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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웬 운도미엘
저녁별 왕비
가운데땅의 역사를 통틀어 요정과 인간의 혼사는 총 세번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베렌과 루시엔, 두번째는 투오르와 이드릴이었고, 두 혼사는 모두 '고시대'라고 불리는 제1시대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 가운데땅에는 요정 왕국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인간들은 그들 사이에서 그들을 받들며 살거나 혹은 그들의 적이 되었다.
베렌과 루시엔의 손녀인 엘윙과, 투오르와 이드릴의 아들인 에아렌딜이 혼인하여 낳은 두 아들이 바로 엘론드와 엘로스이며, 이들은 모두 반요정(페레딜)이었기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로 발라들에게 판결을 받았다. 엘론드는 요정이 되기를 선택했고, 엘로스는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다. 이들의 슬프고 힘겨운 이야기는 모두 '실마릴리온'에 전해져 내려온다.
엘론드는 그 후 갈라드리엘의 딸 켈레브리안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 하나뿐인 딸이 바로 아르웬이다. 전설의 보석 실마릴을 얻었던, 가운데땅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강했던 여인 루시엔의 손녀의 손녀이자, 실마릴을 이마에 달고 지금도 창천을 항해하는 위대한 뱃사람 에아렌딜의 손녀이기도 한 그녀이다.
이런 대단한 가계의 후손이며 3천년을 살아온 요정의 귀인이지만 그녀 역시 할머니의 할머니 루시엔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요정의 영생을 포기하고 사랑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사랑은 추억만으로 간직하고 영생을 누리겠는가.
원정이 있기 이미 500년도 전에, 어머니 켈레브리안은 친정에 다녀오던 중 오르크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고, 그리하여 가운데땅에 마음이 멀어져 벌써 발리노르로 떠나간 뒤였다. 가운데땅에서 태어나 자란 아르웬에게 발리노르는 돌아가고픈 고향이라기보다 그저 먼 친척들이 행복하게 사는 아득히 먼 땅일 뿐이었지만, 원정이 시작될 무렵에 이르러서 아르웬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에스텔(아라곤의 아명)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치열하게 번민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세상의 모든 딸들이 겪어야 하는 홍역이겠지만, 영생을 살아가는 요정에게 있어 수천년을 함께 살아온 가족이란, 고작 20~30년을 함께 살아온 인간의 가족과는 비할 수 없는 사랑이 안겨있지 않을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 다가온 사랑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요정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니.
"얘야. 네가 아무리 열왕의 후손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나 높은 목표로구나. 그녀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들 중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아라곤의 모친이 처음 아라곤의 마음을 알았을 때 아들에게 했던 말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몰락한 집안의 마지막 후손인 데다, 그마저도 다시 옛 영광을 되찾기는 커녕 결국 아주 스러지고 말 위험이 더 크다면 과연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영원히 헤어져 그를 위해 함께 해줄 수 있을지. 지금 이 글을 읽는 이가 여자라면,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문제일 지도 모르겠다.
"그녀에 비하면 자네는 여러 차례의 여름을 넘긴 젊은 자작나무 곁으로 삐져나온 1년생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네."
이 것은 엘론드가 아라곤에게 한 말이다. 아득하게 살아온 그녀가 어찌 이제 갓 성년이 된 인간 청년 에스텔을 만났을 때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글쎄, 사랑은 위대하다는 말로 설명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였을 것이다. 아라곤이 혼자 그녀를 열망한다면 몰라도.
"네 아버지는 사랑하지 않느냐?"
그러나 결국 아르웬은 3천년을 함께 해온 아름드리 거목과도 같은 아버지나 형제들보다도, 이제 막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는 새싹에 지나지 않을 에스텔을 선택하고 말았다. 오래전에 루시엔이 그랬듯 영생의 권리도 포기하고, 반요정으로서의 선택인 유한한 죽음과 영생에의 기로에서 아르웬은 사랑에 이끌려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반지는 파괴되고, 그녀의 에스텔이 인간의 왕이 되었으며 저녁별 왕비는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할머니 갈라드리엘도 떠났고, 아버지와 두 오빠도 모두 떠나갔다. 사랑하는 에스텔도, 노년에 이르러 먼저 숨을 거두었고, 그녀는 슬픔에 잠긴 채 처음 에스텔과 미래를 약속했던, 이제는 모두 떠나고 텅 비어버린 로스로리엔으로 가 한동안 살다가 마침내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 엘론드가 보았던 미래는 아마도 이 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이야기다. 그 하향 평준화를 향해 스스로 내려선 그녀. 정말로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녀에게서 요정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 왕의 후손들이, 3만년을 이어내려온 가계가 계속 이어졌으니 뜻 깊은 혼인이었겠지만, 과연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회한의 그림자로 가라앉지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에스텔 만으로 마음을 꼭 채울 수 있었을까. 이제 겨우 20년 남짓 살아왔고 여자도 아닌 필자에게 더 이상의 추측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프로도를 구하지만, 소설에서는 리벤델의 대장 중 하나이며 과거에 곤도르의 에아르누르 왕과 연합해 앙그마르의 마술사왕 군대와 전투를 벌여 이긴 적도 있는 글로르핀델이 한 일로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