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스타워'스' 개봉 안내 전단지(전화카드 사이즈)

영화 <스타워즈>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영화에 대해 관심이 적거나, 영어문화권과 상관이 없는 세계의 사람일 것이다. 1977년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이 우주를 배경으로 한 무협 환타지 액션 드라마는 세대를 넘어 계속해서 재창조되며 2005년 여름, 6편에 이르는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개봉할 때마다 그 해 최고의 영화로 거론되며 극장가의 많은 기록들을 갈아치웠고, 영화 제작의 개념을 단지 '있는 대상을 촬영하는 것'에서 '보여주고 싶은 화면과 들려주고 싶은 소리를 자유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완전히 뒤집어 놓은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의 인식과는 달리 헐리우드 유수 영화사들에 의해 대자본의 투자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가 아닌, 조지 루카스 감독의 '루카스 필름'이라는 작은 회사의 고유 자본으로 제작된 독립영화다. 20세기 폭스사의 로고는 언제나 이 영화 필름의 맨 앞에 붙어있지만, 20세기 폭스사는 다만 배급만을 담당했을 뿐, 단 1센트의 자본도 투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헐리우드 영화가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을 누르지 못하는 몇 안되는 영화 강국 중의 하나인 한국에서만큼은 이 헐리우드와 거의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영화가, 전혀 인기를 끌지 못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개봉된 클래식 3부작 중 2번째 작품 <제국의 역습>은 아예 개봉되지도 못했고, 세 번째 작품이자 당시까지만 해도 완결편이었던 <제다이의 귀환>은 본래 83년작이었으나 4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한국의 상영관에서 개봉하게 된다. 1997년,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개봉 20주년 기념을 겸해 이 낡은 세 영화를 디지털 기술로 리마스터링하여 재개봉했는데, 이때에도 국내에서의 흥행 수입은 세 영화를 모두 합쳐도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공룡 영화 <잃어버린 세계>의 수입만도 못했다. 1999년부터 개봉된, 클래식 3부작의 앞이야기를 다루는 프리퀄 3부작 역시 2005년에 이르도록 그다지 국내에서의 흥행은 좋지 못했다. 그 결과, 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립영화에 대해서 너무 많은 부분들이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이영화는 아동, 청소년용도 아니며, SF(Science Fiction)도 아니고 (6편의 영화 모두,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듯 검은 화면에 뜨는 파란 글씨 "옛날 옛날 먼 옛날에 은하계 저 멀리에서...Long, long time ago, in gallaxy far, far away..."로 시작한다.), 심지어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무기 이름또한 국내 모 포털사이트에 의해 '레이저 검'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명칭으로 잘못 알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스타워즈>의 세계관은 <반지의 제왕>에 비견될 만큼 방대하고 깊이있으며 또한 독특한 철학적 자연관을 보여준다. 포스Force로 대변되는 우주의 질서를 잡기 위한 제다이Jedi와 시스Sith의 대결, 그리고 마침내 포스의 균형을 가지고 오는 결말의 대담함은, 화려한 광검Light-Sabre 결투와 우주 공중전과 함대전 등으로 장식되어 풍성한 볼거리 또한 제공해준다. 수많은 개성적인 행성의 표정과 독특한 생물들, 인간 외의 종족들, 드로이드Droid라고 이름지은 스타워즈 특유의 인격과 개성을 가진 기계들, 그리고 위험한 우주의 풍경을 담아내는 과정은 하나 하나가 '기록'이 아닌 '창조'의 과정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조지 루카스와 그의 팀은 아무도 보지 못한 광경,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 속에 이 방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스타워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리퀄 3부작에서 드러나는 은하 공화국의 몰락과 은하 제국의 성립 과정은 20세기 초 히틀러와 나치당의 집권 과정과 닮은 점이 많다.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정치로부터 돌리고 힘과 공포로 권력을 유지하는 클래식 3부작에서의 제국의 모습은 레이건 시절의 미국 정부, 그리고 오늘날 조지 부시 2세 대통령 하의 미국 정부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또한 단지 이러한 사회적 쟁점 외에도, 서로를 베어 죽이고 그 결과 우주의 평화를 가져오려 하는 제다이와 시스의 모습을 대비시켜 악을 행하는 선은 정당한가, 선을 행하는 악은 정당한가와 같은 윤리적, 철학적 쟁점들 역시 시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화두를 던져준다는 의미에서 <스타워즈>는 그저 한바탕 즐기고 넘어가는 오락용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스타워즈>가 아닌 다른 영화라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 면모이다. 여기서 <스타워즈>를 언급하는 것은, 이 6편의 영화가 단지 영화로 그치지 않고, 혹은 단지 하나의 대중예술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화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신화는 더이상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핵심적인 코드가 아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예술가들은 신화속의 신과 인물들을 소재로 삼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미술품으로, 시로,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인간을 소재로 삼았다면 단지 음화(淫畵)에 지나지 않았을 여러 작품들이 아프로디테 여신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움'이라는 캐릭터의 의미로 도덕적으로 허용되었다. 단테의 <신곡> 등 성서에 기반을 둔 여러 예술품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틀로 신화가 기여했다는 점을 확인하게 해준다. 그러나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외침, 그리고 2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고 난 현대의 인류에게 신성이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신화 세계는 물론이고, 그들의 제국주의에 의해 잔인하게 해체당한 다른 세계의 수많은 신화 속의 신들 역시 더이상 자신들의 피조물에 대해 믿음을 받아내지 못한다.

