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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론드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우론이 가운데땅의 악의 군주가 되기 전의 시대, 모르고스가 발흥하던 그 어두운 시대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모르고스는 본디 신족 발라의 일원이었으나 자신의 힘을 과신하며 소유욕에 넘쳐 세계를 어둠으로 몰아간다. 그의 부하들은 발로그라 불리는 불의 영, 불을 뿜는 드래곤, 늑대인간과 유령 등 온갖 세상의 사악한 모든 것이었으며, 단언코 그중 최고의 사악함은 모르고스 자신. 그 두번째는 충실한 부관 사우론이었다. 그는 발라들의 땅 발리노르를 빠져나오면서 위대한 보석 실마릴을 훔쳤는데, 이는 놀도르 요정 왕자이자 유한한 자들 중에 가장 강하고 아름다웠던 페아노르의 작품으로, 요정들은 실마릴을 되찾기 위해 발리노르를 떠나 가운데땅으로 와서 길고 희망없는 전투를 벌이게 된다.
페아노르의 동생 핑골핀은 핑곤을 낳고, 모르고스와 1대1 결투를 벌이다 쓰러졌으며, 핑곤은 길갈라드를 낳아 미리 멀리 해안으로 피신을 보낸다. 핑곤의 동생 투르곤은 은둔의 도시 곤돌린의 왕으로, 그는 아름다운 이드릴 켈레브린달을 낳았으며, 그녀는 인간 투오르를 남편으로 맞아 에아렌딜을 낳는다. 에아렌딜은 곤돌린이 모르고스의 침입으로 몰락할때 시리온 강 하구로 피난하여, 먼저 피난왔던 저 유명한 베렌과 루시엔의 손녀 엘윙을 아내로 맞아 엘론드를 낳는다.
이 어마어마한 가계의 말단에 있는 엘론드는 놀도르의 왕족임과 동시에 인간족 최고(最古) 가문의 후손으로, 제3시대 말에 가운데땅에 살아있는 이들 중에서는 가장 고귀한 핏줄을 가진 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요정 사이에서 태어난 반요정(=페레딜)에게는, 발라들에 의해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엘론드는 요정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으며 동생 엘로스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여 인간 왕이 되었다. 그가 아라곤의 먼 조상이다.
엘론드는 시리온강 하구의 아름다운 항구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불행하게도 요정족의 내분으로 인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동생과 함께 사나운 페아노르의 아들들에게 포로로 잡혀간다.(여기에는 실마릴에 관계된 맹세의 저주가 얽혀있다.) 엘론드의 모친 엘윙은 바다의 신 울모의 도움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두번다시 엘론드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요정인 그들에게, 당시 가운데땅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기도 했던 마글로르는 포로라기보다는 손님처럼 대했고, 그들 사이에선 어느새 우정도 생겨났다. 엘론드는 그에게서 학문과 시, 음악을 비롯해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엘윙과, 바다에 나가있던 에아렌딜은 엘윙이 가진 실마릴을 갖고 발리노르에 닿아 발라들의 선처를 빌었고, 그리하여 발라와 발리노르에 남은 요정들의 대군이 가운데땅으로 습격해 와서 모르고스는 완벽하게 패배한다. 이 대전투는 지형을 모조리 바꾸어버려, 벨레리안드라고 불리웠던 요정들의 터전은 거의 모두 바다밑에 잠겼고, 엘론드의 고향 또한 이때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파멸의 전쟁으로 고시대가 끝나고, 제2시대에 엘론드는 놀도르 대왕 길갈라드 등과 함께 회색 항구를 세우고 대양에 새로 생겨난 누메노르 땅에 인간의 왕국을 세운 동생 엘로스의 후손들과 바다를 통해 교류하면서 긴 세월을 보낸다. 가운데땅 서부에 사는 모든 이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리벤델을 지은 것도 이무렵이었다.
엘로스의 후손들이 조금씩 권력과 소유욕에 집착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우론의 모르도르가 발흥하여 가운데땅에 남겨진 무지한 인간들을 괴롭히는 것도 지켜보면서. 사우론이 요정 왕국들을 방문해서 그들을 꾀어 힘의 반지를 만드는 것도 바라보면서. 엘로스의 후손들이 강대해져 사우론을 굴복시키는 것도 보면서. 그리고 마침내, 사우론의 꼬임에 넘어간 인간 왕이, 발라들을 향해 군대를 일으키는 것도, 그 댓가로 누메노르 땅이 철저하게 파멸하는 것도 지켜보면서 시간이 흘렀다.
