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나라행 로켓을 타게 될 어린이들에게 인류가 마력(馬力)을 사용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인간관과 사회관에 근거하여 도덕과 우주론을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 이러한 오래된 '선민'(여호와, 알라, 보탄, 마누, 악마 가운데 그 어느 것에 속하든)의 게임 가운데에서 어느 것을 하기에는 세계가 너무 좁고 인간의 지위는 너무 위대하다. 사실 그러한 게임들은 뱀이 아직 말을 하던 시절에 부족사회의 구성원들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뒤에가면서 재미있어 지는데' '슬로우스타터인데' '실은 복선이라 읽다보면 나오는데' 등등의 주장은 작가님들께는 당연한 것이고, 독자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독자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독자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 한가지를 골라서 보게 되어 있으며, 심심한데 사건전개가 될 때까지 기다릴 이유도, 차분히 글의 내용을 이해할 이유도, 흔한 것이지만 잘 뒤져 그 중에서 특별한 한 조각을 찾아낼 이유도 없습니다. 심지어 프롤로그 (정확히는 게시물 1번)만 읽고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내고싶어하는 분위기도, 여운과 여백도 같은 전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읽히지 않은 글에 의미는 없으니까요. 작가는 가장 적당한 속도로, 효율적으로, 장면이 잘 보이도록, 사건의 전체를 금방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에게 글을 내보여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전달하는' 쪽에 좀 더 비중을 두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술에 의한 사회의 발전은 우리의 상식 속에 자리잡은 유력한 가설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실은 기술에 의해서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의해 기술이 발명되고 선택된다. 설령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이 발명되었다 해도 그것을 수용할 사회의 요구와 가치가 형성되어 있지 않을 때 그 기술은 사장된다.
유럽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은 고대희랍시대였지만 발명자였던 헤론의 아이디어는 기껏 장난감을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의 노예제사회에서 증기기관이 도입된다는 것은 10명의 노예대신 한명의 노예만이 일하면 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노예제사회의 붕괴를 가져올 불경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 부르조아사회의 요구는 중세장인들의 특권을 해체하고 대량생산체제를 완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정신과 사회적 요구에 증기기관은 정확히 부합한 기술이었다. 결국 유럽은 1800년이 지나서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지고서야 증기기관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창훈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90년대 초반, 목욕탕 때밀이 달룡이와 봉숭아학당의 맹구로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는, 사실은 전문 코미디언이 아니라 연극배우였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심형래나 故김형곤이나 혹은 다른 당시의 다른 재기 넘치는 코미디언들처럼 독특한 유행어를 많이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다음 두가지 정도죠. 책상을 뒤집어 엎으며 뛰어올라가 손을 치켜들고 외쳐대던 "저요~! 저요!" 그리고, 달룡이의 "난 짬~뽕!" 이창훈 특유의 뒤틀리고 꼬인 얼굴표정으로 깊게 발음되어야만 그 임팩트가 전해질텐데, 텍스트로는 어려운 일이군요.
당시 저는 어린 아이였고, 왜 저 대사에 웃음이 터지는 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짬뽕이 먹고 싶다면 짬뽕 시키면 되는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야 짜장면이 먹고 싶었나보죠.
네, 솔직해지겠습니다. 지금도 이해 못하겠습니다.
자자, 다들 짜장면으로 통일할 거지? 모두 대동 단결! 시킨다. 전화를 겁니다. 저기요, 짜장면 다섯그릇이요. 격하게 달려가 얼른 수화기를 뺏습니다. 나,나나나 난 짬~뽕! 그리고, 목욕탕 집 주인은 다른 모두와 합세해 그를 밀어냅니다.
어쩌면 그건 뼈저린 풍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연극 배우 이창훈의 삶에서 우러나온 지독한 풍자였는지도 몰라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하라는 대로만 따라해야 하는 80년대를 관통하며 연극판을 전전했던 그에게, 그건 눈물이 금방 솟아나올 것만 같은 비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Whoever fights monsters should see to it that in the process he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look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look into you."
- Friedrich Nietzsche
"괴물과 싸우고 있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원형의 체험보다 소중한 경험은 없다. 오랜 시간 MMORPG를 체험하다가 현실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범하는 우를 본다. '한때는 미쳐서 했지만' '돌이켜보니 뭐했나 싶고' '남은 사람들도 정신차리기를 바라면서' 떠나는 거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 한때는 이 직장에 충성했지만' '돌이켜보니 뭐했나 싶을 거고' '또 다른 직장을 찾아가서 또 실패할 거다' '한때는 이 여자(남자)에게 미쳤지만' '돌이켜보니 다 헛짓이었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실패할 거다'
진짜 바보들은 자기가 사랑한 것, 시간을 투자한 것에 대해 돌아서서 침을 뱉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 번도 제대로 그걸 아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기 힘들 거다. 어지간한 행운을 만나지 않고서는 말이다.
나는 게임을 접으면서 그 게임을 즐겼던 시간, 그 게임을 함께 했던 사람들, 그 게임을 만든 사람들에게 욕질을 해대며, '너도 어서 게임 접어. 게임보다 소중한 게 인생에는 많다.' 라고 권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싶지 않다. 물론 세상에는 게임보다 소중한 것이 넘쳐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짧게는 몇달, 길게는 몇년씩 매일 매일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눈물흘리고 기뻐하던 그 게임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되는 건 아니다.
자신이 사랑을 다해 매달렸던 일을 '헛짓거리'로 치부하는 것은 곧 그 일에 매달린 자기 자신을 쓸데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며,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렇게 취급해버리면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 <투모로우>에서 내가 가장 감동받았던 장면은 해일이 뉴욕을 쓸어버리는 장면도,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던 장면도 아니다. 연료도 식량도 떨어진 채 고립된 기상관측소에 있던 기상학자들이 마지막 남은 술을 꺼내어 잔을 든다. 영국을 위해. 인류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멘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위하여!"