이러한 신화의 공백은 현대의 새로운 신화들이 메우려 시도하고 있다. TV에서 방영하는 <신화 창조의 비밀>과 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예다. 이제 오늘날에 있어서 신화가 되는 것은 놀라운 사람, 사람이 해낸 놀라운 업적, 또는 인간 외의 것에 대한 각양 각색의 쉽게 믿어지지 않는 '과학적' 발견(로스웰에 추락한 외계인과 우주선, 잃어버린 세계, 네스 호의 괴물 네시 등) 등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종래의 신화가 가진 문화 전반에 걸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여전히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어하고, 인간의 감성이 가진 가능성을 믿고 싶어한다. 신화는 바로 이러한 빈자리에 필요한 이야깃거리이다. <스타워즈>는 이러한 신화에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놀랍고 신비한 방대한 세계의 모습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마치 신처럼 명확한 캐릭터성. 그리고 풍부한 자기 반복과 자기 암시이다.

신화의 신들은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성(性)적인 아름다움을 캐릭터로 가진 신이 아프로디테라면, 전장의 잔인함과 광포함을 캐릭터로 가진 신이 아레스인 것처럼, <스타워즈>의 등장인물들 또한 신화 속의 영웅들처럼 정형화되어 있어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 모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모험자 루크 스카이워커와 닳고 닳은 무법자 한 솔로, 고결하지만 용감한 공주 레아, 은둔의 현자 오비완 케노비, 그리고 권위와 힘의 상징 다스 베이더와 같은 <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의 주인공들은 이 후의 작품들에서도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며 관계맺고 변해가며 성장하고 파멸하거나 마침내는 포스와 하나되어 영(靈)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신화는 자기반복을 통해 완성되는데, 히브리 신화에서 신을 거역하는 이들과 그에 대한 응징 또는 용서의 과정들이 이브의 사과에서부터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스타워즈> 역시 이러한 반복의 과정을 지녔으며 이는 "I have a bad feeling about this.", 그리고 "May the Force be with you."와 같이 매 영화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대사들로 대변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생활에 적용하는 것처럼 여러 영화들에서 <스타워즈>의 대사나 상황을 인용하게 만들었다. 영화 <액설런트 어드벤처>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주인공 10대 소년들은 중세로 가서 칼싸움을 하며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의 대결을 흉내낸다. <플래시드>의 주인공들은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유인할 때 쓰는 경광봉을 마치 광검처럼 들고는 장난을 치며 "May the Force be with you!" 라고 외친다. 그리고 지구로 다가오는 거대 소행성을 반토막내기 위해 우주로 출동하는 <아마겟돈>의 주인공들은 츄바카와 한 솔로 같은 유명한 캐릭터를 들먹이며 자신들을 그 위치에 대입시킨다.

이러한 점들 이외에도 <스타워즈>가 얼마나 신화적 은유와 환유들을 많이 포함하는가는 다음의 패러디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 행사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신앙고백 - 사도 신경(1)과, 그 스타워즈식 패러디(2)이다.




(1)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신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2)전능하사 우주를 지으신 조지 루카스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포스로 잉태하사 동정녀 슈미에게 나시고

오비완 케노비에게 고난을 받으사 용암에 빠져 죽으시고

장사하지 않고 기계몸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제국에 오르사 전능하신 황제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스베이더로서 포스의 균형을 잡으러 오시리라

