하는 왕의 곁에 함께 설수 없던 것처럼, 아라곤의 곁에도 설 수 없었다.

"검이 없는 사람도 검때문에 죽어요. 전 죽음도 고통도 두렵지 않아요."

그녀는, 아르웬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딸들을 대변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고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가족들은 그저 그녀를 보호하고자 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언제나 그녀는 남자들을 떠나보내고 그들의 등을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고, 그 결과로 어린 시절에는 낳아준 아버지를, 자라서는 친형제나 다름없던 세오드레드를 잃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예정된 죽음을 향해 떠나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자신처럼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뒤에 남겨져 버린 메리와 함께 생애 최대의 전투를 향해 나아갔다.

"어떠한 남자도 나를 죽일 순 없다."
"난 남자가 아니다."

간달프조차 어찌할 수 없는 가공할 힘을 지닌 마술사왕도, 그에게 걸린 강한 수호 마법의 유일한 구멍에 걸려 영원히 세상을 떠나갔다. 아홉 반지를 가진 누메노르의 왕과 마법사들중 그 누구도 여자가 전장에 나서서 그들의 대장인 마술사왕과 상대할 경우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또 사랑하는 가족 - 세오덴 왕 - 을 영원히 떠나보내야 했고, 슬픔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병상에서 또다시 아라곤을, 오빠 에오메르를, 그리고 수많은 로한의 전사들과 할머니의 조국 곤도르의 용사들을 떠나보내고 이제는 그들이 가는 뒷모습조차 바라보고 서 있을 수도 없게 되자, 그녀는 역시 전장에서의 상처로 병상에 있던 파라미르에게 선처를 부탁한다. 동쪽을 향해 창문이 난 방으로 옮겨달라고. 의료소 정원에서 그들은 여러 번 만났고, 검은 문에서의 전투 경과를 기다리며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텄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항상 뒤에 남겨져야 했던 여인과, 사랑받고 싶어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갔던 남자. 둘 사이엔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을까.

파라미르는 후에 이실리엔의 영주가 되어 에오윈은 그와 함께 오래도록 미나스 티리스와 오스길리아스가 모두 바라다보이는 에뮌 아르넨에서 살았다. 함께 말을 달렸던 마크의 홀드위네, 메리아독 브랜디벅과의 우정도 결코 잊지 않았고, 사나운 로한 여자라며 경원시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는 달리 에도라스에서 온 백색 숙녀를 이실리엔의 영민들은 모두 우러러 칭송했다고 한다. 더이상 그녀는 아무도 떠나보내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다. 파라미르는 비록 그 후에도 종종 전장에 나갔지만 그들 사이에는 다시 만날 것이란 굳은 믿음이 있었으므로.

사랑을 이유로 자신을 구속하려는 부모님께 단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인 세상의 모든 딸들. 에오윈은 바로 그런 그녀들의 대표였다.
,


로스로리엔의 여왕
숲의 여주인

제3 시대 말기에 가운데땅에 살고 있는 그 어떠한 인물도, 그녀보다 오랜 세월을 가운데땅에서 지내진 못했다. 그녀는 해와 달이 있기도 전, 발리노르에 두 그루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만이 이 세상에 빛을 던져주던 시절에 발리노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는 그 옛날 발리노르의 빛이 스며들었고, 그 결과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는 여왕으로 남게 되었다. 부친은 놀도르 요정의 군주들 중 하나였던 피나르핀이며, 모친은 바다를 사랑하는 금발의 텔레리 요정 처녀 에아르웬이었다. 그녀의 남자 형제들 중에는 아라곤의 아득히 먼 조상인 베렌과 그 부친 바라히르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핀로드 펠라군드와 같은 요정군주가 있었다. 펠라군드의 반지는 그 태곳적부터 아라곤 가문의 상징 중 하나로, 특히 피터잭슨의 영화에서 보면 아라곤이 여전히 그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마리 뱀이 에머랄드를 받치고 있는데, 하나는 머리로 받치고 다른 하나는 삼키려 드는 형상이다. 이는 피나르핀 가문의 문장이었다.

대 마왕 모르고스가 두 나무를 죽이고 발리노르의 빛을 머금은 보석 실마릴을 강탈해 달아난 뒤에, 요정들은 잃은 것을 되찾고 복수를 하기 위해 발리노르를 떠나 암흑에 잠겨 있던 가운데땅으로 온다. 그때에 그들을 이끌던 실마릴의 창조자 페아노르는 대부분의 무리들을 배신하고 자신과 아들들, 그리고 그 직속수하들만 데리고 몇 안되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버린다. 남겨진 요정들의 일부는 피나르핀의 영도 하에 발리노르로 돌아가야만 했고, 하지만 그의 아들들과 딸들은 가운데땅을 보고 싶은 열망과 버려졌다는 배신감 때문에 계속해서 가운데땅으로 가기로 한다. 당시에 발리노르의 북쪽과 가운데땅의 북쪽은 얼음의 대지 헬카락세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수천의 요정들을 이끌고 수많은 희생을 겪으며 그들은 마침내 헬카락세를 건너 가운데땅에 도착한다. 얼음의 대지를 건너며 오빠들과 함께 백성들을 이끌면서 갈라드리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운데땅에 온 뒤에 갈라드리엘은 모친의 친족인 텔레리 요정이었던 켈레보른과 혼인하고, 자신만의 영토를 찾아 떠난다. 그리하여 그녀와 일족들은 제1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끔찍하고 슬픈 사건들에서 떨어져 소식만을 접할 수 있었고, 갈라드리엘이 찾아낸 숲은 저 발리노르에 있었던 로리엔의 숲에 비견될만큼 아름답게 가꾸어질 수 있었다.

제2시대가 되어 사우론은 아름답고 고결한 모습으로 요정들을 현혹시켜 힘의 반지를 만들게 하는데, 갈라드리엘 또한 그 반지를 갖게 되었다. 요정의 세 반지 중 하나인 대지의 반지 '넨야'를 가진 그녀는 반지의 힘으로 자신의 왕국을 놀랍도록 풍성하게 가꾸지만, 이어진 사우론과의 거대한 전쟁을 겪으며 제3시대에는 차츰 은둔의 숲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이제 요정들은 공공연히 나서지도 않았고, 숲속에 숨어 자신들만의 방식을 지켜가기만 했으며, 따라서 고 시대에 요정과 교류한 적이 없었던 인간들(브리나 로한 인들, 던랜드인들, 하라드와 룬의 인간들)에게, 그리고 동쪽의 난쟁이들에게 그녀는 숲의 여주인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된다. 사실 알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두렵기 마련이고, 두려움은 왜곡을 낳는다. 단지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숨어야만 했던 그들인데, 결국 그것이 수많은 가운데땅의 의로운 자유 종족들로부터 불신과 공포만을 낳게 한 것이다. 오랜 옛날에는 분명 리벤델에서 모리아를 지나 로스로리엔으로 가는 길이 열려있었는데, 요정 때문인지 난쟁이 때문인지 그 길은 막혀버렸다. 대화 없는 단절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리고 그 단절을 다시 여는 것 또한, 설사 양쪽이 언제나 서로 통하길 바라고 있었다 해도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그리 힘들었던 요정과 난쟁이의 연결을, 세 가닥 머리카락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반지원정대가 떠나던 날, 그녀는 여덟 원정대원에게 각기 선물을 주는데, 난쟁이 김리 만큼은 다른 선물을 바라지 않고 오직 그녀의 머리카락만을 원했다. 김리의 손재주로 그 세가닥 머리카락은 불변의 수정 속에 담기어 김리 가문의, 그리고 난쟁이 종족 모두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고, 그녀가 가운데땅을 떠나간 후에도 그 머리카락은 남아 세개 시대를 살아온 위대한 여왕을 기리는 유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대지처럼 강하고도 유연하며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위대한 어머니와도 같은 여왕인 그녀조차도, 절대반지의 유혹 앞에는 일시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힘을 가지고 있다면, 힘을 쓰는 것에는 묘한 중독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힘을 결국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차라리 그 힘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거두어 가지려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일 것이다. 그리고 반지의 힘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졌기에 자신만이 지켜내고 스스로 거두어야 한다. 절대반지를 그냥 주겠다는 프로도의 말은 감당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위대한 힘을 버리고 고향 발리노르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반지가 파괴되고, 피나르핀 가문의 반지를 가진 인간이 다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녀의 눈앞에서 또 하나의 시대가 저물었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가운데땅에서는 이제 그 누구의 얼굴에서도 발리노르의 빛을 볼 수 없다. 우리들은 이제, 어쩌면 영원히,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잃어버렸고, 모든 것은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잊혀져 가는 것들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리고 슬프다. 그것이 요정의 운명이었고, 그녀는 그 운명의 대표자였다.
,



엘론드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우론이 가운데땅의 악의 군주가 되기 전의 시대, 모르고스가 발흥하던 그 어두운 시대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모르고스는 본디 신족 발라의 일원이었으나 자신의 힘을 과신하며 소유욕에 넘쳐 세계를 어둠으로 몰아간다. 그의 부하들은 발로그라 불리는 불의 영, 불을 뿜는 드래곤, 늑대인간과 유령 등 온갖 세상의 사악한 모든 것이었으며, 단언코 그중 최고의 사악함은 모르고스 자신. 그 두번째는 충실한 부관 사우론이었다. 그는 발라들의 땅 발리노르를 빠져나오면서 위대한 보석 실마릴을 훔쳤는데, 이는 놀도르 요정 왕자이자 유한한 자들 중에 가장 강하고 아름다웠던 페아노르의 작품으로, 요정들은 실마릴을 되찾기 위해 발리노르를 떠나 가운데땅으로 와서 길고 희망없는 전투를 벌이게 된다.

페아노르의 동생 핑골핀은 핑곤을 낳고, 모르고스와 1대1 결투를 벌이다 쓰러졌으며, 핑곤은 길갈라드를 낳아 미리 멀리 해안으로 피신을 보낸다. 핑곤의 동생 투르곤은 은둔의 도시 곤돌린의 왕으로, 그는 아름다운 이드릴 켈레브린달을 낳았으며, 그녀는 인간 투오르를 남편으로 맞아 에아렌딜을 낳는다. 에아렌딜은 곤돌린이 모르고스의 침입으로 몰락할때 시리온 강 하구로 피난하여, 먼저 피난왔던 저 유명한 베렌과 루시엔의 손녀 엘윙을 아내로 맞아 엘론드를 낳는다.

이 어마어마한 가계의 말단에 있는 엘론드는 놀도르의 왕족임과 동시에 인간족 최고(最古) 가문의 후손으로, 제3시대 말에 가운데땅에 살아있는 이들 중에서는 가장 고귀한 핏줄을 가진 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요정 사이에서 태어난 반요정(=페레딜)에게는, 발라들에 의해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엘론드는 요정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으며 동생 엘로스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여 인간 왕이 되었다. 그가 아라곤의 먼 조상이다.

엘론드는 시리온강 하구의 아름다운 항구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불행하게도 요정족의 내분으로 인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동생과 함께 사나운 페아노르의 아들들에게 포로로 잡혀간다.(여기에는 실마릴에 관계된 맹세의 저주가 얽혀있다.) 엘론드의 모친 엘윙은 바다의 신 울모의 도움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두번다시 엘론드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요정인 그들에게, 당시 가운데땅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기도 했던 마글로르는 포로라기보다는 손님처럼 대했고, 그들 사이에선 어느새 우정도 생겨났다. 엘론드는 그에게서 학문과 시, 음악을 비롯해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엘윙과, 바다에 나가있던 에아렌딜은 엘윙이 가진 실마릴을 갖고 발리노르에 닿아 발라들의 선처를 빌었고, 그리하여 발라와 발리노르에 남은 요정들의 대군이 가운데땅으로 습격해 와서 모르고스는 완벽하게 패배한다. 이 대전투는 지형을 모조리 바꾸어버려, 벨레리안드라고 불리웠던 요정들의 터전은 거의 모두 바다밑에 잠겼고, 엘론드의 고향 또한 이때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파멸의 전쟁으로 고시대가 끝나고, 제2시대에 엘론드는 놀도르 대왕 길갈라드 등과 함께 회색 항구를 세우고 대양에 새로 생겨난 누메노르 땅에 인간의 왕국을 세운 동생 엘로스의 후손들과 바다를 통해 교류하면서 긴 세월을 보낸다. 가운데땅 서부에 사는 모든 이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리벤델을 지은 것도 이무렵이었다.
엘로스의 후손들이 조금씩 권력과 소유욕에 집착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우론의 모르도르가 발흥하여 가운데땅에 남겨진 무지한 인간들을 괴롭히는 것도 지켜보면서. 사우론이 요정 왕국들을 방문해서 그들을 꾀어 힘의 반지를 만드는 것도 바라보면서. 엘로스의 후손들이 강대해져 사우론을 굴복시키는 것도 보면서. 그리고 마침내, 사우론의 꼬임에 넘어간 인간 왕이, 발라들을 향해 군대를 일으키는 것도, 그 댓가로 누메노르 땅이 철저하게 파멸하는 것도 지켜보면서 시간이 흘렀다.

절대 반지를 만든 사우론 때문에, 요정들은 죽어갔고, 망명해온 인간 왕족의 후손들과 연합해 거대한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는 충심으로 섬기던 놀도르 대왕 길갈라드도 잃었고, 동생의 먼 후손인 인간 왕 엘렌딜도 잃었다. 다고를라드 평원에서는, 오르크와 요정을 제외하고는 가운데땅의 모든 존재들이 둘로 나뉘어 싸웠다. 이 거대하고 처절한 전장의 한 가운데에 지휘관으로 서 있던 엘론드는, 전투가 끝난 뒤 한없이 널린 시체의 벌판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나스 티리스 전투가 끝난 후의 펠렌노르 평원과는 비교도 안되는 거대한 시체의 평원은, 3천년이 지난 뒤에도 광대한 늪이 되어 남아 프로도의 발목을 잡았다.

불의 산 기슭에서 엄청난 희생을 더 치른 끝에, 엘론드와 이실두르는 사우론을 베고 절대반지를 손에 넣었지만 결국 반지는 버려지지 않았다. 이실두르가 반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불의산에서 내려갈 때, 엘론드의 마음 속에선 자신에게도 일부 흐르고 있던 인간의 피에 대한 한없는 실망. 불신. 슬픔. 고통.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흘렀을 것이다. 3천년이 지났어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아픈 장면은 차라리 잊고 싶지 않았을까. 다고를라드와 불의 산 기슭에서 죽어간 수많은 인간과 요정들의 피는 결국 헛되었던 것이었나.

갈라드리엘 마님의 딸 켈레브리안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둔 그에게는 아직 시련이 남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놀도르가 죽어, 이제 요정 왕국은 예전처럼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없게되었고, 대부분의 옛 땅들은 황무지가 되었다. 엘론드는 살아남은 이들의 군주가 되었지만, 초록 큰숲에는 어둠이 스며들고, 오르크들은 다시 대지를 활보했으며 아내는 결국 친정에 다녀오는 길에 오르크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고 가운데땅을 먼저 떠나버리고 만다. 그리고 먼 친척이면서 몰락한 왕족의 후예 아라곤을 기껏 보살펴 줬더니 나이먹어서 한다는 소리가 보석보다 아름다운 따님을 달라니. 5천년을 살아온 요정군주에게 당당하게 선 채로 요구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는 딸을 사랑했기에, 3천년 전의 그 불신을 버리고 실날같은 믿음과 희망을 아라곤에게 걸었다.
"나는 인간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네."