누군가에게는 코토노하, 누군가에게는 마스터 오비완, 또 누군가에게는 할리 데이비슨,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호드를 위하여!"겠지만, 나 또한, 죽음의 순간까지 내가 지금 사랑하는 것들을 믿을 것이다.
*. 15년인가, 근 20년 전쯤에 '유머 일번지' 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주일과 엄용수, 배추머리 김병조와 꽃피는 봄이 오면 좋은 세상이 오겠거니 꿈꿨지만 얼마전에 러닝머신에서 요절하신 위대한 김형곤의 시대였습니다.
졸면서 TV를 보던 어느날, 짤막한 꽁트가 두 명의 이름을 잊은 코미디언에 의해 연기되고 있었습니다. 한 무인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백년간 칼을 갈아, 마침내 전설의 신검에서 천마의 울음소리가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간의 정성이 깃들어 전설대로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이 되었다는 증거지요. 노인이 그는 역시 노인이 된 원수를 찾아 그 칼을 들고 나서지만, 칼을 치켜들자마자 그 원수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대가 변했으이."
*. 얼마전에 인디아나 존스 3부작을 다시 다 봤습니다. 시리즈 첫편인 <레이더스>의 한 장면에도 위와 같은 재미있는 씬이 들어있습니다. 대검을 치켜들고 씩 웃으며 우리의 고고학자 인디를 노려보는 거한의 무사를 향해, 인디는 아주 귀찮다는 듯 총을 들어 쏘아 일격에 쓰러뜨리고는 갈 길을 서둘러 갑니다. 하지만 어째 전처럼 재미가 없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데 절대로 주변 사람을 잃지 않는 고고학자보다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속이다 절대로 주변 사람을 다 잃어버리는 해적이 이젠 더 제 취향, 그리고 전세계 영화 팬의 취향이 되어버렸죠.
*. 그러니까 어떤 소설을 써내려고 마음 먹었으면 당장 쓰라고요 나님아. 또 이렇게 되지 말고
이 나라, 아메리카의 위대성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들도 본질적으로는 가장 빈곤한 소비자들과 똑같은 것을 구입한다는 전통을 세웠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즉 여러분은 TV를 시청하면서 코카콜라를 볼 수 있는데, 여러분은 대통령 또는 리즈 테일러가 그것을 마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마실 수 있다. 콜라는 그저 콜라일 뿐, 아무리 큰 돈을 준다 하더라도 길 모퉁이에서 건달이 빨아대고 있는 콜라와는 다른, 어떤 더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 모든 콜라는 똑같은 것으로 통용된다. 리즈 테일러도 거렁뱅이도, 그리고 여러분도 그 점을 알고 있다.
한국은 '매트릭스' 였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준 조그만 붉은 알약을 삼키는 것과 같았다. 네오는 그 약을 먹고 눈을 뜬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다시 매트릭스의 세계로 통하는 플러그가 꽂힌다. 그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진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곳 사람들은 자기네 시스템만이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믿지만, 사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시스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곳에는 이런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말 고등학교 같다.
현명하지 못한 관리자는 직원들이 사생활을 희생해서라도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도록 해야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성과 위주로 직원을 평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직원은 자신에게 부여된 감당할 수 없는 과업을 초과 근무를 통해 해결하려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하다. 그렇지만 관리자는 그가 초과 근무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이유로 기꺼이 면죄부를 부여한다. 반면에 자신의 과업을 훌륭히 달성하고 초과 근무를 거부하는 직원은 이기적인 직원으로 낙인을 찍는다.
* 나는 한 겨울에 함박눈을 온몸에 맞아가며 12시간 우유배달을 한 적이 있다. 우유병 표면이 얼어서 장갑에 대기만 해도 달라붙을 만큼 추웠었다. 양 손에 한 상자씩 우유를 '붙이'고 5층 계단을 뛰어다녔다. 아침 10시에는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 해 겨울 내내 그런 생활을 계속했다.
*. 어느 해 추석 연휴, 나는 5일 내내 14시간 근무를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였고 쉴새없이 밀려드는 쵸글링과 아줌마 군단의 어택에도 내내 방긋방긋 웃으며 만두를 삶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뽑았다. 그러고도 연휴가 끝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친구를 만나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고 놀았다.
*. 나는 매일 10시간 근무로 5주동안 일요일까지 모두 포함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야간을 뛴 적이 있다. 생산직이었고 개당 2~4kg의 쇳덩이를 하루에 380개씩 깎아서 자동차에 들어갈 부품으로 만들었다. 하나 하나마다 14개 포인트를 100분의 1mm 단위로 치수를 재면서. 그 5주동안 내가 낸 불량품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하루에 겨우 5시간 정도 글을 쓰고는 '오늘은 너무 많이 썼어. 지친다. 이제 그만 하고 놀아야지.' 라고 말한다.
글로 먹고 살 생각이면 아무리 해도 최소한 하루 8시간 쓰는 버릇은 들여야 할 것 아니겠냐.
원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외 관계를 설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들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생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Love is not primarily a relationship to a specific person; it it an attitude, an orientation of character which determines the relatedness of a person and is indifferent to the rest of his fellow men, his love is not love but a symbiotic attachment, or na enlarged egotism. Yet, most people believe that love is constituted by the object, not by the faculty. In fact, they even believe that it is a proof of the intensity of their love when they do not love anybody except the 'loved' person.
-by Erich Fromm, from <Art of Loving>
사실, 스파이더맨3에 나온 심비오트symbiote 라는 단어를 분명 어디서 들었는데 왜 생각이 안날까 하면서 고등학교때 영어공부 하던 노트를 뒤적이다 발견한 영어 지문입니다 잇힝.
