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멀지 않은 옛날입니다.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가는 286 컴퓨터와 재믹스 게임기, 롤러가 달린 스케이트보드, 조그만 장난감들이 들어 있는 100원짜리 캡슐 뽑기와 소아과 병원에서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용 주사기의 시절입니다. 간호사가 꿈인 소녀는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해서 늘 수많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오빠도 있고 남동생도 있고 말썽꾸러기 여동생도 있어서 네 남매였는데요. 어느날 동네에 나타난 마법사 복장을 한 남자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폭죽 구경을 시켜주며 공룡모양 풍선과 솜사탕과 스케치북을 팔았습니다. 남자의 손에서 나무젓가락에 한올한올 감겨나가는 솜사탕을 몇 시간이고 신기한 듯 바라보던 여동생 덕분에, 소녀는 남자에게 특별한 스케치북을 선물받습니다.

"이건 말이다. 아주 특별한 거란다. 여기에 그림을 그리면, 뭐든 다 실현되지."

물론 남동생은 티라노사우루스 모양 풍선을, 오빠는 뽑기에서 당첨되어 깨끗한 새 스케이트보드를, 여동생은 신비의 솜사탕이라고 딱지가 붙은 비닐포장에 쌓인 은회색 솜사탕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그런데 다음날 소녀가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남동생이 모든 스케치북을 온통 먹물로 망쳐놓은 겁니다. 한바탕 난리가 났고, 소녀는 마지막 한장만 남은 그 특별한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 돌아온 오빠는,

"괜찮아. 한 장은 남았잖아. 여기에다 그림을 그리는 거야. 먼저 그리기 전에, 뭘 그릴지부터 잘 생각해보고. 그럼 버리지 않아도 되잖아?"

소녀는 울음을 그치고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오빠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케치북을 손에 꼭 쥐고요. 그리고 가벼운 스케치와 함께 이야기가 시작됨에 따라 네 남매는 순식간에 소녀의 상상속에 있던 사막으로 함께 떨어집니다.

"누나땜에 그래!"/"언니 땜에 그래!"
"그만 해 너희들!"

자신을 둘러싸고 옥신각신하는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소녀는 몰래 그들 곁을 떠나고, 갈 길도 모른 채 정처없이 걷다가 어느 계곡에서 커다란 풍선 공룡들과 마주칩니다. 네 발로 지면을 울리며 무리지어 걸어가는 거대한 폴리프로필렌 풍선들.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드는 투명한 재질의 사람 키만한 작은 풍선 공룡. 도망치던 소녀는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와서 구해준 오빠 덕분에 간신히 자리를 벗어나지만, 막다른 동굴에서 구해준 건 남동생이 갖고 있던 커다란 티라노사우루스 풍선이었습니다. 펑펑 터지는 얇은 비닐 풍선들.

그 동굴안에서 그들은 늘 갖고 싶었던 것을 발견합니다. 게임 팩이 푸른 비닐봉지에 하나가득. 캡슐에 들은 사탕이 까만 비닐봉지에 또 하나가득. 그리고 주사기 세트가 하얀 비닐봉지에 하나가득.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갖고 싶지 않아 해요. 그들이 원하는건 집에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배고픔을 못이기고 손에 들고 있던 포장된 은회색 솜사탕을 먹어버린 여동생은 그때부터 갑자기 모든 걸 알아버린 것처럼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남자는 마법사야. 신기루의 마법사라고 이 사막의 지배자라고 해. 환상으로 공포를 주어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 같아. 힘을 얻은지 100년이면 죽게 되는데, 후계자에게 힘을 물려주면 죽지 않는대. 우리들 중 하나가, 남자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나봐."

누가 되어야 할까요.
그리고, 누가 되든, 나머지는 돌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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