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6일자 마린블루스 일기 중 일부.

언제부턴가 시가지나 문화 관련 업소들이 운집한 곳이 아닌, '동네'마다 있던 작은 레코드점포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을 듣기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곳인데.
홈쇼핑과 mp3, 벅스의 편리함은 잘 알고 있지만, 사실 들려오는 음악이 좋아 그 가게에 들어가 물어보고 구입하는 추억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우리 곁에 오기 힘들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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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 빼고 온 세상 사람이 다 미친 것 같아요.
그럼, 내가 미친건가?"

-by 델 스프너, <아이, 로봇>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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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 말을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천연덕스럽게) ‘틀리다’라고 발음하는 최근의 언어유행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자신의 속성을 반성조차 하기 싫어하는 한국사회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무서운 언어습관일 것이다.
-이종도의 카바레볼테르, 다르다는 건 틀리다는 것이다-< 히든 >과 < 크래쉬 >


정말, 너무 천연덕스럽고 한결같이, 모두가 '다르다'는 말을 하기 위해 '틀리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요. 대학 교수와 주유소 직원과 레스토랑 지배인과 미용사 선생님을 가리지 않습니다. 언어 생활의 표준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줘야 하는 기자와 아나운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대통령과 국회의원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틀리다'라는 단어를 '다르다'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의미가 다릅니다.
'다르다'는 의미로 '틀리다'를 쓰면 틀립니다.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한국인들은 본질적으로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한국팀의 선전을 응원하기 위해 그 경기 룰도 모르면서 모두 몰려나와 환호하고 외치지요. 그러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은 '틀려먹은' 겁니다.

....무섭지 않아요?

자연의 본질은 다양성이고, 다양성을 담지한 생물이야말로 훌륭하게 적응 방산하여 번성하는 생물이지요. 모두 같은 종류의 먹이만 찾아먹는 동물이라든지, 항상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꽃을 피우는 식물은 조금만 환경이 변해도 멸종해버립니다.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건, 멸종 위기를 스스로 자처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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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자연과 좀더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는 용감한 전사이자 정복자인 샤먼은, 겸허한 태도나 금욕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샤먼의 세계관은 이상주의와도 인연이 없었다. 자연계에 이상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샤먼은 우리 주변 생활의 거의 대부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우리로서는 머리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피부로 체험한다. 샤먼의 지각과 육체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우주적인 폭을 갖는다.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단순히 추상적인 존재에 불과한 자연의 힘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불러낼 수 있다. 환각작용이 있는 버섯과 향과 음식의 도움을 빌려, 혹은 빌리지 않고도 샤먼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로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자연의 힘을 직접 체험한다. 나아가 샤먼은 엑스터시 상태에서 의식의 확장을 경험한다.
(중략)
샤먼은 "이 초자연적인 체험으로 얻은 것은 '진정한 지혜'이지만, 이것은 감정적으로밖에 체험할 수 없다"라고 설명한다. 샤먼은 말한다.
"유럽인은 정보와 지혜를 혼동한다. 이지적인 지식은 진정한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피를 끓게하는 감정적인 지혜야 말로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다."

-코르넬리아 페트라투 · 베르나르트 로이딩거,<이카의 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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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믿어서 손해볼 것이 없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믿는 편이 낫다.

따라서 내기를 한다면, 어느 경우이든 신을 믿는 쪽에 거는 것이 더 안전한 내기일 것이다.

-블레이즈 파스칼, <팡세>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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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오.

...변하는 것도 있고.

-by 모피어스, <매트릭스 릴로디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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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은 스스로를 민간이라 일컫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다른 세계가 보이지 않으니까요.

- by 호란, <동방 마스터 노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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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자를 차로 치고, 사람들을 죽이고, 테러리스트와 전투를 벌이고, 귀신으로부터 도망치면서 먹이를 삼키는 것은 단지 무대장식, 즉 게임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편리한 은유일 뿐이다. <팩맨>이 먹이를 먹고 귀신을 무서워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죽음의 경주>도 보행자를 차로 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라프 코스터, 재미이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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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네 노래를 들어주지 않아. 네가 듣도록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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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프리퀄 3부작이 발표된 이후로 아마 계속된 논쟁이, 이야기의 진행을 클래식 4,5,6 다음에 플래시백으로 1,2,3으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순서대로 1,2,3,4,5,6으로 봐야하느냐 하는 논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를 발표한 순서대로라면 당연히 4, 5, 6, 1, 2, 3 순의 감상이 정공법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사실, 촬영 기법이라든지 액션이나 효과, 규모 면에서는 분명 저 순서대로 무한대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실 말이지 클래식에선 제대로 된 광검 듀얼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각종 기계들이 출몰하는 전투신 또한 20년 전 기술이니 어딘가 화면에서 삐그덕거리는 느낌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20주년 기념으로 리마스터링을 하고, DVD 발매 기념으로 다시 세팅을 했는데도 베이스는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그것이니 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아나킨과 오비완의 광검 듀얼, 황제와 요다의 광검 듀얼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대결도 클래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코루스칸트의 웅대한 대도시도, 에피소드 3 초입의 대규모 함대전도 볼 수 없지요. 클론 전쟁 당시의 드로이드 군대와 클래식 시대의 반군 세력은 굉장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결국 이 재미있는 영화를 갈수록 더 재미있게 보려면 제작 년도 순으로 4, 5, 6, 1, 2, 3 순서로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에는 프리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고풍스런 멋? 저 시대에 저걸 어떻게 찍었담? 그런 식의 결론이 아닙니다. 조지 루카스는, 프리퀄을 만들면서도 사실 스타워즈 최대의 매력은 클래식, 특히 에피소드 6, 제다이의 귀환에 담기도록 안배를 해 두었습니다.

자. 프리퀄에서는 놀라운 광검 듀얼이 넘칩니다. 에피소드 1의 다스 몰과 오비완의 결투. 에피소드 2의 제다이'들'과 드로이드 군대와의 대결. 그리고 에피소드 3에선 훨씬 더 많지요. 오직 광검 듀얼을 위한 영화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말이죠. 그에 비해 클래식에서는 3부작 내내 총 세번밖에 듀얼이 없습니다. 그나마도 듀얼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단순하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에피소드 4의 유일한 듀얼, 다스 베이더와 벤 케노비의 듀얼을 생각해봅시다.
한 사람은 사지 절단에 호흡기로 호흡하는 장애자입니다. (기계 팔다리가 더 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요다님 말씀대로 포스는 생명체와 연동하는 에너지장이며 그만큼 포스의 관점에서는 불구라고 봐야 합니다)
한 사람은 황야에서 20년 넘게 은거한 60이 넘은 노인이며, 상대방이 자기 옛 제자예요.

두 사람 다 20년 전엔 젊었고, 그 힘의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자신의 신념에 취하다시피 열중해 있었지만 이제는 얘기가 다르죠.

그들의 광검 듀얼은, 듀얼이라기보다 그저 서로 검을 툭툭 맞대며 대화를 하는 시간이었을 뿐입니다. 목숨을 빼앗을 의도는 둘다 처음부터 없었던 거지요. 다스 베이더는 다시 만난 옛 스승 앞에서 끝까지 '날 인정해줘' 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로 돌아갔을 뿐인데도, 그저 오비완은 끝까지 그를 용서하지 않고 포스와 하나되어 가버렸습니다.

가련한 우리 아나킨. 결국 사랑하던 스승에게 완전히 버림받았어요.

두번째 듀얼, 에피소드 5의 루크와 다스베이더의 듀얼을 봅시다.

한 손으로 루크의 검을 척척 받아내고 동시에 포스로 물체를 던져 공격하는 다스 베이더의 모습. 그리고 멀리 떨어진 전함에 있는 부하를 포스만을 써서 죽이는 그의 위압감을 보면 아실 거예요.

애초에 다스 베이더는 루크를 가지고 노는 수준의 검기인 겁니다. 반면에 루크는, 겨우 제다이의 수련을 시작한 단계이고 그것도 너무 나이들어서 시작해서 항상 고정관념의 한계에 부딪히지요.

스타크래프트 경기 중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두 사람의 실력차이가 엄청나버리면 경기 재미없습니다. 비슷한 실력이어야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런 과정에서 관전자들은 손에 땀을 쥐는 재미를 얻는 거지요.

그리고 마지막 듀얼, 에피소드 6의 다시 만난 루크와 다스 베이더의 듀얼에서, 루크는 많이 성장했지만, 그래도 다스 베이더의 위용엔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두 사람 다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20년만에 만난 아들을 죽이고 싶어할 아버지가 어디 있을 것이며, 어릴 때부터 평생 그리워한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프리퀄에서는 '볼거리'로서 광검 듀얼이 존재했지만, 클래식의 듀얼은 단지 드라마의 요소일 뿐이므로 그 대결 장면이 화려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는 건 곤란합니다.

두번째. 드라마적 요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I'm, your father." 라는 유명한 베이더의 대사가, 이미 그가 아버지임을 알고 보게 되는 프리퀄 - 클래식 순의 감상에서는 전혀 그 충격과 느낌이 살지 않는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 충격이란 건 루크 쪽에서 감정이입한 채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겁니다. 철천지 원수가 아버지라니! 세상에 충격이죠.

그러나 클래식 자체도, 가만히 보면 주인공은 루크보다는 다스베이더입니다.

기억해보세요. 에피소드4에서 루크가 먼저나왔나요? 다스 베이더가 먼저 나왔죠.
에피소드 5에서는 루크가 먼저 나왔나요? 다스 베이더의 전함이 프로브를 뿌리는 장면이 먼저 나왔습니다.
에피소드 6에서도 다스 베이더가 먼저 나옵니다.

프리퀄 - 클래식 순의 감상이라면 이 여섯 편의 영화는, 아나킨 스카이워커 - 다스 베이더의 일생이 되고, 클래식 3부작 역시 다스 베이더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럼 에피소드 5에서 충격을 받게되는 부분은, I'm your father.가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루크의 비명과 뛰어내림이겠지요. '우리 함께 은하계를 지배하자'는 말에 사랑하는 파드메도 고개를 흔들며 물러났는데, 그 아이 또한 똑같이 그렇게 하다니.

요다는 루크를 보며 '지 애비랑 똑같애' 라고 혀를 찼지만, 베이더 - 아나킨은 루크를 보며 '에미랑 똑같이 하다니'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보다도 가장 충격받은 장면은 에피소드 6의 아나킨의 마지막 대사였습니다.

"마스크를 벗겨다오. 아들아."
"그럼 죽게 되잖아요."
"누구도 죽음을 막을 순 없다."

절대로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절규하던 에피소드2와 3의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이제는 담담하게 포스와 하나되어 죽음을 바라봅니다. 저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대사, 클래식만 보아서는 그저 슬플 뿐인 대사가 이렇게도 가슴을 치는 포인트가 될 수 있었던 건 프리퀄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지요.

자아. 물론 프리퀄이 훨씬 예쁘고 멋지고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프리퀄의 주요 드라마는 전부 코루스칸트에서만 벌어졌다는 겁니다. 물론 코루스칸트 웅대하고 아름다운 도시지요. 그러나, 클래식에서는 타투인과 얼데란과 숲의 달, 얼음의 행성 호스와 방대한 운석지대, 그리고 구름의 행성 베스핀에서 숲의 행성 앤도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곳을 오가며 우주의 광대함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이렇게, 규모면에서는 사실 클래식이 훨씬 장대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6에서 황제가 죽은 뒤에 수 많은 행성에서 축하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 또한, 에피소드 1부터 봐 와야 그 감흥이 살겠지요.

그리고 광검 듀얼이 적은 대신(당연하지 않습니까? 제다이가 다 죽고 없어진 마당에) 클래식에서는 화려하고 긴박한 공중전으로 그 빈자리를 메꿉니다. 웨지 안틸레스, 한 솔로, 랜도 카리지안, 그 외에 수많은 우주의 영웅들이 있는데 왜 그리도 볼 거리가 부족하다고들 생각하시는지. 볼때마다 손에 땀을 쥐는, 초를 다투는 데스스타 공략이, 에피소드 3의 그 '여유 만만' 공중전보다 재미없다고 생각하신다면 곤란하지요.

프리퀄을 보고 난 다음에 클래식을, 이렇게 보면, 예전에는 그저 절대악으로만 보이던 다스 베이더가, 그렇게도 불쌍하고 서글프게 보일 수가 없더라구요. 어머니도 연인도,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 갈구하다 결국 그 갈망 때문에 잃고 어둠의 노예가 된 불쌍한 소년을, 냉정한 스승은 20년만에 나타나서는 조금의 어리광도 받아주지 않고, 생사도 몰랐던 아들네미는 내가 아버지라니까 안믿고 도망가고.

그 슬픔 속에 아들마저 잃어야 하는 상황에 닥친 그에게,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죠.
이 모든 악의 근원인 황제를, 죽일 수밖에.
그리하여 그는 포스 라이트닝에 온몸이 휩싸인 채로 황제를 던져버렸고, 마침내 예언대로 포스의 균형을 잡았습니다.

클래식만 봐서는 단지, 아들 덕에 개과천선한 아버지의 당연한 희생처럼 보였을 지 모르는 그의 죽음이, 참 슬프고도 안타까운, 위대한 초즌 원의 결말로 보이는 거죠.

자, 오늘 밤, 스타워즈와 함께 지새보는 건 어떨까요.
1~6편을 순서대로 감상하며 밝아오는 새벽과 함께, 다스 베이더의 죽음이 아닌 아나킨의 죽음에 눈물을 펑펑 흘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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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빈치 코드'가 한기총의 심기를 건드린 부분은 아마 신성모독 이라고 알려져 있는 모양입니다. 오래전부터 집에 굴러다니던 책인데, 요즘 이슈가 되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근데 사실, 다빈치 코드에서 말하는 시온 수도회라든지, 오푸스 데이 같은 내용들은 '사실'이기도 하고, 다빈치가 그린 수많은 종교적 회화들이 실제로는 다른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얘기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에선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얘기인데다, 예수가 대단히 독특한 인간이었고 결혼도 했었다는 이야기는 셰익스피어 시대부터 이미 널리 알려졌던 이론인데 이런게 이제와서 기독교 단체의 심기를 건드려서 상영 금지일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 건 진짜, 생 트집에 불과해요.