요정의 세 반지 중 하나, 금강석이 박힌 공기의 반지 '빌랴'의 주인으로서, 그는 치유술의 대가였으며 요정 뿐 아니라 모든 가운데땅 자유민들의 중재자였다. 세상이 줄어들어 요정도 난쟁이도 인간도 예전처럼 살지 못하게 된 제3 시대 말엽엔 사우론을 미워하는 이들사이에서도 불신이 횡행했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시대에 엘론드의 리벤델만은 모두의 피난처이자 훌륭한 회의장으로 기능했다. '음식을 먹거나 노래를 듣거나 이야기를 듣거나 또는 이 모든 것을 다 함께 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리벤델은 비록 그가 직접 보았던 고 시대의 찬연한 요정 도시들과는 비할 수 없겠지만, 모든것이 쇠퇴해가는 시대에 마지막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저녁별의 땅이었다. 물론 공기의 반지 빌랴의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엘론드 자신의 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반지는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요정반지도 힘을 잃었다. 놀도르는 하나 둘 가운데땅을 떠나 발리노르로 향했고, 이제는 그도 친애하는 빌보를 비롯해 많은 일행을 데리고 간달프와 함께 가운데땅을 떠난다. 서쪽 땅 발리노르에 닿았을 때에 그는 5천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도 그 땅에서 실마릴을 이마에 달고 배를 몰아 하늘을 항해하는 그의 부친과, 언제나 해안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모친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까. 인간으로 살다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나버린 엘로스를 그리워하면서, 그토록 인간의 길이 가진 슬픔을 이야기해주었어도 인간의 길로 가버린 아르웬을 그리워하면서, 그는 부모와 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


아르웬 운도미엘
저녁별 왕비

가운데땅의 역사를 통틀어 요정과 인간의 혼사는 총 세번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베렌과 루시엔, 두번째는 투오르와 이드릴이었고, 두 혼사는 모두 '고시대'라고 불리는 제1시대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 가운데땅에는 요정 왕국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인간들은 그들 사이에서 그들을 받들며 살거나 혹은 그들의 적이 되었다.
베렌과 루시엔의 손녀인 엘윙과, 투오르와 이드릴의 아들인 에아렌딜이 혼인하여 낳은 두 아들이 바로 엘론드와 엘로스이며, 이들은 모두 반요정(페레딜)이었기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로 발라들에게 판결을 받았다. 엘론드는 요정이 되기를 선택했고, 엘로스는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다. 이들의 슬프고 힘겨운 이야기는 모두 '실마릴리온'에 전해져 내려온다.

엘론드는 그 후 갈라드리엘의 딸 켈레브리안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 하나뿐인 딸이 바로 아르웬이다. 전설의 보석 실마릴을 얻었던, 가운데땅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강했던 여인 루시엔의 손녀의 손녀이자, 실마릴을 이마에 달고 지금도 창천을 항해하는 위대한 뱃사람 에아렌딜의 손녀이기도 한 그녀이다.

이런 대단한 가계의 후손이며 3천년을 살아온 요정의 귀인이지만 그녀 역시 할머니의 할머니 루시엔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요정의 영생을 포기하고 사랑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사랑은 추억만으로 간직하고 영생을 누리겠는가.

원정이 있기 이미 500년도 전에, 어머니 켈레브리안은 친정에 다녀오던 중 오르크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고, 그리하여 가운데땅에 마음이 멀어져 벌써 발리노르로 떠나간 뒤였다. 가운데땅에서 태어나 자란 아르웬에게 발리노르는 돌아가고픈 고향이라기보다 그저 먼 친척들이 행복하게 사는 아득히 먼 땅일 뿐이었지만, 원정이 시작될 무렵에 이르러서 아르웬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에스텔(아라곤의 아명)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치열하게 번민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세상의 모든 딸들이 겪어야 하는 홍역이겠지만, 영생을 살아가는 요정에게 있어 수천년을 함께 살아온 가족이란, 고작 20~30년을 함께 살아온 인간의 가족과는 비할 수 없는 사랑이 안겨있지 않을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 다가온 사랑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요정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니.

"얘야. 네가 아무리 열왕의 후손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나 높은 목표로구나. 그녀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들 중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아라곤의 모친이 처음 아라곤의 마음을 알았을 때 아들에게 했던 말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몰락한 집안의 마지막 후손인 데다, 그마저도 다시 옛 영광을 되찾기는 커녕 결국 아주 스러지고 말 위험이 더 크다면 과연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영원히 헤어져 그를 위해 함께 해줄 수 있을지. 지금 이 글을 읽는 이가 여자라면,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문제일 지도 모르겠다.

"그녀에 비하면 자네는 여러 차례의 여름을 넘긴 젊은 자작나무 곁으로 삐져나온 1년생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네."
이 것은 엘론드가 아라곤에게 한 말이다. 아득하게 살아온 그녀가 어찌 이제 갓 성년이 된 인간 청년 에스텔을 만났을 때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글쎄, 사랑은 위대하다는 말로 설명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였을 것이다. 아라곤이 혼자 그녀를 열망한다면 몰라도.
"네 아버지는 사랑하지 않느냐?"
그러나 결국 아르웬은 3천년을 함께 해온 아름드리 거목과도 같은 아버지나 형제들보다도, 이제 막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는 새싹에 지나지 않을 에스텔을 선택하고 말았다. 오래전에 루시엔이 그랬듯 영생의 권리도 포기하고, 반요정으로서의 선택인 유한한 죽음과 영생에의 기로에서 아르웬은 사랑에 이끌려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반지는 파괴되고, 그녀의 에스텔이 인간의 왕이 되었으며 저녁별 왕비는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할머니 갈라드리엘도 떠났고, 아버지와 두 오빠도 모두 떠나갔다. 사랑하는 에스텔도, 노년에 이르러 먼저 숨을 거두었고, 그녀는 슬픔에 잠긴 채 처음 에스텔과 미래를 약속했던, 이제는 모두 떠나고 텅 비어버린 로스로리엔으로 가 한동안 살다가 마침내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 엘론드가 보았던 미래는 아마도 이 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이야기다. 그 하향 평준화를 향해 스스로 내려선 그녀. 정말로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녀에게서 요정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 왕의 후손들이, 3만년을 이어내려온 가계가 계속 이어졌으니 뜻 깊은 혼인이었겠지만, 과연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회한의 그림자로 가라앉지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에스텔 만으로 마음을 꼭 채울 수 있었을까. 이제 겨우 20년 남짓 살아왔고 여자도 아닌 필자에게 더 이상의 추측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프로도를 구하지만, 소설에서는 리벤델의 대장 중 하나이며 과거에 곤도르의 에아르누르 왕과 연합해 앙그마르의 마술사왕 군대와 전투를 벌여 이긴 적도 있는 글로르핀델이 한 일로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


"길을 나서면, 한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돼. 어물쩡 거리고 그냥 가다간 길이 널 어디로 데려갈지 아무도 모르거든."

대대로 부유한 배긴스 집안의 상속자 붕고 배긴스는 씩씩한 아가씨 벨라도나 툭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빌보 하나만을 두었다. 벨라도나의 마음에 들게 하도록 그는 호비턴에서 제일 화려하고 멋진 굴집을 팠는데, 워낙 대규모 공사였기에 툭 집안에서 보낸 결혼 지참금까지도 공사비에 보탤 정도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백엔드에서, 빌보는 어머니 쪽 가계에서 물려받은 모험심과, 아버지 쪽 가계에서 물려받은 차분한 성격 모두를 내면에 간직하며 자라났다.

50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그의 외가쪽 성격은 간달프의 자극으로 밖으로 튀어 나올 수 있었고, 그는 일생을 바꾼 대모험을 하게 된다. 참나무 방패 소린을 포함한 유랑하는 난쟁이 왕족 열 두 명과 간달프와 함께 외로운 산을 차지한 드래곤 스마우그를 처치하러 떠난 것이었다. 빌보는 도둑 클래스로 이 파티의 일원이 되었는데, 무한 클로킹이 가능한 아이템 절대반지를 입수함으로써 도둑으로서의 임무를 매우 성실히 수행하게 된다.

이 모험길은 동로를 따라 리벤델을 지나서 안개산맥을 넘어 어둠숲과 호수 도시를 거쳐 목적지인 외로운산에 이르렀는데, 빌보는 그 와중에 트롤 셋을 만나 고초를 겪기도 했고(그들이 해가 뜰 때까지 요리법을 두고 옥신각신한 결과 돌이 된 결과물은, 프로도가 마술사왕의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맬 때 일행이 아셀라스 풀을 찾은 근처이기도 하다), 안개산맥을 넘다 고블린과 싸우기도 했다. 어둠숲에서는 거미떼를 만났다가, 요정들에게 붙잡힌 난쟁이들을 구출해 강을 타고 호수도시에 이르렀고, 외로운 산에서는 드래곤이 죽은 뒤에 보물을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과 요정과 난쟁이와 오르크들과 와르그(늑대) 떼거리까지 모두 모여 다섯 군대의 전투라고 불리게 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무언가 재미나지 않은가? 반지 원정대의 여정과 비교해보자. 프로도도 동로를 타고 내려오다 나즈굴에게 고초를 겪고, 리벤델을 지나 안개산맥을 넘으려다 모리아에서 고블린에게 쫒겼으며, 로스로리엔에서는 강을 타고 내려갔다. 거미 여왕 쉴롭과도 싸웠으며, 샘은 프로도를 구출해냈다. 헬름 협곡과 미나스 티리스, 검은문에서는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다. 그들의 모험은, 결국 빌보가 겪었던 모험의 확장판인 셈이다. 심지어 마지막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순간에 독수리가 구해준 것까지도 똑같았다. 피핀이 "독수리다! 독수리가 와요!"라고 외쳤던 것처럼, 빌보도 다섯군대의 전투 와중에 독수리를 보고 기쁨에 겨워 크게 외쳤던 것이다.

모험길 중 안개산맥 어딘가에서 고블린에게 쫒겨 땅속을 헤메다가, 그는 골룸이 잃어버린(정확히는 골룸을 내버린) 절대반지를 줍게 된다. 그리고 골룸을 만나 수수께끼 놀이를 하게 되고, 그 마지막 승부는 이렇게 났다.
"내 주머니에 있는 게 뭐지?"
전통적인 수수께끼 놀이에는 맞지 않는, 평문의 문제였지만, 골룸은 이것에 답을 하려 했기에 결과적으로 지게 된 것이다. 주머니에 있던 건 골룸의 소중한 보물이었고, 그리하여 빌보는 엉겁결에 반지를 낀 채 골룸으로부터 달아나다가 마침내 땅속에서 탈출한다.

이 후의 모험에서도 그는 수없이 반지를 사용했고, 모험에서 돌아와서도 그는 반지를 종종 쓰곤 했다. 그가 반지를 자꾸 쓴 것은, 호비턴에서의 그의 생활이 결코 즐겁지많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촌과 결혼한 로벨리아는 빌보가 떠나서 돌아오지 않자 자신이 백엔드를 상속받으려 했고, 한참 그녀가 그 일을 실행하던 차에 빌보가 다시 나타나게 되자, 두 호빗은 이후 평생의 앙숙이 된다. 빌보는 그녀의 눈에 자신이 발각되는 것조차 싫어했고,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로벨리아를 보면 주저없이 반지를 끼곤 했다.

이렇게 늘 반지를 지니고 자주 사용한 결과, 빌보는 그후 60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느 호빗과 달리 늙지를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간달프는 의심을 하지만, 간달프가 아는 바로는 빌보의 외가인 툭 집안엔 유독 장수한 노인들이 많았기에 (130세라는 최장수 호빗 기록도 툭 집안의 유명한 '툭 노인'이 갖고 있었다. 이는 후에 빌보에 의해 깨어진다.) 시간을 두고 계속 지켜보는 실수를 하게 된다.
"호빗들과 친해서 눈이 먼 거로군."
사루만의 지적은, 어느정도 사실이었다.

반지는 물론 계속 빌보의 곁에 머물러 있었지만, 빌보는 놀랍게도 그 반지를 스스로 남에게 주는 과업을 달성해냈다. 간달프가 아는 한 이는 빌보만이 할 수 있었다. 이실두르도, 골룸도 모두 반지가 그들을 버렸던 것이지만, 빌보만은 자신이 반지를 버린 것이다. 반지는 프로도에게 상속되어, 마침내 운명의 산으로 끌려가 파괴되고 만다. 그 시작은 빌보가 반지를 포기한 그 위대한 행위에서 비롯했기에, 요정들은 빌보 역시 반지 운반자로서 충실한 예우를 해 주었고, 그는 리벤델에서 귀한 손님으로 여생을 보냈다.

시와 노래에 능하고, 요정어로 된 수많은 가운데땅과 누메노르의 옛 기록들을 찾아 서방 공용어(그러니까, 영어)로 정리하곤 했던 이 노학자는 마침내 최장수 호빗 기록인 131세를 기록하게 된 어느 날, 요정들과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프로도와 함께 발리노르로 떠나게 된다. 안정적이었고 유복했던 청년시절과 장년기의 위대한 모험, 그리고 방대한 지적인 모험 속에서 누구보다도 안정되게 살아온 노년기. 결혼도 하지 않았고 사랑도 하지 않았지만 빌보는 언제나 떠나고픈 모험심과 정착하고픈 마음 사이에서 그 둘의 균형을 잡아가며 긴 생애를 살았고, 그의 삶은 그것만으로도 충실하고 위대했다. 그가 남긴 숱한 저서들이 대대로 호비턴과 웨스트마치에서 필사되고 증본되며 후대에 전해진 덕분에, 오늘날 우리들도 반지 원정대가 결성되기 전의 가운데땅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


"내 이름은 나라들의 수 만큼이나 많지. 요정들은 미스란디르라고 부르고, 난쟁이는 사르쿤, 젊은 시절 지금은 잊혀진 서방에서는 올로린이라고 했네. 남쪽 땅에서는 잉카누스, 북쪽에서는 간달프라고 하지. 동쪽으로는 가본 적이 없고."
- 두 개의 탑 中

'이스타리' 라고 불리는 이들은 모두 다섯으로, 인간이나 호빗들은 이들을 마법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스란두일 왕의 초록 큰 숲의 남쪽에 어둠이 스며들어 '어둠숲'이라고 불리게 되었을 때쯤에 회색 항구를 통해 가운데땅에 들어왔다. 영생의 땅 발리노르에서 사우론의 악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한 이들은 강대한 능력을 가진 반신족, 마이아들이었지만, 직접 자신의 힘으로 사우론에 대항하는 것만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 수장은 사루만, 요정들은 쿠루니르라 부르는 자였고, 그는 서녘의 인간들과 접촉했으며 본래 곤도르의 서쪽 끝 요새였던 아이센가드에 정착했다. 라다가스트는 독수리를 비롯한 온갖 날개달린 이들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온 가운데땅의 정보를 모았고, 간달프는 요정들과 주로 접촉하면서 한곳에 머물지 않고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나머지 두명은 각각 동쪽과 남쪽 땅으로 들어가 그 후로 언급되지 않고, 이 마법사들과 요정의 군주들이 모이는 '백색회의'에도 출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우론의 악을 견제하고 그곳의 인간들을 선의 세력으로 돌리는데 실패하여 죽음을 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놀라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호빗들에게 있어서 간달프는 불꽃놀이를 벌이는 등 축제의 여흥을 돋궈주는 일종의 연예인이자, 아이들을 꾀어 위험하고 알 수 없는 바깥 세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곤 하는 요주의 인물에 불과했다. 호빗 아이들은 그를 보면 '위대한 간달프'라고 부르지만, 나이를 느리게 먹는 호빗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어렸을 적에 간달프를 보게 되면 '위대한 간달프!'를 연호하며 그의 마차를 쫒아 달음박질 쳤다는 것을 그 아이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간달프를 환대하며, 그가 바깥세상에서 겪는 헤아릴 수 없는 고초와 고민거리들을 잠시 잊게 해주는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던 프로도(그리고 아마도 빌보)에게서, 그러니까 가장 순수하고 연약하며, 주어진 막대한 과업을 해나가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던 그런 아름다운 호비턴에서 문제의 절대반지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종족으로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함과 준엄함을 가진 이 '마이아 올로린'에게는 크나큰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달리 선택할 도리가 없이 이 작은 이에게는 너무나 큰 짐일 그 부탁을 하게 되고, 그가 항상 생각하고 기대해 왔던 대로 프로도는 놀랍게도 과업을 해내고 만다. 간달프 자신조차도 할 수 없던 일을.