포스를 믿사오며 거룩한 카운슬과 제다이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미국 네티즌들의 만우절 장난 중 하나인 타이타닉 2 포스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997년작 <타이타닉>은 훌륭한 영화다. 아름답거나 장엄한 화면 안에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담아냈으며, 그 결과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과 사회적 이슈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타이타닉은 단지 그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재생산하듯, 타이타닉의 등장인물이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즉 <타이타닉>'을' 이야기하는 것만 가능할 뿐, <타이타닉>'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짧은 한 편이기에 자기 반복과 자기 암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캐릭터성도 부족하여, 많은 관객들이 잭과 로즈라는 등장 인물의 이름보다는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두고 <타이타닉>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신화적 특징들이 결여되어 있으니 <타이타닉2>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포스터와 같은 합성 이미지가 하나의 유희에 불과할 뿐 실제의 영화 혹은 소설 등 또 하나의 대중예술 작품으로 실현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스타워즈>는 가능하다. 즉, 우리는 <스타워즈>'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스타워즈>'로' 이야기할 수 있다. 티모시 잰의 스타워즈 소설들(제국의 후예, 어둠의 반란, 최후의 명령)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는 등단한 소설가에 의해 정식으로 출판된 문학 작품이며,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으나 최근에는 절판되었다. 클래식 3부작 이후 세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들은 조지 루카스의 등장인물과 세계관을 사용하면서도 작가의 독특한 내러티브와 주제를 표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또한 카툰 네트워크 채널에서 방영된 <클론 전쟁>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은 2002년 개봉한 <클론의 습격>과 2005년 개봉한 <시스의 복수> 두 스타워즈 영화 사이의 일을 다루고 있으며, 그리버스 장군과 같은 <시스의 복수> 한 편만 출연한 단역 캐릭터의 내력 등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미니시리즈 등으로 제작되거나, 다양한 장르의 게임(RTS, RPG, FPS 등)으로 출시된 스타워즈의 로고가 달린 게임들은 또한 영화 본편에서는 나오지 않은 여러 행성 출신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 본편 못지 않은 재미와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스타워즈>는 단지 영화만이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대중예술 분야에서 하나의 신화적 바탕이 되어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대중예술이면서 다른 대중예술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경우, 즉 팬덤 현상이 <스타워즈>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드라마 <프렌즈>, 등은 배우의 이름보다는 캐릭터의 이름을 두고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놀라운 캐릭터성을 지닌 작품들이다. 소설 <반지의 제왕>은 피터 잭슨이 감독한 영화를 비롯해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으로 여러번 재창조되었으며, 이 작품 안에 나오는 작가의 인공어 '퀘냐'로 성서 등을 번역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까지 설립되어 있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건담>, <마크로스>는 수많은 감독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하나의 이야기 구조가 되어 왔다. 2004년 개봉한 두 영화 또한 주목할 만하다.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프레디 VS 제이슨> 이 영화의 제목에서 보여지는 네 캐릭터는 모두 여러 편의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상징처럼 각인된 공포의 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가 영화를 이야기의 소재로 삼게 된 것이다.

이처럼 대중예술은 단지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중'의 예술이기에, 팬덤을 형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야깃거리가 되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인류는 대부분 잃어버린 '신화'가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긴 세월동안 이어지다 현대의 이름으로 단절되어버린 문화와 예술의 전통을 재창조하는 토대로 대중예술을 받아들일 수 있고, <스타워즈>는 그러한 신화적 가능성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


영화  <여고생 시집가기>는 임은경과 은지원의 (이젠 그다지 높지는 않은) 네임밸류만으로 짜여진 어린이 - 청소년용 3류 명랑 코미디에 불과합니다.

라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고 일견 사실이기도 합니다만, 영화의 시작은 정말 의외입니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어린 울보 소녀에게 평강의 혼이 씌었고, 16세 생일 전에 온달을 만나 정을 통하지 못하면 죽게 될거라는 설정으로, 모든 것을 운명으로 몰아갑니다. 성정 과격한 어머님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며 점집을 들어 엎지만, 예언되었던 16세의 생일이 다가오자 죽음은 계속해서 여전히 울보이지만 전교 일진인 막강한 소녀 평강을 스쳐지나가고, 마침내 눈앞에 온달이 나타나자 '살기 위해' 그의 사랑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온갖 장애가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운명의 그날, 역사는 이루어지고, 두 사람은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에 골인합니다.
그리고 운명을 완결짓는 두 사람의 아이는, 이제 다시 점집으로 돌아와 낙랑공주의 혼이 씌었다는 판정을 받고 북을 찢습니다. 뭘 믿고 이리 스케일이 큰건지. 참 재미있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합니다.

아쉬운점이야 물론 많지요. 단지 웃음을 위해서 집어넣은 듯한 칠수나 원어민교사 같은 캐릭터들은 정말 삭제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전교 1등이지만 비만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평강과 같은 반의 여학생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평강과 대비해 좋은 이야기구조가 되었을 텐데 도리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르는 다른 캐릭터들에 밀려 비중이 약화되어 버린 듯 합니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 또한 예상 그대로이고, 액션도 특수효과도 엉성하지요.


하지만 죽어야 한다는 절실한 운명을 알고 있기에, 관객들은 한심한 장면들에는 실소하면서도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결말을 기다리는 듯한 심정으로 평강을 응원하게 됩니다. 예쁘지만 막강한 소녀가, 똑똑하고 잘생긴 소년을 만나 사랑에 골인한다는 너무 단순한 스토리는, 또한 우리가 늘상 접하던 "멍청한 고교 일진이 영리한 학교 수석 여학생과 사랑한다"는 소년만화의 정석을 반대로 뒤집었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깊습니다.