하지만 이 책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상영 금지 요청을 받고 있는 이유는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적 주제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신성한 여성성'의 파괴와 '남성성의 권위 확립'이라는, 일종의 거대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고발하고 있거든요. 이 소설은 풍부한 상징과 기호학적 함의를 통해, 수만년간 이어져 내려온 신성한 여성성에 대한, 남성성의 이천년간의 반란과정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반란이 거의 성공해서 이제는 덮어진 것 같지만, '시온 수도회'는 여전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성성을.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남자,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라는 말이 있지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 제목도 있고,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성차를 소재로 하는 수많은 인터넷 유머가 책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흐름은 남성성이 사회적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남근 숭배를 하는 말리의 원시적 조각상과 조지 부시의 기도하는 두 손은 본질적으로 같은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마녀 사냥을 통해 신성한 여성성의 숭배가 종교적 전통 하에 남아있던 예수 이전 시대 종교들의 모든 메시지는 박멸당했고, 여자는 남자의 부속지로 전락한 지 천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크고 배우기 쉬운 언어인 '영어'를 봅시다. prince왕자에 ess를 붙여야 princess왕녀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man인간이란, 남자를 가리킵니다. 영어로 쓰여진 최고의 고전, 반지의 제왕을 볼까요?
"War is the province for men."
에오메르는 에오윈에게 말합니다. 호빗 '메리'가 전장에 뛰어들겠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냄과 동시에, woman여자인 에오윈이 전장에 뛰어들려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는 충고지요.
"No man can kill me."
마술사왕이 에오윈에게 하는 말이지요. '인간'은 나를 죽일 수 없다는 의미지만, '남자'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의미로도 보입니다. 에오윈은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당연히.

언어는 그 언어가 사용되는 세계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가장 보편적인 척도지요. 그리고 이렇게 성차별적인 언어인 영어가 지배적인 오늘날의 세계는 남자를 위주로 짜여져 왔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여성을 원합니다. 여성이란 인격체를 함께 살아갈 배우자로 원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프로이트적으로 본질을 따지면 그 여성은 결국 성욕의 충족과 유전자의 보존을 위한 도구로 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0살도 안된 어린 소녀부터 60세가 넘은 노파에 이르기까지, 이 욕구에서 자유로운 여성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가장이란 권위를 틀어쥐고 있는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고 길들여집니다. 아버지는 남자고, 남자의 기준에서 여성을 길들이는 과정은 결국 '다른 남자에게 가장 가치있어보이는 성욕 충족 및 자녀 생산 도구' 로 보이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정숙한 여성과 현모 양처가 여성의 이상향으로 보여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구조에서 비롯합니다.

하지만 도구로서의 여성을 남자들은 하나만 원하지 않습니다. 유인원 중에서, 오직 인간과 긴팔원숭이만이 일부 일처제를 지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주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습니다. 일부 다처제가 오히려 더 오랜 시간동안, 권위를 가진 우두머리 인간man에게 이어졌지요. 침팬지와 오랑우탄과 고릴라처럼, 인간도 본질적으로는 일부 다처제를 원하는 동물인 셈입니다. 이 4종의 수컷은 모두 자위행위를 합니다. 성욕의 충족이 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종족 보존을 위한 최선의 여성을 선택하긴 하지만, 인간은 성욕을 충족시킬 다른 여성을 원합니다. 여성을 먹는것에 비유하는 인간man의 표현들은, 수많은 언어에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밥만 먹고 어떻게 살아. 반찬도 먹어야지. 라고 말하는 그들의 자기 합리화는 본능에 대한 합리화지 일탈행위에 대한 합리화가 결코 아닙니다.

성욕의 충족 도구로서 바라보는 여성은 결국, 다양한 입맛에 맞춰지는 여러가지 식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항상 여성에겐 이중성이 강요됩니다. 교복미소녀가 전통적인 성적 판타지인 이유를 알겠지요? 맛있게 보이도록 속살이 비치는 교복 블라우스를 어린 학생들에게 입히고, 내 가족이니 그 위에 조끼를 입혀 그걸 가립니다. 맛있게 보이도록 바람이 불면 속옷이 보이기도 하는 스커트를 입히면서, 내 가족이니 다리를 오므려 앉는 등 자세부터 정숙하길 요구합니다. 완전히 공개되어 있는 도구는, 내 것이 아니게 됩니다. 불편합니다. 공공 화장실이 더러우면 볼일을 보면서도 불쾌한 것처럼, 창녀는 불편합니다. 하지만, 교복 미소녀는 (검증은 별도로 하고) 위의 이중성 덕분에, 내가 처음 사용하는 것이고 그 효용이 월등합니다. 이 판타지는 결국 남이 입댄 음식보다는 처음 나온 음식이 맛있다는 원칙에서 비롯하는 겁니다. 손을 대면 이중성이 깨집니다.

이렇게, 남성 위주의 사회 구조에서 모든 남성은 변태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변태라는 단어의 기준이 일부 일처제보다 일부 다처제를 선호한다는 점, 혹은 일반적인 식사보다 특이한 식사를 원한다는 점에 있다면 말이죠.

여성성이 신성하게 여겨지던 농경시대에는 이러한 변태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대지와 같이 생명을 창조하고 양육하는 여성은 신성한 것이며, 성교는 영육의 결합이고 인간의 능력으로 신과 닿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수많은 포르노 산업의 결과물이 남자에게 성교를 오락으로, 여성을 그 도구로 보이게 합니다. 산업 자체가 남성 위주로 짜여져 있습니다. men남자은 (여성을 포함한) 자연물을 이용하여 노동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냅니다. 해체하고 가공하고 변화시켜 일부는 버리고 일부는 본래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는 등의 '파괴'를 '가치 창조'라고 부르는 이 멋진 사회 구조는 men남자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men이 무얼 창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에오메르의 대사를 변형하자면, Creation is the province for women.

여성은 신성하고, 위대하며, 그녀들의 2세를 양산하기 위해 일부 유전자를 분리해 떼어놓은, 걸어다니는 정자주머니일 뿐인 남성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위대한 혼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어머니도, 아내도, 딸도, 걸레도, 퀸카도, 먹이도 아닙니다.

여성은 여성입니다.





한기총의 주 멤버는 남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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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내가 막을 거야. 내 힘으로.'

'누구도 죽음을 막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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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두 영화니까, 무어라 내용에 대해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평범한 소년이 세상의 운명을 지게 되지만 자기 스스로의 길을 자신의 방법으로 개척해 나간다는 이야기라는 점은 비슷하고, 사랑과 우정과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라는 점도 비슷해요. 헐리우드 대형 영화사에서 대 자본을 투자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도 그렇고요. 하긴, 이정도까지 추상화했을 때 비슷하지 않은 이야기가 몇개나 남을 지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두 영화에는, 한쪽은 여섯편짜리고 한쪽은 세편짜리, 한쪽은 편당 두시간 한쪽은 편당 세시간 반이라는 분량상의 차이 외에도, 서로 절대 넘을 수 없는 깊은 골이 존재합니다. 그 차이는 '한국에서도 흥행했다.'와 '한국에서만 흥행하지 못했다.'의 차이지요.

한국은 굉장한 나라입니다. 헐리우드 영화가 수입 배급되는 나라 중에서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이렇게 높은 나라가 또 있을까요. 또한 그 자국 영화가 타국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도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질 것도 없다는 점도 그렇구요. 그만큼 문화적 잠재력도 깊고 전통도 확고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런 한국에서 스타워즈는 흥행하지 못하고 반지의 제왕은 흥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보의 차이를 예로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타워즈는 첫 개봉부터가 본토에 비해 너무 늦은데다가 홍보 자체도 잘 안되었고, 드라마적으로 가장 긴장감넘치고 중요한 부분인 에피소드 5 - 제국의 역습 편은 국내 개봉 자체를 못했었지요. 이렇게 첫인상을 구긴 영화가, 90년대 말에 재개봉을 하고 그 뒤를 이어 개봉을 한다 해도 관객들이 기억해주고 다시 극장을 찾을 리 만무합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공짜로 (불법으로!)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면 되는 한국 사회의 편리한 정보 인프라 구조상, 어지간하게 재미있거나 '극장'만의 메리트가 없는 영화는 장사가 안될 수밖에 없지요. 물론 반지의 제왕처럼 국내 배급사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원작 소설 등의 주변 상품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마도 국내에서 처음 스타워즈를 받아보게 되는 배급사나 영화관 관계자 여러분들에게도 '첫인상'이 나빴던 게 이유가 되지 싶네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를 '아무도 안본'게 아니라, 스타워즈도 분명 극장에서 보고 나온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평은 반지의 제왕을 보고 나왔을 때와는 달랐지요. "그냥 그래. 화면은 멋있더라."

왜 그렇게 말할까요. 그건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의 이야기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긴 호흡으로 여유있게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웅장하고 아름다운 화면 속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반지죠.

반지를 파괴해야 하는 사람들. 반지를 되찾아야 하는 족속들이 서로 극명하게 대립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배경 이야기를 잘 모르더라도 모든 것은 반지로 귀결된다는 그 하나 만큼은 이해를 하게 되고, 모든 주인공에게 닥친 상황을 절박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3편 왕의 귀환에서 마침내 반지가 파괴되었을 때, 많은 관객들이 안절부절 못했던게 저거만 부서지면 얘기 끝날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3년동안 (일년에 3시간이나!) 극장을 찾아줬는데, 반지가 부서지고도 도무지 끝날 기미를 안보이니 일어섰다 다시 앉기를 반복할 수밖에요.

하지만 스타워즈는 긴박하고 경쾌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면서도, 재기 넘치는 독특한 화면 속에는 그다지 분명한 목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포스? 라이트 사이드와 다크사이드의 대결이 그 목적이 될 수 있다고 믿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런 추상적인 개념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캐릭터를 형성하는 데는 도움이 될 지 몰라도요.

스타워즈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목적이 다 따로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한 편에서 귀결되는 게 아니라 전편, 혹은 그 이전 편부터 계속해서 의도되고 추진되어온 목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포스의 균형을 잡는다는 예언 하나 믿고 미래도 보이지 않는 위험한 아이를 받아들인 제다이 카운슬의 마스터들이나, 단지 다크 사이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라이트 사이드를 밀어낼 뿐 아니라 은하계 전체를 지배할 권력을 노리고 있는 팰퍼틴이나, 다시 은하계에 정의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레아 공주나, 그들의 목표는 너무 거대하고 또한 주인공의 개인적 목표와도 서로 나란하지 않기에 그저 배경 이야기처럼 보일 뿐입니다. 정작 여섯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아나킨과 그 아들 루크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향해 행동하지요. 아나킨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리고 루크는 갓난아이 때부터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그림자를 뒤쫒기 위해, 영화에 보여진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영화와 영화 사이, 영화가 끝난 뒤에서 살아갑니다. 관객은 누군가 한 사람, 감정이입을 하거나 공감해줄 사람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냥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열광하기엔 저들이 왜 저렇게 싸우나 하는 식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거지요.

납득이 가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두 영화에서 드러나는 '아버지 상'의 차이에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버지, 혹은 그 대신이 될 삼촌이나 왕의 모습은, 늙어 약한 모습도 보이지만 위엄있고 단호하며, 리더쉽을 갖추고 앞장서서 이끌어줄 사람입니다. 빌보도 그렇고, 엘론드도 그렇고, 세오덴도 그렇고, 데네소르도 그렇고, '아버지'라는 이름과 권위에 모두 어울리는 인물들이죠. "물론이지. 그애도 배긴스니까." 와 같은 빌보의 대사. 세오덴의 "부모가 자식을 묻는게 아니라오." 와 같은 슬픈 대사. 그리고 "저희들 입장이 바뀌었길 바라시죠? 제가 죽고 형이 살아있는." 과 같은 파라미르의 대사를 보고 공감이 가지 않는 한국의 부모와 둘째들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네요. 그들은 제3시대 말엽의 가운데땅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한반도의 수많은 큰아들 빠돌이 아버지이자 둘째나 조카에겐 냉정하기만 한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스타워즈는 기본적으로 아버지가 없습니다. 프리퀄에서는, 제다이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벗어나 무예와 학문과 포스를 연마하는 독특한 수행자 집단이며, 권력의 중심과 닿아있고 극도로 절제를 요구하는 자들입니다. 아버지보다 마스터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그들에게, 아들/딸 보다 파다완이란 호칭이 더 익숙한 그들에게 아버지상을 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제일 근접한 이야기구조라면, 이제는 한물 간 무협영화의 사제관계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프리퀄 스타워즈는 포장은 화려한 우주 판타지일지는 몰라도, 한국인에게는 한물 간 무협지로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들을 전부 베어넘겨버린 아나킨이 아버지가 되어 있는 클래식에서는, 다스 베이더의 잊지못할 그 한마디 대사를 남기죠.

"I'm, your father."