세상에는 멍청한 녀석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해 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멍청한 녀석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서, 괜히 토론이나 논쟁을 하는 것은 완전한 자원 낭비요,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멍청한 녀석들과의 토론은 아무런 발전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며, 그들과의 논쟁은 설득은 고사하고 우리의 논점을 예리하게 하는 효과도 가져오지 않는다. 논점이 예리해지는 것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과 논쟁하면 보통 기대되는 결과이다. 그러나 멍청한 녀석들과의 논쟁은 아무런 결과도 산출하지 않는다.
멍청한 녀석들은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과 토론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 논쟁 한참 중간에 멍청한 녀석임을 깨달아도 그때는 이미 늦었다. 왜냐하면 그때 논쟁을 끝내면, 멍청한 녀석들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멍청한 녀석들과 논쟁을 끝내려면 외부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된다. (예를 들어, 어디를 가봐야 한다거나, 부모님께 전화가 오거나, 잘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다거나). 물론 사실상 그들과의 논쟁에 끝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견이 어떻게 불일치하는가를 정리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멍청하지 않은 사람들은 의견이 계속 불일치 하더라도 어떤 점에서 논리가 달라지는가를 정리할 줄 알고, 더 근거를 모아서 다음 논쟁이 더 풍부해지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멍청한 녀석들과 대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에 인터넷에서 토론을 하다가 멍청한 녀석들을 발견하면, 그런 녀석들에게는 절대 대응하지 않고, 정중하게 '멍청한 녀석'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요긴하다. 따라서 멍청한 녀석들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그 특징을 잘 숙지해 놓는 것이 중요하겠다.
1. 멍청한 녀석들은 대체로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그러므로 멍청한 녀석들의 머리 속에 든 것은 중고교 때 배운 것들 중 찌꺼러기 남은 것과, 텔레비젼, 신문 등의 미디어,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친구나 선배의 말에서 줏어들은 지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상당한 경우, 멍청한 녀석들도 책을 읽는다. 그러나 그 책의 종류가 워낙 한정되어 있어서, 폐쇄된 언어회로를 갖는 경우, 넓은 학문 분야의 용어사용이나 논리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자신이 읽은 종류의 책에서 나오는 언어사용이나 논리구성을 절대시하게 된다.
2. 책을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얇고 좁게 읽는 결과, 멍청한 녀석들은 논쟁에는 용어의 정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용어를 함부로 쓰며, 자기 꼴리는대로 라벨링을 한다. 무엇을 정의할 때 원칙 같은 것도 없으며, 은유나 기능적인 정의를 엄밀한 정의와 동일시된다.
3. 멍청한 녀석들은 엄밀한 논리 구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독단을 하나 받아들이고 나서, 그것으로 만족한다. 물론 독단이 받아들여진 과정은 간단하다. 고교 때 배운 찌꺼러기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지식 잡동사니가 뭉쳐서 깨달음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검증의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라 '확증'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주장에는 논리의 연결고리가 있고, 그것에 헛점이 있으면 자신의 주장이 타격을 받는다는 명백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멍청하지 않은 사람들은 옆차기를 가격당하면 자기가 이제까지 했던 이야기 이외의 근거를 가져와서 가격당한 부분을 방어할려고 한다. 그러나 멍청한 녀석들은 그 연결고리에 아무리 이단 옆차기를 가격해도 뻔한 얼굴로 그들의 독단을 단지 되풀이하기만 한다. 이것은 아주 환장할 일이다. 멍청한 녀석이 전개한 주장의 연결고리가 4가지라고 해보자. 이 4가지를 a, b, c, d라는 논의로 반박하거나 다른 측면의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멍청한 녀석은 그 a, b, c, d라는 논의를 당신이 전개하기 이전과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할 것이다. 즉, 당신의 공격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멍청한 녀석의 주장 자체가 스스로 모순되는 두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 속은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비빔밥 버무리듯이 나온 독단이 반박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한다. 멍청한 녀석들과의 논쟁이 시간낭비에 그치는 것의 주된 이유는 바로 이 '독단의 되풀이'라는 그들 특유의 특징 때문이다.
4. 멍청한 녀석들은 과학철학에 대해 x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어의 정의 방식이나, 가설 설정이나, 논리 구성에 우열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떤 것이 더 현실을 잘 설명하고 더 발전된 가설 형태이고, 어떤 것은 '그런 식으로도 현실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방식이 과학이라 하기에는 너무 열등해서 축출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과학철학에 대해서 X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혀 전제하지 않고 멍청한 녀석들과 논쟁을 시작했다가, 결국 그들이 '개똥 철학'이나 '개똥 사회과학'에 깊숙히 빠져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낭패스러운 일이다. '개똥 철학'의 특징은 자신의 무식을 정당화하는 것이요-가장 조야한 형태의 지식 상대주의관, 윤리 상대주의관-, '개똥 사회과학'의 특징은 모든 것이 반증 불가능한 형태의 명제로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형태의 상대주의나 반증 불가능 명제를 신봉하는 자에게 '당신의 말은 틀렸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멍청한 녀석의 폐쇄적 언어회로 내에서 그 개똥철학과 개똥사회과학은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멍청한 녀석에게 '당신의 설명 방식은 열등하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서로 다른 설명방식의 우열을 가리는 지식의 룰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접해 본 것은 자신의 독단 밖에 없다.
5. 멍청한 녀석들은 무식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무식과 멍청함은 동일하지 않다. 무식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어떤 분야에 전문화되어야 하고, 또 체질상 맞는게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분야에 대해서는 무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무식을 전혀 인정하지 않거나, 무식하다는 사태를 인지하면서도 그것이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무식의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서도 올바른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멍청한 녀석들의 특징이다. 우리가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제대로 된 논의를 펼치려면, 상당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 점은 멍청한 녀석들도 인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자연과학에 무식한 사람들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과학이 무식한 도전에 마구 공격당할 정도로 발전이 지체된 것도 아니다. 사회과학 역시 그 고유의 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멍청한 녀석들은 그 점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멍청한 녀석들은 윤리학 책을 단 한권도 살아오면서 읽지 않은 상태에서 윤리에 대해 개똥같은 의견을 피력하거나, 자본주의 시초축적 과정에 대한 어떠한 책도 읽지 않았으면서 봉건제로부터의 이행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기도 한다.