한편  <제니주노>는, 똑같이 교복 입은 아이들의 결혼을 그리면서도 무척 실망스럽기만 합니다. 전교 1등인 귀여운 여중생과, 프로게이머로 잘나가는 예쁜 남학생. 이건 정말 3류 소년만화나 순정만화의 공식일 뿐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여고생 시집가기>에 비해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화면구성과 근사한 로맨스 장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니주노>는 애초에 영화이길 포기하고 멋대로 장면을 나열했을 뿐입니다. 지금 제가 스토리를 요약해서 설명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죠. 거기에는 '운명'과 같은 일관성도, '사랑'과 같은 당위성도 보이질 않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라면서 어째서 전혀 실현성이 없는 마무리를 보여주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박민지양이 임은경보다 별로안예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디 우리 은경이랑 비교를...)
영화는 영화 나름으로 이야기를 완결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웹에 연재된 만화나 실화, 혹은 인터넷 소설이라는 허무맹랑한 장르명으로 출판된 귀여니즘 출판물이 인기를 끄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에 기반하고 있는 영화라도 감독이나 배우들의 나름의 해석과 가치관이 담기지 않는다면, 단지 동어반복적 확대 재생산에 불과할 뿐입니다. 최소한의 구조도 갖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리 예쁜 화면에 사랑스런 배우들을 담아낸다 하더라도 영화의 이름을 달고 극장에 걸릴 자격이 없습니다.
,

오늘은 영화가 하나뿐입니다.

영화 '천군'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잘 모르겠네요.
남북한의 군인들이 1572년의 조선시대로 날려가 이순신을 만난다는 이야기.
박중훈 식 코미디를 유행시켰던 바로 그 배우 박중훈이 이순신에 캐스팅되어서인지, 이 영화가 요즘 유행한다는 그노무 '퓨전 코미디 액션 사극'으로 생각하게 되면 아마도 돈주고 안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여러가지 특수효과들이 조금씩 허술한게 눈에 띄고 그래서 그다지 깔끔한 화면을 보여주진 않습니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갈라선 남과 북의 문제.
한반도의 핵 문제.
애국심의 범위에 관한 문제.

전쟁을 다루지만, 이 영화는 전쟁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범위까지 넘나드는 고찰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훨씬 우리 피부에 가까운 이야기, 즉 군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내가 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런 겁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탕아에서 일순간에 개과천선하는 영웅 이순신을 보여주기보다, 무과 응시때 다친 다리를 여전히 절룩이면서도 자신의 머릿속 마지막 생각 하나, 마지막 손가락 근육 하나에 배인 힘까지 모두 짜내어 나와 같은 사람들, 나와 대화하고 내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는 한 청년을 보여줄 뿐입니다. 과거로 흘러간 여섯 명의 남북한 군인들은 모두 이순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갑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휴전선에는 이 땅에 태어나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같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게으른 말년 이병장도, 어리버리 김이병도, 독사 박중위도, 모두 저 너머에 있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다만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기에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건너 중국을, 바다건너 일본을 바라보지 못하고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군대는 돈없고 빽없어서 간다고 생각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가족을, 친구를, 그리고 여러분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말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고(갔다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요.
,
2차 세계대전은 엄밀히 말해서 단일한 전쟁이라기보다, 여러 전쟁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미국, 영국, 소련 등이 연합하여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추축동맹을 상대로 싸운 전쟁이 아니라,

게르만인과 슬라브인의 사활을 건 대결이었던 독소전쟁(에너미 엣더 게이트),
철저하게 훈련받은 연합군과 자타공인 최고의 육군국 독일과의 대결인 유럽전쟁(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민족감정과 생존본능 등 모든 것이 얽히고 섥힌 증오와 파괴의 태평양 전쟁(신 레드 라인, 윈드 토커, 진주만),
그리고 모두가 본국으로부터 소외된 채 정글이나 사막, 거친 바위산을 오가며 그저 헤매야 했던 동남아시아 전쟁과 북아프리카 전쟁, 이탈리아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얽혀있는 전쟁마다 모두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거대한 파괴의 흔적이 수많은 사람들을 부수고 지나갔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만 하는 전쟁은 독소전쟁과 태평양전쟁입니다.



영화 진주만은 태평양 전쟁에 대한 많은 영화 중의 하나입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2차대전은 독일군과의 싸움이라기보다 일본군과의 싸움으로 더 잘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군은 미국 영토에 단 한발의 포탄도 투하하지 않았고 단 한발의 포격도 행한 적이 없지만, 일본군은 끔찍한 상처를 남기고 갔기 때문이지요.

영화에 대해서는 혹평이 분분합니다. 로맨스가 너무 상투적이다. 비주얼만 있으면 다냐. 결말도 너무 뻔하고 작위적이다. 등등.
하지만 이 영화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설득시켜주려는 영화가 아니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1941년 12월 7일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평화롭고 즐거운 섬지방 하와이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주말연속극처럼 지루한 로맨스는, 그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의 기준에서는 정말 어이없는 방식으로 전투를 진행했습니다. 보통 해전에서는, 적함이 격침되면 그것으로 전투가 끝납니다. 바다에 빠진 승무원들은 구조하여 포로로 잡는 것이 일반적인 서구 군대의 해전이었지요. 그러나 진주만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원들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수병들을 향해 아무 주저없이 그들이 자랑하는 제로전투기의 기관포를 발사했습니다.

