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 '아르카나'의 한 장면


나는 정보 장교다.
나라는 지금 전쟁중이고, 나는 전장에 침투해서 정보를 빼오는 게 일이다.
하나도 안 위험한 이유는, 내가 침투할 곳은 바로 아군의 서류더미가 쌓여 있는 지휘소이기 때문이다. 고위 장교인 이상 나는 철저하게 보호되고, 그래서 내 일은 정시에 출퇴근하는 공무원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내 상관은 군 원수나 장군이 아니다. 여자 버릇이 나쁜 파스쿠치라는 노인이다. 그에겐 열 네명의 딸과 여섯명의 아들이 있지만 파스쿠치의 성을 가진 아이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웃기지? 그런데 어쩌다 생긴 손녀아이는 끔찍히 위해주는게 더 웃기는 일. 마리안느 파스쿠치. 그 아이는 겨우 열 살이다.

나는 그의 지위도 계급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의 저택 뒷산 산책 코스뿐. 정확한 집주소까지 전부 금지사항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 상관이고 내게 명령을 내릴 권한은 그에게만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오직 그에게만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내가 받는 명령은 적진에 침투해 누굴 죽이라는 그런 게 아니니 다행이다. 기껏해야 어디어디의 현황을 알아오라는 정도니까. 알아오라는 명령을 받으면 알아오고, 그의 산책 코스에서 기다리다가 그와 같이 몇걸음 걸으며 보고하면 된다. 그럼 그는 다음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위험이 닥쳤다.

첫번째. 파스쿠치가 죽었다.
산책로에서 기다려도 이 시계같은 양반이 오질 않길래, 나는 몇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가 구토를 금치 못했다. 그가 머리만 남아 있고 온 몸이 손바닥보다 작은 고깃덩이와 뼈덩이로 분할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절차에 따라 파스쿠치가 지정해 둔 상부에 보고한 나는 최전선으로 배속되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쳐들어왔다. 당연히 지휘라곤 해본 적 없는 내 부대는 박살나버렸고, 나는 명령받은 대로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결하려고 권총을 빼 들었다. 한번도 쏴본 적이 없는 권총이다.

"왜 그래?"

갑자기 나타난 어린 여자아이다. 열 두어살 쯤 됐을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한 손에는 어린 소녀에겐 어울리지 않을 큰 칼, 다른 손에는 기관단총을 들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다. 뭐 눈 돌릴 만큼 나오고 들어간 몸도 아니지만. 가만, 지금 이런 소리 할 때가 아니거든.

"내가 죽여야 되는데 혼자 죽어버리면 안돼."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나는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짓이야."

"죽이라고 명령하는게 더 나빠."

"난 아무 명령도 안하는걸."

"그럼 안죽일게. 혼자 죽든지 말든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맑게 웃으며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칼 춤을 춘다. 노래를 부른다.

하나, 둘, 셋, 넷,
일이다~ 일~ 할 일이 많아~
열, 스물, 서른, 마흔,
목이 너무 목이 너무 말라~
백, 이백, 삼백, 사백,
피가~ 목이~ 필요해~ 많이~


섬뜩한 노래다. 나는 큰 칼과 기관단총이 두려워 아이를 붙잡진 못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일, 재밌, 니?"

"하나두 재미 없어!"

뚝 그치듯 노래와 춤을 멈추고 내게 다가온 아이는 외쳐버렸다.

"그만하고 싶어!"

난 그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 아이를 위해 전쟁을 멈추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건 정보 뿐이다.

"전쟁을 멈추려면 열 세 개의 목을 베면 돼. 이름 적어줄게."

적국의 주요 강경파 인사 여섯명, 우리 나라의 주요 강경파 인사 일곱명의 이름을, 나는 아이에게 적어주었다. 그들의 자세한 집 위치와 사는 곳과 기타 등등의 모든 것을.

"얘네만 베면 돼? 나 이런거 안해도 돼?"

"응."

"와와! 이제 끝났다 끝났어! 만 사천 칠백 오십 삼명을 베었는데도 안끝나길래 울었단 말야. 열 세개만! 열 세개만 베면 되는구나!"

아이는 노래를 바꿔 불렀다. 여전히 섬뜩한 춤과 함께. 나는 그때 묘한 직감으로, 이 아이가 정말로 저 열 세명을 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 세 개, 열 세 개, 열 세 개의 목!
열 세 개만~ 하면 돼~
열 세 개, 열 세 개, 열 세 개의 목!
귀여운~ 마리안느에게 열 세 번만 벌을~!


마리안느.
파스쿠치의 손녀의 이름. 그녀를 난 딱 한번 보았었지. 곧 그녀는 노래를 마치고는 나타났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나는 다행히 포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차례로 적국과 우리 나라의 전쟁 지도자들이 하나 둘 죽어넘어가기 시작했다.

그 수가 열 셋이 되자, 이젠 더이상 양 국은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공격 지휘관도, 면밀한 군수 담당자도, 카리스마 있는 국가 원수도 없는 나라가 무슨 전쟁을 하겠어. 휴전이 이루어지고, 포로를 교환하게 되었다. 이 또한 몇년이 지난 셈이다. 상급자들이 모조리 죽어버린 나는 장성이 되어, 포로 수용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포로들 사이에서 맹수를 묶는 것과 비슷한 재질의 굵은 수갑을 차고 매달려 있는 발가벗은 여자를 언뜻 보긴 했지만, '여긴 미친 놈 소굴이니 조심하시는게 좋습니다' 라는 부하 장교의 말에 이내 고개를 돌렸다.

200명이나 되는 장교 포로를 직접 심문하고 송환과 투항의 여부를 묻겠다고 하자 준비가 바빠졌다. 포로들을 몸수색하고, 한명 한명씩 방을 지나가게 하면서 나는 그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았다. 정보 장교의 감으로 그들의 거짓말 정도는 빤히 보였고, 대답과는 상관없이 송환과 귀순 도장을 내 판결로 찍어놓았다.

"이게 전부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아까 그 여잔 뭐지?"

"여자가 아닙니다. 그건. 맹수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가 보았다. 발가벗은 여자는 사슬에 묶여 있어도 완강히 발버둥치며 으르렁댔다. 하지만, 이내 나를 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성숙한 몸매에 나는 잠시 눈을 돌렸다.

여자는 노래했다.

열 세 개, 열 세 개, 열 세 개의 목!
열 세 개만~ 하면 돼~
열 세 개, 열 세 개, 열 세 개의 목!
귀여운~ 마리안느에게 열 세 번만 벌을~!


"이제 다 했어. 나 잘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에게 수갑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내게 안겨와 울었고, 부하들은 내 지시에 따라 파스쿠치의 살해 건을 알아보았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파스쿠치의 손녀가 아니라 그의 창조물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단순한 민간의 술사인 그는 군 정보망을 조작해 나를 자신의 지휘 하에 넣었다. 그리고 내가 모든 정보에 대해 충분한 준비를 갖자, 마리안느의 시동 키를 넣은 것이다.

절대적인 파괴자의 시동 결과는 참혹했다. 시동자를 포함해, 그녀의 길을 막는 모든 자를 죽였다.

다만 가장 중요한 정보망이었던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 의해 보호될 처지였던 것이다.

(마리안느의 노래를 글로는 전달할 수 없어서 아쉽네요. 굉장히 나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섬뜩하고 귀에 박히는 그런 음이었어요. 노래와 함께 숫자들이 눈앞에 환상처럼 명멸하는 묘한 느낌. 난 왜 맨날 이런 꿈만 꾸는 거야 대체.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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