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위대했던 전사. 하지만, 사악한 마녀의 성으로 마녀를 베기 위해 떠난 뒤 잊혀졌다.
남자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다. 마을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지만, 그런대로 평화로운 마을이다. 소년이 동경하는 영주의 딸은, 무척 순수하지만 제멋대로인 소녀. 연회장에 가지 않기 위해 소녀는 이따금 가출을 시도하고, 그러다 소년을 만난다.

(아마도 츠뮤님으로 추정되는 나레이션 :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 납치범을 인질이 길들이는 거군요.")

소년은 치르키라는 이름의 메뚜기를 키우는게 일생의 낙. 소녀는 자신과는 너무 다른 소년의 이야기에 늘 빠져든다. 그리고 둘은 서로 무척 호감을 갖지만, 영주 부인의 손길이 뻗어와 소녀는 다시 성으로 끌려간다.

숲에 숨어 있다가 이내 낙담한 소년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마을 풍경이 이상하다. 옆에서 아는척 하던 동네 친구가 키우는 너구리가, 입이 이상스럽게 커다랗게 변하더니 몸 전체가 뒤틀어지며 이형으로 바뀐다. 녹색의 괴물이 된 그 너구리를 피해 소년은 마을 안으로 도망쳐 오지만, 이미 온 마을에는, 손바닥만한 개미와 망아지만한 벌레들로 가득 차있다.
치르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치르키는 이미 죽어 있었다. 올라타도 될만큼 커다랗게 변했지만, 몸은 어느새 누군가에 의해 반동강나버린 치르키는 눈물을 흘리며 소년을 바라보다가 죽어간다.

(다시 나레이션 : 눈물나게 슬픈 이별이네요)

소년은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 어머니와 단 둘이서 이리저리 숲을 지난다. 나무들 또한 살아서 움직이고, 그들을 잡으려 달려들자 어머니는 주저없이 예전의 검 실력을 발휘해 나무들을 베어넘긴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싸우셨군요."
"아니. 느이 아버지가 매번 경충(....)이었지. 일단 회피할 거다. 회피란 건, 강한 적과 싸우지 않고 돌아가는 거야. 알았니?"
하지만, 소년은 치르키의 나머지 커다란 반신을 물어뜯고 있는 벌레들을 보고는 그만 분노해서 나무막대기를 들고 그 손바닥만한 벌레들을 마구 짓밟고 두들겨패 박살냈다.
"회피하라니까!"
"그렇게 돌아가다 발길에 좀 채인 건 상관 없잖아요!"
"어쩜 그리 느이 아버지랑 똑같니!"
온 마을에 벌레들이니 동물들이 다 괴물로 변했지만, 이상하게 말들은 멀쩡했고, 괴물들의 습격에 놀라 울부짖고 있었다. 말에 올라타고 급히 도망치던 모자는, 이내 쫒기다 못해 마을 끝의 동굴로 들어간다. 기억도 나지 않던 시절부터 금기였던 그 동굴 안에는 화학적 위험물이니 생물학적 위험물이니 하는 표시가 가득 차있고, 온통 금속질의 벽과 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몇몇 괴생물체들이 그곳을 막고 서서, 우리에게 그 이상 근엄할 수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Thou, shall not, pass!"(...)
이에 어머니는 주저없이 근처 벽의 유리 장을 쳐서 깨고는, 45구경 매그넘을 꺼내 온 사방에 난사한다. 녹색의 체액이 난리치며 피어오른다.

(나레이션 : 아니 왜 갑자기 판타지에서 바이오 해저드 ㄱ-)

"회피하신다면서요 어머니?"
"지나가다 발길에 좀 채이면 어때서."
권총에 남은 마지막 한발이 문 옆의 계기판을 박살내자 결코 열릴 수 없을 거 같던 그 위험 표지의 강력한 X자 빔으로 보안된 문이, 벌컥 열렸다.
그 곳은 왕궁이다.

소녀는 모친인 영주 부인에 의해 드레스로 치장하고 왕궁의 연회장으로 끌려왔다. 개구리보다 더 못생긴 얼굴의 왕자와 선을 보기 위해, 왕비의 수석 시녀장과 면담을 먼저 치르게 된다.
하지만 엄청 잘나보이는 그 수석 시녀장은 얼음장처럼 단호한 얼굴로 서 있었고 소녀는 이내 따분해졌다.
"왕자비가 되면 월급은 잘 줘요?"
"노후 보장은요?"
"그 드레스, 어깨에 뭐 넣은거에요?"

(나레이션 : 굉장한 여자애네요.)

소년에게 들은 얘기를 마구 조합해가며 온갖 건방지다고 할 만한 표현을 난사하자 이내 시녀장은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표정엔 드러나지 않는다. 참다못한 영주부인이, '잠시 둘이 얘기좀 하겠습니다' 라고 양해를 구하고 소녀를 데리고 근처 정원으로 끌고 나온다. 미로정원의 입구로 들어가버린 영주부인을 쫒아 소녀는 미로 안에 들어서지만, 그 곳에서 마주친 것은 수천의 은색 나비들.
밤하늘을 수놓으며 미로 속을 온통 메운 나비들의 향연에 취해있던 소녀의 등뒤로, 갑자기 나비들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영주부인의 모습을 이룬다. 아니, 영주부인이 아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밤의 마녀다.
"내 말을, 그대로 따라한다."
라는 말과 함께 영주부인의 입 앞에서 몇 마리 나비가 모여들어 까만 구체를 이룬다. 영주부인은 소녀를 옭아매며 자기 입으로 소녀의 입에 그 구체를 집어넣으려고 애쓴다. 소녀는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하는데, 그 순간 소녀의 눈앞에, 나무막대기가 휘둘러지며 구체가 맞아 날아가 흩어진다.
"밤의 마녀. 애들은 알아서 하게 냅두고 우리끼리 놀자. 나랑 못다한 얘기가 있을 텐데."
"흥. 네 남편은 웃기지도 않았어. 그런 조무래기에게 몸을 허락한 주제에 내게 대항할 셈인가?"
"닥쳐! 남자란 강함만으로 매력이 설명되는게 아냐!"
"그럼 밤일이나 잘한다고 남자인줄 알아 그럼?"
어머니들의 심도높은 토론을 뒤로 하고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미로 밖으로 달려나간다. 폭음과 빛의 향연이 등 뒤를 쫒아와 소년은 소녀를 끌어안고 엎드렸고,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일어났을 때는 어머니도, 미로 정원도, 왕궁도 흔적도 없었고, 광야에 앉아 있는 소년의 곁에는 차게 식은 소녀의 몸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어째서 츠뮤님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나레이션을 이어나갔는지는 의문입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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