말살전쟁만이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었고, 그들 자신도 포로가 되기보다 죽는 것을 선택했기에, 이 기이한 전투에 끌려들어간 미국인들조차 결국엔 그러한 방식으로 싸우게 됩니다. 거기에는 분노와 공포와 고통이 모두 배어 있습니다. 한발 한발의 총탄과 포탄마다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권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진주만은 바로 그런 모습을 생생하게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칭찬하는 이유입니다.

이따금 성조기가 휘날리고, 미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하는 듯한 화면도 보이지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살수대첩이나 명량 해전을 영화화할때, 우리는 과연 그러한 이미지를 인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요?



에너미 엣더 게이트에서도 진주만과 비슷한 삼각관계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진주만에서처럼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진주만에서의 애들린과 레프는 비록 군과 관련해서 만났지만 폭격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단지 생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타냐와 바실리는 전장에서 만나야 했고, 전장에서나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독소전쟁은 애초부터 우수한 게르만 혈통의 유지를 위해 열등민족 슬라브족을 쓸어버리려는 의도로 시작된 악랄한 전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전쟁에 선과 악이 극명하게 갈리는 예는 사실 역사를 통틀어 매우 드물지만,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은 분명히 잔인 무도한 비적들이었고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 죄없는 선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주만이 미 육군(과 해군) 항공대의 전투라면, 에너미 엣더 게이트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 소총 한자루로 분연히 일어섰(다고 선전됐)던 한 저격수의 무용담을 그립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적은 둘이었습니다. 독일군과,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당원들과 붉은 군대 그 자체. 노동자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던 신도시 스탈린그라드는 밀어닥친 독일군들로 인해 벽돌과 쇳덩이로 뒤덮힌 폐허로 바뀌고 맙니다. 하지만 스탈린 동지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잃을 수는 없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스탈린그라드로 보내어집니다.

소총과 총탄등 기본적인 보급품조차 부족한 상태에서 잘 정비된 독일군을 향해 맨몸으로 뛰어가야 했던, 돌아서면 아군의 기관총이 자신들을 다시 되돌려세우는 그런 상황 속에서 러시아사람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죽어갑니다. 그래서 희망을 주기 위해 영웅은 만들어지고, 소총 한자루로 최선을 다해 독일군과 싸우는 바실리 자이체프의 모습은, 도쿄 폭격을 가했던 레프와 대니처럼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의 불씨가 되지만, 영웅에게 남은 건 상처뿐입니다.

레프와 애들린은 전쟁이 끝나고 다시 주말연속극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 습니다. 하지만 바실리와 타냐는 그저 간신히 만났을 뿐입니다. 엉성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붉은 군대의 행정처리 절차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행운이긴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그 다음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독소 전쟁이 태평양 전쟁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파괴와 살육을 남기고 갔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요.


전쟁과 사랑은 모두 격렬한 죽음과 연관되어 있고, 그리하여 자주 묶이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두 영화 모두 전장을 함께하는 절친한 두 친구와 한 여인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고, 그 관계는 한 친구의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친구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
 
트로이에 대해서는, 일전에 [일류 액션 '에로'물]이라고 매우 혹평한 적이 있습니다.

신화속의 인물을 재조명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우면서 잘했다는 소리 듣기 매우 힘든 방법은 '역사속의 인물로' 조명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킬레스 : 발목만 제외하고 불사의 몸을 가진, 신의 아들. 트로이 전투에서 파리스의 화살에 발목을 맞고 전사.

트로이 전투 : 10년에 걸친 소모적인 공성 끝에 오디세우스의 재치로 목마를 성 안에 들여 마침내 함락시킴.

헬레네 : 모든 남자들을 현혹시킨, 절세의 미녀. 제우스의 불륜의 결과물로, 헤라의 저주를 받아 관계하는 남자마다 파국을 맞이함.

파리스 : 트로이를 멸망케 하리라는 예언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비운의 왕자. 헬레네와 운명의 사랑에 빠짐.

이 모든 것이 영화 트로이에서 어떻게 변화했나를 봅시다.

아킬레스 : 막강한 힘과 놀라운 검술을 가진 용맹한 전사이나 정치와 세상사에 회의를 느끼는 심약한 인물. 파리스의 화살에 죽지만, 사람들이 목격한 것은 오직 발뒤꿈치에 박힌 화살뿐.

트로이 전투 : 10개월 여의 단속적인 공성 끝에 양측 모두 주력 장수를 잃은 상태에서 트로이의 목마로 함락됨.