절대 반지를 만든 사우론 때문에, 요정들은 죽어갔고, 망명해온 인간 왕족의 후손들과 연합해 거대한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는 충심으로 섬기던 놀도르 대왕 길갈라드도 잃었고, 동생의 먼 후손인 인간 왕 엘렌딜도 잃었다. 다고를라드 평원에서는, 오르크와 요정을 제외하고는 가운데땅의 모든 존재들이 둘로 나뉘어 싸웠다. 이 거대하고 처절한 전장의 한 가운데에 지휘관으로 서 있던 엘론드는, 전투가 끝난 뒤 한없이 널린 시체의 벌판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나스 티리스 전투가 끝난 후의 펠렌노르 평원과는 비교도 안되는 거대한 시체의 평원은, 3천년이 지난 뒤에도 광대한 늪이 되어 남아 프로도의 발목을 잡았다.
불의 산 기슭에서 엄청난 희생을 더 치른 끝에, 엘론드와 이실두르는 사우론을 베고 절대반지를 손에 넣었지만 결국 반지는 버려지지 않았다. 이실두르가 반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불의산에서 내려갈 때, 엘론드의 마음 속에선 자신에게도 일부 흐르고 있던 인간의 피에 대한 한없는 실망. 불신. 슬픔. 고통.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흘렀을 것이다. 3천년이 지났어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아픈 장면은 차라리 잊고 싶지 않았을까. 다고를라드와 불의 산 기슭에서 죽어간 수많은 인간과 요정들의 피는 결국 헛되었던 것이었나.
갈라드리엘 마님의 딸 켈레브리안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둔 그에게는 아직 시련이 남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놀도르가 죽어, 이제 요정 왕국은 예전처럼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없게되었고, 대부분의 옛 땅들은 황무지가 되었다. 엘론드는 살아남은 이들의 군주가 되었지만, 초록 큰숲에는 어둠이 스며들고, 오르크들은 다시 대지를 활보했으며 아내는 결국 친정에 다녀오는 길에 오르크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고 가운데땅을 먼저 떠나버리고 만다. 그리고 먼 친척이면서 몰락한 왕족의 후예 아라곤을 기껏 보살펴 줬더니 나이먹어서 한다는 소리가 보석보다 아름다운 따님을 달라니. 5천년을 살아온 요정군주에게 당당하게 선 채로 요구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는 딸을 사랑했기에, 3천년 전의 그 불신을 버리고 실날같은 믿음과 희망을 아라곤에게 걸었다.
"나는 인간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네."
요정의 세 반지 중 하나, 금강석이 박힌 공기의 반지 '빌랴'의 주인으로서, 그는 치유술의 대가였으며 요정 뿐 아니라 모든 가운데땅 자유민들의 중재자였다. 세상이 줄어들어 요정도 난쟁이도 인간도 예전처럼 살지 못하게 된 제3 시대 말엽엔 사우론을 미워하는 이들사이에서도 불신이 횡행했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시대에 엘론드의 리벤델만은 모두의 피난처이자 훌륭한 회의장으로 기능했다. '음식을 먹거나 노래를 듣거나 이야기를 듣거나 또는 이 모든 것을 다 함께 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리벤델은 비록 그가 직접 보았던 고 시대의 찬연한 요정 도시들과는 비할 수 없겠지만, 모든것이 쇠퇴해가는 시대에 마지막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저녁별의 땅이었다. 물론 공기의 반지 빌랴의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엘론드 자신의 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반지는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요정반지도 힘을 잃었다. 놀도르는 하나 둘 가운데땅을 떠나 발리노르로 향했고, 이제는 그도 친애하는 빌보를 비롯해 많은 일행을 데리고 간달프와 함께 가운데땅을 떠난다. 서쪽 땅 발리노르에 닿았을 때에 그는 5천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도 그 땅에서 실마릴을 이마에 달고 배를 몰아 하늘을 항해하는 그의 부친과, 언제나 해안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모친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까. 인간으로 살다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나버린 엘로스를 그리워하면서, 그토록 인간의 길이 가진 슬픔을 이야기해주었어도 인간의 길로 가버린 아르웬을 그리워하면서, 그는 부모와 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