오랜 세월 가운데땅에서 살아오면서 수많은 지식을 익혔고, 그리하여 가운데땅 어디에서도 그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으며 알지 못하는 세상도 남지 않았다. 물론 그의 적 사우론과 그 부하들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많이 알았으며, 그들과 대항해 싸울 만큼 강대한 힘도 가지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자신이나 사우론과 동일한 '마이아'였던 존재, 발로그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한 정보가 없던 만큼 확고하게 승리를 다짐할 수 없었던 듯 했다.

비밀의 불꽃 아르노르의 충복이라고 발로그 앞에 선언한 대로, 그는 불의 마법사이며, 그의 불꽃은 적들을 물리칠 뿐 아니라 모리아의 어둠도 밝혔고 아몬 딘의 봉화도 밝혔으며 사람들의 가슴에도 용기와 희망의 불을 지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요정의 세 반지 중 하나였던 불의 반지 '나랴'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래는 회색항구의 주인이자 가운데땅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요정 중 하나인 선장 키르단이 가지고 있었는데, 키르단은 간달프에게 이것을 건네주었다.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는 가운데땅을 떠나 서녘 땅 발리노르로 향하는 이들을 전송해야만 하는 키르단은 자신보다는 간달프에게 오히려 반지가 어울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네 머리로 받아봐! 페레그린 툭! 그래도 안열리면 날 가만히 냅두고."
"다음엔 네가 직접 뛰어들어라! 그럼 걱정할 일도 없을 테니까."
불의 마법사인 만큼 그는 성격도 불같았지만, 결코 그렇다고 성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침착하고 용의주도한 편이었지만, 자신만큼 막강한 발로그 앞에서는 그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듯 하다.

잠깐의 방심으로 발로그와 함께 심연으로 떨어진 후에, 그들은 비록 관객이라고는 지하의 괴수들 뿐이었지만 저 고시대의 위대한 전투에 비견될만한 놀라운 싸움을 벌였다. 간달프의 검에서는 발리노르의 빛이 번뜩였고, 발로그의 채찍에서는 고대의 대마왕이자 사우론의 주인이었던 모르고스의 분노가 불꽃이 되어 일렁였다. 아마도 역시 모리아가 건재하고 난쟁이들의 문명이 꽃을 피우던 고시대부터 존재했을, 지하 깊은 곳에서 카라드라스 산정 꼭대기에 이르는 '무한의 계단'을 오르며 그들은 한없이 싸웠고, 간달프는 마침내 그를 무찔렀는데, 이 전투는 사실 펠렌노르 전투보다도 더욱 웅대한 노래로 불리워야 마땅할 것이다.

죽음의 끝에서 자신의 사명을 위해 다시 되살아난 간달프는 이제 사루만이 스스로 내버린 '백색회의의 의장' 역인 '흰색의 마법사'가 되어, 독수리의 왕 과이히르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행을 찾아온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그 누구도 태우지 않는 로한의 명마 섀도팩스를 타고. 사실 이 명마는 로한 왕가의 종마에게서 났지만 아무도 태우려 들지 않아 그저 방치되어 있었는데, 간달프가 사루만에게서 탈출한 후에 로한에 와서 경고를 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서(이미 세오덴은 사루만의 마법에 씌어있었다) 만나게 된 말이다.

피핀 때문에 한번 죽을 고비를 지나고, 아무도 보진 못했지만 역사에 길이 남아야할 전투를 치른 간달프는 이제 다시 피핀 때문에 황급히 미나스 티리스로 향한다. 백색 탑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백색의 마법사는, 샤이어 호빗들이 '위대한 간달프'를 연호하는 것과 꼭 같이 곤도르 백성들에게 '위대한 미스란디르'라는 외침을 듣는다. 팔란티르를 들여다보고 나날이 소심해져 가는 성주 데네소르보다는, 이 마법사의 존재가 곤도르의 병사들에게는 훨씬 큰 믿음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비록 실전 경험도 턱없이 부족한 병사들이지만(파라미르와 함께 하던 백전 노장들은 이미 오스길리아스에서 거의 모두 잃었다), 미스란디르의 영도 하에 그들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용감히 싸웠다. 3일이나 분전한 끝에 그들은 수없이 죽어가면서도 로한이 올 때까지, 그리고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왕이 돌아올때까지 왕을 위해 비워진 왕좌를 지켜냈다. 모든 것은 분명 위대한 미스란디르의 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검은 문 앞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웠던 간달프는 이제 모든 과업이 끝나자 너무나 엄청난 일을 맡아준 프로도를 구하고, 그에게 합당한 영예를 선사하기 위해 불길이 치솟는 운명의 산으로 과이히르와 함께 날아간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고, 일행이 모두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 뒤에도 프로도는 영예보다는 아픔과 함께 지냈고, 간달프는 내내 그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반지 원정대의 과업이 모두 끝나고 가운데땅이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을때, 그는 반지의 사자였던 빌보와 프로도를 데리고 영생의 땅으로 떠난다.

"그는 무척 위험하지. 나도 무척 위험하고 말이오, 난쟁이 양반. 살아 있는 채로 바랏두르에 끌려가지 않는 한, 가운데땅에서 당신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존재일 거요."
아라곤 일행을 다시 만났을 때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반신족 마이아인 만큼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적을 물리치기 보다는 가운데땅의 모든 자유민들이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도록 곁에서 거들기만 한다는 것은 대단한 자제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절대 반지를 거부하는 것 역시, 3개 시대를 살아온 위대한 여왕 갈라드리엘 마저도 일시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을 만큼 치명적인 유혹이었는데도 그는 심지어 손가락 하나 대지도 않았다. 힘이 있으되 사용하지 않는 것은 분명 없어서 못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일 것이니.

모든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영생의 땅으로 돌아간 뒤에 그는 아마도 마이아의 본모습으로 돌아갔을까. 혹은 여전히 간달프인 채로 프로도와 빌보의 곁에 머물면서 몇만년이나 오래전부터 전해지던 지혜의 노래를 불러주며 그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달래주었을까. 어쩌면 또 다른 임무를 가지고 가운데땅으로 돌아와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원정대의 다른 일행들은 모두 유한한 존재였지만, 무한한 그에게 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는 역시 유한한 존재에 불과한 필자에게는 상상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
,


에스텔
두네다인 족장, 아라손의 아들 아라곤2세, 두나단
이방인 소롱길
순찰자 스트라이더(성큰걸음)
곤도르 국왕 엘레사르 텔콘타르(요정의 돌, 성큰걸음)

엘렌딜과 그의 두 아들 이실두르 아나리온이 가운데땅으로 망명해 와서 세운 나라는 둘인데, 엘렌딜이 통치한 곳은 북방의 아르노르 왕국이었고, 이실두르와 아나리온이 나란히 통치한 왕국이 바로 곤도르이다.
사우론과의 전투로 인해 엘렌딜과 아나리온이 죽은 후, 이실두르는 엘렌딜의 장자 자격으로 왕권을 이어받기 위해 아르노르 왕국으로 향하다 반지의 배신으로 죽고 만다. 그의 가솔들은 리벤델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어린 아들이 왕위를 이어갔다. 아르노르 왕국은 이렇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앙그마르의 마술사 왕과의 전쟁으로 인해 마침내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아르노르 왕들은 곤도르의 왕이 사라진 뒤 그 왕위를 주장했었지만 섭정들은 이를 거절했다. 그때만해도 에아르누르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르노르까지 몰락하자 왕위를 이어나갈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두네다인이라 불리운 북방 왕족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그 족장들의 인도 하에 조상들이 통치했던 북방 왕국의 옛 영토 안을 떠돌며 사악한 것들로부터 선량한 자유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순찰자가 되었다. 리벤델은 이들이 머물고 쉬며, 가족들을 돌볼 수 있는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아라곤이 처음 출생했을 때는 에스텔이란 가명으로 불리웠으며, 그의 혈통 역시 철저히 감춰졌는데, 이 당시에 어둠숲 남쪽 돌 굴두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발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아라손2세는 순찰자로 황야를 떠돌다 그가 어린 시절에 죽고 말았다.
20세가 되기까지, 소년 에스텔은 요정들 사이에서 자라나며 풍부한 학식을 쌓고 또한 엘론드의 아들들에게서 무예를 연마하며 지냈다. 갓 20세가 되었을때는 엘론드의 아들들과 함께 순찰자가 되어 길을 나서 훌륭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 때에 이르러 그는 비로소 자신의 출생의 비밀과 혈통을 어머니로부터 듣고 가보인 부러진 나르실을 받게 된다. 나르실은, 절대반지가 다시 나타나고 사우론이 힘을 발할때까지 다시 벼려지지 않을 것이란 엘론드의 예언대로 항상 부러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무렵까지 아르웬은 외가인 로스로리엔에서 지내다 리벤델로 돌아오는데, 아라곤은 우연히 리벤델에서 아르웬을 만나게 되고, 마치 옛 이야기의 베렌과 루시엔이 그랬던 것처럼 한순간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로 아라곤은 아르웬에게는 언제나 아명인 '에스텔'이라 불리웠으며, 심지어는 임종의 순간까지도 그러했다. 훌륭한 스승이자 보호자였고 그를 무척 사랑했던 엘론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고, 아라곤은 사랑과 운명 사이에서 번민하다 마침내 순찰자로서 먼 수행을 떠난다.

소롱길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남쪽으로 떠나간 그는 세오덴의 부친 셍겔 왕이 다스리는 로한에 가서 던랜드인의 습격 등에 함께 대항하기도 한다.
"세오덴이 통치하는 로한과는 친구 사이요."
다시 길을 떠나 곤도르에 온 이방인 소롱길은 엑셀리온 2세 섭정의 총애를 받았고, 당시 젊은이였던 데네소르를 제치고 다음 섭정이 될지도 모른다는 여론까지 조성되었다. 소롱길과 데네소르는 항상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장에 나서, 모르도르의 끄나풀들을 수없이 해치웠지만, 데네소르보다는 소롱길에게 모든 이의 마음이 모아진 것이다. 그러나 소롱길 자신은 언제나 한 사람의 대장 이상의 처신은 하지 않았으며, 데네소르에게도 주군의 예로 대했다. 그러나 아마 예지가 뛰어난 데네소르는 어느정도 그의 정체를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나도 백색 탑을 본 적이 있지. 보로미르."
곤도르가 그렇게 또한번 위기를 넘기자, 소롱길은 이제 떠나겠노라고 엑셀리온 섭정에게 말한다. 미나스 티리스의 모든 백성이 그를 아쉬워 했지만 그는 홀연히 떠났고,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본 그의 행로는 어둠산맥을 향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정면으로 싸워야 할 적을 탐색하며 이렇게 수행을 쌓던 아라곤은, 북방으로 다시 향하다 로스로리엔에서 쉬어가게 되고, 이때 이곳에 와있던 아르웬을 다시 만난다. 두 연인은 여기서 미래를 다짐하고, 아라곤은 다시 길을 떠나 북방의 순찰자로써 두네다인 족을 이끈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외로운 산의 드래곤 스마우그가 호수 도시에서의 전투로 죽고, 다섯 군대의 전투가 일어나고, 빌보는 반지를 얻어 샤이어에 돌아왔다. 그리고 빌보의 생일 잔치가 벌어지고, 간달프는 반지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함께 황야를 떠돌며 돌굴두르 공략을 비롯해 많은 전투를 같이 치른 아라곤과 간달프는 상의 끝에 둘이 함께 이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반지가 나타났으므로 부러진 검은 다시 벼려진다.

서부의 불꽃 안두릴을 들고 아라곤은 간달프와 함께 원정대를 이끌어 남향을 하지만, 아몬 헨에 이르러 보로미르가 죽은 뒤에는 미나스티리스로 돌아가 왕위를 주장하고 싶은 욕구와 프로도를 운명의 산까지 지켜주고 싶은 의무감 속에서 수없이 번민하게 된다. 그는 보로미르 이상으로 자신의 적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어떠한 방법도 희망이 희박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희망은 언제나 희박했지." - 간달프
어느 길도 위험한 그 선택의 기로에서, 그가 택한 것은 결국 친구와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신념이었다. 두 호빗을 구한다는 것은 사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추격이었지만 그는 결국 해냈다.
"우린 친구를 구하기로 했소. 말이 없다면 걸어서라도 쫒을 것이고, 또 적의 수가 얼마나 되는 지는 칼로 세어보면 될 것이오."
그리하여 그는 친구 뿐 아니라, 사루만의 배신으로 위기에 처한 로한 왕국까지도 구해낸다.

그리고 마침내 곤도르로 향하고, 맹세를 어겨 죽은 뒤에도 떠나지 못하는 산속의 배신자들까지 제3시대 최대의 전투에 끌어모은다. 이실두르의 저주는 그에 의해 풀렸고, 마침내 죽은 자들도 3000년의 기다림 끝에 충성을 받아줄 왕을 만나 명예를 되찾고 영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라곤은 이제 프로도와 샘을 돕기 위해, 펠렌노르 전투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검은문을 치기 위해 나선다. 확실하지 않지만, 사실, 아주 작은 가능성밖에 없지만, 그는 원정대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웃음거리군요. 전성기의 곤도르였다면 선발대도 안되는 병력으로 모르도르를 치러 간다니. 그 자는 코웃음을 치며 문밖을 내다보지도 않을 겁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은, 곤도르의 영주들 중 하나였던 돌 암로스의 임라힐 왕자가 한 말이다.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면 안된다.
그대들의 눈 속에서, 나와 똑같은 공포를 보았다.
오르크가 승리하고, 인간이 패배하는 그런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은 아니다.
인간의 용기가 땅에 떨어지고, 우리의 동맹이 깨어지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은 아니다.
지금 이날! 우린 싸운다!
그대들이 이땅에서 향유할 그 모든 것을 걸고, 끝까지 싸우기를 명한다. 서부의 인간들이여!"