충격적인 반전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이는 70년대부터 수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온 이야기구조입니다. 출생의 비밀 말이에요. 드라마에선 모두가 한 가족이지요. 뻔한 이야기 아닙니까. 모르긴 몰라도, 클래식만 본다 해도 저 장면에 딱히 충격받을 한국인이 그리 많진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반지의 제왕을 지배하는 정서는 한국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반지 원정대 편에서 간달프를 끌어들이려는 사루만의 모습이란, '우리가 남이가' 라고 말하는 부정한 권력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우리가 남이가'는 원정대를 통해서도 수없이 반복됩니다. 요정과 난쟁이의 반목 정도는, 지역감정에 빗대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가부장적인 로한 왕과 곤도르 섭정의 모습은 '군사부일체'와 같은 성어가 생각나게 하고, 사우론의 군대가 사람들을 덮치는 모습이란, 화적패나 오랑캐가 덮쳐오는 사극의 그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스타워즈의 전투는 화려하긴 하지만, 절박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군이 아니라서일지도요? 제다이가 너무 강해서일지도? 혹은 적군이 너무 바보같아서일지도요. 신나게 온 우주를 뛰어다니지만, 너무나 많은 문화권의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주기에 관객으로서는 저 많은 이들이 다 어쨌다는 걸까 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지긋지긋한 시골짝 박차고 세상에 나와 뭔가좀 해볼 요량이었다든지, 친구를 구하려고 위험을 자초했다든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든다든지 하는 주인공의 사명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알아서 벌어집니다.

요약하자면, 반지의 제왕은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여운을 주지요. 흥행하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타워즈는, 북미 신화이기에 영화를 보는 잣대로 평가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그다지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이 두 영화의 흥행 성적에 있어 크게 갈리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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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녕 이 나라의 왕이 맞느냐?"
궁궐 속에 곤룡포로 박제되어 유배된 연산의 외침은, 정글의 왕임을 애써 주장하려는 고독하고 외로운 킹콩의 표효.
"나, 이거 하고싶어. 이런건 여기서밖에 못하잖아." VS "돈은 문제가 아니야. 난 연극을 사랑했어."
오직 광대놀음을 사랑하지만 타고난 미모 때문에 몸을 팔길 강요받던 공길은, 인정받는 글을 쓰고 싶지만 돈의 압박에 굴복하는 잭 드리스콜.
"왕을 가지고 노는 거야." VS "네가 영화를 알아?"
한양을 향해 떠나 큰 판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려 했던 장생은, 미지의 해골섬으로 가 아무도 담지못한 영상을 담아오려 했던 칼 덴햄.

온 저자거리에 왕 이야기만 넘실대는 한양은, 오직 콩을 섬기는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해골섬.
수많은 중신들에게 둘러싸여 살아남으려 애쓰는 연산은, 수많은 공룡들 속에서 외로이 살아남으려 애쓰는 킹콩.
연산은 장생의 눈을 지지고, 킹콩은 칼 덴햄의 카메라를 박살냈습니다.
연산은 공길의 인형극에 취하고, 킹콩은 잭 드리스콜의 글을 이해하는 아름다운 앤에게 취합니다.
아픈 기억들을 헤메이며 거친 싸움을 통과하며 그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갈구 끝에 연산은 결국 녹수에게 묶이고, 킹콩은 결국 커다란 쇠사슬에 묶입니다.
장생은 자신의 눈을 지진 연산에 대한 복수로, 공길과 함께 목숨을 걸고 마지막 한탕의 줄놀음을 넘고, 칼 덴햄은 자신의 카메라를 박살낸 킹콩에 대한 복수로 그를 쇠사슬에 묶어 무대에 올립니다.
연산은 광대놀음에 마음을 빼앗긴 채 중신들의 반정으로 목숨을 잃고, 킹콩은 앤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미 육군 항공대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던, 결코 통제할 수 없는 두 왕의 최후는, 그렇게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자유를 주었던 것은, 바로 아름다움. 예술가의 혼이 부어진 그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칼 덴햄에게서 피터 잭슨을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장생에게서 이준익을 읽었습니다.
1933년 작 '킹콩'과 피터 잭슨의 '킹콩'이 다른 것만큼이나, 연극 '이'와 이준익의 '왕의 남자'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름을 추구한 결과,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던 이 두 이야기가, 예술가의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꽃에 대한 터질 것 같은 사랑을 노래하는, 자화상과 같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광대! 광대지!"
그리고 공길은 다시 태어나 광대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연극을 사랑했다면 바다에 뛰어들었겠지."
그리고 잭은 앤에 대한 사랑으로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제 죽음보다 더한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을, 말하고 싶은걸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갈망을 이해합니까?
셰헤라자드가 죽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멈추던 그 치열한 끊음을,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모자장이의 절규를, 이해할 수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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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 감독, 올란도 블룸 주연. '킹덤 오브 헤븐'의 배경은 십자군 전쟁입니다. 유대교 사원이 있는 예루살렘,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이 자리한 예루살렘, 이슬람의 사원이 자리한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자는 그 '이름'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성벽아래에서 죽어갔습니다.
영화는 십자군 전쟁 최악의 졸전이라고 평해지는 '하틴의 뿔' 전투가 일어나기까지의 배경, 그리고 그 이후만을 다룹니다. 하틴의 뿔 언덕에 가득한 까마귀 떼만이 어이없는 패전을 보여줄 뿐. 우리의 주인공 발리안은, 자신이 십자군으로서 예루살렘 근방에 영지를 가진 높은 기사 고프리의 아들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저 아이와 아내를 잃은 불쌍한 대장장이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신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생부에게 이끌려 기사가 되고, 생부가 죽자 영주가 됩니다. 발리안은 성지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곳에도 신은 없었습니다. 남편이 있는 공주가 자신을 유혹하고, 사랑은 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이용당하기 때문이겠지요.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용당하기 때문에 결코 발리안의 고결한 마음은 도구로서의 자신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기사 기 드 뤼지앵은 결국 공주를 아내로 삼았기에 왕이 되고, 곧바로 전쟁을 도발합니다. 그리고 '하틴의 뿔' 전투에서, 물도 공급받지 못한 그의 부대는 간단하게 쓸려버립니다. 이제 이슬람의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은, 그동안 평화를 위해 기독교도의 지배를 인정해 준 예루살렘을 자신의 발 아래 두려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했던 그대로 응징을 가하려,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신은 핑계였지. 다만 영토와 이익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어."

기사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그저 학살 앞에 벌벌 떨고 있을 뿐. 하지만 우리의 발리안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분연히 일어서, 싸웁니다.

신을 위해서도, 영토와 이익을 위해서도, 사랑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죄없는 이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당연히 질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시체를 태우면 종말의 날이 와도 부활하지 못해요!" - 예루살렘의 주교
"놔두면 전염병으로 다 죽어요. 신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이해 못한다면, 신도 아니니 상관 없겠죠." - 우리의 발리안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고, 빌리안은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발리안이 본래 살던 마을에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찾아옵니다. 성지를 되찾으러 간다고 말하죠.

"자네가 살라딘에 맞서 예루살렘을 지켰다는 그 고프리의 아들 빌리안인가?"
"전 그냥 대장장이입니다."

네. 얼굴과 손목에 긴 흉터가 남았지만, 그는 대장장이로 돌아왔습니다.
더이상 공주가 아닌 새 아내와 함께요.
3차에 걸친 사자왕 리처드의 원정은 씁쓸한 협상으로 끝났고, 엄밀히 말해서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이 '성전'은 계속되고 있고 그 자리에, 우리 친구들, 우리 동생들, 우리 아들들이 서 있기도 합니다. 아르빌에 말이죠.
그들은 왜 거기 서 있는 걸까요?
왜 미국과 한국과 이라크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버려야 할까요?




제트 리, 이연걸로 더 잘 알려진 최고의 액션배우의 또 하나의 역작입니다. 'Danny the Dog' 어릴때부터 갱들에게 '사육'되어 목줄을 풀면 맹견으로 돌변하는 대니. 인간으로서의 감정이나 사고가 배제된 그의 눈 앞에 맹인 피아노 조율사 샘(모건 프리맨)이 나타납니다. 피아노 소리에 그의 안에 남아있던 작은 인간이 깨어났고, 우연한 기회에 갱들로부터 놓여난 그는 그저 피아노를 찾아갔다가 샘과 그의 수양딸 빅토리아가 사는 작은 자취집에서 살게 됩니다. 음악과 대화와 사랑이, 그를 조금씩 인간으로 돌려놓고, 마침내 그는 절대로 스스로는 풀 수 없던, 맹견으로서의 자신을 묶어두던 그 목줄을 풀어내리고 진짜 인간이 됩니다.

그때서야 눈앞에 나타난 자신을 키워준 갱들. 파이터들로 하여금 서로 죽일때까지 싸우게 하는 불법 클럽에 끌려간 그는 더이상의 살인은 하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살인을 강권합니다.

탈출하여 샘과 빅토리아에게 돌아간 대니는, 빅토리아의 피아노 연주로 마침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찾고, 자신을 키워준 갱단 두목이 어머니를 상습강간하다가 죽이고 만 원수라는 걸 깨닫습니다. 갱들이 샘과 빅토리아가 사는 아파트를 덮치고, 이제 대니는 다시금 싸워야 합니다. 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하나요?
아니면 어머니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 싸워야 하나요?

거대한 전쟁이건, 일 대 일의 격투건,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할 때 그 이유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정당한 이유가 없는 싸움은, 사육되던 대니의 지난날처럼, 기 드 뤼지앵의 '하틴의 뿔' 전투 처럼 승패를 가리지 않고 비참할 뿐이지요. 주체가 아닌 싸움. 발사된 화살. 부러져나가는 검날. 빗나간 창처럼 의미없이 손실될 뿐입니다.

어쩌면 삶은 그 사람에게 있어 기나긴 싸움입니다.
당신의 싸움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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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가장 잔혹한 것도, 가장 강한 것도

가장 끔찍한 것도

가장 지독한 것도


인간입니다.




"너흰 질병이야."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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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스타워'스' 개봉 안내 전단지(전화카드 사이즈)

영화 <스타워즈>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영화에 대해 관심이 적거나, 영어문화권과 상관이 없는 세계의 사람일 것이다. 1977년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이 우주를 배경으로 한 무협 환타지 액션 드라마는 세대를 넘어 계속해서 재창조되며 2005년 여름, 6편에 이르는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개봉할 때마다 그 해 최고의 영화로 거론되며 극장가의 많은 기록들을 갈아치웠고, 영화 제작의 개념을 단지 '있는 대상을 촬영하는 것'에서 '보여주고 싶은 화면과 들려주고 싶은 소리를 자유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완전히 뒤집어 놓은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의 인식과는 달리 헐리우드 유수 영화사들에 의해 대자본의 투자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가 아닌, 조지 루카스 감독의 '루카스 필름'이라는 작은 회사의 고유 자본으로 제작된 독립영화다. 20세기 폭스사의 로고는 언제나 이 영화 필름의 맨 앞에 붙어있지만, 20세기 폭스사는 다만 배급만을 담당했을 뿐, 단 1센트의 자본도 투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헐리우드 영화가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을 누르지 못하는 몇 안되는 영화 강국 중의 하나인 한국에서만큼은 이 헐리우드와 거의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영화가, 전혀 인기를 끌지 못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개봉된 클래식 3부작 중 2번째 작품 <제국의 역습>은 아예 개봉되지도 못했고, 세 번째 작품이자 당시까지만 해도 완결편이었던 <제다이의 귀환>은 본래 83년작이었으나 4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한국의 상영관에서 개봉하게 된다. 1997년,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개봉 20주년 기념을 겸해 이 낡은 세 영화를 디지털 기술로 리마스터링하여 재개봉했는데, 이때에도 국내에서의 흥행 수입은 세 영화를 모두 합쳐도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공룡 영화 <잃어버린 세계>의 수입만도 못했다. 1999년부터 개봉된, 클래식 3부작의 앞이야기를 다루는 프리퀄 3부작 역시 2005년에 이르도록 그다지 국내에서의 흥행은 좋지 못했다. 그 결과, 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립영화에 대해서 너무 많은 부분들이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이영화는 아동, 청소년용도 아니며, SF(Science Fiction)도 아니고 (6편의 영화 모두,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듯 검은 화면에 뜨는 파란 글씨 "옛날 옛날 먼 옛날에 은하계 저 멀리에서...Long, long time ago, in gallaxy far, far away..."로 시작한다.), 심지어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무기 이름또한 국내 모 포털사이트에 의해 '레이저 검'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명칭으로 잘못 알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스타워즈>의 세계관은 <반지의 제왕>에 비견될 만큼 방대하고 깊이있으며 또한 독특한 철학적 자연관을 보여준다. 포스Force로 대변되는 우주의 질서를 잡기 위한 제다이Jedi와 시스Sith의 대결, 그리고 마침내 포스의 균형을 가지고 오는 결말의 대담함은, 화려한 광검Light-Sabre 결투와 우주 공중전과 함대전 등으로 장식되어 풍성한 볼거리 또한 제공해준다. 수많은 개성적인 행성의 표정과 독특한 생물들, 인간 외의 종족들, 드로이드Droid라고 이름지은 스타워즈 특유의 인격과 개성을 가진 기계들, 그리고 위험한 우주의 풍경을 담아내는 과정은 하나 하나가 '기록'이 아닌 '창조'의 과정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조지 루카스와 그의 팀은 아무도 보지 못한 광경,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 속에 이 방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스타워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리퀄 3부작에서 드러나는 은하 공화국의 몰락과 은하 제국의 성립 과정은 20세기 초 히틀러와 나치당의 집권 과정과 닮은 점이 많다.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정치로부터 돌리고 힘과 공포로 권력을 유지하는 클래식 3부작에서의 제국의 모습은 레이건 시절의 미국 정부, 그리고 오늘날 조지 부시 2세 대통령 하의 미국 정부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또한 단지 이러한 사회적 쟁점 외에도, 서로를 베어 죽이고 그 결과 우주의 평화를 가져오려 하는 제다이와 시스의 모습을 대비시켜 악을 행하는 선은 정당한가, 선을 행하는 악은 정당한가와 같은 윤리적, 철학적 쟁점들 역시 시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화두를 던져준다는 의미에서 <스타워즈>는 그저 한바탕 즐기고 넘어가는 오락용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스타워즈>가 아닌 다른 영화라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 면모이다. 여기서 <스타워즈>를 언급하는 것은, 이 6편의 영화가 단지 영화로 그치지 않고, 혹은 단지 하나의 대중예술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화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신화는 더이상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핵심적인 코드가 아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예술가들은 신화속의 신과 인물들을 소재로 삼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미술품으로, 시로,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인간을 소재로 삼았다면 단지 음화(淫畵)에 지나지 않았을 여러 작품들이 아프로디테 여신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움'이라는 캐릭터의 의미로 도덕적으로 허용되었다. 단테의 <신곡> 등 성서에 기반을 둔 여러 예술품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틀로 신화가 기여했다는 점을 확인하게 해준다. 그러나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외침, 그리고 2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고 난 현대의 인류에게 신성이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신화 세계는 물론이고, 그들의 제국주의에 의해 잔인하게 해체당한 다른 세계의 수많은 신화 속의 신들 역시 더이상 자신들의 피조물에 대해 믿음을 받아내지 못한다.