헬레네 : 정략결혼으로 호색한인 메넬라오스에게 팔려갔다가 파리스를 만나 사랑에 눈뜬 아름다운 그리스 귀족 여성.

파리스 : 여자나 후리고 다니며 형에게 의지하는 철부지에 망나니 막내 왕자. 헬레네를 만나 겨우 사랑을 알고 형을 잃은 후에 겨우 인생을 알게 됨.

위대했던 신화 속에서 위대함을 빼앗고, 숭고한 운명 속에서 필연을 빼앗아버린 영화 '트로이'는 그래서 제목이 일리아드가 아니고 '트로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는 보다시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힘이었던 신적 요소를 모두 잃어버린, 단순한 일류 액션 에로물.
"신들은 인간을 질투해."

하지만 정작 그 신은 아킬레스가 아폴론의 신상을 베어버린 것처럼, 처음부터 영화안에선 있지도 않았습니다. 신의 이야기에서 신을 빼버리면, 남는게 뭘까요.



자, 반면, 역사속의 인물을 재조명하는 방법도 물론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알렉산더의 경우, 가장 사료에 충실하게 진행하는 방법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사료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덧살로 붙였지요. 가장 평이한 전기영화의 서술 방식이지만, 어떤 덧살을 붙이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알렉산더에 덧붙인 덧살은, 결코 그리스의 나체 조각상들처럼 치부는 감추고 사실은 미화시킨 덧살이 아니라, 로댕 이후의 조각상처럼 치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흉한 사실을 그대로 그려내는 덧살이었습니다.

4만 대 25만이라는, 단일 전투로서는 최대에 가까운 거대한 전투였던 가우가멜라 전투 신은 한없이 냉정하고 섬뜩하게 이날의 전황을 그려냅니다. 피범벅이 되어서도 지극히 냉정하게 훈련받은 대로 검과 창을 휘두르는 알렉산더의 군대가,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다리우스의 모습보다 수천배는 더 섬뜩하게 보이도록. 그런 힘을 가진 군대가 아니라면 인도에 이르는 대장정을 해낼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위대한 군인이었던 알렉산더는, 정치가로서, 왕으로서는 단지 몽상가에 불과했습니다.
모두 하나되는 세상. 모든 민족이 그리스식 표준을 따르는 문명화된 세계. 각지에 세워지는 알렉산드리아. 멋진 꿈이지만...
"꿈을 쫓는 자는 역사에 남지만, 대신 그 주위 사람들을 너무나 힘들게 해. 그리고 그가 죽거나 아니면 주위 사람들이 지쳐 죽지."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프톨레마이오스(영어식으로는 톨레미, 안소니 홉킨스 분)의 말대로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마저 모두 그를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겠지요.

"신은 인간을 질투해."

아무리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고 해도,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는 법이고, 영화는 바로 그 한계에 늘 부딪히고 좌절하며 우는 연약한 알렉산더를 냉랭하게 그려냅니다.




전설속의 인물을 그릴때 우리는 주로 전설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전설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이야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곤 합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얼마나 전설을 더 전설처럼 보이게 하느냐. 얼마나 더 전설로서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하느냐 정도겠지요. 영웅의 행적과 사랑을 통해 무엇이 옳은지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그 뻔한 기능 말입니다.

영화 '킹 아더'는 '카멜롯의 전설'등에서 기존에 보여주었던 이 방식들을 무참히 깨부수고, 전설을 역사로 끌어내버렸습니다. 아무도 뽑지 못하던 엑스칼리버를 뽑아 그것으로 왕이 되었다는 아더는, 실존인물입니다. 5세기 경,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무렵의 일이죠. 암흑 시대라고 불리던 이 변혁기에 브리튼 섬의 주민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침략자 색슨족의 침입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나운 상전에서 놓여나자 바로 잔인한 도적을 맞이하는 꼴.

아더의 본명은 '루시우스 아토리우스 카스투스' 로마인 아버지와 브리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휘하에 있는 기사들은 로마 제국 동쪽 끝 변방에 살던 기마민족 '사마시아' 출신의, 당시 가장 고도로 훈련된 전투 집단이었습니다. 명예와 무용 등을 중시하는 기사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죽음 대신 로마를 위해 싸워주는 것을 선택하여 징집당한 그들은 15년의 복무 기한을, 고향과는 거의 지구 반대편인 브리튼 섬까지 끌려와 채우게 됩니다. 마침내 그 기한이 끝나고 자유를 보장받지만, 그들은 힘겨운 임무와 숱한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자유로이 고향으로 떠나기보다, 나란히 원탁에 앉아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며 그들을 돌보아준 아더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익히 알고 있는, 기사도에 충실한 풀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는 아더왕이 아니라, 로마의 갑주를 걸치고 독수리 문장이 달린 군기를 쳐드는 아더의 모습은 무척 생소하지만, 영화는 나름대로 멋지게 아더를 전설에서 끌어내 역사의 옷을 입혔습니다.




