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미국, 영국, 소련 등이 연합하여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추축동맹을 상대로 싸운 전쟁이 아니라,
게르만인과 슬라브인의 사활을 건 대결이었던 독소전쟁(에너미 엣더 게이트),
철저하게 훈련받은 연합군과 자타공인 최고의 육군국 독일과의 대결인 유럽전쟁(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민족감정과 생존본능 등 모든 것이 얽히고 섥힌 증오와 파괴의 태평양 전쟁(신 레드 라인, 윈드 토커, 진주만),
그리고 모두가 본국으로부터 소외된 채 정글이나 사막, 거친 바위산을 오가며 그저 헤매야 했던 동남아시아 전쟁과 북아프리카 전쟁, 이탈리아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얽혀있는 전쟁마다 모두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거대한 파괴의 흔적이 수많은 사람들을 부수고 지나갔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만 하는 전쟁은 독소전쟁과 태평양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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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진주만은 태평양 전쟁에 대한 많은 영화 중의 하나입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2차대전은 독일군과의 싸움이라기보다 일본군과의 싸움으로 더 잘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군은 미국 영토에 단 한발의 포탄도 투하하지 않았고 단 한발의 포격도 행한 적이 없지만, 일본군은 끔찍한 상처를 남기고 갔기 때문이지요.
영화에 대해서는 혹평이 분분합니다. 로맨스가 너무 상투적이다. 비주얼만 있으면 다냐. 결말도 너무 뻔하고 작위적이다. 등등.
하지만 이 영화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설득시켜주려는 영화가 아니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1941년 12월 7일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평화롭고 즐거운 섬지방 하와이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주말연속극처럼 지루한 로맨스는, 그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의 기준에서는 정말 어이없는 방식으로 전투를 진행했습니다. 보통 해전에서는, 적함이 격침되면 그것으로 전투가 끝납니다. 바다에 빠진 승무원들은 구조하여 포로로 잡는 것이 일반적인 서구 군대의 해전이었지요. 그러나 진주만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원들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수병들을 향해 아무 주저없이 그들이 자랑하는 제로전투기의 기관포를 발사했습니다.
말살전쟁만이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었고, 그들 자신도 포로가 되기보다 죽는 것을 선택했기에, 이 기이한 전투에 끌려들어간 미국인들조차 결국엔 그러한 방식으로 싸우게 됩니다. 거기에는 분노와 공포와 고통이 모두 배어 있습니다. 한발 한발의 총탄과 포탄마다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권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진주만은 바로 그런 모습을 생생하게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칭찬하는 이유입니다.
이따금 성조기가 휘날리고, 미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하는 듯한 화면도 보이지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살수대첩이나 명량 해전을 영화화할때, 우리는 과연 그러한 이미지를 인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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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엣더 게이트에서도 진주만과 비슷한 삼각관계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진주만에서처럼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진주만에서의 애들린과 레프는 비록 군과 관련해서 만났지만 폭격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단지 생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타냐와 바실리는 전장에서 만나야 했고, 전장에서나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독소전쟁은 애초부터 우수한 게르만 혈통의 유지를 위해 열등민족 슬라브족을 쓸어버리려는 의도로 시작된 악랄한 전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전쟁에 선과 악이 극명하게 갈리는 예는 사실 역사를 통틀어 매우 드물지만,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은 분명히 잔인 무도한 비적들이었고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 죄없는 선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주만이 미 육군(과 해군) 항공대의 전투라면, 에너미 엣더 게이트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 소총 한자루로 분연히 일어섰(다고 선전됐)던 한 저격수의 무용담을 그립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적은 둘이었습니다. 독일군과,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당원들과 붉은 군대 그 자체. 노동자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던 신도시 스탈린그라드는 밀어닥친 독일군들로 인해 벽돌과 쇳덩이로 뒤덮힌 폐허로 바뀌고 맙니다. 하지만 스탈린 동지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잃을 수는 없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스탈린그라드로 보내어집니다.
소총과 총탄등 기본적인 보급품조차 부족한 상태에서 잘 정비된 독일군을 향해 맨몸으로 뛰어가야 했던, 돌아서면 아군의 기관총이 자신들을 다시 되돌려세우는 그런 상황 속에서 러시아사람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죽어갑니다. 그래서 희망을 주기 위해 영웅은 만들어지고, 소총 한자루로 최선을 다해 독일군과 싸우는 바실리 자이체프의 모습은, 도쿄 폭격을 가했던 레프와 대니처럼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의 불씨가 되지만, 영웅에게 남은 건 상처뿐입니다.
레프와 애들린은 전쟁이 끝나고 다시 주말연속극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 습니다. 하지만 바실리와 타냐는 그저 간신히 만났을 뿐입니다. 엉성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붉은 군대의 행정처리 절차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행운이긴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그 다음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독소 전쟁이 태평양 전쟁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파괴와 살육을 남기고 갔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요.
전쟁과 사랑은 모두 격렬한 죽음과 연관되어 있고, 그리하여 자주 묶이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두 영화 모두 전장을 함께하는 절친한 두 친구와 한 여인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고, 그 관계는 한 친구의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친구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