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을 보면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분명 가운데땅과 발리노르가 속한 세계 '아르다'에는 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들인 '발라르'가 있으며 그들이 보내는 '마이아'가 가운데땅을 활보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든 요정이든 난쟁이든 그 '신성'에 대한 개념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요정이나 인간은 그 어떤 발라의 피조물도 아니고 나중에 온 종족, 더 나중에 온 종족일 뿐이니 (게다가 마이아와 혼인한 요정도 있고, 그 후손인 요정과 혼인한 인간도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쳐도, 난쟁이는 분명 발라 '아울레'의 피조물인데도 그들이 '마할'이라 부르는 이 아울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지요. 기독교가 일상에 깊이 스며든 서구인들이 뭔 일만 있으면 Oh, Jesus! Oh God! 하고 예수를 찾고 신을 찾는 것과는 달리, 난쟁이든 인간이든 요정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신성에 기대는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일상적 대화에는 오히려 예의범절과 인사에 대한 것, 누구의 편이냐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긴밀하게 언급됩니다.

곤도르는 굉장히 오래된 나라입니다. 건국 자체가 몇천년이 넘었고,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누메노르 왕조가 수천년이 이어졌었죠. 이쯤되면 곤도르 인들에겐  곤도르는 나라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예요. 그들은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누메노르의 전통에 따라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보존합니다. 왕이 없지만 누구도 왕을 참칭하지 않고, 정당한 왕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이가 나타날때까지 섭정가가 통치하죠. 끝까지 섭정으로 남아서. 밖에서 보기엔 엄청나게 아름답고 화려해보이는 고대의 유적인 미나스 티리스와는 달리 그들은 검소한 민족이고, 호빗들에겐 간식거리도 안될만한 식사 앞에서 잠시 서쪽을 향해 서서 엄숙히 묵념하는 것이 기본 예의입니다. 손님과 주인에 대한 예의, 주군과 신하의 예의, 친구간의 예의가 수없이 언급되지요. 뭐 생각나는 것 없으세요?

네. 현실 세계에선 바로 중국, 한국, 일본인들이 그렇잖아요. 수천년간 중국은 스스로 세계를 자처하며 살아왔죠. 조상신부터 시작해서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을 비롯해 온갖 미신이 횡행하지만 이 '세계'의 지배자들, 왕과 황제들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질서에 따라 나라의 틀을 유지해왔습니다. 그 질서는 바로 '예의'죠. 한국은 동방 예의지국이라고 불렸어요. 부자간의 예의, 군신간의 예의에 대해서는 거의 남녀간의 사랑만큼이나 애절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지요. 일본의 천황은 신하된 입장에서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국가의 상징을 넘어서서 일종의 신성마저 부여되어 있고요. 그 전통은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곤도르인들은 이런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에요. 미나스티리스 도성에 엄청난 수의 적군이 쏟아져들어오는데도 절망을 말하는 이는 있을 지언정 구원을 바라는 이는 없습니다. 섭정부터 말단 병사까지 임무에 충실하며 혹 상급자가 그러지 못한 면모를 보인다 해도 자신은 상관없이 임무 수행에 충실합니다. 그 때문에 섭정이 아들을 죽이고 자살한다 해도 도성 수비대는 위치를 이탈해 그들을 말릴 수가 없었던 거지요.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임무니까요. 자신의 자리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시작이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또 눈여겨볼 건 곤도르라는 지명이에요. Gon은 돌, ~dor는 ~의 땅이란 뜻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의 지명과 비슷한 방식이죠? 石地라고 번역해도 돼요.  물론 요정어를 그대로 쓰는 것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요정어의 어휘 생성법은 중국어와 비슷합니다. 같은 의미를 가진 어간이 별다른 어형변화 없이 놓이는 위치에 따라 발음이나 의미의 연결이 달라지죠. 일상어는 아니지만, 인명 지명등에 많이 쓰이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인이 한자를 자주 쓰는 것과도 또 유사합니다.

자, 이제 방향을 바꿔서 모르도르를 볼까요. 마이아 사우론의 권세가 일구어낸 어둠과 암흑, 먼지와 재와 유독한 대기의 땅. 더러운 오크들이 자신들의 온갖 악행을 서로에게 거듭하며 수없이 번식하고, 사우론의 꾀임에 넘어가거나 힘으로 정복당한 어둠의 인간들이 모여드는 곳. 정복지에서 납치한 노예들이 광활한 평야를 일구고 눈꺼풀 없는 붉고 거대한 외눈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강요당하는 곳.

모르도르가 단일한 국가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우론과 그 종복들의 술수는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었던 겁니다. 앙그마르의 마술사왕이 남왕조와 북왕조의 왕들을 차례차례 제거한 것도 반지전쟁으로부터 천년 전이지요. 동쪽으로는 룬, 남쪽으로는 하라드, 서쪽으로는 움바르를 차례차례 복속시키고 국력을 모으는 데만도 몇백년이 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마이아인 사루만을 끌어들이기까지 했지요. 이렇게 끌어모은 거대한 연합군이 인간세계의 마지막 자유왕국 곤도르를 친 겁니다. 곤도르를 침과 동시에 또 한무리의 오크 군단은 북방 난쟁이 왕 다인의 영지와 그 인근 인간 마을을 공격했고, 다른 무리는 요정이 사는 로스 로리엔과 리벤델을 향해 공격해들어갔지요. 거의 가운데땅 전체를 향해 모든 병력을 동시에 내리친 겁니다. 이 어마어마한 군단이 섬기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룬과 하라드와 던랜드의 인간들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단일한 전략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눈꺼풀 없는 눈의 공포였지요. 실체조차 없는 이 존재가 자신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눈의 직속 부하들인 나즈굴이 섬뜩한 공포를 소리내어 퍼트리죠.

우리세계에서 이와 가장 비슷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네. 바로 "복수의 하나님 여호와" 께서 계십니다.

신이 두렵지 않느냐고 말하는 우리 세계의 인간들처럼, 오크들은 끊임없이 '루그부르즈'(원작에서 수없이 언급된 이것.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교회당과 같은 일종의 장소나 조직인지, 아니면 사우론과 만날 수 있는 오크 대 족장인지) 와 그 뒤에 버티고 선 커다란 눈동자를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합니다. 서로의 배에 칼을 쑤시는 것이 당연한 사이끼리도 그 말만 나오면 어느정도 수긍하고 말지요. 사루만의 우루크하이들과 모리아의 오크들이 싸우는 걸 보면, 자신들이 누굴 섬기는지, 그리고 그들 중 누가 더 위대한지를 겨룹니다. 꼭 자신의 믿음을 설파하려는 광신도들처럼 말이죠.

실체가 없는 눈꺼풀 없는 눈동자라는 존재, 아무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심지어 가장 의로운 자 모세조차도 보고나서 눈이 멀었던 그 실체없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신이 유일자이며 자신에게 선택받은 종족들에게 선민의식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도 비슷해요. 결코 그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며 구체적인 행위는 나즈굴을 시키는 것도, 천사를 보내고 성령으로 역사하는 하나님과 비슷하죠?

서로 참호를 파고 들어앉아 아침이면 저쪽에서 이쪽으로 자살돌격을 하고, 저녁이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살돌격을 해야 했던 1차 세계대전 때, 그들은 양쪽 모두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습니다. J.R.R. 톨킨이 몸소 겪었던 전쟁이었죠. 그는 평생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살아왔지만, 사실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미 사라졌음을 소심하게 드러낸 걸지도 모릅니다.  

덧 : 그럼 이(↓) 남자는 우리 세계의 마술사왕인 셈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