라고 말할 줄 알았죠? 포장만 역사일 뿐,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그 대의를 위해 싸웠고 마침내 압도적인 수의 적을 맞아 싸워서 이긴 아더의 모습은 결국 전설속의 아더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장검으로 검투사식의 로마 검술이라뇨;; 아더가 무슨 헤라클레스라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전설에 충실해 마법이 난무하는 대전투를 그리는게 낫지 않았나 싶네요. 내심, 대의를 내세워 껍데기만 남은 로마를 차버리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야심가 아더를 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그려내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모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는 것 같네요.
,
2003/05/17, <로젠다로의 하늘> 등록글을 수정.

저는 투명드래곤과 귀여니님(이윤세)의 글을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투명드래곤에 대해서라면 저는 전편을 다 읽었으며, 굉장한 팬이었다고 미리 못박아두겠습니다. 여기저기 이런 것도 있다며 주소를 복사해서 올리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녔을 정도니까 말입니다. 투명드래곤은 확실히 '대단한' 이슈가 될 만 합니다. 기존 판타지 문단(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도록 합시다)에 대한 하나의 반항일 수도 있고, 심지어 그들 모두를 신랄하게 까대는 강한 풍자일 수도 있습니다. "절라 짱이었다"와 "꼐속"을 아마도 다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생각만해도 즐겁습니다. 누가 드래곤에게 영속적인 인비저빌리티를 부여할 생각을 해보았던가요. 사실 아무도 이런 생각은 못해보았을 겁니다. 장난으로는 했더라도 하나의 글에 이런걸 표현할 생각은 못했을 거란 말입니다.

귀여니님의 글은 저는 엄하게도 '책으로' 읽었습니다.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책이 눈에 들어와서 열어봤는데, (물론 그 서가에는 다른 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주로 별로 심각하지 않게 즐기며 써 내려갔으나 조회수의 높음으로 인해 출판된 것들이지요.) 제 결론은 이것은 '소설'이 아니며, '글'도 아니고, 단순한 '시간보내기용 놀이기구'라는 것입니다. 즉, 예전에 많이 나오던 구비문학류(최불암씨리즈, 참새씨리즈등)를 책에 담은 것과 용도상으로 거의 같으며, 그것이 다만 한사람의 창작자가 있다는 점만 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용도라면 이것은 상당한 수준을 갖고 있습니다. 귀여니님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트렌디'함을 가득가득 품고 있으며, 요즘 시대를 사는 10대들이 좋아할만한 아이템과 이벤트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일단 책을 사면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구성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책은 저를 판매 대상으로 예상하지 않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귀여니님과 취향과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저는 소외감마저 느꼈으며, 결국 3분의1 정도를 읽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다시 투명드래곤으로 돌아갑니다. 투명드래곤은 분명히 하나의 소설이며, 국어 파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글 자체의 내적인 완성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낙서를 위대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거기서 오히려 우리는 아이들의 눈으로만 보일 법한 진실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투명드래곤은 바로 그런 걸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제가 쓰고 있는 글 또한 투명드래곤보다 한치도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판타지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단지 '절라 짱이었다'를 좀더 설득력 있고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강하고 멋지고 스펙터클하면서 환상적이고 웅대한 이미지를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실 '절라짱이었다'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다만 그렇게 쓰는 것은 '문학적'이지가 못해서 다들 지양하는 표현일 뿐이지요. 투명드래곤에 덧글을 다시는 분들 중에는 계속해서 덧글을 다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그 분들은 횟수가 지속될수록 계속 욕만 하고 있습니다. 안좋다고 생각하면, 보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을 들킨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인터넷 세대입니다. 게임 세대입니다. 영화 세대입니다. 뮤비 세대입니다. 멋지고 훌륭한 것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본질에 무엇이 있건 멋져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보다 멋진 것이 좋습니다. 얼짱. 몸짱. 단 한장의 지명수배 사진으로 강짱(강도얼짱)까페를 만들기까지. 게임에선 오직 지존 캐릭터만을 위해 끝없는 노가다를 달리죠. 과정의 즐거움따위 잊은지 오래. 뽀대와 강함을 챙기는게 바로 우리들입니다. 투명드래곤은 그런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적어도 그 시류에 영합하는 귀여니님의 책보다 투명드래곤은 솔직하게 그 시류를 낙서해냄으로써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우리들 모두에 대한 신랄한 풍자의 역할을 해 내고 있습니다.