무식한 사람들이, 지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 그 사람은 '열려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은 관심만 있다면 곧 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며, 지식이 없다 해도 논쟁을 하는 것이 때때로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모르는 부분은 곧 설명을 하면 그 설명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멍청한 녀석들과의 논의가 그들의 수준에 맞춰져 버리는 것은, 그들이 논의에 중요한 어떤 명제나 논리, 용어에 대한 설명을 도통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멍청한 독단을 되풀이할 생각으로 머리 속이 너무 꽉 차 있어서, 자신의 폐쇄 회로 바깥에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6. 그렇다면 멍청한 녀석들을 교육시켜서 선진화된 논의를 한다는 구상은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멍청한 녀석들은 기껏해야 우연히 올바른 의견을 가지게 될 뿐이다. (즉, 논증과 진실탐구로 올바른 의견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멍청한 녀석들과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고, 그들을 진지하게 교육한다는 것도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멍청한 녀석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완고함이다. 그들은 세계를 해석하는 그들의 수준이 매우 저열하고 그것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잡동사니 모순된 어거지 개똥 철학에 매우 큰 완고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멍청한 녀석이 쓸데없는 도전을 해온다면 정중하게 '멍청한 녀석'이라는 딱지를 붙여주면 된다. 이는 곧, 위의 1번에서 5번까지의 특성을 갖고 있는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사람과 논쟁하지 않을 좋은 이유를 제시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멍청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시간 낭비를 안하게 되고, 이것은 고장난 자판기에 다른 사람이 동전을 넣지 않도록 '자판기 고장'이라고 써 붙이는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에 해당할 것이다.
7. 이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멍청한 녀석들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무시하고 어찌 진보가 달성될 쏘냐?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과 진지한 논쟁을 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비중은 크다. 또한 구제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우연히 올바른 의견을 가질 수는 있다. 여기에는 각종 대중 선동의 방식이 유효하다. 감정상의 선동, 시각적인 언어의 동원, 친밀감을 느끼고 우호적인 영상의 동원, 대중 스타의 기용, 휩쓸려갈 수 밖에 없는 분위기 조성, 각종 문화적 자원을 이용한 주입. 진지한 논쟁은 멍청하지 않은 사람들과 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합리적인 승리의 기반도 굳히는 한편, 멍청한 녀석들과는 직접 대응하지 않은 채, 이러한 방식을 동원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잘 생각해보고 써먹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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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보는 논리 오류 >>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만, 모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간판으로 내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모르는 것 때문에 잘못이 무조건 용서된다고 믿는 것은 죄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논리학 개론 반권만 읽었어도, 연구나 공부가 아니라 그냥 한 번 읽어보기만 했어도 범하지 않을 짓거리를 해대면서 자신이 가장 잘난 사람인척 하는 예가 너무도 자주 보이기에, 범 네티즌 계몽 및 홍보운동 차 몇 자 끄적거려본다. 이런 것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기에 이런 것을 쓴다고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똑같이 못난 사람이 될 뿐이다. 이런 것도 모를 정도의 세상이 한스러울 뿐이다.
다만 이 글은 대상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스크롤의 압박" 이 있으면 무조건 안보고 배를 째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므로 최대한의 배려를 하여 전문용어나 기타 등등은 하나도 섞지 않으며, 이론을 먼저 제기하고 그 다음에 예를 드는 것보다 알기 쉽게 예를 먼저 들고 해당되는 논리적 오류를 (좀 알기쉽게 풀어 써서) 적어 보겠다. 하나 전제가 있다면, 여기 나온 오류론 자체를 의심하는 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1+1이 왜 2가 되어야 하나요? 라고 묻는 것이 낫겠다. 논리학의 오류라는 것은 이미 수없는 논증과 심판을 거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미 1+1 = 2 라는 것 만큼이나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니까. 몇몇가지는 아주 유명한 오류이고, 나머지 몇 개는 좀 복합적인 것도 있는데 내가 알기 쉽게 바꾸어 표현한 것도 많다. 그것에 대해 논박하려면 최소한 논리학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할 터이니, 그런 수단을 써서라도 공부를 하게 만들겠다.
1)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 -> 그 말은 애당초에 증거불충분이다. 논리의 근거가 되는 자격조건의 예시가 없다. 아울러 그 논리를 주장할 경우, 역작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 맞다고 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을 옹호할 자격은 없다."는 말이 되는가 생각해보자.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만약 "법관 자격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벌 줄 수 없다." 고 한다면 현행범은 누구도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법관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그 역을 생각해보자. 누구도 벌을 줄 수 없다면 누구도 옹호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변호사 자격을 따기 전에는 누구도 죄 지은 사람에 대해 변론을 할 수 없다. 실제로는 법관이 아니고서도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기도 하고,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법정에서 자기 변론을 할 수 있다. 단죄하는 데에는 법관의 자격이 필요할지 모르나 비판이나 옹호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왜 이게 말이 안되는지 대봐라!'고 대드는 것도 오류이다. 욕먹고 싶지 않으면, '왜 욕하냐'라고 따지기 전에 '나는 왜 정당하다'라고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왜 이게 말이 안되느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해주자. '왜 말이 되는지부터 설명해라. 그 다음 말해 주겠다.'
논리 오류적으로도 스스로 증거를 댈 수조차 없는 강변을 논리적인양 위장하는 오류이다. 편의상 이것을 "자격 오류"라 해두자.