이러한 신화의 공백은 현대의 새로운 신화들이 메우려 시도하고 있다. TV에서 방영하는 <신화 창조의 비밀>과 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예다. 이제 오늘날에 있어서 신화가 되는 것은 놀라운 사람, 사람이 해낸 놀라운 업적, 또는 인간 외의 것에 대한 각양 각색의 쉽게 믿어지지 않는 '과학적' 발견(로스웰에 추락한 외계인과 우주선, 잃어버린 세계, 네스 호의 괴물 네시 등) 등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종래의 신화가 가진 문화 전반에 걸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여전히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어하고, 인간의 감성이 가진 가능성을 믿고 싶어한다. 신화는 바로 이러한 빈자리에 필요한 이야깃거리이다. <스타워즈>는 이러한 신화에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놀랍고 신비한 방대한 세계의 모습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마치 신처럼 명확한 캐릭터성. 그리고 풍부한 자기 반복과 자기 암시이다.

신화의 신들은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성(性)적인 아름다움을 캐릭터로 가진 신이 아프로디테라면, 전장의 잔인함과 광포함을 캐릭터로 가진 신이 아레스인 것처럼, <스타워즈>의 등장인물들 또한 신화 속의 영웅들처럼 정형화되어 있어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 모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모험자 루크 스카이워커와 닳고 닳은 무법자 한 솔로, 고결하지만 용감한 공주 레아, 은둔의 현자 오비완 케노비, 그리고 권위와 힘의 상징 다스 베이더와 같은 <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의 주인공들은 이 후의 작품들에서도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며 관계맺고 변해가며 성장하고 파멸하거나 마침내는 포스와 하나되어 영(靈)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신화는 자기반복을 통해 완성되는데, 히브리 신화에서 신을 거역하는 이들과 그에 대한 응징 또는 용서의 과정들이 이브의 사과에서부터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스타워즈> 역시 이러한 반복의 과정을 지녔으며 이는 "I have a bad feeling about this.", 그리고 "May the Force be with you."와 같이 매 영화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대사들로 대변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생활에 적용하는 것처럼 여러 영화들에서 <스타워즈>의 대사나 상황을 인용하게 만들었다. 영화 <액설런트 어드벤처>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주인공 10대 소년들은 중세로 가서 칼싸움을 하며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의 대결을 흉내낸다. <플래시드>의 주인공들은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유인할 때 쓰는 경광봉을 마치 광검처럼 들고는 장난을 치며 "May the Force be with you!" 라고 외친다. 그리고 지구로 다가오는 거대 소행성을 반토막내기 위해 우주로 출동하는 <아마겟돈>의 주인공들은 츄바카와 한 솔로 같은 유명한 캐릭터를 들먹이며 자신들을 그 위치에 대입시킨다.

이러한 점들 이외에도 <스타워즈>가 얼마나 신화적 은유와 환유들을 많이 포함하는가는 다음의 패러디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 행사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신앙고백 - 사도 신경(1)과, 그 스타워즈식 패러디(2)이다.




(1)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신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2)전능하사 우주를 지으신 조지 루카스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포스로 잉태하사 동정녀 슈미에게 나시고

오비완 케노비에게 고난을 받으사 용암에 빠져 죽으시고

장사하지 않고 기계몸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제국에 오르사 전능하신 황제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스베이더로서 포스의 균형을 잡으러 오시리라

포스를 믿사오며 거룩한 카운슬과 제다이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미국 네티즌들의 만우절 장난 중 하나인 타이타닉 2 포스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997년작 <타이타닉>은 훌륭한 영화다. 아름답거나 장엄한 화면 안에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담아냈으며, 그 결과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과 사회적 이슈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타이타닉은 단지 그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재생산하듯, 타이타닉의 등장인물이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즉 <타이타닉>'을' 이야기하는 것만 가능할 뿐, <타이타닉>'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짧은 한 편이기에 자기 반복과 자기 암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캐릭터성도 부족하여, 많은 관객들이 잭과 로즈라는 등장 인물의 이름보다는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두고 <타이타닉>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신화적 특징들이 결여되어 있으니 <타이타닉2>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포스터와 같은 합성 이미지가 하나의 유희에 불과할 뿐 실제의 영화 혹은 소설 등 또 하나의 대중예술 작품으로 실현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스타워즈>는 가능하다. 즉, 우리는 <스타워즈>'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스타워즈>'로' 이야기할 수 있다. 티모시 잰의 스타워즈 소설들(제국의 후예, 어둠의 반란, 최후의 명령)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는 등단한 소설가에 의해 정식으로 출판된 문학 작품이며,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으나 최근에는 절판되었다. 클래식 3부작 이후 세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들은 조지 루카스의 등장인물과 세계관을 사용하면서도 작가의 독특한 내러티브와 주제를 표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또한 카툰 네트워크 채널에서 방영된 <클론 전쟁>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은 2002년 개봉한 <클론의 습격>과 2005년 개봉한 <시스의 복수> 두 스타워즈 영화 사이의 일을 다루고 있으며, 그리버스 장군과 같은 <시스의 복수> 한 편만 출연한 단역 캐릭터의 내력 등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미니시리즈 등으로 제작되거나, 다양한 장르의 게임(RTS, RPG, FPS 등)으로 출시된 스타워즈의 로고가 달린 게임들은 또한 영화 본편에서는 나오지 않은 여러 행성 출신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 본편 못지 않은 재미와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스타워즈>는 단지 영화만이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대중예술 분야에서 하나의 신화적 바탕이 되어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대중예술이면서 다른 대중예술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경우, 즉 팬덤 현상이 <스타워즈>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드라마 <프렌즈>, 등은 배우의 이름보다는 캐릭터의 이름을 두고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놀라운 캐릭터성을 지닌 작품들이다. 소설 <반지의 제왕>은 피터 잭슨이 감독한 영화를 비롯해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으로 여러번 재창조되었으며, 이 작품 안에 나오는 작가의 인공어 '퀘냐'로 성서 등을 번역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까지 설립되어 있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건담>, <마크로스>는 수많은 감독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하나의 이야기 구조가 되어 왔다. 2004년 개봉한 두 영화 또한 주목할 만하다.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프레디 VS 제이슨> 이 영화의 제목에서 보여지는 네 캐릭터는 모두 여러 편의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상징처럼 각인된 공포의 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가 영화를 이야기의 소재로 삼게 된 것이다.

이처럼 대중예술은 단지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중'의 예술이기에, 팬덤을 형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야깃거리가 되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인류는 대부분 잃어버린 '신화'가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긴 세월동안 이어지다 현대의 이름으로 단절되어버린 문화와 예술의 전통을 재창조하는 토대로 대중예술을 받아들일 수 있고, <스타워즈>는 그러한 신화적 가능성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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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고생 시집가기>는 임은경과 은지원의 (이젠 그다지 높지는 않은) 네임밸류만으로 짜여진 어린이 - 청소년용 3류 명랑 코미디에 불과합니다.

라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고 일견 사실이기도 합니다만, 영화의 시작은 정말 의외입니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어린 울보 소녀에게 평강의 혼이 씌었고, 16세 생일 전에 온달을 만나 정을 통하지 못하면 죽게 될거라는 설정으로, 모든 것을 운명으로 몰아갑니다. 성정 과격한 어머님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며 점집을 들어 엎지만, 예언되었던 16세의 생일이 다가오자 죽음은 계속해서 여전히 울보이지만 전교 일진인 막강한 소녀 평강을 스쳐지나가고, 마침내 눈앞에 온달이 나타나자 '살기 위해' 그의 사랑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온갖 장애가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운명의 그날, 역사는 이루어지고, 두 사람은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에 골인합니다.
그리고 운명을 완결짓는 두 사람의 아이는, 이제 다시 점집으로 돌아와 낙랑공주의 혼이 씌었다는 판정을 받고 북을 찢습니다. 뭘 믿고 이리 스케일이 큰건지. 참 재미있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합니다.

아쉬운점이야 물론 많지요. 단지 웃음을 위해서 집어넣은 듯한 칠수나 원어민교사 같은 캐릭터들은 정말 삭제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전교 1등이지만 비만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평강과 같은 반의 여학생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평강과 대비해 좋은 이야기구조가 되었을 텐데 도리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르는 다른 캐릭터들에 밀려 비중이 약화되어 버린 듯 합니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 또한 예상 그대로이고, 액션도 특수효과도 엉성하지요.


하지만 죽어야 한다는 절실한 운명을 알고 있기에, 관객들은 한심한 장면들에는 실소하면서도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결말을 기다리는 듯한 심정으로 평강을 응원하게 됩니다. 예쁘지만 막강한 소녀가, 똑똑하고 잘생긴 소년을 만나 사랑에 골인한다는 너무 단순한 스토리는, 또한 우리가 늘상 접하던 "멍청한 고교 일진이 영리한 학교 수석 여학생과 사랑한다"는 소년만화의 정석을 반대로 뒤집었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깊습니다.




한편  <제니주노>는, 똑같이 교복 입은 아이들의 결혼을 그리면서도 무척 실망스럽기만 합니다. 전교 1등인 귀여운 여중생과, 프로게이머로 잘나가는 예쁜 남학생. 이건 정말 3류 소년만화나 순정만화의 공식일 뿐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여고생 시집가기>에 비해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화면구성과 근사한 로맨스 장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니주노>는 애초에 영화이길 포기하고 멋대로 장면을 나열했을 뿐입니다. 지금 제가 스토리를 요약해서 설명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죠. 거기에는 '운명'과 같은 일관성도, '사랑'과 같은 당위성도 보이질 않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라면서 어째서 전혀 실현성이 없는 마무리를 보여주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박민지양이 임은경보다 별로안예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디 우리 은경이랑 비교를...)
영화는 영화 나름으로 이야기를 완결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웹에 연재된 만화나 실화, 혹은 인터넷 소설이라는 허무맹랑한 장르명으로 출판된 귀여니즘 출판물이 인기를 끄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에 기반하고 있는 영화라도 감독이나 배우들의 나름의 해석과 가치관이 담기지 않는다면, 단지 동어반복적 확대 재생산에 불과할 뿐입니다. 최소한의 구조도 갖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리 예쁜 화면에 사랑스런 배우들을 담아낸다 하더라도 영화의 이름을 달고 극장에 걸릴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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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화가 하나뿐입니다.

영화 '천군'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잘 모르겠네요.
남북한의 군인들이 1572년의 조선시대로 날려가 이순신을 만난다는 이야기.
박중훈 식 코미디를 유행시켰던 바로 그 배우 박중훈이 이순신에 캐스팅되어서인지, 이 영화가 요즘 유행한다는 그노무 '퓨전 코미디 액션 사극'으로 생각하게 되면 아마도 돈주고 안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여러가지 특수효과들이 조금씩 허술한게 눈에 띄고 그래서 그다지 깔끔한 화면을 보여주진 않습니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갈라선 남과 북의 문제.
한반도의 핵 문제.
애국심의 범위에 관한 문제.

전쟁을 다루지만, 이 영화는 전쟁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범위까지 넘나드는 고찰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훨씬 우리 피부에 가까운 이야기, 즉 군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내가 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런 겁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탕아에서 일순간에 개과천선하는 영웅 이순신을 보여주기보다, 무과 응시때 다친 다리를 여전히 절룩이면서도 자신의 머릿속 마지막 생각 하나, 마지막 손가락 근육 하나에 배인 힘까지 모두 짜내어 나와 같은 사람들, 나와 대화하고 내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는 한 청년을 보여줄 뿐입니다. 과거로 흘러간 여섯 명의 남북한 군인들은 모두 이순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갑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휴전선에는 이 땅에 태어나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같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게으른 말년 이병장도, 어리버리 김이병도, 독사 박중위도, 모두 저 너머에 있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다만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기에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건너 중국을, 바다건너 일본을 바라보지 못하고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군대는 돈없고 빽없어서 간다고 생각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가족을, 친구를, 그리고 여러분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말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고(갔다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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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은 엄밀히 말해서 단일한 전쟁이라기보다, 여러 전쟁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미국, 영국, 소련 등이 연합하여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추축동맹을 상대로 싸운 전쟁이 아니라,

게르만인과 슬라브인의 사활을 건 대결이었던 독소전쟁(에너미 엣더 게이트),
철저하게 훈련받은 연합군과 자타공인 최고의 육군국 독일과의 대결인 유럽전쟁(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민족감정과 생존본능 등 모든 것이 얽히고 섥힌 증오와 파괴의 태평양 전쟁(신 레드 라인, 윈드 토커, 진주만),
그리고 모두가 본국으로부터 소외된 채 정글이나 사막, 거친 바위산을 오가며 그저 헤매야 했던 동남아시아 전쟁과 북아프리카 전쟁, 이탈리아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얽혀있는 전쟁마다 모두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거대한 파괴의 흔적이 수많은 사람들을 부수고 지나갔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만 하는 전쟁은 독소전쟁과 태평양전쟁입니다.