영화에만 나온 대사로, 소설에는 이 명연설이 없다. 하지만, 분명 아라곤이라면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죽음보다 지독했던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 반지는 파괴되고, 아라곤은 왕으로서 미나스 티리스에 귀환한다. 제3시대 말기에 "왕이 귀환하면" 이라는 말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과 동의어라는 얘기는 아마 이제 독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해는 서쪽에서 떠올랐다. 곤도르의 왕위가 이어졌고, 그 혈통은 본디 엘렌딜과 이실두르의 직계 후손이었으며, 이들은 탐욕과 오만으로 멸망한 서쪽 섬나라 누메노레 왕족의 후손이자 요정을 따르던 충직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엘로스 타르미냐투스의 직계 후손이며, 엘로스는 엘론드의 동생으로, 같은 반요정(페레딜)이었지만 요정의 삶을 택한 엘론드와 달리 인간의 왕이 되기로 한 자였다.
엘론드와 엘로스는 에아렌딜과 엘윙의 아들들이며, 에아렌딜은 위대한 보석 실마릴을 가지고 분리의 대해를 항해하여 영생의 땅 발리노르에 닿았다. 그의 도착으로 인하여 마침내 발리노르는 사우론의 주인이었던 모르고스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이던 가운데땅의 요정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대 전투가 벌어졌고 모르고스는 세상 밖으로 쫒겨나 고 시대가 끝났다. 에아렌딜의 별 실마릴의 빛은 갈라드리엘이 프로도에게 준 유리병에도 담겨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계보로도 수천년, 요정의 계보로는 3만년에 이르는 고귀한 혈통은 다시 자신의 권리를 되찾았고, 아르웬 왕비를 맞이한 그에게서 요정의 피가 흐르는 인간 왕의 계보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그의 핏줄에 흐르는 힘은 인간들을 하나로 모았고, 그의 신념은 거대한 사우론의 힘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으며, 항상 실날같던 희망마저도 그의 도전 앞에 당당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금준미주와 옥반가효로 호사를 누릴 수 있고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는 곤도르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순찰자 시절과 다름없이 "깡총거리는 망아지" 여관의 맥주를 칭송하며 샤이어에서 온 '롱버텀' 상표 연초를 피웠다. 평생토록 그는 메리와 피핀을 비롯해 사우론과의 전투에서 함께 했던 숱한 친구들 - 김리, 레골라스, 에오메르... - 과 각자의 방식으로 우정을 이어나갔고, 메리와 피핀은 죽은 뒤에도 왕의 곁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지금도 미나스티리스의 왕가의 묘역에 들어서면,(그 전에는 누메노르 왕국의 전통이었던)곤도르 왕가의 전통에 따라 영원히 썩지 않도록 처리되어 아름답게 안치된 위대한 왕과, 그 두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데네소르의 아들 보로미르
곤도르의 대장

이실두르가 절대반지의 배신으로 오르크의 화살에 맞아 죽고 나서, 곤도르의 왕위는 이실두르의 조카 발란딜이 이어받았다. 사우론과의 전쟁으로 인해 국토는 황폐해졌고, 인구도 급감하여 곤도르의 국력은 쇠퇴 일변도를 걸었다. 외세의 침입이나 왕족들의 내분, 기근과 역병 등을 겪으면서, 모르도르 주변 곳곳에 세워둔 초소마저 유지가 불가능해 모두 철수하게 된다. 그 후로 비어있던 미나스 모르굴에 아무도 모르게 다시 마술사왕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제3시대 2050년, 에아르누르 왕은 마술사왕의 요청에 의해 1대1 결투를 치르기 위해 미나스 모르굴로 떠나지만, 그후로 누구도 왕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투사의 무용에만 관심이 있던 왕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왕족들은 수가 극히 적어 정당한 후계자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에 왕권을 인계받았던 섭정 마르딜 보론웨에 의해 섭정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그후로 데네소르 2세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26대의 섭정이 곤도르를 다스렸다.
섭정은 "국왕께서 돌아오실때까지 나라를 맡아 다스린다"는 서약과 더불어 직위를 맡았고, 이 직위는 계속해서 세습되었다. 권력은 왕권과 전혀 다름없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높은 단 위에 있는 왕좌에는 오르지도 않았고, 그 아래 섭정의 자리에 앉았다. 이실두르의 아버지 엘렌딜의 시절부터 내려오던 왕관은 항상 에아르누르 왕이 두고 간 그대로 왕가의 묘역에 남아있었다.

보로미르는 데네소르의 큰아들로, 그 역시 에아르누르 왕처럼 강한 투사였지만 전쟁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역사 공부조차도 게을리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에게 섭정이 왕이 되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소국이라면 몇년이면 되겠지. 곤도르라면 일만년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이에 그는 무척 실망했고, 섭정의 직위 자체에도 회의를 느끼게 된다. 천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왕 따위는 필요도 없다고 느낀 것이다.
10세의 어린 나이에 요정 여인처럼 아름답던 어머니를 병으로 잃긴 했지만 그는 훌륭히 성장하여 놀라운 용맹을 발휘해서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원정대가 출발할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로, 누메노르 혈통이 남아있는 곤도르인으로서는 젊은 축에 든다) 곤도르의 대장 직을 '직접' 수행하여 오스길리아스와 카이르 안드로스 등 오르크들이 점령했던 곳곳을 탈환하는 공을 세운다. 오스길리아스는 줄곧 전초기지로 활용되다가, 펠렌노르 전투 직전에야 적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직접 모르도르의 권세에 대항해 싸우면서 자신이 택한 적이 자신의 용맹만으로는 손톱자국만큼도 상처입히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점차 깨달아갔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희망을 잃었다.

리벤델에 찾아온 그의 본래 목적은 자신과 동생 파라미르가 같이 꾸었던 예지몽에서 일종의 예언과 같은 노래를 들었고, 그 것을 해석해달라고 현명한 엘론드에게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이실두르의 재앙'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반인족이 나타날 것이라는 그 노래의 의미를 알기 위해 찾아온 리벤델에서 그는 마침내 그 '이실두르의 재앙' 절대반지를 보게 되지만, 강인함에 걸맞는 용기와 희망을 갖지 못한 그는 반지에 의해 첫번째 공략 대상이 되고 만다.

전사로서 가장 강한 인간이었고, 또한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자국민에 대한 애정이 마음에 가득 차 있던 그에게 최고의 힘의 반지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가 배워온 역사에는 항상 암울한 배신과 패전만이 이어졌고, 그 자신또한 그렇게 스러질 거라고 항상 피부로 느끼면서 어둠산맥을 바라보고 살아온 그에게 그 모든 질곡의 역사를 한번에 뒤집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감정 표현에 서투른 그조차도 기쁨에 차서 자신의 주장을 소리높여 외칠 수 있게 해줄만 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반지는 인간이든 누구든 곤도르의 친구들에 의해서는 이용될 수 없었고, 원정대와 함께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자신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가 직접적으로 싸운 대상은 반지를 얻고자 하는 그 욕망이라기 보다는, 점점 절망만이 가슴을 채우는 자신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반지의 힘에 완전히 굴복하여 프로도를 궁지에 내몰고 나서, 그는 통곡하면서 다시 프로도를 부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 우르크하이의 습격에 최선을 다해 저항했고, 너무나 급박하게 싸우느라 그만 자신의 방패마저 가져오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방패를 들고 싸웠다면 그렇게 아쉬운 최후를 마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지에 씌인 채 종족 전체에 저주를 부었던 그 반인족인 메리와 피핀을 지켜 주려다 목숨을 잃은 후, 그의 시신은 원정대 일행에 의해 요정의 배로 장례를 치르게 된다. 곤도르에서는 먼 훗날까지, 그를 실은 요정의 배가 폭포를 빠져나와 안두인 대하를 타고 오스길리아스를 지나서, 별이 빛나는 밤에 바다로 나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훌륭한 전사였지만 심약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던 아쉬운 인물, 어쩌면 가장 평범한 인간다운 면이 많았던 등장인물인 보로미르는 그렇게 죽어서 신화가 되었다.
,


스란두일의 아들 레골라스

가운데땅에 처음 요정들이 나타났을 때는 달과 태양이 없었고, 세상을 밝히는 것은 별 뿐이었다. 그 때에 발리노르에는 빛을 내는 두 그루 신성한 나무가 있어 언제나 놀랍고 신성한 빛이 가득했고, 따라서 발라들은 요정들을 발리노르로 초대했었다.

이 초대에 응한 태도에 따라서 요정은 셋으로 나눠지는데, 제일 먼저 가장 빠른 길로 발리노르에 따라가서 그곳에 눌러앉아 두번다시 가운데땅에 돌아오지 않은 이들은 '바냐르' 라고 불렸으며, 온갖 기술에 능했던 '놀도르'라고 불린 일파는 발리노르에 갔지만 후에 모종의 원한과 맹세 등에 이끌려 가운데땅에 돌아온다. 그리고 '텔레리'라고 불린 요정들은 강과 바다, 항해를 사랑했고 가장 늦게 발리노르에 갔으며, 일부는 여행길의 중도에 아예 여행을 포기하고 그냥 가운데땅에 눌러앉고 말았다. 여기에 대한 아름답고 슬픈 방대한 이야기는 '실마릴리온'에 서술되어 있다. 이들은 인종적 특징도 조금씩 달라서, 텔레리는 보통 백금발에 밝은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놀도르는 아르웬이나 엘론드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검은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가 특징이었다. 단 갈라드리엘 마님의 경우엔 모친 쪽이 텔레리였기 때문에 자신은 놀도르의 왕족이지만 아름다운 금발을 가지고 있다.

'텔레리' 요정 중에서 가운데땅에 그냥 눌러앉아버린 요정들은 '신다르' 라고 불리며, 이들은 주로 은둔 왕국 도리아스의 주민들이었다. 도리아스가 난쟁이와의 불화로 멸망한 뒤로 이들은 곳곳을 헤메이다가, 스란두일이 이끄는 일파가 당시에는 '초록 큰숲'이라고 불리던 어둠숲에 정착하게 되었다. 레골라스는 스란두일 왕의 아들이다.

여기서도 난쟁이와의 불화는 또 있어서, 이들의 궁전 또한 난쟁이들에게 하청을 주어 지은 동굴 형의 궁전이었고 많은 보물과 무기를 그들에게 의뢰해 제작했지만 난쟁이들의 그 철두철미한 '보수의 요구'로 인해 결국엔 그들과 전쟁까지 벌이게 되었다. 빌보와 함께 떠난 열두 난쟁이들은 두린의 후손인 난쟁이 왕족들로, 스란두일과 악연이 있던 난쟁이들과는 그다지 크게 관계가 없었지만 어쨌든 어둠숲의 요정들은 난쟁이를 매우 싫어했다.

사실 그들은 난쟁이 뿐 아니라 자신들과 다른 종족이라면 일단 의심하고 보았는데, 거미라든지 오르크의 침입이라든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어둠숲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둠숲을 지나던 열두 난쟁이들을 체포한 것은(빌보는 그때 반지를 끼고 숨었었다) 요정들로서는 당연한 조치였으며, 따라서 글로인의 아들 김리와 레골라스는 본디 상당한 악연인 셈이다.

초록 큰숲에 어둠이 스며든 것은 원정이 있던 해에서 약 2000년 전으로, 레골라스는 이무렵부터 숲의 왕자로써 요정들을 이끌고 수많은 크고작은 전투를 치렀다. 원정대의 아홉 명 중에서 가운데땅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이는 바로 그였으며, 사우론에게 충성하는 그 어떠한 종류의 적과도 싸울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경험치를 가진 그가 원정대에 합류한 것은 1만 대군과 함께 떠나는 것 보다도 더 든든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수많은 레골라스의 비기들 : 달리는 말에 올라타기(분명, 연습했을 것이다. 그에겐 남는게 시간이니), 방패 보딩과 연속 사격의 조합, 무마킬을 혼자 트리플 샷으로 처치하기 등등은 그의 경력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 레골라스는 원정대의 아홉 명 중에서 가장 알려진 바가 적은 인물이다. <호빗> 에는 그가 출현하지 않고, <반지의 제왕> 에서도 원정대에 합류하기 전에 그가 했던 일은 간달프의 부탁을 받아 어둠숲의 감옥에 골룸을 잡아두었던 정도 뿐이다. 예전 열 두 난쟁이에게는 전혀 온정을 베풀지 않고 계속 가두어두었지만, 골룸에게는 어쩐 일인지 감옥에만 있으면 쇠약해질까봐 데리고 나가 바람도 쏘이곤 했다. 그러다 그만 골룸을 놓쳐버리고 말았고, 그는 이 안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어둠숲의 다른 요정들과 함께 간달프를 찾아 리벤델로 왔다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 또한 중요한 임무를 다른 잘 알지 못하는 종족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책임감 등이 작용하여 원정대에 합류하게 된다.

오랜 세월 가운데땅에서 살아온 그는 숲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고 나무와 교감하기도 했다. 팡고른에 들어섰을 때 그는 자기보다도 더 오래된 나무들을 만나게 되어 감동의 물결에 잠겼고, 그들의 아련한 추억들과 분노를 읽고 공감했는데 아마도 숲과 함께 살아온 요정 왕자에게는 나무에 도끼질을 해 베어내고 뽑아내는 것은 자신의 다리를 도끼로 찍어 끊는 것만큼이나 끔찍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것보다도, 그에게는 물을 사랑하는 타고난 항해 민족인 '텔레리'의 피가 흘렀기에, 수천년간 바다를 한번도 본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나스티리스로 가는 길에 바다를 접하고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나 파도소리 등 온갖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버렸다. 모든 임무가 끝나고 나서 결국 얼마 뒤에(인간의 기준으로는 꽤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친구 김리'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발리노르로 향한다. 이로써 가운데땅에서 반지로 맺어진 우정도 막을 내린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유연한 전사였으며, 오랜 삶에서 비롯하는 자신감과 용기는 어려운 시기에 위험한 임무를 맡은 원정대원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발리노르에 도착해서는 먼저 떠난 프로도와 샘, 갈라드리엘과 간달프를 다시 만났을 것이고, 그는 아마도 오랜 삶의 끄트머리에 겪은 생애 최대의 모험 때문에 그곳에서 영원토록 자신의 먼 친척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고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


글로인의 아들 김리
요정친구

난쟁이들은 본래 요정이나 인간과는 근본을 달리하는 족속이다. 저주받은 오르크조차 요정을 끔찍하게 변형시켜버린 결과물이지만, 난쟁이는 그들과는 전혀 다르며 친척 관계는 전혀 있을 수가 없다. 이유는 요정이나 인간, 발라(신족), 마이아(반신족) 등 가운데땅과 발리노르를 포함한 세계 '아르다' 안의 모든 거주민들은 본래 세상 밖의 절대신 '일루바타르'의 창조물이지만, 난쟁이는 발라 중 한명인 대장장이 신 '아울레'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본래 난쟁이는 지상에 무언가 자라나는 것이 있기도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무와 숲 등에 대해서는 조금의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애정을 갖는 것은 땅 속 깊은 곳에서 뻗어나가는 금속 광맥과 보석들이고, 이는 숲속에서 처음 눈을 뜨고 살아온 요정족이 숲에 대해 갖는 애착과 꼭 같다.