조금 높은 어조로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만, 투명드래곤은 적어도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읽어주겠지. 팔 수도 있겠지 하는 의도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순수하게 '창작'된 글입니다. 비판을 받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소설'입니다. 그리고 제 관점에서는, 어떠한 비판을 받든 존재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귀여니님의 글은, 사람들이 읽어줄 만하고 읽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만이 글의 목표입니다. 따라서 그 글은 소설이 아닙니다. 어떠한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은 귀여니님의 글은 비판을 받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귀여니님 자신이 바라는 호칭인 '트렌디 작가' 가 아닌 '트렌드에 영합하는 장사꾼'이라고 불러주고 싶군요. 물론 귀여니님이 단지 자기 만족을 위해 글을 썼다면 상관 없겠지만, 그걸 출판했고, 그로 인해 이윤을 얻고 있다면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한 자격은 갖춘 셈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판받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 출판사. 그런 글을 출판한, 그리고 그것을 소위 '인터넷 문학'이니 하는 표딱지까지 붙여서 자신들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양 행세하는 편집자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장사꾼이며, 돈을 위해서라면 양심마저 뜯어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사람들입니다. 비판은 귀여니님에게보다 그들에게 먼저 해야 할 겁니다.

쾌락 위주 문화의 절정에 다다른 우리들의 모습과, 그것을 장사에 이용하는 출판사와 그에 '기꺼이' 이용당하는 귀여니님.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신랄하게 까대주었던 투명드래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봅시다. 우리들은 무엇인지.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해 온 건지. 과연 우리가 누굴 비판해야 하고 , 비판할 자격은 있는지.

이 글은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과 저와 비슷한 사람들을 위한 반성문입니다.



꼐속.
,
1. 반지 원정대 VS 매트릭스

평범한 매트릭스 안의 한 사람이었던 네오는 매트릭스의 정체와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진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평범한 샤이어 안의 한 호빗이었던 프로도는 반지의 정체와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샤이어 밖 거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일행은 네오를 위해 오라클을 찾아 요원들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매트릭스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일행은 프로도를 위해 리벤델을 찾아 나즈굴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황야를 나선다.


모피어스는 일행과 네오를 지키기 위해 막강한 요원 스미스와 단 둘이 대결하기로 결심한다.

간달프는 일행과 프로도를 지키기 위해 막강한 발로그와 단둘이 대결하기로 결심한다.


일행중 한명의 배신으로 인해 두 명은 목숨을 잃고 네오는 위기에 처한다.

일행중 한명의 배신으로 인해 두 명은 잡혀가게 되고 프로도는 위기에 처한다.


네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다시 매트릭스로 나선다.

프로도는 반지의 능력을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다시 여행을 계속한다.


2. 두 개의 탑 VS 매트릭스 릴로디드


네오와 모피어스, 트리니티는 열쇠쟁이를 찾기 위해 어렵게 메로빈지언을 찾아간다.

아라곤과 레골라스, 김리는 두 호빗을 찾기 위해 어렵게 로한 땅을 가로지른다.


네오는 일행과 떨어진 채로 위험하고 알 수 없는 존재 스미스를 만난다.

프로도는 일행과 떨어진 채로 위험하고 알 수 없는 존재 골룸을 만난다.


네오와 모피어스, 트리니티는 열쇠쟁이를 구하기 위해 메로빈지언의 부하들과 불가능할 것 같은 사투를 벌인다.

아라곤과 레골라스, 김리는 로한을 구하기 위해 사루만의 부하들과 불가능할 것 같은 사투를 벌인다.


위기에 처한 마지막 순간에 트리니티의 도움으로 네오는 무사히 소스에 접속한다.

위기에 처한 마지막 순간에 에오메르의 도움으로 일행은 무사히 로한을 지켜낸다.


영화의 거의 끝에서 트리니티는 건물 옥상에서 죽기 직전에 네오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영화의 거의 끝에서 프로도는 건물 옥상에서 죽기 직전에 샘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3. 왕의 귀환 VS 매트릭스 레볼루션


네오와 트리니티는 전쟁의 종결을 위해 단 둘이서 아무도 갈 수 없다던 기계의 도시로 향한다.

프로도와 샘은 전쟁의 종결을 위해 단 둘이서 아무도 갈 수 없다던 불의 산으로 향한다.


기계들은 모든 힘을 몰아 시온을 공격하고, 이를 돕기 위해 출발한 모피어스는 뒤늦게 도착하지만 간신히 EMP로 모두를 구한다.

마술사왕은 모든 힘을 몰아 미나스티리스를 공격하고, 이를 돕기 위해 출발한 아라곤은 뒤늦게 도착하지만 간신히 죽은 자의 군대로 모두를 구한다.


마지막 대결을 위해 모피어스와 기타 일행들은 수없는 적 앞에 버티고 서게 되지만 그들 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마지막 대결을 위해 아라곤과 기타 일행들은 수없는 적 앞에 버티고 서게 되지만 그들 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네오는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스미스와 대결하지만 결국 진다. 그러나 그 패배가 사실은 승리였고, 스미스는 파괴되며 전쟁은 끝난다.

프로도는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골룸과 대결하지만 결국 진다. 그러나 그 패배가 사실은 승리였고, 반지는 파괴되며 전쟁은 끝난다.








조금 억지로 짜맞춘 감도 없진 않지만,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은 두 영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