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란 무엇인가. 장르영화란 오히려 딱 한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영화이다. 가끔 매스컴은 통계청의 국민생활상 조사 등을 근거로 모든 국민들의 평균치를 적용한 가상인물 ‘김대리’를 제시하는데, 장르영화의 관객은 딱 한사람, ‘김대리’인 것이다. 영화제작자들은 영화적으로 가장 평균적인 관객 ‘김대리’를 설정하고 그를 이러저러하게 만족시키기 위해 갖가지 재밌는 틀들을 고안해내고 모니터링을 하고 연구를 해왔으며,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관객수와 같은 결과를 따져 그 수치가 흥행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을 때 가설 ‘김대리’는 검증된다. 결국 장르영화는 ‘김대리’라는 ‘보통대명사‘의 기대와 욕망이란 얘긴데,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영화제작자가 어떻게 설정을 하든, ’김대리‘의 실체는 자연인이다. 그것은 ‘김대리’ 또한 변화성장하는 와중에 있는 유기체이며, 보편적인 관심거리를 지닌 동시에 쉽게 권태로워지고 항상 새로운 것을 탐하며 가끔 믿어지지 않게 변태스러운 면을 동시에 지닌 보통사람이라는 뜻이다. 실제 제작현장에서 흔히 범하는 잘못은 ‘김대리’의 자연인으로서의 실체를 자주 까먹는 것이다. 아직도 ‘김대리’는 조폭 코드에 웃을 것이라 믿거나, ‘김대리’는 스타에 크게 좌우되는 단순한 사람이라고 무시하거나, 조선놈 ‘김대리’는 좋아하는 게 빤하다며 도대체 새로운 걸 찾을 생각은 않는 것이다. 특히나 막대한 제작비 결정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겪는 동안 ‘김대리’는 소위 객관적이고 검증된, 하지만 실체가 막연한, 본질이 무시된 화석화된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많고, 그 지난한 시간동안 ‘김대리’의 성장 시차(時差) 또한 무시되기 일쑤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김대리’가 좋아하는 게 빤하다는 오해인 것 같다. 이미 재밌는 건 세상에 나올 게 다 나왔고, 뭐, ‘김대리’를 놀래킬 만한 게 뭐가 있겠나, 숨어있는 ‘쾌감대’가 또 있겠나, 지레 짐작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데 게으르다는 것이다.

(중략)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이 지면에서 다양한 소재의 영화들이 제작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을 얘기하고 싶다기 보단, 좀더 정밀하게 얘기해서, 대중영화, 상업영화를 만들고자 할 때 좀더 정확하게 보고 더욱 용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리’는 살아있다. 그는 시간을 통해 늘상 성장하고 있고, 시간에 따라 어느덧 지겨워하고 있고, 속한 사회와 지역에 따라 관심 가는 구석이 옮아가고 있으며,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자극을 본능적으로 바라고 있는, 건강한 인물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를 정확히 알아야 하며 그리고 용기를 내야 한다. 이런저런 새로운 얘기들로 그에게 들이대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그는 영화에 남아있다. 영화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경직되지 않아야 한다. 장르는 어쩌면 영화인들의 도그마다. 장르 영화가 흥행이 잘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정밀하게 얘기해서 장르이기 때문에 흥행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영화 자체가 지닌 재미있고 신선한 요소들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라 정리하는 게 맞다. <살인의 추억>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사회극, 실화극이 어엿한 흥행모델로 자리 잡았고, <왕의 남자>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비호감이던 동성애 코드가 오버그라운드 했으며, <친구>가 조폭영화의 불을 당겼던 사실, 그리고 많은 아류작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절대 ‘김대리’를 대충 대략 단순하고 정체된 인물로 보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절대 ‘창의적이기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러준다.


-by 박정우, YES24 영화 칼럼<박정우의 思生活> 中





비단 장르 영화만 그럴까.
장르 소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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