2) 옹호는 좋은 것이고, 비판은 나쁜 것이다. -> 두 가지 경우 전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될 수 있다.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대상에 따라 다르다. (주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연쇄살인범을 동정에 의해 감춰 주어 경찰을 피하게 해주어서 수없는 살인을 더 저지르게(어쩌면 그 자신도 살해될지도 모른다.) 하는 것은 옹호라 해도 옳은 것이 아니다. 물론 죄없는 자에 대한 무조건 적인 비판은 당연히 나쁜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과정과 합당한 이유를 지닌 비판은 결코 악이 아니며, 그것을 일컬어 "정의"라고 부를 수 있다. 정의의 탈을 쓴 악덕도 많으며, 동정심이나 옹호의 탈을 쓴 죄 가리기나 뭉개기도 많이 눈에 띈다. 이 자체는 좀 더 세밀히, 눈을 크게 뜨고 구분할 일이다.
물론 사람이라면 동정심도 가져야 하고, 옹호도 할 수 있으나 무분별한 동정이나 옹호 때문에 정의가 악덕으로 규탄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행동은 무분별한 비난과 똑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무분별한 옹호나 무분별한 비난은 똑같다 볼 수 있다. 옹호나 비판이나 같은 선상에 있다. 만약 비판의 자격을 묻는다면, 옹호의 자격도 물어야 한다.
별도의 항으로 분류하려다 말았는데, 여기서 파생되는 가장 웃기는 경우가 "타당한 근거도 없이 무조건 옹호하는" 형태이다. 이는 싸구려 무협 혹은 폭력만화나 영화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이런 대사, 장면 많지 않은가?
"아니! 비겁하게 한 사람에게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다니! 나는 그런 불의를 보고 참아 넘길 수 없다! 내게 덤벼라!" 식이다.
뭐 그게 멋있다고는 해두자. 그러나 그런 논리를 무작정 인터넷이나 통신의 논리에 적용한다면,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눈뜬 장님이며, 범죄자이다. 보통 통신상의 비판을 보자. 그 중 일대일이 아닌 것이 있는가? 잘 생각해보라. 한 사람의 글에 대해 100개의 비판 리플이 붙었다고 보자. 당신같은 눈뜬 소경은 그것을 "100명이 한 명에게 덤비다니!"라고 생각하여 싸구려 모조품 정의감을 불태우며 뛰어들지도 모르겠다. 가끔, 아주 가끔 그것이 장님 소 뒷걸음에 쥐 밟는 식으로 맞을 때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바보짓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리플을 붙이거나 비난 글을 올리는 것은 엄연히 1대 1의 작용이다. 글을 올리는 상황에서는 글을 올리는 사람과, 그 글을 보는 당사자 밖에 없다. (물론 리플 내에서 붙은 격전은 당사자에게 행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르나, 그것 역시 1대 1이다.) 한 명의 글에 100개의 비판글이 붙었다는 이유는 한 명을 백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때려눕히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백 명을 하나씩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채팅방에서 백명이 한 명을 몰아붙여 말도 못하게 만든다면 당연히 뛰어들어 마땅할지도 모르지만(사실 뒤에 설명하겠지만 그것도 잘못이다), 글에 시간 순으로 리플이 줄줄이 달렸다고 분노하는 사람의 머리구조는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궁금하다. 설령 그것에 부당성을 느끼더라도, 일단은 다시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이 사람이 정말 100명에게 집단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잘못이 많아서 100명 에게 욕을 먹을 만한 사람인가?"
우선 이 과정을 스스로 판별하고 뛰어들려고 해도 뛰어 들어야 한다. 보통 무협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위와 같은 멋진 말을 한고 보통은 선량한,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의당 옳다는 꼭두각시적 세뇌를 은연중 당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반대의 경우를 무협지적으로 생각해보자.
주인공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모아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악의 원흉 마교 교주를 전 무림을 희생시켜가며 간신히 포위했는데, 뜬금없는 미친[놈]들이 "아니, 열한명(구파일방 장문인 10명, 주인공 1명)이 한 사람을 동시에 공격하다니! 나는 그런 불의를 보고 참아 넘길 수 없다! 내게 덤벼라!" 하고 우르르 달려들어서 끼리끼리 싸움이 붙느라 그 사람들과 주인공, 구파일방 장문인만 죽도록 싸우다가 다 죽고 마교 교주는 웃으며 달아났다. 이게 옳은 일인가? 웃기는 해프닝이다. 뛰어든 사람들이 정의의 사도였나? 미친[놈]들 아닌가?
무협지를 모른다면 일반 형사드라마를 생각해보자.
평생을 목표로 한 범인을 찾기위해 세 형사가 10년을 헤매지만 범인은 잘도 피해다닌다. 어느날 10년동안 매일매일 사복차림으로 잠복한 끝에 범인을 잡아 격투가 벌어졌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아주 정의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왜 이래? 멀쩡한 세 사람이 한 사람에게 덤비다니! 죽어라 퍽퍽!"
결국 세 형사는 떡이 되게 혼나고, 범인은 다시 자취를 감추어서 영원히 찾을 수 없었다.
멀쩡한 상황이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뭐 그냥 대강 든 예이고 비유이니 그 예의 논리구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이런 예를 든 것은,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 정의의 주인공이 된다고 무조건 착각하지 말고 정황과 사정을 잘 살피면서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버젓이 나타나는 인간군상이 있다. "나는 비록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렇게 한 사람을 공격하는 꼴은 도저히 못봐주겠네요!" 라면서 스스로의 부자격성, 비논리성, 쌍무식성을 있는대로 드러내면서도 스스로 정의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끼어든다. 차라리 혀를 물고 죽어버려라. 차라리 친인척이나 이해당사자라면 그래도 봐주겠다. 친분이나 하다못해 작은 인간관계라도 있었다면 그래도 이해는 간다.