영화 진주만은 태평양 전쟁에 대한 많은 영화 중의 하나입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2차대전은 독일군과의 싸움이라기보다 일본군과의 싸움으로 더 잘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군은 미국 영토에 단 한발의 포탄도 투하하지 않았고 단 한발의 포격도 행한 적이 없지만, 일본군은 끔찍한 상처를 남기고 갔기 때문이지요.

영화에 대해서는 혹평이 분분합니다. 로맨스가 너무 상투적이다. 비주얼만 있으면 다냐. 결말도 너무 뻔하고 작위적이다. 등등.
하지만 이 영화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설득시켜주려는 영화가 아니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1941년 12월 7일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평화롭고 즐거운 섬지방 하와이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주말연속극처럼 지루한 로맨스는, 그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의 기준에서는 정말 어이없는 방식으로 전투를 진행했습니다. 보통 해전에서는, 적함이 격침되면 그것으로 전투가 끝납니다. 바다에 빠진 승무원들은 구조하여 포로로 잡는 것이 일반적인 서구 군대의 해전이었지요. 그러나 진주만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원들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수병들을 향해 아무 주저없이 그들이 자랑하는 제로전투기의 기관포를 발사했습니다.

말살전쟁만이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었고, 그들 자신도 포로가 되기보다 죽는 것을 선택했기에, 이 기이한 전투에 끌려들어간 미국인들조차 결국엔 그러한 방식으로 싸우게 됩니다. 거기에는 분노와 공포와 고통이 모두 배어 있습니다. 한발 한발의 총탄과 포탄마다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권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진주만은 바로 그런 모습을 생생하게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칭찬하는 이유입니다.

이따금 성조기가 휘날리고, 미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하는 듯한 화면도 보이지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살수대첩이나 명량 해전을 영화화할때, 우리는 과연 그러한 이미지를 인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요?



에너미 엣더 게이트에서도 진주만과 비슷한 삼각관계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진주만에서처럼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진주만에서의 애들린과 레프는 비록 군과 관련해서 만났지만 폭격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단지 생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타냐와 바실리는 전장에서 만나야 했고, 전장에서나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독소전쟁은 애초부터 우수한 게르만 혈통의 유지를 위해 열등민족 슬라브족을 쓸어버리려는 의도로 시작된 악랄한 전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전쟁에 선과 악이 극명하게 갈리는 예는 사실 역사를 통틀어 매우 드물지만,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은 분명히 잔인 무도한 비적들이었고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 죄없는 선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주만이 미 육군(과 해군) 항공대의 전투라면, 에너미 엣더 게이트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 소총 한자루로 분연히 일어섰(다고 선전됐)던 한 저격수의 무용담을 그립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적은 둘이었습니다. 독일군과,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당원들과 붉은 군대 그 자체. 노동자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던 신도시 스탈린그라드는 밀어닥친 독일군들로 인해 벽돌과 쇳덩이로 뒤덮힌 폐허로 바뀌고 맙니다. 하지만 스탈린 동지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잃을 수는 없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스탈린그라드로 보내어집니다.

소총과 총탄등 기본적인 보급품조차 부족한 상태에서 잘 정비된 독일군을 향해 맨몸으로 뛰어가야 했던, 돌아서면 아군의 기관총이 자신들을 다시 되돌려세우는 그런 상황 속에서 러시아사람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죽어갑니다. 그래서 희망을 주기 위해 영웅은 만들어지고, 소총 한자루로 최선을 다해 독일군과 싸우는 바실리 자이체프의 모습은, 도쿄 폭격을 가했던 레프와 대니처럼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의 불씨가 되지만, 영웅에게 남은 건 상처뿐입니다.

레프와 애들린은 전쟁이 끝나고 다시 주말연속극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 습니다. 하지만 바실리와 타냐는 그저 간신히 만났을 뿐입니다. 엉성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붉은 군대의 행정처리 절차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행운이긴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그 다음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독소 전쟁이 태평양 전쟁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파괴와 살육을 남기고 갔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요.


전쟁과 사랑은 모두 격렬한 죽음과 연관되어 있고, 그리하여 자주 묶이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두 영화 모두 전장을 함께하는 절친한 두 친구와 한 여인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고, 그 관계는 한 친구의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친구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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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에 대해서는, 일전에 [일류 액션 '에로'물]이라고 매우 혹평한 적이 있습니다.

신화속의 인물을 재조명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우면서 잘했다는 소리 듣기 매우 힘든 방법은 '역사속의 인물로' 조명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킬레스 : 발목만 제외하고 불사의 몸을 가진, 신의 아들. 트로이 전투에서 파리스의 화살에 발목을 맞고 전사.

트로이 전투 : 10년에 걸친 소모적인 공성 끝에 오디세우스의 재치로 목마를 성 안에 들여 마침내 함락시킴.

헬레네 : 모든 남자들을 현혹시킨, 절세의 미녀. 제우스의 불륜의 결과물로, 헤라의 저주를 받아 관계하는 남자마다 파국을 맞이함.

파리스 : 트로이를 멸망케 하리라는 예언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비운의 왕자. 헬레네와 운명의 사랑에 빠짐.

이 모든 것이 영화 트로이에서 어떻게 변화했나를 봅시다.

아킬레스 : 막강한 힘과 놀라운 검술을 가진 용맹한 전사이나 정치와 세상사에 회의를 느끼는 심약한 인물. 파리스의 화살에 죽지만, 사람들이 목격한 것은 오직 발뒤꿈치에 박힌 화살뿐.

트로이 전투 : 10개월 여의 단속적인 공성 끝에 양측 모두 주력 장수를 잃은 상태에서 트로이의 목마로 함락됨.

헬레네 : 정략결혼으로 호색한인 메넬라오스에게 팔려갔다가 파리스를 만나 사랑에 눈뜬 아름다운 그리스 귀족 여성.

파리스 : 여자나 후리고 다니며 형에게 의지하는 철부지에 망나니 막내 왕자. 헬레네를 만나 겨우 사랑을 알고 형을 잃은 후에 겨우 인생을 알게 됨.

위대했던 신화 속에서 위대함을 빼앗고, 숭고한 운명 속에서 필연을 빼앗아버린 영화 '트로이'는 그래서 제목이 일리아드가 아니고 '트로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는 보다시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힘이었던 신적 요소를 모두 잃어버린, 단순한 일류 액션 에로물.
"신들은 인간을 질투해."

하지만 정작 그 신은 아킬레스가 아폴론의 신상을 베어버린 것처럼, 처음부터 영화안에선 있지도 않았습니다. 신의 이야기에서 신을 빼버리면, 남는게 뭘까요.



자, 반면, 역사속의 인물을 재조명하는 방법도 물론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알렉산더의 경우, 가장 사료에 충실하게 진행하는 방법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사료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덧살로 붙였지요. 가장 평이한 전기영화의 서술 방식이지만, 어떤 덧살을 붙이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알렉산더에 덧붙인 덧살은, 결코 그리스의 나체 조각상들처럼 치부는 감추고 사실은 미화시킨 덧살이 아니라, 로댕 이후의 조각상처럼 치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흉한 사실을 그대로 그려내는 덧살이었습니다.

4만 대 25만이라는, 단일 전투로서는 최대에 가까운 거대한 전투였던 가우가멜라 전투 신은 한없이 냉정하고 섬뜩하게 이날의 전황을 그려냅니다. 피범벅이 되어서도 지극히 냉정하게 훈련받은 대로 검과 창을 휘두르는 알렉산더의 군대가,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다리우스의 모습보다 수천배는 더 섬뜩하게 보이도록. 그런 힘을 가진 군대가 아니라면 인도에 이르는 대장정을 해낼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위대한 군인이었던 알렉산더는, 정치가로서, 왕으로서는 단지 몽상가에 불과했습니다.
모두 하나되는 세상. 모든 민족이 그리스식 표준을 따르는 문명화된 세계. 각지에 세워지는 알렉산드리아. 멋진 꿈이지만...
"꿈을 쫓는 자는 역사에 남지만, 대신 그 주위 사람들을 너무나 힘들게 해. 그리고 그가 죽거나 아니면 주위 사람들이 지쳐 죽지."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프톨레마이오스(영어식으로는 톨레미, 안소니 홉킨스 분)의 말대로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마저 모두 그를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겠지요.

"신은 인간을 질투해."

아무리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고 해도,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는 법이고, 영화는 바로 그 한계에 늘 부딪히고 좌절하며 우는 연약한 알렉산더를 냉랭하게 그려냅니다.




전설속의 인물을 그릴때 우리는 주로 전설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전설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이야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곤 합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얼마나 전설을 더 전설처럼 보이게 하느냐. 얼마나 더 전설로서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하느냐 정도겠지요. 영웅의 행적과 사랑을 통해 무엇이 옳은지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그 뻔한 기능 말입니다.

영화 '킹 아더'는 '카멜롯의 전설'등에서 기존에 보여주었던 이 방식들을 무참히 깨부수고, 전설을 역사로 끌어내버렸습니다. 아무도 뽑지 못하던 엑스칼리버를 뽑아 그것으로 왕이 되었다는 아더는, 실존인물입니다. 5세기 경,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무렵의 일이죠. 암흑 시대라고 불리던 이 변혁기에 브리튼 섬의 주민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침략자 색슨족의 침입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나운 상전에서 놓여나자 바로 잔인한 도적을 맞이하는 꼴.

아더의 본명은 '루시우스 아토리우스 카스투스' 로마인 아버지와 브리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휘하에 있는 기사들은 로마 제국 동쪽 끝 변방에 살던 기마민족 '사마시아' 출신의, 당시 가장 고도로 훈련된 전투 집단이었습니다. 명예와 무용 등을 중시하는 기사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죽음 대신 로마를 위해 싸워주는 것을 선택하여 징집당한 그들은 15년의 복무 기한을, 고향과는 거의 지구 반대편인 브리튼 섬까지 끌려와 채우게 됩니다. 마침내 그 기한이 끝나고 자유를 보장받지만, 그들은 힘겨운 임무와 숱한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자유로이 고향으로 떠나기보다, 나란히 원탁에 앉아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며 그들을 돌보아준 아더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익히 알고 있는, 기사도에 충실한 풀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는 아더왕이 아니라, 로마의 갑주를 걸치고 독수리 문장이 달린 군기를 쳐드는 아더의 모습은 무척 생소하지만, 영화는 나름대로 멋지게 아더를 전설에서 끌어내 역사의 옷을 입혔습니다.




라고 말할 줄 알았죠? 포장만 역사일 뿐,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그 대의를 위해 싸웠고 마침내 압도적인 수의 적을 맞아 싸워서 이긴 아더의 모습은 결국 전설속의 아더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장검으로 검투사식의 로마 검술이라뇨;; 아더가 무슨 헤라클레스라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전설에 충실해 마법이 난무하는 대전투를 그리는게 낫지 않았나 싶네요. 내심, 대의를 내세워 껍데기만 남은 로마를 차버리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야심가 아더를 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그려내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모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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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17, <로젠다로의 하늘> 등록글을 수정.

저는 투명드래곤과 귀여니님(이윤세)의 글을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투명드래곤에 대해서라면 저는 전편을 다 읽었으며, 굉장한 팬이었다고 미리 못박아두겠습니다. 여기저기 이런 것도 있다며 주소를 복사해서 올리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녔을 정도니까 말입니다. 투명드래곤은 확실히 '대단한' 이슈가 될 만 합니다. 기존 판타지 문단(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도록 합시다)에 대한 하나의 반항일 수도 있고, 심지어 그들 모두를 신랄하게 까대는 강한 풍자일 수도 있습니다. "절라 짱이었다"와 "꼐속"을 아마도 다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생각만해도 즐겁습니다. 누가 드래곤에게 영속적인 인비저빌리티를 부여할 생각을 해보았던가요. 사실 아무도 이런 생각은 못해보았을 겁니다. 장난으로는 했더라도 하나의 글에 이런걸 표현할 생각은 못했을 거란 말입니다.

귀여니님의 글은 저는 엄하게도 '책으로' 읽었습니다.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책이 눈에 들어와서 열어봤는데, (물론 그 서가에는 다른 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주로 별로 심각하지 않게 즐기며 써 내려갔으나 조회수의 높음으로 인해 출판된 것들이지요.) 제 결론은 이것은 '소설'이 아니며, '글'도 아니고, 단순한 '시간보내기용 놀이기구'라는 것입니다. 즉, 예전에 많이 나오던 구비문학류(최불암씨리즈, 참새씨리즈등)를 책에 담은 것과 용도상으로 거의 같으며, 그것이 다만 한사람의 창작자가 있다는 점만 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용도라면 이것은 상당한 수준을 갖고 있습니다. 귀여니님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트렌디'함을 가득가득 품고 있으며, 요즘 시대를 사는 10대들이 좋아할만한 아이템과 이벤트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일단 책을 사면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구성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책은 저를 판매 대상으로 예상하지 않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귀여니님과 취향과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저는 소외감마저 느꼈으며, 결국 3분의1 정도를 읽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다시 투명드래곤으로 돌아갑니다. 투명드래곤은 분명히 하나의 소설이며, 국어 파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글 자체의 내적인 완성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낙서를 위대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거기서 오히려 우리는 아이들의 눈으로만 보일 법한 진실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투명드래곤은 바로 그런 걸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제가 쓰고 있는 글 또한 투명드래곤보다 한치도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판타지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단지 '절라 짱이었다'를 좀더 설득력 있고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강하고 멋지고 스펙터클하면서 환상적이고 웅대한 이미지를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실 '절라짱이었다'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다만 그렇게 쓰는 것은 '문학적'이지가 못해서 다들 지양하는 표현일 뿐이지요. 투명드래곤에 덧글을 다시는 분들 중에는 계속해서 덧글을 다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그 분들은 횟수가 지속될수록 계속 욕만 하고 있습니다. 안좋다고 생각하면, 보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을 들킨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인터넷 세대입니다. 게임 세대입니다. 영화 세대입니다. 뮤비 세대입니다. 멋지고 훌륭한 것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본질에 무엇이 있건 멋져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보다 멋진 것이 좋습니다. 얼짱. 몸짱. 단 한장의 지명수배 사진으로 강짱(강도얼짱)까페를 만들기까지. 게임에선 오직 지존 캐릭터만을 위해 끝없는 노가다를 달리죠. 과정의 즐거움따위 잊은지 오래. 뽀대와 강함을 챙기는게 바로 우리들입니다. 투명드래곤은 그런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적어도 그 시류에 영합하는 귀여니님의 책보다 투명드래곤은 솔직하게 그 시류를 낙서해냄으로써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우리들 모두에 대한 신랄한 풍자의 역할을 해 내고 있습니다.