그리하여, 대장장이 신 아울레를 본받았는지 온갖 놀랍고 정교한 세공 기술들을 발전시켜나갔음에도 이들은 요정의 기준에서는 추한 외모와, 숲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이 함부로 그들의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베어 쓴다는 점에서 요정들과는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아득한 고 시대에는 이들 사이에 교류가 있어, 많은 요정왕국들이 난쟁이들과의 교역으로 얻은 무기로 무장을 하고, 난쟁이들에게 하청(?)을 주어 공사를 마친 난쟁이 양식의 암반을 파들어간 궁전에 거처를 마련했다. 은둔 왕국 도리아스의 메네그로스(천의동굴)는 그 대표격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있었던 거대한 난쟁이들의 지하 도시 카잣둠(요정의 땅에선 너무 멀리 있어 아무도 가보지는 못했다고 한다)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이었다. 이 시대말에 도리아스는 난쟁이들과의 불화로 멸망했다고 한다.

고 시대에 자리잡았던 요정왕국의 터전들은 물론 전쟁과 재해 등으로 인해 두 시대를 지나는 동안 모두 아득한 바닷물에 잠겼고, 그 당시에는 '동쪽 저멀리 안개산맥'에 있다는 '카잣둠'이 지금은 가운데땅의 서쪽 중간쯤의 위치가 되어버렸다. 2시대 말기와 3시대 초기까지 사우론과의 전쟁으로 인해 요정왕국들은 대부분 황폐화되어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는 모리아라고 불리는 카잣둠에 살던 난쟁이들은 드래곤이나 고블린과의 거듭된 전투,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새 아득한 땅 속에 숨어들어 잠들어 있던 발로그를 깨운 사건 때문에 가운데땅 자체 만큼이나 기나긴 역사를 자랑했던 모리아를 등진 채 떠돌이가 되고 만다.

빌보와 함께 모험을 떠났던 열두 난쟁이 중 하나였던 발린은, 드래곤 스마우그에게서 재산을 어느정도 되찾게 되자 세력을 규합하여 모리아로 향한 뒤, 글로인 등과 소식이 끊어진다. 열 두 난쟁이들은 본래 모리아에 살던 두린족 난쟁이들의 후손으로, 이들은 세상에 처음 눈을 떴던 난쟁이들의 시조 '두린'의 이름을 계속 이어받은 직계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했는지 글로인과 그 아들 김리는 그들에 대해 희망적으로 생각했지만, 간달프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결국 아득히 위대한 조상의 영이 서려있는 모리아에 들어서서 만난 것은 난쟁이들의 융숭한 손님대접이 아니라 고블린과 발로그였다.

모리아는 수천년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김리가 그 안의 도시를 보며 느낀 감정은 아마도 우리가 피라밋이나 파르테논 신전을 볼때 느끼는 그런 감정에 경탄과 경외심과 자긍심까지 가득 붙은 것일 터였다. 그런데 그 곳이 친척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참담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엘론드의 비밀 회의에 불려온 난쟁이들은 대체로 빌보와의 모험 이후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외로운산이나 철산 등에 눌러앉아 새로 세력을 규합한 부유한 난쟁이 군주들이었다. 항상 자신의 부를 늘리고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자신과의 은원관계만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잊지 않는 난쟁이들이건만, 가운데땅 전체가 위기에 몰려 있다는데 요정들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는 모리아와 요정 왕국 에레기온이 손을 잡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사우론과의 전쟁 때에 모리아의 문은 닫혀버렸고, 이는 요정들이 효과적으로 사우론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쟁이들이 적극적으로 요정들과 함께 전장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골라스와 김리는 이 문제에 대해 옥신각신 하곤 했지만, 이들의 감정이 일소에 사라진 것은 로스로리엔에서였다.

김리는 본디 난쟁이들이 다 그렇듯 로스로리엔 숲에 대해 공포심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은 결코 요정과 다르지 않아서 갈라드리엘 마님을 알현하고 나서는 온통 그 분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과 숭배의 감정이 마음에 가득차게 되었다. 이로 인해 레골라스와도 화해하게 되었고,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난쟁이가 요정의 친구가 된 것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난쟁이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은 어느 곳의 요정들이나 같은데, 로스로리엔과 같이 은둔해 있어 보안이 중요한 곳에서는 더했다. 자존심만큼은 키에 안어울리게 하늘을 찌르는 난쟁이나으리이신 김리에게 이러한 대접은 꽤 참기 힘든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갈라드리엘 마님이 작별 선물로 어떠한 것을 원하냐고 물었을 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굳이 주시겠다면 머리칼 한올을 기념으로 받았으면 한다고 답하여 요정들을 놀라게 했다. 난쟁이들은 탐욕적이고 재물만 밝힌다는 것이 대부분의 요정들이 가진 고정관념이었으며, 이는 상당부분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김리가 받아든 갈라드리엘의 머리칼은 난쟁이의 기술로 투명한 수정 안에 보관되어 대대로 가운데땅에 남게 되었고, 갈라드리엘이 가운데땅을 떠난 후에도 남아서 3개 시대를 살아왔던 위대한 여왕의 기억을 남겨주었다.

갈라드리엘 마님에 대한 숭배의 감정이 난쟁이의 자존심과 결합되어서, 그는 에오메르가 숲의 여주인에 대해 실언을 하자(김리 자신도 로스로리엔에 들어서기 전에 같은 실언을 프로도에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자신의 도끼를 걸며 '그 분에 대해 올바르게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겠다고 분개한다. "난쟁이의 도끼질을 받으며 요정을 칭송하는 법을 배우는" 희한한 시대를 도래하게 만든 셈이다.

안두인 강에서는 레골라스와 한 배에 탔고, 로한에서는 항상 레골라스가 탄 말에 함께 탔던 김리는 고통과 죽음의 기다림이었던 검은문 전투에서도 레골라스와 나란히 함께 있었고, 먼 훗날 레골라스가 배를 타고 가운데땅을 떠나기로 했을 때 노년이 되었음에도 그와 함께 발리노르로 가기로 결정한다. 물론 이 결정에는 먼저 떠난 갈라드리엘 마님을 한번 더 뵙고 싶다는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존심과 직선적 성격, 억센 의지 등으로 대표되는, 다분히 난쟁이다운 김리였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은 결코 요정이나 인간의 관점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강인함은 곳곳의 전장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오르크를 베며 세상이 시작된 이래 수없이 들린 그 난쟁이의 외침 "바룩 카자드! 카자드 아이메누!"를 울려퍼지게 했지만 덧붙여서 헬름 협곡 안 동굴의 아름다움도 발견하고(레골라스가 팡고른에 들어섰을때 느낀 경외심과 같은 것이다) 미나스 티리스의 성문과 거리 곳곳을 난쟁이의 솜씨로 훌륭하게 새로 단장하기도 한다. 파괴하기 보다는 만들어내고 보살피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난쟁이나 요정이나 꼭 같았지만 그들은 다만 그 대상이 달랐다는 데서 서로 반목할 수밖에 없었고, 김리 대에 이르러서 두 종족간의 오랜 반목이 마침내 화해로 결말을 맺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팔라딘의 아들 페레그린
사인 페레그린 1세

1500여년 전에 샤이어 땅에 호빗들이 이주해 왔을 때 그들은 당시엔 아직 건재했던 아르노르 왕국의 국왕으로부터 샤이어에의 영주권을 획득했고, 이후 줄곧 국왕의 신하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왕국이 멸망하던 최후의 전투에도 앙그마르의 마술사왕에 대항하기 위해 소수의 호빗 궁수들이 참전했다는 기록도 알려져 있다.
아르노르 왕국이 멸망하고나서는 그들 중 유력한 족장 중에서 '사인'이라 칭하는 국왕의 대리자를 스스로 선출했는데, 툭 집안은 대대로 이 사인의 자리를 이어받아왔다. 여전히 호빗들은 스스로 국왕의 신하라고 여기고 있으며, 오크나 고블린, 트롤 등의 '점잖치 못한 족속들'을 일컬어 '국왕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라고도 불렀다.

그들이 살고 있는 턱버로우는 샤이어에서 가장 큰 호빗굴집으로, 빌보의 백엔드나 브랜디벅 집안의 브랜디 홀도 대저택이지만 이 턱버로우에 비하면 오두막이나 다름없다. 십수세대에 걸쳐 계속해서 증설되고 내부로도 확장을 계속한 끝에 큰 입구만도 여러개인 이 거대한 굴집은 사인의 궁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샤이어의 명소 중 하나이다. 피핀은 바로 이곳에서 자라났다. 곤도르에서 사람들은 피핀을 '에르닐 이 페리안나스(=반인족의 왕자)'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는데, 이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피핀에게 어울리지 않을 호칭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게 전통 있는 명문가의 자제이긴 해도, 그의 생활이란 보통의 호빗청년들과 전혀 다를 게 없어서 여섯끼 식사를 한번이라도 거르면 곤란하고, 맥주와 연초를 너무나 사랑하며 온갖 장난질은 다 하고 다니는 대표적인 꾸러기 중 하나였다. 아침은 두번 먹어야 하고, 아점과 점심이 있고, 새참과 저녁 만찬을 모두 챙겨 먹는 것은 일반적인 호빗의 삶이지만, 피핀에게는 특히나 더 중요해서, 곤도르에 있을 때 하루 세번 빵과 물과 버터만 먹던 그 시간은 피핀에겐 가장 암울했을 것이다.
"예의바른 이들이 사는 곳이라면 맛있는 음식과 괜찮은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주막이 당연히 있을 걸로 생각했는데요."

그의 집안 선조들 중에는 과거 혹한의 겨울 시기에 고블린들이 샤이어에 침입했을 때 적장의 머리를 몽둥이 한번으로 멀찌감치 날려버린 유명한 반도브라스 툭(황소울음꾼 툭)이 있는데, 피핀도 그 용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고 (누구나 그랬듯) 매우 동경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 닥친 모험에는 고블린 같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모르도르 오크나 우르크하이, 트롤, 아니 심지어는 나즈굴 같은 무시무시한 것들이 가득했으니, 그가 용감했던 선조의 피를 선보일 기회는 거의 없었던 것도 어쩌면 안타까운 일이다.

호기심이 많은 것은 사실 꽤 많은 젊은 호빗들의 버릇이다. 샤이어 안에서라면 호기심이란 조금 야단을 맞을 거리이긴 해도 크게 위험할 것은 없었으나, 피핀은 그 호기심 때문에 대형 사고를 두번이나 치고 만다.
"다음엔 네가 직접 뛰어들어라! 그러면 더이상 걱정할 일도 없을테니까!"
"바보지만, 아직은 정직한 바보야."
두번이나, 그 신중하고 용맹하며 현명하고 위대한 마법사 간달프를 간떨어지게 했으니 이정도면 피핀의 호기심은 반도브라스 툭의 용맹 만큼이나 기록에 남을 법하다.

장난도 심하고 음식을 사랑하며 호기심이 많긴 하지만, 아주 철없는 어린아이는 아니어서(원정 당시의 그의 나이는 27세인데, 인간으로 치면 18세 가량에 해당한다) 자신 때문에 죽은 보로미르를 떠올리며 그 값을 해보려 애 쓰고, 그에 따라 곤도르의 기사가 되며 파라미르의 목숨도 구하게 된다. 더욱이 봉화대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호빗들은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소년기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굉장한 용기를 보여주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검은문 전투에서는 모든 서방 자유민들의 입장을 대표하기 위해 샤이어 호빗들의 대표로 뽑혀 아라곤과 나란히 나가 섰으며, 이때만큼은 그도 저 반도브라스 툭을 앞설 만큼 용맹하게 싸웠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나스티리스에서 친해진 한 병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르도르의 트롤을 상대로 급소를 찔러 죽이는 위업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그의 재능 중에선 극히 일부분이다. 음식과 연초와 맥주를 즐기는 만큼, 그는 노래도 무척 즐겼으며, 부르기만 해도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을 만큼 즐겁고 신나는 우스운 노래들을 수 없이 알고 있고, 지어부르기도 했다. 이따금 만취해서 감상적이 되어 집에 돌아올 때는 우울하고 서정적인 노래를 부를 때도 있었겠지만, 그건 '절망이 유예될 수 있는 한 희망은 딱히 필요치 않은' 쾌활한 호빗인 그에게 일상적인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이 눈앞에 오고, 웅장한 왕궁 안에서 몰락을 눈앞에 둔 강대한 영주가 노래를 청했을때 그의 마음에는 생전에 겪었던 그 어떤 슬픔보다도 깊은 아픔이 깃들었을 것이다.

"이 쬐끄만 놈들아. 네놈들이 우리한테 뭘 어쩌겠다는 거야. 국왕이 돌아오면 모를까."
샤이어를 망치고 있던 깡패들이 앞에 나선 프로도를 조롱하자 피핀은 당당하게 검을 빼들고 나선다.
"내가 바로 그 국왕의 친구다. 넌 지금 서방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에게 까불고 있는 거야."
이후의 일은 물론 약간의 요란함과 함께, 엉망이 된채 도망치는 일단의 깡패들과 의기양양해 하는 호빗들로 마무리 된다.

이 샤이어 역사의 마지막 전투로 인해서 피핀은 집안에서도 크게 인정받게 되고(툭 집안만큼은 턱버로우를 근거지로 끝까지 그 깡패들에게 저항하다가, 마침내 메리와 피핀이 호비턴에서 버클랜드까지의 모든 주민들을 봉기시키자 사인의 권리를 다시 되찾았다.), 위로 형이 셋이나 있지만 아버지 사인 팔라딘 2세의 뒤를 이어 사인 페레그린1세가 된다. 샘이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 (정말로 얼마 안돼서)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고, 그들의 아들은 파라미르의 이름을 땄으며, 역시 사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노년에 이르러서 그는 메리와 함께 샤이어에서의 모든 자리를 내놓고 남쪽으로 떠나간다. 새집이나 뒤지며 말썽만 부리던 꼬마가, 구국의 영웅이자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아무 미련없이 떠나가는 모습, 대대로 샤이어에 전해져 '가장 훌륭했던 사인'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


버클랜드의 주인
고관 메리아독
마크의 홀드위네

브랜디벅 가문은 대대로 버클랜드에 살아왔는데, 호비턴에서 브랜디와인 강을 건너가야 있는 그 땅은 샤이어의 동쪽 끝으로, 평온한 샤이어의 다른 지방과는 달리 주위의 위험에 조금은 노출되어 있는 편이다. 해가 떨어지면 문을 잠그는 일은 샤이어에서는 오직 버클랜드에서만 볼 수 있다.