허나 아무 것도 모르는데 무엇을 평가하려고 하는가? 일단 그 대상이 옳고 그르고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자기가 무슨 전투의 화신, 혼돈의 화신이라고 나대면서도 끝끝내 잘난 척하는 미친 족속이 많고, 그런 족속을 이용하여 항상 빠져 나가는 악당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명심하자. 이 글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앞으로 그런 "자칭 무림고수의 오류"는 범하지 말자.
물론 무분별한 옹호와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비판도 똑같은 악덕이나 그것은 이미 대부분 악덕으로 알고 있으니 굳이 예를 들지는 않겠다. 단 한가지, 일단 무분별하더라도 옹호부터 해놓고 볼 때가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진짜 생명)이 달렸을 때 뿐이다. 그 외의 통신 논의에서 사람이 죽는 일이 없고, 대부분 잘잘못을 가리는 일인 이상, 그런 무분별은 범하지 않는것이 좋다.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비판이나 옹호의 자격은 없다고 해놓고 왜 끼어드는 것에 자제를 가하려 그러느냐? 그에 미리 답해본다. 비판이나 옹호의 대상 자격논의가 아니라 제대로 된 논의에 참가하는 자세인가 묻는 것이다. 뭐 자기가 알아서 자기 망신 당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겠는가?
한 번 양자의 의견이나 입장을 찾아 보지도 않으면서 잘났다는 듯 끼어드는 지식인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가짜 지식인이며,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판 것이다. 끼어 들어라. 자격은 있으니까. 허나 처절히 매도되고 비웃음 사는 것도 자기 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할 일이다.
'모르면 나서지 말라'는 말은 모른다고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 나서도 망신을 당한다는 뜻이다. 옛적부터 '말조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물론 이것은 무분별한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정말 못된 놈이네...' 이것 역시 헛소리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정말 못된 놈이란건 어떻게 아는가? 모두가 조금더 말조심 할 일이다.
2) 내가 한 짓이 못마땅하면 너도 해봐라. 능력도 없는 것들이 -> 역시 쌍무식한 티를 그대로 드러내는, 선도해야만 하는 오류적 발언이다. 가령 그 대상이 문제성이 있는 일이라 치자. 그렇다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로 대응할 수 있다. 상점에 진열된 물건을 공연히 때려부수지 않는 것은, 그럴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쁜 짓이므로 안하는 것이다. 만약 도덕성의 차이를 능력의 유무로 끌고 들어가거나 같은 짐을 짊어지게 하는 이러한 오류를 일단 "너도 해봐라 오류"라 명명짓자.
3) 너희 중에 죄짓지 않은 놈이 "나"에게 돌을 던져라. 너희는 잘못 한 적도 없느냐? -> 죄 지은 자들이 가장 많이 부르짖는 형식이다. 예수님이 다 좋은 말씀을 남기셨는데, 무분별한 쌍무식장이들이 예수님 말씀까지 곡해하여 이용해 먹으니, 이것은 논리단계를 넘어서서 종교모독에 이르른다.
그 이야기는 제 3자의 입장에서 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며 죄를 벌하되 "인간적 모독을 가하거나 동정을 베풀 여지를 남겨라" 즉 사랑의 가르침을 설파하신 것이지 죄인도 다 용서하자는 뉘앙스를 가진 것이 아니다.
사회 계약론에 의하면 죄가 있는 자도 다른 죄를 단죄할 수 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다고 그 잘못이 정당화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조리 잡아다가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잘못이 있다고 잘못에 대한 논의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사회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께서 재림하셔서 몸을 60억으로 나누어 하나씩 맡아 카운셀링을 해주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결국 기본적으로 뻔뻔스러운 무식의 소치이다. 이것을 편의상 "돌던져라 오류"라 명명하자.
혹은 "우물에 독을 타는 오류(poison to well)" 이라는 멋진 시적 뉘앙스를 지닌 비유에 해당한다. 내가 죽을 것 같으니 우물에 독을 타서 다 죽자, 즉 모두 끌고 들어가자는 악의서린 흉계의 주장이며, 일고의 가치가 없는 말이다. 또 다른 말로 "물귀신 오류"라고 해두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넘어가자. 이제까지는 드러난 잘못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교묘히 숨어 있는 잘못에 대한 몇가지 평가를 해보자.
4)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 당신은 항상 정당해요. -> 그것은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그 당사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자신을 우주 전체인양, 혹은 인간 사회를 대표한다는 총체적 착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 찬사를 듣는 다면, 얼른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라고 권하고 싶다. 그 "우주의 신"이 언제 마음이 변하여, "내가 당신을 싫어하니 당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다 나빠요! 소멸되어라! 죽어!" 할지도 모르니까. 이것을 반장난삼아 "당신만을 오류"라 칭해본다.
5)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니 비판하지 말아주세요. -> 열심히 한 것은 아무리 나름대로 했건, 알아줄만큼 열심히 했건 비판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열심히 했다는 것이 비판받지 않을 이유나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일종의 동정심 유도의 작전일 뿐이다. 열심히 했다는 것은 "열심히 했느냐"는 비판에 대해서만 해답이 된다. 도둑질도 열심히 하면 비판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살인도 연쇄살인을 하면 비판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긴 중국에는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백만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속담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일 뿐이다. 정말 백만명을 때려 죽여봐라. 영웅으로 변하나.
열심히 한 것이 모든 근거의 척도가 된다면 고시도 가장 오래 시험본 사람을 무조건 붙여줘야 하고, 미술 국전도 제일 나이 많은 사람에게 무조건 대상 줘야 하고, 가장 긴 영화가 가장 명작이 되어야 하고, 수능도 굳이 시험 칠 것이 아니라 학생 하나하나마다 씨씨티비라도 설치하여 "누가 더 덜 자고 열심히 했나" 로 뽑는게 맞겠다.