조금 높은 어조로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만, 투명드래곤은 적어도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읽어주겠지. 팔 수도 있겠지 하는 의도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순수하게 '창작'된 글입니다. 비판을 받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소설'입니다. 그리고 제 관점에서는, 어떠한 비판을 받든 존재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귀여니님의 글은, 사람들이 읽어줄 만하고 읽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만이 글의 목표입니다. 따라서 그 글은 소설이 아닙니다. 어떠한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은 귀여니님의 글은 비판을 받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귀여니님 자신이 바라는 호칭인 '트렌디 작가' 가 아닌 '트렌드에 영합하는 장사꾼'이라고 불러주고 싶군요. 물론 귀여니님이 단지 자기 만족을 위해 글을 썼다면 상관 없겠지만, 그걸 출판했고, 그로 인해 이윤을 얻고 있다면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한 자격은 갖춘 셈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판받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 출판사. 그런 글을 출판한, 그리고 그것을 소위 '인터넷 문학'이니 하는 표딱지까지 붙여서 자신들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양 행세하는 편집자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장사꾼이며, 돈을 위해서라면 양심마저 뜯어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사람들입니다. 비판은 귀여니님에게보다 그들에게 먼저 해야 할 겁니다.

쾌락 위주 문화의 절정에 다다른 우리들의 모습과, 그것을 장사에 이용하는 출판사와 그에 '기꺼이' 이용당하는 귀여니님.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신랄하게 까대주었던 투명드래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봅시다. 우리들은 무엇인지.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해 온 건지. 과연 우리가 누굴 비판해야 하고 , 비판할 자격은 있는지.

이 글은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과 저와 비슷한 사람들을 위한 반성문입니다.



꼐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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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지 원정대 VS 매트릭스

평범한 매트릭스 안의 한 사람이었던 네오는 매트릭스의 정체와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진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평범한 샤이어 안의 한 호빗이었던 프로도는 반지의 정체와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샤이어 밖 거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일행은 네오를 위해 오라클을 찾아 요원들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매트릭스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일행은 프로도를 위해 리벤델을 찾아 나즈굴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황야를 나선다.


모피어스는 일행과 네오를 지키기 위해 막강한 요원 스미스와 단 둘이 대결하기로 결심한다.

간달프는 일행과 프로도를 지키기 위해 막강한 발로그와 단둘이 대결하기로 결심한다.


일행중 한명의 배신으로 인해 두 명은 목숨을 잃고 네오는 위기에 처한다.

일행중 한명의 배신으로 인해 두 명은 잡혀가게 되고 프로도는 위기에 처한다.


네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다시 매트릭스로 나선다.

프로도는 반지의 능력을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다시 여행을 계속한다.


2. 두 개의 탑 VS 매트릭스 릴로디드


네오와 모피어스, 트리니티는 열쇠쟁이를 찾기 위해 어렵게 메로빈지언을 찾아간다.

아라곤과 레골라스, 김리는 두 호빗을 찾기 위해 어렵게 로한 땅을 가로지른다.


네오는 일행과 떨어진 채로 위험하고 알 수 없는 존재 스미스를 만난다.

프로도는 일행과 떨어진 채로 위험하고 알 수 없는 존재 골룸을 만난다.


네오와 모피어스, 트리니티는 열쇠쟁이를 구하기 위해 메로빈지언의 부하들과 불가능할 것 같은 사투를 벌인다.

아라곤과 레골라스, 김리는 로한을 구하기 위해 사루만의 부하들과 불가능할 것 같은 사투를 벌인다.


위기에 처한 마지막 순간에 트리니티의 도움으로 네오는 무사히 소스에 접속한다.

위기에 처한 마지막 순간에 에오메르의 도움으로 일행은 무사히 로한을 지켜낸다.


영화의 거의 끝에서 트리니티는 건물 옥상에서 죽기 직전에 네오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영화의 거의 끝에서 프로도는 건물 옥상에서 죽기 직전에 샘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3. 왕의 귀환 VS 매트릭스 레볼루션


네오와 트리니티는 전쟁의 종결을 위해 단 둘이서 아무도 갈 수 없다던 기계의 도시로 향한다.

프로도와 샘은 전쟁의 종결을 위해 단 둘이서 아무도 갈 수 없다던 불의 산으로 향한다.


기계들은 모든 힘을 몰아 시온을 공격하고, 이를 돕기 위해 출발한 모피어스는 뒤늦게 도착하지만 간신히 EMP로 모두를 구한다.

마술사왕은 모든 힘을 몰아 미나스티리스를 공격하고, 이를 돕기 위해 출발한 아라곤은 뒤늦게 도착하지만 간신히 죽은 자의 군대로 모두를 구한다.


마지막 대결을 위해 모피어스와 기타 일행들은 수없는 적 앞에 버티고 서게 되지만 그들 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마지막 대결을 위해 아라곤과 기타 일행들은 수없는 적 앞에 버티고 서게 되지만 그들 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네오는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스미스와 대결하지만 결국 진다. 그러나 그 패배가 사실은 승리였고, 스미스는 파괴되며 전쟁은 끝난다.

프로도는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골룸과 대결하지만 결국 진다. 그러나 그 패배가 사실은 승리였고, 반지는 파괴되며 전쟁은 끝난다.








조금 억지로 짜맞춘 감도 없진 않지만,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은 두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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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아르카나'의 한 장면


나는 정보 장교다.
나라는 지금 전쟁중이고, 나는 전장에 침투해서 정보를 빼오는 게 일이다.
하나도 안 위험한 이유는, 내가 침투할 곳은 바로 아군의 서류더미가 쌓여 있는 지휘소이기 때문이다. 고위 장교인 이상 나는 철저하게 보호되고, 그래서 내 일은 정시에 출퇴근하는 공무원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내 상관은 군 원수나 장군이 아니다. 여자 버릇이 나쁜 파스쿠치라는 노인이다. 그에겐 열 네명의 딸과 여섯명의 아들이 있지만 파스쿠치의 성을 가진 아이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웃기지? 그런데 어쩌다 생긴 손녀아이는 끔찍히 위해주는게 더 웃기는 일. 마리안느 파스쿠치. 그 아이는 겨우 열 살이다.

나는 그의 지위도 계급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의 저택 뒷산 산책 코스뿐. 정확한 집주소까지 전부 금지사항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 상관이고 내게 명령을 내릴 권한은 그에게만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오직 그에게만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내가 받는 명령은 적진에 침투해 누굴 죽이라는 그런 게 아니니 다행이다. 기껏해야 어디어디의 현황을 알아오라는 정도니까. 알아오라는 명령을 받으면 알아오고, 그의 산책 코스에서 기다리다가 그와 같이 몇걸음 걸으며 보고하면 된다. 그럼 그는 다음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위험이 닥쳤다.

첫번째. 파스쿠치가 죽었다.
산책로에서 기다려도 이 시계같은 양반이 오질 않길래, 나는 몇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가 구토를 금치 못했다. 그가 머리만 남아 있고 온 몸이 손바닥보다 작은 고깃덩이와 뼈덩이로 분할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절차에 따라 파스쿠치가 지정해 둔 상부에 보고한 나는 최전선으로 배속되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쳐들어왔다. 당연히 지휘라곤 해본 적 없는 내 부대는 박살나버렸고, 나는 명령받은 대로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결하려고 권총을 빼 들었다. 한번도 쏴본 적이 없는 권총이다.

"왜 그래?"

갑자기 나타난 어린 여자아이다. 열 두어살 쯤 됐을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한 손에는 어린 소녀에겐 어울리지 않을 큰 칼, 다른 손에는 기관단총을 들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다. 뭐 눈 돌릴 만큼 나오고 들어간 몸도 아니지만. 가만, 지금 이런 소리 할 때가 아니거든.

"내가 죽여야 되는데 혼자 죽어버리면 안돼."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나는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짓이야."

"죽이라고 명령하는게 더 나빠."

"난 아무 명령도 안하는걸."

"그럼 안죽일게. 혼자 죽든지 말든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맑게 웃으며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칼 춤을 춘다. 노래를 부른다.

하나, 둘, 셋, 넷,
일이다~ 일~ 할 일이 많아~
열, 스물, 서른, 마흔,
목이 너무 목이 너무 말라~
백, 이백, 삼백, 사백,
피가~ 목이~ 필요해~ 많이~


섬뜩한 노래다. 나는 큰 칼과 기관단총이 두려워 아이를 붙잡진 못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일, 재밌, 니?"

"하나두 재미 없어!"

뚝 그치듯 노래와 춤을 멈추고 내게 다가온 아이는 외쳐버렸다.

"그만하고 싶어!"

난 그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 아이를 위해 전쟁을 멈추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건 정보 뿐이다.

"전쟁을 멈추려면 열 세 개의 목을 베면 돼. 이름 적어줄게."

적국의 주요 강경파 인사 여섯명, 우리 나라의 주요 강경파 인사 일곱명의 이름을, 나는 아이에게 적어주었다. 그들의 자세한 집 위치와 사는 곳과 기타 등등의 모든 것을.

"얘네만 베면 돼? 나 이런거 안해도 돼?"

"응."

"와와! 이제 끝났다 끝났어! 만 사천 칠백 오십 삼명을 베었는데도 안끝나길래 울었단 말야. 열 세개만! 열 세개만 베면 되는구나!"

아이는 노래를 바꿔 불렀다. 여전히 섬뜩한 춤과 함께. 나는 그때 묘한 직감으로, 이 아이가 정말로 저 열 세명을 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 세 개, 열 세 개, 열 세 개의 목!
열 세 개만~ 하면 돼~
열 세 개, 열 세 개, 열 세 개의 목!
귀여운~ 마리안느에게 열 세 번만 벌을~!


마리안느.
파스쿠치의 손녀의 이름. 그녀를 난 딱 한번 보았었지. 곧 그녀는 노래를 마치고는 나타났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나는 다행히 포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차례로 적국과 우리 나라의 전쟁 지도자들이 하나 둘 죽어넘어가기 시작했다.

그 수가 열 셋이 되자, 이젠 더이상 양 국은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공격 지휘관도, 면밀한 군수 담당자도, 카리스마 있는 국가 원수도 없는 나라가 무슨 전쟁을 하겠어. 휴전이 이루어지고, 포로를 교환하게 되었다. 이 또한 몇년이 지난 셈이다. 상급자들이 모조리 죽어버린 나는 장성이 되어, 포로 수용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포로들 사이에서 맹수를 묶는 것과 비슷한 재질의 굵은 수갑을 차고 매달려 있는 발가벗은 여자를 언뜻 보긴 했지만, '여긴 미친 놈 소굴이니 조심하시는게 좋습니다' 라는 부하 장교의 말에 이내 고개를 돌렸다.

200명이나 되는 장교 포로를 직접 심문하고 송환과 투항의 여부를 묻겠다고 하자 준비가 바빠졌다. 포로들을 몸수색하고, 한명 한명씩 방을 지나가게 하면서 나는 그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았다. 정보 장교의 감으로 그들의 거짓말 정도는 빤히 보였고, 대답과는 상관없이 송환과 귀순 도장을 내 판결로 찍어놓았다.

"이게 전부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아까 그 여잔 뭐지?"

"여자가 아닙니다. 그건. 맹수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가 보았다. 발가벗은 여자는 사슬에 묶여 있어도 완강히 발버둥치며 으르렁댔다. 하지만, 이내 나를 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성숙한 몸매에 나는 잠시 눈을 돌렸다.

여자는 노래했다.

열 세 개, 열 세 개, 열 세 개의 목!
열 세 개만~ 하면 돼~
열 세 개, 열 세 개, 열 세 개의 목!
귀여운~ 마리안느에게 열 세 번만 벌을~!


"이제 다 했어. 나 잘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에게 수갑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내게 안겨와 울었고, 부하들은 내 지시에 따라 파스쿠치의 살해 건을 알아보았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파스쿠치의 손녀가 아니라 그의 창조물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단순한 민간의 술사인 그는 군 정보망을 조작해 나를 자신의 지휘 하에 넣었다. 그리고 내가 모든 정보에 대해 충분한 준비를 갖자, 마리안느의 시동 키를 넣은 것이다.

절대적인 파괴자의 시동 결과는 참혹했다. 시동자를 포함해, 그녀의 길을 막는 모든 자를 죽였다.

다만 가장 중요한 정보망이었던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 의해 보호될 처지였던 것이다.

(마리안느의 노래를 글로는 전달할 수 없어서 아쉽네요. 굉장히 나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섬뜩하고 귀에 박히는 그런 음이었어요. 노래와 함께 숫자들이 눈앞에 환상처럼 명멸하는 묘한 느낌. 난 왜 맨날 이런 꿈만 꾸는 거야 대체.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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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위대했던 전사. 하지만, 사악한 마녀의 성으로 마녀를 베기 위해 떠난 뒤 잊혀졌다.
남자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다. 마을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지만, 그런대로 평화로운 마을이다. 소년이 동경하는 영주의 딸은, 무척 순수하지만 제멋대로인 소녀. 연회장에 가지 않기 위해 소녀는 이따금 가출을 시도하고, 그러다 소년을 만난다.