브랜디벅 가문은 대체로 학구적인 경향이 있었는데, 메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옛 이야기나 전설 등을 배워 알고 있었지만 그 중에도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가운데땅의 지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원정대가 향하는 길들을 대부분 지도상으로나마 알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나무수염의 팡고른 숲이 버클랜드 근처의 숲과 갖는 연관성도 잘 기억하고 있다.
버클랜드 근교의 '묵은 숲'은 아득한 옛날에는 팡고른 숲까지 계속 이어지는 고대의 대삼림지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부분이고, 이곳의 나무들도 살아서 움직이곤 한다. 또한 숲 너머의 고분산에는 오랜 옛날 앙그마르의 마술사왕에 의해 멸망했던 아르노르의 왕들이 묻혀있는 고분이 있는데, 그 곳에는 잠들지 못한 유령들이 항상 떠돌고 있다는, 호비턴에서라면 믿겨지지 않을 일들을 메리는 항상 듣고 자라났다.

영화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네명의 호빗은 나즈굴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바로 이 길, 묵은 숲을 지나 고분산 앞을 통과해 동로로 내려서는 위험한 행로로 샤이어를 빠져나온다. 메리가 얻게 된 검은 고분산에서 나온 보물 중의 하나로, 아르노르 왕국이 앙그마르의 마술사왕과 대치중이던 시절에 요정 대장장이들이 만든 검이다. 아마도 그 검의 제작자가 자신이 만든 검이 한 호빗의 손에 들려 마술사왕의 다리를 찌름으로써 멸망한 왕국의 복수를 해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척이나 기뻤을 것이다. 이때 에오윈을 구한 공로로, 에오메르 왕으로부터 그는 '마크의 홀드위네'라는 로한 어 이름을 받게 되었다.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배를 몰 줄도 안다는 점만 제외하면, 메리는 샘이나 프로도와는 달리 일반적인 호빗 청년에 가까운 면이 더 많다. 고분산의 유령이나 묵은 숲의 살아 움직이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듣긴 했지만' 딱히 철썩같이 믿지도 않았고, 그에게는 감자 서리와 청룡장 여관의 맥주, 그리고 롱버텀 연초가 더 믿을만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영리하고 상황파악도 빠른 메리는, 나이도 어린데다 눈치없고 호기심만 가득한 사촌 피핀과 항상 함께 했다. 호빗들은 10단위 촌수도 일일이 따지는데, 이들은 정말로 사촌간이고, 따라서 인간의 입장에서라면 형제나 다름없는 가까운 사이다. 물론 먹을 것과 맥주를 무지하게 즐기는 전형적인 호빗이라는 점도 둘은 꼭 같다. 어린시절부터 잠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이 두 친구가 하나는 로한에, 하나는 곤도르에 멀찌감치 떨어지게 되었을 때의 그 상실감이란 몸의 한 부분이 잘려나간 것만큼이나 아픈 것이었을 것이다.

원정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메리와 피핀은 샤이어에 들이닥친 악당들을 몰아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마크의 기사 작위까지 가진 데다 마술사왕을 죽이는데 일조하기까지 했던 메리에게 몽둥이나 쇠스랑을 휘두르는게 고작인 깡패 일당들은 이제 웃기지도 않은 상대로 보였을 것이고, 곤도르의 기사 피핀과 함께 가뿐하게 처리해 낸다. 악당들을 몰아낸 공으로 메리는 뭇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꽤나 예쁜 아가씨 에스텔라 볼져와 결혼도 하고, 결국에는 브랜디벅 가문의 대를 잇는 족장이 된다.

나이가 들어 '고관 메리아독'으로 불리며 존경을 한몸에 받던 그는 혼블도어 노인으로부터 시작된 연초 재배의 역사를 적은 "샤이어의 연초지"와 같은 책을 내기도 하고, 호빗을 홀뷔틀라 라고도 하며 전설속에 반인족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도 전해내려오는 로한인들과 호빗 간의 언어의 연관성에 대해서 연구하기도 했다. 사실 로한인들은 본디 북방에 살다 이주한 이들이기에, 마크의 땅에 왕국을 세우기 전에는 아마도 호빗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면서 묵은숲과 호빗 등에 대한 지식은 마침내 전설이 되고, 해묵은 옛 이야기가 되어 난롯가에서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들려주는 정도로나 남게 되었지만, 그들은 분명 엔트와 호빗이라는 존재와 함께 살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버클랜드에 살면서도 세오덴 왕에 대한 기억과 마크의 기사 신분을 잊지 않고 있던 그는, 노년이 되자 친구 피핀과 함께 모든 샤이어에서의 지위를 내놓고는 로한으로 향한다. 이제는 노인이 된 에오메르 왕의 환대를 받고, 또한 곤도르의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파라미르와 에오윈을 만나기 위해 다시 곤도르로 향했던 두 친구는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엘레사르 왕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메리와 피핀은 죽은 뒤에 왕의 친구 자격으로 평생토록 우정을 유지했던 그 왕의 곁에 나란히 안치되게 된다. 젊은 시절에 그토록 위대한 모험을 겪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자신이 하고 싶던 바를 많이 이루어냈으며, 죽은 뒤에도 신성한 곤도르 왕가의 묘역에 안치되어 모든 이들의 기억에 남은 메리는 분명 가장 행복한 삶을 살다 간 호빗 중 하나일 것이다.
,



샘와이즈 시장나리
햄퍼스트의 아들 샘와이즈
용감한 샘와이즈(Samwise the Brave)

햄퍼스트 감지는 백엔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백쇼트 거리에 사는 평범한 정원사였는데 젊은 시절 배긴스가에 정원사로 발탁된 후로 줄곧 백엔드의 정원을 관리해 오다 나이가 들자 막내아들 샘와이즈에게 그 자리를 넘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빌보와 프로도에 대해서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남들 입에서 그 둘에 대한 험담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꼭 정정해줘야만 하는 충실한 하인의 전형이다.
샘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백엔드에 드나들면서 원예 수업을 쌓았고, 동시에 빌보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라났다. 특히 샘이 주목하여 들은 것은 요정 이야기와 요정어로 된 노래를 빌보가 번역해서 불러주는 여러 노래들이었다.
샤이어는 본래 외따로 떨어진 지방이라기보다는, 요정들의 항구인 회색항구로 향하는 제2시대부터 있던 구 도로가 관통하는 지방이다. 샤이어의 서쪽 끝에는 세개의 탑이 서 있는 탑언덕이 있는데, 이 탑들은 북왕조 아르노르가 강성하던 시절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제법 무너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위로 올라가면 바다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호빗들은 물을 무서워하고, 동시에 높은 곳도 무서워하는 고로 아무도 이곳에 올라가는 대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았으며 바라보는 것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리벤델이나 로스로리엔, 어둠숲에 사는 요정들이 항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샤이어를 지나가야 했고, 그래서 간혹 가운데땅을 떠나려 하는 요정들이 샤이어의 숲지대에 출몰하기도 했다. 샘은 언뜻언뜻 보이지만 만나보기는 힘든 그런 요정들에 대한 동경을 마음 가득히 품고 살아오다가, 옛날이야기에 대한 그 호기심을 못견뎌 간달프와 프로도의 반지 이야기를 엿듣고는 그 벌로 주인을 모시고 모르도르까지 다녀오게 된다.

온갖 것을 다 걱정하는 그의 성격은 모험 중에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그의 커다란 등짐을 보면 모포와 각종 야전 취식물(?), 취사도구에 로스로리엔에서 받아온 요정의 밧줄까지 챙겨 넣고 있는 등 정말 세심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원사로서는 매우 적합한 자질이겠고, 또한 힘겨운 짐을 운반하는 프로도를 위해서도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당신네 땅에서는 모두가 높이 대접받을 만큼 훌륭하게 살고 있을 거 같구려. 정원사도 크게 존경받는 직업일 것이구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원사가 존경받는 직업인 것은 맞지요."


샘의 충성심은 곧잘 용기로도 이어지는데, '숲의 여주인'이라 불리며 난쟁이나 인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갈라드리엘 마님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서 있을 수 있던 그 힘은 단지 그의 순수한 신의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배를 타고 안두인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내내 겁을 먹었던, 물을 무서워하는 보통의 샤이어 호빗이면서도 주인을 따라가기 위해 당당히 안두인 대하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또한 곤도르의 대장이라는 파라미르 앞에서도 당당히 그의 형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있고, 사우론만큼이나 오래되고 케케묵은 악의 존재, 실롭을 상대로 저 고시대의 요정 전사들처럼 빛나는 검을 들고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무지에서 오는 용기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순수한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힘이었을 것이다. 용감한 샘와이즈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인을 되찾기 위해 모르도르 안의 요새 하나를 향해 단신으로 공략해 들어가고, 자신도 거의 다 죽어가는 몸으로도 주인을 들쳐업고 불의 산을 오른다. 무지와 순수의 결합은 놀라운 용기를 낳는다는 것은 어쩌면 소위 '요즘 판타지'의 공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샘의 경우는 결코 천박하거나 한심하지 않고 오히려 고결해보이기까지 하다.

정원사 샘은 숲 중의 숲, 가운데 땅에서 가장 훌륭하고 근사한 정원 로스로리엔에서 나쁘고 좋은 일을 하나씩 겪게 된다. 하나는 갈라드리엘의 거울을 통해 엉망이 된 샤이어를 보게 된 것이고, 두번째는 갈라드리엘 마님으로부터 작은 상자안에 들은 선물을 받은 것이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샤이어는 정말로 엉망이 된다. 몰락한 사루만과 그리마는 던랜드 출신 깡패들을 이끌고 샤이어로 가서 그곳의 주인인양 물자를 전부 빼돌리고 나무를 베어내고 주점을 모두 닫게 하고 말 안듣는 주민들을 가두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메리와 피핀이 아이센가드에서 찾아낸 연초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는 샤이어에 미리 보냈던 첩자들이 빼돌린 것이었다!)

그들은 물론 우리의 네 호빗들이 잘 해치우지만, 엉망이 된 호비턴 거리는 무엇으로 메꿀 수 있었을까. 갈라드리엘 마님의 선물은 아름다운 은색 호두알과 갈색의 자잘한 가루들이었는데, 이는 모두 영생의 땅 발리노르에서 온 것들이었고 샘이 원예 지식을 총동원해서 가꾸어낸 새로운 호비턴은 발리노르에서나 볼 수 있을 아름다운 나무들( 특히 호두알이 자란 말로른 나무는 가운데땅에서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로 가득찬 마을이 된다.

프로도에게 백엔드와 여행의 기록을 물려받고, 훗날 호비턴의 시장이 되고, 많은 자녀들을 낳은 샘은 큰아들 프로도가 '가드너'라고 성을 바꾸고 독립하여 샤이어의 명사 집안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가드너 집안의 시조'로 기억되게 된다. 어째서 '기억'되느냐면, 샘도 나이가 들면서 프로도에게 받은 기록들을 큰딸 엘라노르에게 넘기고 회색 항구로 가 발리노르로 떠나기 때문이다. 잠깐이지만 반지운반자로써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했던 공로였다. 엘라노르는 아르웬 왕비의 명예 시녀가 되고, 숱한 기록들을 남편과 함께 정리하여 그 "레드북" 선집을 완결해내는데 이것을 영어로 번역한 책들이 바로 우리가 볼 수 있는 '호빗'과 '반지의 제왕' 인 것이다.

샤이어에서의 그의 삶도 충분히 충실하고 훌륭했지만,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의 주인을 그 영생의 땅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때 그는 비로소 행복했을 것이다. 샘은 거기서도 프로도의 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아침이면 프로도의 침실에 들어와 커튼을 걷으며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라고 프로도를 깨우는 행복한 일상을 계속 이어나갔을 것이고, 어쩌면 그로 인해 프로도에게도 간신히 진정한 안식과, 반지 운반자라는 힘든 임무에 대해서 작으나마 보상이 되었을 것이니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


아홉 손가락의 프로도.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

프로도는 어린 시절 뱃놀이 중의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지만, 빌보 삼촌의 품에서 자라면서, 그리고 그의 이상스런 손님들(마법사나 난쟁이 같은)과 만나 수많은 모험 이야기들을 들으며 꿈을 키우게 된다. 가운데땅이 훨씬 넓었던 시절의 고시대의 모험 이야기도 자세하게 배워서 알고, 요정어도 공부했던 학자님이시기도 하다.

빌보와 프로도는 생일이 같은데, 생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호빗들의 입장에서 볼때 이는 굉장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삼촌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가계도를 확인해보면 7촌뻘이다. (빌보의 할아버지가 프로도의 증조할아버지의 형제이다.) 그러나 10단위 촌수도 일일이 따지는 호빗들이니 이정도는 매우 가까운 촌수이며, 게다가 빌보의 어머니쪽 가계로 따져도 7촌간이니 어쩌면 호빗치고는 매우 특이하게도 결혼을 하지 않은 빌보에겐 친아들보다 더 가까운 인연인 셈이다.
프로도의 모친쪽 가계는 툭 집안이나 브랜디벅 집안과 연관이 있는데, 이쪽 집안은 호비턴에 사는 호빗들에게는 '뭔가 좀 이상한 데가 있는' 집안으로 여겨지곤 했다. 배를 타거나 하는 일도 그 중 하나였기 때문에(본래 대부분의 호빗들은 물을 무서워한다.) 프로도의 부모가 죽은 일에 대해서는 갖가지 추문도 나돌았을 것이고(여자가 남자를 밀었는데 남자가 끌고 들어갔다든가 하는), 그는 아마 호비턴에 살면서도 또래 친구들이나 동네 어른들과는 겉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빌보도 평판은 좋았지만 옛날의 대모험 때문에 보통의 어른들은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곤 했다는데, 그 빌보의 상속인이 된 것도 프로도라는 젊은이의 평판에는 마이너스 요소가 되지 않았을까. 강건너 버클랜드에 사는 메리나 피핀이 사촌이기도 하지만, 그에겐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할만한 친구라고는 그들밖에 없었을 것이다.