앞에 든 예를 한 번 정정해보자면 "열심히 했으니..." 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뜻을 가지고 열심히 했으니..." 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런데 이러려면, 굳이 열심히... 라기 보다는 그 나름대로의 뜻이 뭐였는지 밝히는 편이 맞을 것이다. 즉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근거 하에서 이러이러한 목적으로 이러이러하게 한 행동이니..." 정도가 설득력있게 전개된다면 된다면 합격점이다. 그리고 "비판하지 말아주세요..." 가 아니라 "타당성 있게 비판해주세요..."로 바꾸어야 설득력이 생긴다. 무조건 비판만 하지 말아달라니? "열심히"는 우주적 면죄부를 지닌 단어였단 말인가? 이것을 일단 "열심히 오류"라 지어두자.
6) 그래. 나는 못배워서 무식하다! 나이 어려서 모른다. 그렇다고 나를 무시해도 되는 거냐? -> 물론 못배워서 무식하다고 말하거나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그 잘못의 범위는 그냥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선의 잘못이지, 원칙적으로는 잘못이 아니다. 그 잘못도 어리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거나 무식하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무시했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무시"라는 말이 대단히 우습게 쓰인다. 무조건 자기 말을 안들어 주면 무시한다고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의 정당성은 "무시"가 정말 무시인가? 아니면 무조건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무시"로 받아 들이느냐에 있다. 일단 두 경우를 함께 생각할 때, 여기서는 두 가지의 오류를 검출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못배워서 무식한 것을 면죄부라도 되는 양 들고 일어난 오류이다. 못배운 것은 죄가 아니지만, 떳떳하거나 자랑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많이 배우고 유식해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면 스스로 그 대열에서 뒤쳐진 낙오자라는 뜻이오, 그러지 못할 여건이 있었다면 하고 싶은 바를 하지 못했다는 울분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못배우고 무식한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겸손을 가지고 잘 언급하거나 약점 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남의 쓰라린 부분을 건드리는 것은 도의적으로 좋지 않다 여기기 때문에, 혹은 그 사람에게 너무 충격을 줄 지 모르므로 좋은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삼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약점을 둘러 잡아 그것을 가면처럼 둘러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방패 삼으려 한다면, 더 이상 인의도덕을 따질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앞장서서 스스로 둘러썼으니 만큼 그것이 치부도 아니고, 그런 치부를 공격한다고 도의적이지 못한 것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좀 못할 짓이지만 철저하게 못배운 것을 놀려주고, 못 알아먹을 말만 해주고, 배운 다음에 다시 오라고 끊어버려도 논리적으로는 결코 죄가 되거나 무시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일단 이렇게 자신의 약점을 방패삼아 둘러써서 상대의 윤리관을 이용해먹는 것은 행동패턴이고 오류 자체는 아니지만 일단 대별하여 대강 "무식의 오류"라 해두자.
물론 정말 상대가 못배운 것을 조롱거리로 삼아 선공을 한 경우에 응답으로 이 말을 쓴다면 그것은 한맺힌 정당한 항의의 표현이 될 것이다. 허나 뻔히 논거를 들어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스스로가 쓰레기임을 공인한 처사이니 고민하거나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말고 그냥 청소기로 쓸어서 밖으로 치워버리면 그만이다.
나이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어리다는 건 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이므로 많은 잘못이 있어도 넘어가주며, 봐주는 경우가 많다. 가령 미성년자는 어른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이것은 미성년자가 잘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못배우고 아직 생각이 짧기 때문에, 아울러 앞으로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한 것이다. 즉 좀 심한 말로 표현하면 "아직 모자라고 덜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 질 수 없을 수 있으며" 그때문에 그만큼 많은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러한 많은 특권을 주는 것을 권한으로 인정하는 되바라진 미성년자라면, 혼부터 내는 것이 맞다. 미성년자에게도 성인과 동등한 권리가 있다. 다만 그것이 달라서, 어린사람의 잘못은 처벌보다는 훈계나 가르침으로 넘어가며, 대신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지도를 따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정당하지 못하거나 나쁜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른의 말이라고 하여 무조건 이렇게 앞장세우며 거부하는 것은 같은 미성년자 입장에서 보아도 옳지 않을 것이다. 이것 역시 오류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패가 있지만 관성의 법칙에 따라 "미성년의 오류"라 해두자.
아울러 이 두 오류의 전제가 되는, 타당한 논거도 자기가 패배할만하면 "무시"라고 이름붙이는 못된 습관을 일단 "무시의 오류"라고 해두자
7) 저런 *가 있는 저기는 쓰레기통이야... -> 완벽한 일반화의 오류 형태이다. 만약 *라는 인간말종이 어딘가의 단체에 들어간다 치자. 그렇다고 그 단체를 모조리 *와 똑같은 쓰레기통으로 생각하고 일반화, 정형화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쓰레기나 다를 바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최소한 그 *가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모두 같이 있으므로 모두가 다 쓰레기이며, 자신도 쓰레기가 될 것이다. 단체라고 했지만, 집단, 가족, 기타 등등 모두 포함된다.
*가 속한 집단을 욕하려면 그 집단의 행동양태를 볼 것이지, * 자체의 존재가 집단의 성격을 대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이것을 '일반화의 오류'라고 해두자.
이 외에도 수백가지의 오류들이 있으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 거의 모두가 논리학에서 나오는 대여섯가지의 기본적 오류체계로 이루어져 그것들이 중복, 혼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여섯가지의 기본오류는 여러분들에게 숙제로 남겨 두겠다. 그래야 책을 보고 나름대로 공부를 할 것 아닌가?