(아마도 츠뮤님으로 추정되는 나레이션 :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 납치범을 인질이 길들이는 거군요.")

소년은 치르키라는 이름의 메뚜기를 키우는게 일생의 낙. 소녀는 자신과는 너무 다른 소년의 이야기에 늘 빠져든다. 그리고 둘은 서로 무척 호감을 갖지만, 영주 부인의 손길이 뻗어와 소녀는 다시 성으로 끌려간다.

숲에 숨어 있다가 이내 낙담한 소년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마을 풍경이 이상하다. 옆에서 아는척 하던 동네 친구가 키우는 너구리가, 입이 이상스럽게 커다랗게 변하더니 몸 전체가 뒤틀어지며 이형으로 바뀐다. 녹색의 괴물이 된 그 너구리를 피해 소년은 마을 안으로 도망쳐 오지만, 이미 온 마을에는, 손바닥만한 개미와 망아지만한 벌레들로 가득 차있다.
치르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치르키는 이미 죽어 있었다. 올라타도 될만큼 커다랗게 변했지만, 몸은 어느새 누군가에 의해 반동강나버린 치르키는 눈물을 흘리며 소년을 바라보다가 죽어간다.

(다시 나레이션 : 눈물나게 슬픈 이별이네요)

소년은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 어머니와 단 둘이서 이리저리 숲을 지난다. 나무들 또한 살아서 움직이고, 그들을 잡으려 달려들자 어머니는 주저없이 예전의 검 실력을 발휘해 나무들을 베어넘긴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싸우셨군요."
"아니. 느이 아버지가 매번 경충(....)이었지. 일단 회피할 거다. 회피란 건, 강한 적과 싸우지 않고 돌아가는 거야. 알았니?"
하지만, 소년은 치르키의 나머지 커다란 반신을 물어뜯고 있는 벌레들을 보고는 그만 분노해서 나무막대기를 들고 그 손바닥만한 벌레들을 마구 짓밟고 두들겨패 박살냈다.
"회피하라니까!"
"그렇게 돌아가다 발길에 좀 채인 건 상관 없잖아요!"
"어쩜 그리 느이 아버지랑 똑같니!"
온 마을에 벌레들이니 동물들이 다 괴물로 변했지만, 이상하게 말들은 멀쩡했고, 괴물들의 습격에 놀라 울부짖고 있었다. 말에 올라타고 급히 도망치던 모자는, 이내 쫒기다 못해 마을 끝의 동굴로 들어간다. 기억도 나지 않던 시절부터 금기였던 그 동굴 안에는 화학적 위험물이니 생물학적 위험물이니 하는 표시가 가득 차있고, 온통 금속질의 벽과 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몇몇 괴생물체들이 그곳을 막고 서서, 우리에게 그 이상 근엄할 수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Thou, shall not, pass!"(...)
이에 어머니는 주저없이 근처 벽의 유리 장을 쳐서 깨고는, 45구경 매그넘을 꺼내 온 사방에 난사한다. 녹색의 체액이 난리치며 피어오른다.

(나레이션 : 아니 왜 갑자기 판타지에서 바이오 해저드 ㄱ-)

"회피하신다면서요 어머니?"
"지나가다 발길에 좀 채이면 어때서."
권총에 남은 마지막 한발이 문 옆의 계기판을 박살내자 결코 열릴 수 없을 거 같던 그 위험 표지의 강력한 X자 빔으로 보안된 문이, 벌컥 열렸다.
그 곳은 왕궁이다.

소녀는 모친인 영주 부인에 의해 드레스로 치장하고 왕궁의 연회장으로 끌려왔다. 개구리보다 더 못생긴 얼굴의 왕자와 선을 보기 위해, 왕비의 수석 시녀장과 면담을 먼저 치르게 된다.
하지만 엄청 잘나보이는 그 수석 시녀장은 얼음장처럼 단호한 얼굴로 서 있었고 소녀는 이내 따분해졌다.
"왕자비가 되면 월급은 잘 줘요?"
"노후 보장은요?"
"그 드레스, 어깨에 뭐 넣은거에요?"

(나레이션 : 굉장한 여자애네요.)

소년에게 들은 얘기를 마구 조합해가며 온갖 건방지다고 할 만한 표현을 난사하자 이내 시녀장은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표정엔 드러나지 않는다. 참다못한 영주부인이, '잠시 둘이 얘기좀 하겠습니다' 라고 양해를 구하고 소녀를 데리고 근처 정원으로 끌고 나온다. 미로정원의 입구로 들어가버린 영주부인을 쫒아 소녀는 미로 안에 들어서지만, 그 곳에서 마주친 것은 수천의 은색 나비들.
밤하늘을 수놓으며 미로 속을 온통 메운 나비들의 향연에 취해있던 소녀의 등뒤로, 갑자기 나비들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영주부인의 모습을 이룬다. 아니, 영주부인이 아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밤의 마녀다.
"내 말을, 그대로 따라한다."
라는 말과 함께 영주부인의 입 앞에서 몇 마리 나비가 모여들어 까만 구체를 이룬다. 영주부인은 소녀를 옭아매며 자기 입으로 소녀의 입에 그 구체를 집어넣으려고 애쓴다. 소녀는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하는데, 그 순간 소녀의 눈앞에, 나무막대기가 휘둘러지며 구체가 맞아 날아가 흩어진다.
"밤의 마녀. 애들은 알아서 하게 냅두고 우리끼리 놀자. 나랑 못다한 얘기가 있을 텐데."
"흥. 네 남편은 웃기지도 않았어. 그런 조무래기에게 몸을 허락한 주제에 내게 대항할 셈인가?"
"닥쳐! 남자란 강함만으로 매력이 설명되는게 아냐!"
"그럼 밤일이나 잘한다고 남자인줄 알아 그럼?"
어머니들의 심도높은 토론을 뒤로 하고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미로 밖으로 달려나간다. 폭음과 빛의 향연이 등 뒤를 쫒아와 소년은 소녀를 끌어안고 엎드렸고,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일어났을 때는 어머니도, 미로 정원도, 왕궁도 흔적도 없었고, 광야에 앉아 있는 소년의 곁에는 차게 식은 소녀의 몸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어째서 츠뮤님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나레이션을 이어나갔는지는 의문입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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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주먹계의 대부 밑에서 잔심부름 등을 해주고 밤에는 '파이널 판타지'라는 이름의 주점에서 춤을 추는 주인공 나(소녀)는 어느날 적대 조직의 피라미 하나를 심문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심하게 얻어맞은 뒤에 결국 조직의 아지트를 발설해버린 그는 울면서 내게 치료를 받았다.
그는 계속 울면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날 저녁 '파이널 판타지'에 습격이 있게 되고 그는 그림자처럼 빠져나가 사라진다. 습격이야 우리 대부의 놀라운 대활약으로 처리되지만, 그 습격은 며칠을 두고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나는 조직의 큰형들로부터 여러가지 싸움의 기술이나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배우며 빠르게 성장해 갔다. 이상할만큼 나는 여자인데도 강했다. 나중에는 수십명이 나 하나를 향해 각목을 들고 휘둘러오는 데도 그 각목을 내가 춤을 출때 쓰는 날카로운 부채로 모두 베어버리고 그 사내들을 다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러다 습격이 뜸해진 어느날 대부는 우리들 중 최고의 인원을 이끌고 적성 조직의 아지트를 급습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건물 지하에서 이어지는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불길이 일렁이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형상이었고, 금색의 사슬에 묶여 발버둥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그 악마의 이름은 디아블로라고 했다.(;;) 몸을 돌려 나가려던 찰나, 적 조직의 우두머리가 우리가 들어온 입구에 웃으면서 서 있었다.
"비밀을 봐버렸군. 죽어 사라져라."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악마의 몸에 걸려있던 사슬이 튕겨져 날아가고, 디아블로는 풀려나 우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날카로운 부채를 펼쳐 악마의 몸 이곳 저곳을 베어내며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부채를 놓치고 그에게 목덜미를 잡힌다. 이상한 것은, 디아블로는 나를 바로 죽이지 않고 계속 바라보다가, 이내 용암같이 주황색으로 빛나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뭐하는게야! 어서 죽여! 계약자가 명한다!"
디아블로는 눈을 꽉감고 고개를 흔들며 나를 벽으로 집어던졌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때 내 곁에는 머리만 남아 무선조종 자동차같은 기계장치로 이동하는 남자와, 벌레들을 몸에 휘감고 있는 나이든 여자 사이에 있었다. 그들은 디아블로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수천년을 살아온 예언자들로, 동료는 아니었지만 지금 같은 목적을 위해 내 곁에 뭉친 것이었다. 디아블로의 몸은 인간과 같은 성분의 육체이며 그것은 바로 나를 알고 좋아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몸에서 비롯했다는 그들의 설명에 나는 내게 치료를 받다가 도망쳐버린 적 조직의 피라미를 떠올렸다. 커다랗고 징그러운 어머니 벌레의 등에 올라탄 여자는 나를 안아올려 아주 빠른 속도로 수많은 벌레들과 함께 도시를 질주해 목적지로 가는데, 도시는 온통 파괴되어 있었고 불길에 쌓인 곳도 많았다. 마침내 도착했을 때 내가 본것은, 훨씬 거대해져버린 디아블로와 그 뒤에서 웃고 있는 붉은 눈의 남자였다. 적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계약자부터 죽여."
여자가 내게 속삭였고, 나는 그를 베기 위해 불길에 쌓인 밤거리를 달려 그에게 다가갔지만 문득 그의 얼굴이 우리 조직의 대부처럼 변하는 것을 봐버렸다. 두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었다. 차마 베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는 디아블로를 향해 손을 들고 나를 죽이라고 손짓했다. 디아블로는 또 손을 쳐들었고, 나는 그가 망설이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우리 대부의 목을 부채로 그어버렸다. 그냥 목만 베려고 했는데, 완전히 동강나버렸다. 그래도 나를 키워준 사람인데, 평생 알고 지낸 남자인데 그어버려야 했다.

그의 피가 얼굴에 확 튀었고, 다음 순간 디아블로의 몸이 하얗게 빛나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다시 정신이 들자 내가 춤을 출때 배경으로 많이 쓰던, '얼마나 좋을까' 라는 제목의 서정적인 노랫소리가 들렸고, 작은 소년이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소년은 울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악마의 계약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간거야. 그도 너처럼 어렸을 때부터 길러졌었지."
무엇을 위해 내가 태어났고 그가 태어났을까. 우린 왜 싸워야 했을까. 슬픔에 눈물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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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오염이 심각해질대로 심각해진 2200년대의 어느날 고교생 민주의 집으로 배달 온 작은 금색의 램프. 알라딘의 마술램프와도 비슷한 모양의 그 등잔은 정말로 손으로 비비니 아름다운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 예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축하드려요. 당신은 티르 나 노이에 초대된 184만 12번째 시민입니다."
우주 반대편으로 차원이동된 민주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반쯤 물에 잠긴 아름다운 섬에 있는 고혹적인 작은 도시. 이 곳의 사람들에겐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도시에서 너무 멀리 떠나지 말라는 권고들은 있지만 민주가 그곳에서 택한 자신의 역할은 바다의 모험가. 그는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잠수복을 입고 깊은 바닷속을 내달리게 됩니다. 그 일을 하게 된 건, 순전히 먼저 와있던 사람중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던 같은 학교 선배 때문인데요. 그는 꽤 오래전에 실종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이곳에 와 있었던 겁니다.
두 사람은 팀이 되어서 곧잘 아주 먼 곳에까지 나아가 새로운 것들을 많이 얻어옵니다. 그러던 중 어느 해구 속을 탐사하다가 발견한 잠수정은 어딘지 모르는 이상한, 하지만 익숙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지구에서 온 것들이지요. NASA 마크가 찍힌 옷이라든지, 스팸 깡통이라든지. 선배는 비밀로 하자면서 나중에 다시 올 수 있도록 표시를 해두고 나오지만 영 민주는 찝찝합니다. 그 후 선배와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고, 신입 파트너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임무를 수행하다 두 세번의 실수를 하게 되고, 상사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들은 민주에게 선배의 연락이 옵니다. 혼자서 약속한 그곳으로 떠난 민주앞에 선배가 나타났고, 선배는 물 속인데도 잠수복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고백할게 두가지 있어. 하나는, 난 인간이 아니야."
물속에서 잠수복의 헬멧에 살짝 키스하는 선배.
"그리고 널 사랑했어."
선배는 사라지지만, 그 충격으로 민주는 잠수 일을 그만두고 대신 활공기를 타기로 합니다. 인력으로 비행하는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글라이더들은 정말 먼 곳까지 날아갈 수 있었는데요. 첫 임무로 거대한 편대에 속해 멀리까지 날아간 목적지는 넥스 라는 거대한 항구도시. 해질무렵 도착한 그곳엔 수많은 날으는 자동차들이 하늘을 오가고, 거대한 건물들이 눈부시게 빛을 냈습니다. 리더의 인솔에 따라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착륙한 그들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합니다.
"티르 나 노이에서 온 사자입니다."
마침 그 건물의 가장 높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나이든 회장과도 같은 남자가 리더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휙 돌렸습니다.
"이번에 책정한 물품 가격이 너무 높아서 그렇습니다. 조정을 요청합니다."
리더는 제법 정중하게 말을 했지만, 회장은 묵묵히 자신의 전용기에 오를 뿐. 비웃음을 보았다고 민주는 느꼈습니다.
"어이 시골뜨기들. 헛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 너네들이 우리가 파는 물건들 하나라도 안사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제대로 비웃음을 흘리며 회장은 전용기 속으로 사라졌고, 리더는 민주에게 넌지시 귓말을 합니다.
"편대비행은 좀 알겠어?"
"네?"
"됐어."
그리고 다음 날 건물높이 불길이 치솟았고, 민주가 속한 편대는 감쪽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제 전쟁입니다.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문명을 유지하고 재화를 소모하며 살기로 한 이주자들과, 마법과 자연을 사랑하면서 살기로 한 티르 나 노이의 주민들간의 전쟁. 활공기를 타고 하늘을 누비며 또 다른 영광을 찾게 된 민주는 어느날 바다 한가운데서 적습을 받고 불시착해 물위에 떨어집니다. 활공기의 잔해도 물속으로 곧 가라앉고, 유일한 무기이자 신호기인 빛을 내는 마법의 완드도 잃어버린 민주는 그저 바다위에서 헤엄칠뿐. 오래전의 공포가 되살아나 물속이 갈수록 끔찍해지고 있습니다.민주를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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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고향에서 서울로 유학 온 4명의 남매 중학생들을 하숙시키며 사는 평범한(?) 피자배달원 현성. 별로 나이 차이도 안나는 얼굴로 아이들에게 근엄한 표정으로 절대 금기라고 말한 지하실에는 대체 뭐가 숨어있길래. 고작 빨간 스쿠터나 타고다니는 주제에 말이다.