빌보의 111세 생일 잔치이자 동시에 프로도의 33세 생일 잔치였던 그 날에 벌어진 대사건 이후 프로도는 문제의 '반지'를 물려받게 된다. 빌보가 젊은 시절 떠났던 여행에서 얻게 된 그 반지는 사실은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힘이 들어있는 사우론의 절대반지였으니, 빌보는 "내 아들 프로도"에게 근사한 저택 백엔드와 함께 끔찍한 재앙까지 물려준 셈이다.
빌보의 모험이야기를 듣고, 그의 일기를 보아가며 프로도는 평범한 호빗과는 다르게 놀랍고 신비한 모험을 꿈꾸는 청년으로 자라났지만, 그에게 닥친 모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힘겨운 여정이었다.
"어렸을 때는 평온하고 조용하기만 한 샤이어가 너무 바보같아서 차라리 오크들이라도 쳐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이제 와서 정말 그런 식으로 샤이어를 잃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두렵네요."
왕족인 참나무 방패 소린을 포함한 열두 난쟁이와 함께 하면서, 보상도 확실하게 보장된 계약서까지 받아들고 있었던 빌보와는 달리, 반지의 힘을 이겨내면서 동시에 힘겨운 여정을 감내해야 하고 보상은 커녕 생환조차 보장할 수 없는 그의 길은 아홉명의 반지 원정대중 그 누구의 길보다도 험난했고, 죽음과 고통이 곳곳에 도사린 길이었는데, 정작 그는 인간으로 치면 갓 성년을 지난 나이의 부잣집 도련님에 불과했다. 원정을 시작한 나이는 소설에서는 50세, 영화에서는 33세인데, 호빗의 33세는 인간의 19~20세에 해당한다. 게다가 프로도는 공부는 제법 했을지 몰라도, 힘든 일이라곤 해본 적도 없이 사촌인 메리와 피핀과 함께 늘 샤이어 곳곳을 헤메다가 해질녘에 배고프고 지치면 각자 집으로 흩어지곤 했던 것이다. 사실 그가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은, 아라곤이 왕위에 올라 위대한 누메노르의 혈통을 다시 잇고 인간의 시대가 열리는 그 전환점보다는 오히려 이런 일상의 소박한 기쁨들에 가까울 것이다. 맥주를 마시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차마시는 시간이 있는 정중한 땅에서 씨앗과자와 함께 차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소박한 기쁨들.

모르도르라는 이름 자체만도 이미 가운데땅 서쪽의 모든 이들에게는 악몽이건만, 그 죽음의 땅으로 향해야 하는 임무 앞에서 그는 기꺼이 자신을 죽음앞에 내밀었다. 아라곤의 혈통도, 김리와 레골라스의 강함도, 간달프의 지혜도 갖지 못했던 그가 가진 것은 용기와 선한 의지 뿐.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최후의 드래곤 스마우그의 약점을 알아내고 드래곤의 재물을 도둑질해낸 빌보는 그 댓가로 굉장한 부를 얻었건만, 저 서쪽 회색 항구에서부터 어둠산맥을 마주보고 있는 미나스티리스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세상을 사우론의 발치에서 구해낸 프로도는 그 댓가로 칼에 찔린 상처와 독에 쏘인 후유증, 그리고 물어뜯긴 손가락만을 얻었을 뿐이다. 샘과 메리와 피핀은 후에 샤이어에서 다들 한자리씩 갖게 되지만, 프로도의 위업은 정작 샤이어의 호빗들은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들에겐 곤도르나 모르도르 같은 이름들은 상관도 없는 다른 시대 다른 세상 것인양 들릴 것이니. 그에겐 아픈 몸과 고통과 공포의 기억들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지치고 힘든 몸으로 몇년을 더 샤이어에 남아 자신의 여정을 기록에 남겼지만, 그는 이제 안식을 위해 자신이 구해낸 가운데땅을 떠나간다.
"우리는 샤이어를 구하기 위해 떠났었고, 결국엔 구해냈어. 하지만 나 자신은 구하지 못했어."
그리고 소설에서는 몇마디가 더 남는다.
"누군가는 포기하고 잃어야 다른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법이지."

몇 안되기에 더욱 소중했던 친구들을 '영원히' 떠나간다는 것은 참기 힘든 슬픔이었을 것이다. 친구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고 인정받는 삶을 살게 된 것을 확인하면서 약간의 위안은 받았겠지만 그 상실감은 누가 메꿔줄 수 있을까.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의 경우엔 프로도를 여성으로 설정하여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좀더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샘과의 사랑 이야기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가야 하는 아픈 이별이라든지.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읽고 난 뒤에 너무 마음이 아플지도 모르니 톨킨은 그런 점을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
경험을, 인생을 소설로 환전할 수 있다니 소설가는 얼마나 축복받은 직업인가. 동시에 얼마나 불행한 존재들인가.

- 손장호, <5,7>(2001년, Cobalt Blue Vol 1.- Low man's lyric) 中

1982년 2월 生
2006년 4월 歿

영원히 이 땅의 손님일 수밖에 없었던 외로운 고독.
잠들지 못한 아쉬움으로 손내밀던 손설가.
그리고 끝내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던 나

이젠 안녕. 맑은 눈의 좋은 친구.



선재
계현
,
 

이분의 기일입니다.



張國榮
출생 : 1956년 9월 12일
사망 : 2003년 4월 1일

한끝의 아름다움을 위한 피의 시간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비노기 캐릭터 시뮬레이터로 만들었습니다.
왼쪽부터 이세느 세이트. 샤를로테 샤렌델. 아셀 라스. 이스나 엘 리샤인. 프로린 미스티니. 세르가드 쉐이렌. 페이히린. 마노 라피스라. 카미유 린. 이자크 린.
클릭해서 확대해 보세요.

,


이은주.
생 : 1980년 12월 22일
몰 : 2005년 2월 22일


슬픔은 언제나 아름다움.
,
,
백남준 - 다다익선(일부)


출생 : 1932년 7월 20일
사망 : 2006년 1월 29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6500만년 만에 돌아온 미소녀 예찬, 오늘은 Leaf 사의 고전 미연시, White Album의 히로인 오가타 리나 입니다.

White Album은, 물론 남자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성인 게임'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단순한 H씬(무슨뜻인지 모르시는 분은 주저없이 백스페이스를~)을 위한 게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H씬은 그저 '미연시라는 장르의 어쩔 수 없는 한계' 일 뿐, 여느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더욱 마음을 움직이는 깊은 스토리와 음악으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독특한 게임입니다. 백색 마약이라고도 일컬어지며, 여러 히로인들을 모두 공략하고 CG 달성률 100%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게이머들이 몇날 며칠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수많은 분기점을 포함하는 이 게임의 진짜 스토리는 오가타 리나에 대한 스토리 그 하나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미연시와 달리 White Album에서의 주인공은 이미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모리가와 유키. 이제 싱글을 막 발표한 신인 아이돌, 하지만 주인공과는 고교시절부터 알아왔고 사귀어 온 사이였지요.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길을 걸어감에 따라, 주인공은 AD 아르바이트 등으로 방송국을 맴돌며 그녀 곁에 머무르려고 애쓰지만 어쩔 수 없이 멀어져만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주치게 되는, 이미 정상의 아이돌이며 무한의 카리스마를 가진 무대위의 여신, 오가타 리나.



유키와는 같은 소속사이고, 오프닝 이벤트에서 우연히 자신의 프로듀서이자 친오빠인 오가타 에이지와 말다툼을 벌이다 실수로 주인공의 얼굴에 강펀치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유키 때문에 AD 아르바이트로 방송국을 드나들던 주인공은, 그녀와 우연한 기회에 이런 저런 대화를 하게 되고, 점차 화려한 그녀의 무대 위 모습 뒤에 숨은 또 다른 모습들을 하나 하나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돌보아주고 감싸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외로운 소녀의 모습.




너무나 화려한 오빠의 배경에서, 그녀는 오빠를 사랑하면서도, 여동생이라기보다 마치 도구처럼 다루어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그러나 일 만큼은 확실하게, 멋지게, 굉장하게, 훌륭하게 잘 해내는 그녀. 그 일의 최대의 적, '스캔들'이 오빠와 유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자 유키의 연인인 주인공에게 접근하지만, 도리어 주인공의 순수하고 꾸밈없는 태도에 자신이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스캔들을 막겠다더니, 스캔들을 일으키다니.
주인공은 유키의 매니저에 의해 철저하게 유키와 격리당하고, 화려하지만 냉정한 연예계라는 얼음 낙원의 한 끝에서 고독에 떨던 중 리나의 솔직한 모습들에 조금씩 마음을 열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터에서 마주치는 그녀와의 아무것도 아닌 대화들. 가끔 예정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그리고 가벼워보이는 부탁 여러가지. 그런 것들이 그녀와 주인공의 거리를 하나 하나 좁혀가면서 동시에 두 사람 모두가 사랑해 마지 않던 유키와의 거리는 점차 멀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리나는 고백합니다. 사랑해버렸다고. 그러니까 유키에게 돌아가라고. 자신이 오빠를 잃었던 것처럼 유키를 슬프게 할 수는 없다고. 그러나 그건 결국 똑같은 희생. 지금까지 오빠에게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의 희생에 지나지 않기에, 주인공인 플레이어로서는 그녀를 결코 그렇게 돌려보내선 안되는 겁니다. (돌려보낸 당신에겐 저주를!)



"나, XXX와 잤어."
"짝!-"
씁쓸하지만, 정말 많이 씁쓸하지만.
음악제에서 리나와 근소한 차이로 2위를 한 유키에겐 리나가 가졌던 정상의 아이돌이란 지위가 내려졌고,
음악제에서 1위를 차지하자마자 은퇴선언을 한 리나에게는 유키가 가졌던 남자친구가, 자신을 찬양하거나 혹은 이용하거나 깎아내리지 않고 순수하게 대해줄 남자친구(바로 플레이어 당신!)가 내려졌습니다.
결코 원하던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바라던 바를 얻었고, 이제 유키와 리나의 앨범, White Album이, 유키의 첫 앨범이자 리나의 마지막 앨범이 주인공의 손에 쥐어집니다.
연예계라는 낙원은 유키를 얻고, 주인공이라는 현실은 리나를 얻습니다. 정말로? 엔딩 이벤트인 음악제 이후로, 주인공은 리나를 만나지 못합니다.
유키는 정말 사랑했던 두 사람 모두 용서하지만, 리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연예계에서 내려와 주인공 곁에 선 리나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스캔들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방송과 잡지의 기자들을 피해가며, 몇달이나 지나서 홀연히, 하지만 힘겹게 주인공을 찾아온 리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처럼 알바생이나 하며 사는 게 어떨까 하고 웃어봅니다.
그래봐야 아직은, 그 유명한 프로듀서 오가타 에이지의 동생이란건 변함없기에 주인공과의 사랑의 도피는 결국 호텔방과 해변을 오가게 되지만 말이지요.

압도적인 카리스마 너머에 숨어있던 덜자란, 아니 자랄 수 없었던 여린 소녀의 모습들.
석양의 해변에서 웃음짓는 오가타 리나의 뒷모습은 영원히 우리모두의 아이돌로 남을 것입니다.
,
미소녀 예찬!
그 여섯번째 시간은 츠다 마사미의 <그남자!그여자!>에 출연하는 시바히메 츠바사 양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잘나가는 종마 아리마 소이치로군을 짝사랑하던 자그마한 미소녀로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유명 아동복 디자이너인 아빠와 단 둘이 사는 소녀였지요. 엄마는 츠바사를 낳고 세상을 떠났고, 엄마의 사랑을 겪어본 적이 없던 그녀는 '감정의 기본적인 부분들이 채워져 있지 않은' 불안정한 모습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누구나 한번쯤 돌아볼 만큼 굉장히 귀여운 소녀이지만, 사실 섣불리 손대기엔 무척이나 위험합니다. 가끔 기분 드러울땐 귀엽다고 내미는 손길도 앙 물어버릴 만큼 야수적인 면도 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자신이 귀엽다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것도 문제지요. 한번 귀엽다고 안아줘버릇하면 그것으로 모두를 자기 뜻대로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계속해서 폭 안겨드는 무서운 소녀이기도 합니다. 이런 짓들, 다른 사람이 하면 분명 화를 내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츠바사이기에 등장인물들은 물론 독자들도 관대해질 수밖에 없다는건 참 신기한 일.



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세나, 사와다, 츠바사, 사쿠라. 중학시절부터의 친구들이고, 특히 사쿠라와는 유치원때부터 악연이지요.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양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리마는 츠바사의 아픔을 알고는 있었기에 동생처럼 친근하게 대해줘 왔지만, 츠바사는 아리마의 사랑은 될 수 없었습니다. 같은 아픔을 갖고 있다고 해서 쉽게 사랑이 될 만큼 아리마의 내면의 어둠이 옅은게 아니었는데다가, 고등학교에 와서는 유키노를 만나버렸지요.
그리고 아빠 또한, 재혼 상대를 만나 결혼해버립니다. 자기만을 사랑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남자들은 항상 다른 사람을 택하기에, 결국 그녀는 사랑 같은건 믿을 수 없게 되지요.




그러나 다행히도, 아빠가 재혼하면서 남매가 된 카즈마를 만나 츠바사는 남매의 정 속에서 마음을 다독이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카즈마에게 단번에 마음을 열어버리지만, 록 밴드 보컬로 활동하는 카즈마를 음악에 뺏겨버릴 까봐 전전긍긍하지요.
음악이 카즈마를 앗아가는게 아니라, 카즈마의 사랑이 곧 음악이 되어 츠바사의 곁에 오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기 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언제나 비어있던 츠바사의 마음은 비로소 가득차게 됩니다.

3층에서 훌쩍 뛰어내린다든지,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벽을 들이받아 무너진 담벽에 깔려 하루만에 발견된다든지, 그야말로 짐승같은 짓도 서슴지 않지만, 그러한 행동들 뒤에는 사랑받고 싶어하는, 적어도 사랑받으며 자라고 싶어하는 심정이 배어있는 것이지요. 온몸으로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지만, 그건 자신의 마음을 채워줄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한 한 여자로 자라날 수 없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카즈마가 없었다면 언제까지고 비어버린 마음을 꼭 쥔채 말없이 친구들에게 안기는 공허한 눈의 소녀로 남았을 거예요. 아주 아름답지만, 아주 슬픈 눈을 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공허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그 마음이 가득 채워진 뒤의 진심으로 웃는 모습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덧: 그림파일 찾느라 애먹었어요. 주연도 아닌데다 <그남자!그여자!> 자체가 꽤 오래된 애니메이션인지라;;
,
이번 호 미소녀 예찬의 주인공은 최종병기 그녀, 치세입니다.



치세는 귀엽다.
하지만 느리다.
키도 작고 체력도 약하다.거기다 그다지 똑똑하지도 못해 성적도 중간 정도이다. 다만 세계사만은 성적이 좋은데, 그건 치세가 살아가는데 그다지 플러스가 되지 못함을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입버릇은 "미안해." 좌우명은 "강해지고 싶다."

이야기의 시작, 지옥 언덕에서 슈지가 읊은 치세의 신상명세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여자아이임에도 그다지 칠칠치가 못해서, 곧잘 넘어져서 무릎을 깨기도 하고, 먹을 걸 흘려서 블라우스를 더럽혀서 어릴때부터의 친구 아케미에게 늘 야단을 맞기도 합니다. 속옷부터 유아틱하다며 친구들에게 놀림받을 만큼 행동도 외모도 나이보다 한참 어려보이지만, 그런 그녀가 어느날 갑자기 '남자친구 슈지'앞에 병기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미안해. 나 이런 몸이 되고 말았어."




사람을 죽여야하는 병기가 되어, 어느날부턴가 아무도 모르게 벌어져버린 전쟁에 뛰어들고, 남자친구의 첫사랑을 알게 되어 마음아파하기도 합니다. 힘으로는 세상 그 누구 아니 무엇보다도 강한 최종병기가 되었으니 "강해지고 싶다"는 좌우명대로는 되었지만, 그녀 자신은 의식을 잃은 채 적도 아군도 수많은 사람이 살았던 도시도 멋대로 파괴해버리는 자신의 행위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한없이 '미안해'라고 되뇌이곤 하지요.