좌우간 이 글을 읽고, 논리를 생각한 사람은 우선은 그 스스로가 쌍무식한 사람이자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궤변론자 뿐인, 입하고 밥통만 달린 기형적 인간이 되지 말고, 혹 그러한 인간을 만났을 적에도 잘 대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논리학은 아주 중요한 학문이다. 서양 중세에서도 일단 언어만 습득하고 나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논리학부터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형이상학을 가르쳤으며, 그 다음에야 실제 전문과목을 가르쳤다. (괴테의 "파우스트"참조) 서양이 수천년간 앞서가던 동양을 이기고 수백년만에 급속하게 번성하게 된 근본적 힘이 바로 이 논리학에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이 논리학이며, 특히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이 논리학은 가장 중요한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논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많아져서 보다 원활하고 발전적인 인터넷 생활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며 대강 잡글을 마친다.
장르란 무엇인가. 장르영화란 오히려 딱 한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영화이다. 가끔 매스컴은 통계청의 국민생활상 조사 등을 근거로 모든 국민들의 평균치를 적용한 가상인물 ‘김대리’를 제시하는데, 장르영화의 관객은 딱 한사람, ‘김대리’인 것이다. 영화제작자들은 영화적으로 가장 평균적인 관객 ‘김대리’를 설정하고 그를 이러저러하게 만족시키기 위해 갖가지 재밌는 틀들을 고안해내고 모니터링을 하고 연구를 해왔으며,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관객수와 같은 결과를 따져 그 수치가 흥행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을 때 가설 ‘김대리’는 검증된다. 결국 장르영화는 ‘김대리’라는 ‘보통대명사‘의 기대와 욕망이란 얘긴데,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영화제작자가 어떻게 설정을 하든, ’김대리‘의 실체는 자연인이다. 그것은 ‘김대리’ 또한 변화성장하는 와중에 있는 유기체이며, 보편적인 관심거리를 지닌 동시에 쉽게 권태로워지고 항상 새로운 것을 탐하며 가끔 믿어지지 않게 변태스러운 면을 동시에 지닌 보통사람이라는 뜻이다. 실제 제작현장에서 흔히 범하는 잘못은 ‘김대리’의 자연인으로서의 실체를 자주 까먹는 것이다. 아직도 ‘김대리’는 조폭 코드에 웃을 것이라 믿거나, ‘김대리’는 스타에 크게 좌우되는 단순한 사람이라고 무시하거나, 조선놈 ‘김대리’는 좋아하는 게 빤하다며 도대체 새로운 걸 찾을 생각은 않는 것이다. 특히나 막대한 제작비 결정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겪는 동안 ‘김대리’는 소위 객관적이고 검증된, 하지만 실체가 막연한, 본질이 무시된 화석화된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많고, 그 지난한 시간동안 ‘김대리’의 성장 시차(時差) 또한 무시되기 일쑤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김대리’가 좋아하는 게 빤하다는 오해인 것 같다. 이미 재밌는 건 세상에 나올 게 다 나왔고, 뭐, ‘김대리’를 놀래킬 만한 게 뭐가 있겠나, 숨어있는 ‘쾌감대’가 또 있겠나, 지레 짐작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데 게으르다는 것이다.
(중략)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이 지면에서 다양한 소재의 영화들이 제작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을 얘기하고 싶다기 보단, 좀더 정밀하게 얘기해서, 대중영화, 상업영화를 만들고자 할 때 좀더 정확하게 보고 더욱 용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리’는 살아있다. 그는 시간을 통해 늘상 성장하고 있고, 시간에 따라 어느덧 지겨워하고 있고, 속한 사회와 지역에 따라 관심 가는 구석이 옮아가고 있으며,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자극을 본능적으로 바라고 있는, 건강한 인물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를 정확히 알아야 하며 그리고 용기를 내야 한다. 이런저런 새로운 얘기들로 그에게 들이대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그는 영화에 남아있다. 영화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경직되지 않아야 한다. 장르는 어쩌면 영화인들의 도그마다. 장르 영화가 흥행이 잘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정밀하게 얘기해서 장르이기 때문에 흥행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영화 자체가 지닌 재미있고 신선한 요소들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라 정리하는 게 맞다. <살인의 추억>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사회극, 실화극이 어엿한 흥행모델로 자리 잡았고, <왕의 남자>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비호감이던 동성애 코드가 오버그라운드 했으며, <친구>가 조폭영화의 불을 당겼던 사실, 그리고 많은 아류작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절대 ‘김대리’를 대충 대략 단순하고 정체된 인물로 보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절대 ‘창의적이기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러준다.
이사 덕분에 오래된 노트들을 꺼내보게 되었는데, 무려 고등학교 2학년때 쓰던 노트에 이런 표현이 적혀있었습니다. 누가 했던 표현인지, 아니면 혹 내가 쓴 말인지 - 그랬다면 10년동안 전 퇴보한 거죠.(눈물) -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명료한 표현을 왜 그동안 잊고 있었을까요.
프레임의 좌우부분은 화면의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까닭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 와이드 스크린으로 촬영된 영화 중에서, 대수롭지 않은 다수의 작품들은 상용의 5대3 비율로 잘라버릴 수도 있는데, 이는 스크린의 좌우 측면에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들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을 이같이 축소시켜도 별 시각적 손상을 입지 않는다면, 우선 우리는 그 영화를 찍은 감독이 범속한 시각적 재능밖에 갖고 있질 않다고 생각해볼 만 하다. 왜냐하면 와이드 스크린의 예술적인 장점을 사용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굳이 와이드스크린으로 찍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by L. 자네티, <영화의 이해 : 이론과 실제> 中
매트릭스 레볼루션 도입부에서
제가 처음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비디오로 이 장면을 봤을 때 이해가 안됐던 것이, '대체 어디서 이 사람과 네오가 만났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메로빈지언의 프랑스식 레스토랑 장면을 다시 돌려봐도 이 사람은 나오지 않았거든요.
매트릭스 릴로디드 中, 5:3 비율
DVD를 구입한 뒤에야 '아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위 장면은 사실,
이렇게 분명히 네오를 바라보는 장면이었거든요.
이제는,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멋대로 가위질해도 괜찮다고 믿는 시대는 비디오와 함께 제발 좀 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