어느날 근무하는 피자집에서 벌어진 국회의원 암살 사건의 용의자를 추적해 잡아낸 개가로 구 경찰서에 불려간 현성은 서장의 권고로 경찰이 되어버린다. 어쩐지 오랜 안면이 있는 사이 같은 현성과 서장의 관계 때문에 수사반장도 뭐라 말은 못하지만, 파트너 없이 단독으로 행동하는 현성이 눈에 띄는 것은 당연. 그는 계속 국회의원 암살 사건의 배후를 캐내려 들지만, 갑자기 나타난 늙은 여류 과학자는 그를 막아세우며 더이상의 개입은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집히는 게 있어 현성은 퇴근 후에 지하실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미 아이들이 자신의 비밀 고성능 자동차를 끌고 나가버린 것! 기절하게 놀란 현성은 스쿠터에 달린 추적장치를 켜고 제트 엔진을 끄집어내 달아서는 거리를 질주하는데.

밝혀지는 현성의 과거 : 죽은 아내의 추억(겨우 고3 정도 외모에 결혼까지 했었다). 늙은 여류 과학자의 13년 2중 생활.(국립과학수사연구소 근무와 슈퍼 히어로의 제작).

무엇보다도 현성 자신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초대 슈퍼히어로였던 것이다. 제트 엔진을 몸에 달고 하늘을 날며 고성능 무기로 범죄자를 제압하던. 과학무기의 결함으로 (아내를 비롯해)수많은 인명을 무고하게 살상한 후 그만 두었지만, 슈퍼히어로계획 자체는 2대로까진 이어졌다. 2대 '길주'의 모친은 바로 그 늙은 여류 과학자. 길주는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졌고, 그 후로 슈퍼히어로 계획은 백지화되었지만, 현성은 그 길주에게 이 사건의 배후가 있다고 의심한 것이다.

자동차를 돌려받고 아이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지만 이미 아이들은 못볼걸 보고도 차의 성능(마하3) 덕에 무사히 탈출했을 뿐. 이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현성과 자신이 필요없자 내쳐버린 정권과 언론, 세상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 길주와의 일대 격전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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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도시 인천.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는 검은 옷의 음침한 남자가 추적하는 적은 과연 누구일까. 주인공 여고생은 언제나 야간 자율학습과 피아노 레슨을 끝내고 돌아가는 늦은 밤길에 자신을 살피는 눈길에 몸을 떨며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 앞을 막아선 피아노 선생은, 순식간에 3미터도 넘는 키에 크고 긴 머리를 가진 날카로운 이빨의 생물체로 변해 자신의 두 손을 쥐고, 천천히 물어뜯으려 한다. 비명을 지르려 하던 찰나 나타난 음침한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괴물의 몸을 단검 하나로 산산조각내고, 그 장면이 인상깊었던 여고생은 남자를 따라나서지만 금방 잃어버린다.

며칠이 지난 후, 다른 누군가가 역시 그 괴물에게 발목을 뜯어먹히는 장면을 발견하고는 경악하며 두 발을 잃은 그 남자를 구하는데, 남자는 유명한 마라톤 선수였다. 갈수록 폐인이 되어가는 남자를 보다 못한 여고생은 마라톤 선수를 구한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간신히 피해 달아나지만, 음침한 병원 복도에서 다시금 자신을 덮쳐온 것은 그 괴물이었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 나타난 남자는 괴물을 한번에 죽이지 않고, 슬금슬금 몸을 부수어가며 협박을 해댄다. 괴물의 이름은 ORGE. 햇볕이 닿으면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버리지만 빛이 없는 곳에선 인간의 모습. 그들이 먹고 사는 것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심장을 빼앗고, 영리한 과학자의 뇌를 파먹는 것처럼,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여고생의 손을 물어뜯으려 한 것이다.

문제는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것 만이 아닌, 좀더 거대한 음모라는 것. ORGE들 중에는 시장의 측근도, 시 의원도 있었고, 대기업의 총수도 ORGE였다. 점점 기업도시가 되어가는 인천에서 그들의 권력은 막강했고, 그래서 그들은 시민들의 가장 소중한 것, 자유를 빼앗아 먹어치우고자 했다. 그 시작이 될 사건은 언론의 조작과 가장 반발이 심할 학생들의 제어를 위한 학교 폐쇄.

이제 여고생과 낯모를 음침한 남자라는 묘한 페어의 엄청난 모험이 시작된다. 밝혀지는 남자의 과거. 한쪽을 쓸어내린 머리카락 속에 숨은 붉은 눈은 과연 어떠한 과거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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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셀리온의 아들 데네소르
곤도르의 섭정 데네소르 2세

거진 26대 동안 곤도르를 다스린 것이 왕이 아니라 끝까지 섭정이었던 이유는, 물론 정통성을 가진 그들의 왕족이 왕국을 떠나 귀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있지만, 곤도르의 중기 역사 중에는 왕가의 내분으로 인한 뼈 아픈 상실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수의 축복을 입은 누메노르 혈통의 왕이 단명하는 하위 인간들과 혼인하고 그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왕족 카스타미르는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별의 도시 오스길리아스는 화염에 휩싸여 저 멀리 누메노르 왕국 시대부터 전해내려온 왕가의 기보인 '팔란티르' 역시 안두인 강물에 빠져 대양으로 사라졌다.

물론 그들은 곧 정권을 잃었고, 전쟁에 패해 움바르로 달아난다. 본디 남쪽의 아름다운 섬이었던 움바르는 이 때 곤도르의 통치로부터 벗어났고, 반역자 왕족들은 해적이 되어 그 후손들은 하라드인에게 굴복한 뒤 결국 사우론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움바르는 먼 훗날까지도 끝까지 곤도르와 항전하다가 반지 전쟁의 시기에 북방에서 내려온 두네다인 순찰자와 그의 괴상하고 공포스런 군대에 의해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서야 다시 곤도르의 영토가 되었다.

지혜로웠던 엑셀리온 2세 섭정 시대에 곤도르는 로한의 셍겔 왕이 보내준 재능있는 지휘관이며 충실한 섭정의 조언자였던 이방인 '소롱길'의 충고와, 섭정의 아들 데네소르의 무용과 용맹으로 점점 모르도르의 공격에 대해 굳건한 방비를 갖추게 되었다. 소롱길은 움바르를, 데네소르는 이실리엔을 각각 공략하여 곤도르의 영향력을 크게 넓혔던 것이다. 소롱길과 데네소르는 곤도르가 가진 수많은 문제에 대해 많은 점에서 같은 해결방안을 제시하곤 했으나, 오직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소롱길은 엑셀리온이 그 열쇠를 내어 준 아이센가드의 쿠루니르(=사루만)보다, 방랑하는 미스란디르의 조언을 따르길 원했지만, 데네소르는 쿠루니르같은 위대한 지혜자의 풍모 대신 떠돌이 참견꾼 같은 외모를 가진 이 회색의 방랑자를 결코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곤도르인들은, 엑셀리온 2세마저도 대체로 데네소르보다도 소롱길을 좋아하고 따랐으나, 그의 본명과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용맹하면서도 예민하고 선견지명이 있으며 통찰력이 깊었던 데네소르는 아마도 그의 출신을 미루어 짐작하고는, 미스란디르와 그가, 자신이 차지해야 할 '통치섭정'의 지위를 넘보기 전에 어떻게든 소롱길을 떠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데네소르는 물론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다 가졌지만, 그 자신감과 책임감으로 인해서 세월이 흐를 수록 점점 자신만이 곤도르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게끔 되어버렸다. 천여년이나 왕좌를 비우고 돌아오지 않는 엘렌딜과 이실두르의 후손들을 그는 믿지 않게 되었고, 왕은 더이상 귀환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이 왕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곤도르엔 왕이 없어. 그딴건 필요도 없어."

데네소르의 아들 보로미르 역시 그러한 아버지를 꼭 빼닮았고, 그리하여 데네소르는 단명한 아내보다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이 큰아들을 몹시도 사랑했다.

즉위한 다음에야 늦은 결혼을 한 데네소르2세 섭정은 남쪽 지방 출신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몹시 사랑했는데,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 순수한 여인은 결혼한지 12년만에 굳건히 방비된 도성 미나스 티리스에서 꺾여온 꽃처럼 시들어 죽고 말았다. 데네소르의 아내 사랑은 아마도 자신만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섭정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면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경쟁자 소롱길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만 했던 그는, 이해와 보살핌보다는 정복과 통치에 더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은 아마 자신의 아내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성 싶다.

어둠이 곤도르를 뒤덮고 있었고, 데네소르의 시대에 그의 두 아들은 곤도르의 대장으로서 사우론의 잔당들과 수없이 전투를 벌여 승리했지만 데네소르는 오스길리아스에서, 움바르에서, 이실리엔에서, 안두인 강 너머에서 적의 군세가 약화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암흑탑의 군주는,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백색탑의 영주를 단 일격에 내치고 서쪽의 자유 종족들을 멸할 준비를. 데네소르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루만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팔란티르를 본 것이다.

팔란티르는 누메노르 왕조 시대에 서녘의 요정들이 전해준 선물로, 위대한 보석 실마릴을 빚은 장인 페아노르의 작품이며 모두 일곱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들은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을 볼 수 있으며, 서로 다른 곳에 있는 팔란티르끼리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누메노르 왕조가 몰락하고 바다가 갈라져 세상이 휘어지면서 이 돌들은 엘렌딜의 배에 실려 가운데땅으로 왔고, 엘렌딜과 이실두르의 시대에 이 돌은 각각 미나스 이실, 오스길리아스, 미나스 아노르, 오르상크, 포르노스트 등 북왕국과 남왕국의 요지마다 하나씩 놓여 있어 왕족들은 이 돌을 통해 서로 연락함은 물론 가운데땅의 모든 곳을 보고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미나스 이실이 정복되어 미나스 모르굴이 되면서 팔란티르도 잃게 되었고, 이 것이 사우론의 손에 들어가자 후대 곤도르의 모든 왕과 섭정들은 팔란티르를 보지 않게 되었다.

데네소르는 팔란티르를 보았다. 그는 사루만처럼 강대한 권능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인간 중에서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강직했다. 그리하여 사루만처럼 사우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마음은 먹지 않았으나, 인간답게 사우론의 권세를, 하나 하나 눈으로 확인하고 자신과 비교하게 되었다. 사우론이 가졌으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우론이 절실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것을 과연 자신은 손에 넣을 수 있는가.

"팔란티르는 위험한 물건이야. 내가 이쪽에서 보는 동안에, 저쪽에서 누가 또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르지 않나."

사루만에 대한 간달프의 충고는 너무 늦었지만, 그나마도 데네소르에게는 닿지도 못했다. 데네소르는 회색의 순례자 미스란디르를 거의 만나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데네소르는 팔란티르를 통해 곤도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은 물론이고 더 먼 곳의 일도 면밀하게 예지함으로써, 가신들과 백성들을 매일 놀라게 했다.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오? 당신은 현명하다고 불릴 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오. 백색탑의 눈이 먼 줄 아시오? 난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소."

그러나 그 댓가는 컸다. 매일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사우론의 붉고 커다란 외눈과 의지를 겨루면서, 데네소르는 장수를 약속받은 누메노르인의 후손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빠르게 늙었다. 그는 아라곤과 비슷한 연배에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육신이 늙었다는 것은 그의 정신도 그만큼 쇠락하였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약해진다고도 하지 않던가. 소중한 그의 곤도르를 지키기 위해 장수의 축복을 희생하면서까지 팔란티르를 보았건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곤도르가 곧 파멸되리란 예측 뿐이었다. 그는 이제 북방에서 나타났다는 '이실두르의 재난'을 자신의 손에 넣기 전에는, 그 어떤 준비도 소용없을 것이라 여겼다.

"내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지만 통치에는 실패하셨고, 내가 곤도르를 부흥시키길 원하고 계시오."

그러나 소문의 그 '이실두르의 재난'을 찾으라고 보낸, 사랑하던 큰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오직 뿔나팔만이 두동강나 안두인 강을 따라 두동강나 떠내려오고 말았다. 암흑탑의 권세는 하나 하나 백색탑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힘없는 인간 데네소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곤도르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였던 그는 이제 곤도르를 구할 길이 없어지자 절망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다. 섭정의 지위도, 아직 살아있던 둘째아들의 목숨도 모두 버리고, 그는 백색탑의 영주를 위대하게 만들었으나 암흑탑의 군주에게 굴복하게 만든 팔란티르를 품에 안고는 불길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필요 이상의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때로는 위대한 지혜자들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샤이어의 호빗 청년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때로는 용감한 요정 전사보다, 아무 힘 없어 보이는 샤이어의 정원사가 더 강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법이다. 인간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힘으로 인해 곧잘 파멸하는 법이다. 왕이나 왕이 아니었던 데네소르는 그러한 불운의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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