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네소르의 아들 파라미르
곤도르의 대장
엘레사르 왕의 섭정 대신
에뮌 아르넨의 영주

제3 시대 말엽 곤도르에는 왕족의 혈통을 잃어버린 지 천여년이 지난 뒤였다. 섭정의 가문인 '후린 가'의 자손들은 대대로 섭정을 맡으며, '왕이 귀환할때까지' 왕권을 맡아 다스린다는 선서와 함께 왕좌 밑의 섭정의 자리에 앉아 통치했다. 섭정은 곧 곤도르의 주인이었고, 미나스 티리스와 도성 수비대로 대표되는 힘의 중점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을 참칭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을 비롯해 모든 곤도르 인의 마음 속에는 요정의 피가 흐르는 누메노르 혈통의 진짜 왕족이 왕이어야 한다는 거의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대대손손 이어져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파라미르는 제3시대 2983년, 불길에 몸을 던진 최후의 통치 섭정 데네소르 2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저 '용감한 샘와이즈 시장 나리'와 동갑이며, 형 보로미르와는 다섯살 차이가 난다. 그는 젊은 시절 이방인 소롱길과 함께 곤도르의 대장으로서 용맹을 떨쳤던 부친과는 많이 달라서, 학식과 음악을 사랑했고 부친으로부터 영예를 얻기보다는 종종 찾아오곤 했던 회색의 순례자 미스란디르, 그러니까 간달프로부터 지혜를 얻기를 좋아했다. 이런 점이 부친에게는 몹시 못마땅해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지혜롭고 강하며 모든 것을 보고 안다고 생각했기에, 간달프에게서 배우려는 아들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보로미르는 내게 충실했어! 너처럼 마법사의 제자는 아니었다고!"

그의 형은 어린시절 잃어버린 어머니의 성격을 몹시 닮은 파라미르를 무척 아꼈고, 파라미르 역시 형의 일이라면 뭐든지 따를 만큼 형제의 우애는 깊었다. 앞 뒤 재는 일 없이 용맹과감하고 자신감에 넘치며 또한 그 것을 뒷받침할 만큼 강했던 형은 그에겐 늘 동경의 대상이어서, 형이 처음 갑옷을 입고 앞장서 출정할 때는 아직 소년이었던 그 역시 따라나서고 싶어 부친을 몹시 졸라 갑옷까지 얻어냈다고 한다. 물론 그 역시 곧 자라나 또 한 명의 곤도르의 대장이 되었고, 그 때의 조그만 갑옷은 페레그린 툭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곤도르의 대장으로서, 형제의 처신은 그 성격에 따라 무척 달랐다. 보로미르는 위압적인 사우론의 존재감을 이겨내기위해 치열하게 싸웠다면, 파라미르는 그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부하들과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는데 더 주력했다. 보로미르는 그런 동생을 인정했고, 또 필요로 했지만, 아버지 데네소르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파라미르는 늘 패장으로 인식되었고, 그 뒷수습을 하는건 보로미르의 몫이 되곤 했다. 사실은 보로미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작지만 중요한 일들을 파라미르가 지켜내려 했을 뿐인데도.

반지 운반자 프로도를 그냥 보낸 일은, 사실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의 갈등은 반지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와 같은 말초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형이었다면 어찌 했을 것인가,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형처럼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보로미르가 아니었고, 군사 구역에서 배회하는 수상쩍은 반인족을 대의를 위해 그냥 보내는 정도의 규정 위반은 재량으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유연했고, 엄정한 규정보다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할 것이라는 그 실날같은 믿음이 오히려 더 곤도르와 부친과 인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나라의 법을 알고 계시죠? 포로를 놔주면 사형을 받게 됩니다."
"받아야만 한다면 받겠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그렇지 않았다. 죽은 형의 몫을 하지 못한 그를 질책하는 건 너무한 일이겠지만, 자신과는 너무 다른 파라미르를 인정하지 못했던 데네소르에게, 처음부터 아들은 하나 뿐이었고 이제는 죽고 없는 셈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냐마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라는 건 또 다른 법이다. 자손을 남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이어갖길 바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정과 달리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인간은, 이렇게라도 그 모습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걸 우린 전통이라고도 부르고, 유전이라고도 부르고, 혈통이라고도 하고 여러가지 용어로 지칭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의 이유는 하나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뛰어넘고 싶은 것이다.

파라미르의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그의 모친은 침착하고 섬세한 아들의 면모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가 제대로 철이 들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자신을 감싸주는 건 형 뿐이었다. 외롭게 세상에 던져진 채 출생을 이유로 그의 섬세한 면으로는 감당못할 곤도르의 대장 직에 앉혀진 그는 비록 백성들로부터는 무한한 사랑을 받았지만, 아버지로부터는 한 터럭의 사랑도 받지 못한 외로운 존재였다. 아버지를 닮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미 아버지를 꼭 빼닮은 형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들 입장이 바뀌었길 바라시죠? 제가 죽고 형이 살아있는."
"....그래. 그랬길 바란다."
"....형을 원하신다면, 제가 형의 몫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살아서 돌아오면, 더 귀한 아들로 대해주십시오."
"결과에 따라서. 네가 지느냐, 이기느냐."

그때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던,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하는 파라미르는 이미 그 자신이 아니었다. 부모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데, 어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부모에게서 자신의 길을 허락받지 못하는데, 어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까. 그는 본디 보로미르가 가야만 했던 그 길로 들어섰고, 보로미르 만큼의 용맹은 가졌지만 그 만큼의 자신감이 없었던 그에겐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스스로 내버렸던 목숨이건만, 그런 목숨이라도 망설임없이 불에 뛰어들어 구해내 준 반인족 페레그린 툭은 그에겐 평생의 은인이었다. 가까스로 불길에서 벗어난 그는 병실에서 회복하면서 마침내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가 그리도 사랑을 갈구했던 아버지처럼, 그리고 형처럼 용맹하고 저돌적이면서도, 어릿하게 기억에 남은 어머니처럼 무척 아름다운, 에도라스의 백색 숙녀가 전장에서 쓰러져 병실에 남은 것이다.

사랑하는 형과 싸워 부모의 사랑을 얻어야만 하는 세상의 모든 둘째들. 파라미르는 그들의 슬픔을 대표한다. 다시한번, 사랑받기에 늘 뒤에 남겨져야 했던 여자와 사랑받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남자. 그들은 마침내 서로 그토록 바라던 사랑을 만났다. 형이 죽어 그에게 돌려지게 되어버린 다음 통치 섭정이란 자리도, 이젠 그에게 강요되지 않는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일어났으니까. '왕의 귀환'으로 인해 그는 그의 삶을 온통 괴롭혔던 통치 섭정의 지위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고, 사랑도 얻었다. 그리하여 에뮌 아르넨의 영주는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모든 영민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으며 장수하다 평안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돌격을 바라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제 아버지도 둘째시거든요. 이렇게 사랑받지 못한, 형과는 너무 다른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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