연약한 소녀의 마음으로, 힘든 사랑과 힘든 전쟁을 함께 한다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서도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끝까지 이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갑니다. 세상은 점점 파괴되어가고, 마침내는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그녀만은 오직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해서, 그녀의 '슈'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난, 슈지의 여자친구인걸."



작은 입으로 더듬더듬 어린아이 말투로 나오는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마다, 눈물을 왈칵 쏟게 만드는 인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녀가 아름다운 것은 그 아픔을 딛고도 계속해서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이 끝나버리더라도, 사랑은 사랑이기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 작고 약한 소녀에 불과한 치세가, 좋아하는 세계사의 연표를 하나하나 거쳐온 세상을 통째로 잃으며 깨달은 단 하나의 진실입니다.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가면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구. 단지 내가 알고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우연에 의해 같은 나라에 태어난... 내 나라의, 왠지 정이 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대신... 이 별에서 내가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대신 죽는다. 그차이 뿐이잖아?
내게 있어선 둘다 별 차이 없어. 다 같아! 한쪽이 더 슬프고 괴롭다는 거 빼곤...
다 똑같다구!!
...이제 가게.. 해주세요. 남자친구가..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요. ... 적어도 오늘만큼은... 부탁이에요.. 이 거리에서만큼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기억나? 저기 옛날엔... 어느날 몇시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 사람들이 있었잖아. 그거... 나 어렸을 때, 진짜로 믿었었다-
친구들한테서 듣고서... 나 10대에 죽는구나 하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혼자서 울었어.
나... 그시절의 내게 말해주고 싶어.
지구는 무사하다...
는...


거짓말을...
이제 더이상 울지 않아도 된다고 거짓말을 해주고 싶어."
,
이번호 미소녀 예찬의 주인공은 무적의 나오과장입니다.



넥슨에서 운영하는 온라인게임 '마비노기'를 시작하면 캐릭터를 만들고 처음 만나는 NPC입니다. 소울스트림의 인도자로서, 그녀는 처음 에린에 가는 이들을 비롯해, 환생으로 새 삶을 살고자 하는 밀레시안들 모두 친절한 충실한 안내자입니다.

나오, 로나와 판. 마비노기 초창기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일러스트.


잘 모르시는 분이라면, 전투로 피에 젖으러 가는 여행자들의 모습이라기엔 너무 밝고 명랑해 보이지 않느냐는 말도 있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에린엔 전투만 하러 가는게 아니랍니다. 옷도 만들어보고, 노래도 부를 수 있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즐겁게 거기서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무서운 모리안여신님보다는 친절한 나오가 훨씬 좋은 안내자겠지요.
그리고 혹시라도 전투중에 쓰러졌다 해도, 소울스트림의 인도자인 나오는 특별한 아이템의 도움 없이도 우리를 다시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곤 합니다. 다만 3번 까지만. 피시방에선 5번까지인가요. 생일 선물도 주고, 20세 생일엔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시는 고마운 분입니다.

그러나,
결재해라!


이처럼, 무료 이용하는 여행자들에겐, 2시간이 지나면 칼같이 질질 끌고 에린 밖으로 데리고 가버리는 무서운 나오과장님이기도 합니다.

어느 분은 나오의 외모를 간단히 '아이돌얼굴에 에로바디'라고 일축하면서 남자들을 타겟으로 한 공식에 입각해 만든 NPC에 불과하다면서 매우 싫어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곁에서 도와주며 나의 길을 언제나 함께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건 부인할 수 없지요. 가슴이 큰 건 사실이긴 합니다.

그녀는 본래 오래전, 전설속의 이상향 '티르 나 노이'를 찾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세 전사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이름은 마리. 그녀의 아버지는 대 마법사였지만, 마족들의 마신 키홀의 꾐에 빠져 가족도 잃고 마족의 수하에 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만은 무사히 탈출하여 티르 코네일이란 변방 마을에서 지난 기억을 잃고 촌장의 딸로서 성장해, 씩씩하게 위험한 던전으로 뛰어들었다가 강한 전사와 대마법사의 제자, 그렇게 두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왈가닥이었던 나오가 이렇게 정중하게 편지를 쓰다니.."

티르 나 노이를 찾아 위험한 여행을 하던 그들은 마침내 키홀의 계략에 말려들어 마족의 수하에 들어버린 마리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그리고 한 명을 제외하고는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지만, 마리는 다행히 키홀에게 잡혀있던 모리안 여신의 힘으로 환생하여 소울 스트림의 인도자로서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아름답지만 일면 한없이 위험한 에린의 세계를 충실히 경험했던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처음 에린으로 떠나는 여행자에겐 무척 소중합니다. 오늘 밤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홀려아름다운 에린을 향해 소울스트림에서 나오의 소개 편지를 받아들고 에린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G1까지의 공식 일러스트.
G2 이후의 나오의 공식 일러스트. 이 모습 그대로 피규어도 발매됨.
,
이번 미소녀 예찬의 주인공은 영화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주연(?)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양입니다. 지난 회의 아스카와는 갈색 머리와 영리한 두뇌가 무척 닮았네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마법을 쓰지 못하는 평범한 머글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누구보다도 영리하고 용감하며 당찬 소녀마법사. 전설적인 해리 포터와 그 친구 론 위즐리와는 1학년때 화장실에서 같이 오거와 맞닥뜨린 후로 최고의 친구가 되었으며, 교칙을 위반하는 은밀한 일까지 같이 도모하기도 했을 정도. 헤르미온느 역의 엠마 왓슨은 실제로도 해리 포터역의 다니엘 래드클리프군과 연인사이라고도 하네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중에서. 귀신 나오는 여자 화장실에서 폴리쥬스 제조중.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며, '잡종'이란 천한 용어를 굉장히 싫어하여 슬리데린 반의 얼짱이자 일진인 말포이와는 사사건건 충돌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둘이 친해진다면 상당히 그림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중에서.
그녀는 이 에피소드의 진정한 주역이었습니다.



분명 지나치게 열정적인 학생임에도,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점술 과목에서는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수업을 뛰쳐나올 정도로 논리와 지성을 옹호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분명 자신도 지각하지 못하고 있는 깊은 열정과 직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없이 냉정하고 논리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정과 용기의 불을 깊이 간직한, 그녀의 양면성엔 대단한 매력이 있습니다.




헤르미온느가 어떠한 모습으로 자라나게 될 지, 그리고 어떠한 매력을 보여주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당차고 똑똑하며 이지적인 소녀에서 열정과 용기가 넘치는 여학생으로 성장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또 어떤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게 될지, 기대하게 되는 바입니다.


<해리 포터와 불의 잔> 중에서.
성숙한 모습으로 두 친구 앞에 선 그녀는 이제 친구가 아니라 여인이고자 합니다.
,
저번 회의 아우크소에 이어서, 이번회에는 필자의 고교생활을 온통 불살랐던 그녀들 중 하나인 아스카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아우크소처럼 붉은 이미지의 미소녀지만, 그녀와는 달리 무척이나 당당하고 활기찬 소녀.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작품으로, 온갖 대형 로봇물의 특징이란 것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 엄청 무지막지스런 스토리 꼬임과 막가는 엔딩으로 살인적인 욕을 얻어먹기도 했던 작품이지요. (특,히, 아스카의 최후 때문에 대박으로...(쿨럭)) 이 작품에서 제시되는 철학적으로 보이는 문제의식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것들은 단지 이야기를 떠돌 뿐이지 핵심을 관통하며 관객들의 깊은 마음을 흔드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관객들의 마음을 지른 것은 결국 "니들 아직도 미소녀에 취해서 로봇만화 보냐!" 라는 상당히 건방진 문제의식이랄까.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14세. 일본계와 독일계 혼혈의 천재소녀. 독일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본에 와서는 뻔뻔하게도 같은 나이의 중학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세컨드 칠드런. 입버릇은 "바보". 최대의 매력포인트는 하늘을 치솟는 자존심. 그녀의 시각에선 보통의 아이들은 사실 다 "바보" 겠지요.



나이와 맞지 않는 지나친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20세 이상 연상의 카지 료지였습니다. 아저씨를 좋아하는 미소녀의 이미지란 '오지콘'이란 이름으로 일종의 전형으로 굳어져버린지 오래지요. 또래의 남자애들 따윈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은 꽤나 우리의 주인공 신지에게 맘을 두고 있습니다.

그녀가 타는 에바는 2호기로, 프로토 타입인 레이의 0호기와 테스트 타입인 신지의 1호기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실전을 위해 만들어진 프로덕션 모델입니다. 수많은 장갑판과 AT필드로 무장하고 막대한 운동량을 발휘하는 에바의 힘은 워낙 강해서, 전선을 뽑으면 4분 30초라는 기간밖에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 시간을 길게 남겨먹으며 확실하게, 그리고 가장 잔인하게 사도를 처리하곤 합니다. 언제나 힘이 넘치는 모습은 일상에서도 드러나지만, 내면에는 항상 거절당할 까봐 두려워하는 어린 시절부터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외강 내유형.





당당하고 활기찬 그녀는 후에 제15사도의 정신 공격으로 폐인이 되고 말지만, 모친에 대한 기억을 자각하면서 최후의 순간에 여러대의 양산형 에바를 대상으로 엄청난 선전을 벌이다가 그만... (갑자기 나타난 롱기누스의 창에 의해 쓰러지고, 결국 에바 2호기와 함께 산산조각나고 맙니다. 흑흑.)


에바의 등장인물은 인간관계나 성격 면에서 무언가 심각하게 결여된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인공수정되어 태어나 아버지를 모르는 그녀에게는, 오직 자신만이 진정 소중했을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도, 에바도 모두 사실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나를 알아달라고.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나를 봐달라고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는 수도 없이 외쳤지만, 아무도 그녀의 당찬 외면에 가려진 그 외침을 들어주진 못했던 겁니다.

,
미소녀 예찬. 첫 순서는 제 닉네임 중 하나이기도 했던, 아우크소입니다.

단행본 4권에서 처음 발표된 이미지.(벌써 10년전)
이때만해도 나선생 참 순수했다.




나가노 마모루의 작품 "The Five Star Stories"에 등장하는 인공생명체.
최강의 검성의 파트너로, 오직 그만을 위해 만들어진 슬픈 생명이기도 합니다.

그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티마'의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성단에는 강한 힘을 타고나는 특수한 신분인 '기사'가 존재하는데, 맨손으로 전차를 부수고 시속 180km로 달리는 그들이 사용하는 전쟁의 도구는 거대한 인형 병기 모터헤드입니다. 이를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컴퓨터로는 불가능하고, 그리하여 리튬 발란셰라는 천재적인 과학자는 인간형의 생체 컴퓨터를 만들어냅니다. 그 최초의 모터헤드용 연산기는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바늘처럼 긴 다리와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 신체 등, 인간과는 다른 특징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최초의 파티마인 그녀의 이름은 포커스라이트.

파티마들은 기사와 마찬가지로 보통 인간을 뛰어넘는 강한 힘, 반사신경 등과 함께 놀라운 지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능, 용모, 체력. 모든 면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생명의 창조. 금단의 연구입니다."
금단의 과실을 따버린 인간은,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금제를 파티마에게 걸어댑니다. 네가 죽든 범해지든 사람을 해치지 말라.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 등등.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전혀 없는 파티마이지만 자신이 섬길 주인을 고르는 것만은 스스로 할 수 있게 허락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모터헤드를 모는 기사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파티마는 오히로메(피로연)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여기 참석한 수많은 기사들 가운데 자신의 '마스터'를 고르게 되면, 그 파티마는 그 기사의 '소유물'이 됩니다.
"파티마는 인형, 어차피 인간이 아닙니다. 마음이 있는 인간이 보자면, 개에도 못미치는 가축입니다."

세월이 흘러 파티마는 수도없이 많이 만들어지고, 리튬 발란셰의 후손인 크롬 발란셰는 천재적이면서도 악마적인 연구를 계속하여 그만의 유별난 파티마를 많이 만들어냅니다. 아우크소는 그의 서른 여덟번째 작품으로, 최강의 검성 더글라스 카이엔의 파트너가 됩니다. 그는 끔찍스런 탄생의 비밀이 있었고, 그 때문에 비뚤어져버린 아까운 인물이기도 합니다.(어떤 비밀인지는 직접 읽어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전 성단을 돌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던 그를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아우크소는, 어느날 그를 구하기 위해 지뢰 앞에 몸을 던져 거의 죽음에 이릅니다.

가까스로 발란셰의 제자를 만나 소생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기억을 모두 잃게 될 거라는 말에 카이엔은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마침내 소생한 날 아우크소를 데리러 갔을 때, 카이엔은 놀랍게도 자신을 기억해내는 그녀의 한마디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지요.

일러스트집 '플라스틱스타일'에 발표된, 세상에 처음 공개된 플라스틱 스타일 파티마 수트를 입은 아우크소


그런데 나가노 마모루는 그렇게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해놓곤, 이렇게 뒤통수를 날려버립니다. 그녀에겐 애초에 발란셰 특제 '복수의 정보체'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어서, 세포 하나만 남더라도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기억까지 모두 살아나는 내구도 최강의 파티마였던 것입니다. 카이엔은, 괜한 걱정을 한 거지요. 더욱이 그녀를 만드는 재료가 된 것은 최초의 파티마 포커스라이트. 도대체 우린 왜 걱정한 겁니까 제길;;


"성단 최강이란건, 자기보다 강한 상대랑은 싸우지 않는다는 거야."
최강이면서도 항상 한심한 행동을 하는 마스터를 끝까지 열심히 따라다니던 인내력 No.1의 파티마 아우크소는, 마침내 대 전투를 앞둔 어느 날, 길고 힘든 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자 했던 마스터에 의해

"다음 주인을 찾아라. Seek and Find your Next."

봉인이 해제됩니다.
그녀는 본디 오직 카이엔만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그 주인이 그녀를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충격을 받은 그녀는 모든 기능이 망가진 채 쓰러지고 맙니다.

먼 훗날, 그녀는 델타벨룬 이라는 이름의 파티마로 다시 만들어지게 됩니다. 기억이나 추억 같은건 전부 없이. 그저 모터헤드의 컨트롤에만 전념하는 연산기에 불과한 존재로.

수천년의 삶 동안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재구성되고 그 잠시의 백여년을 그만을 위해 살아왔지만, 그것에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보답받을 수는 없었던 슬픈 운명.

모터헤드의 콕피트에 앉아 눈을 빛내는 파티마는 더없이 철두철미하고 냉혹한 연산기일 뿐이지만, 거기서 내려서서 주인 곁에 서 있을때 파티마에게는, 인격이 없는 파티마에게는, 몰지각한 일반인들에게 만만한 여자애 인형에 불과한 파티마에게는, 오직 주인만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입니다.
그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이가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아우크소의 운명은 너무나 가혹하지 않습니까. 붉은 아이 컨택트 속에 들어있는 눈동자에는 언제나 하나가득 슬픔만 읽히는 건 저 뿐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