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에서 깨어나 바로 적는 글. 배경은 제가 구상했던 게임 레무리아 온라인입니다.
요즘 게임할때 느낀 그런 정서와 만들고 싶어하는 게임에 대한 비주얼이 꿈속에서 이리저리 섞여서 이상한 잡탕 스토리가 됐네요.

게임 레무리아 온라인에서 가장 득템이 잘되는 필드, 노르하 사막.
오늘도 올드 유저들은 파티를 맺고 몹 몰이에 여념이 없습니다. 수염이 허연 노인이 열심히 고수준 마법을 캐스팅하는 동안, 젊은 전사들은 낮은 스킬로는 별로 데미지를 내지도 못하는 괴물같은 몹들을 유인해 맵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끌어옵니다. 계곡 안에 몹들끼리 서로 몸이 걸려서 오도가도 못하는 사이 체인 라이트닝이 시전되고, 마스터 레벨의 전격이 몹들을 날려버립니다. 쓰러지는 시체들을 향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남녀 캐릭터들. 루팅할때마다 옷이며 금화가 후드득 떨어집니다. 이미 죽을 나이가 지났는데 그 비싼 생명약으로 한달 한달을 사는게 틀림없는 저 노인 캐릭터의 뒤에 앉아있을 유저는 분명 피식피식 웃고 있을 거 같습니다. 파티원들마다 자기에게 일정량의 돈을 주고 가니까 말이죠.
"저럼 재밌나."
계곡 위에서 한마디 툭 내뱉고 지나가는, 긴 검을 어깨에 걸머지고 까만 머리칼을 양쪽으로 질끈 묶은 여자. 니니엘입니다.
"심술나요. 저희들끼리만 다 헤쳐먹고."
옆에서 소녀 캐릭터가 한마디 내뱉습니다. 이름은 '귤'. 니니엘을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지만 사실 게임상의 관계는 그냥 동등한 유저캐릭터입니다.
"돈 저렇게 모아서 뭐에다 쓰려는지 원. 퀘스트도 안해. 던전플레이도 안해. 그렇다고 몹잡으려고 열심히 스킬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마망. 나, 재밌는 생각났다?"
니니엘은 귤을 돌아보았습니다. 핑크빛 머리칼이 흔들리며 싱긋 웃는 귀여운 얼굴을 살짝 가렸다가 올라갑니다.
"저 속에 뛰어들어서 몹 흩어버리는거예요!"
말과 동시에 도도도도, 달려갑니다. 이미 한쪽에 잔뜩 모여있는 백마리 가까운 몹들 사이로, 귤이는 신나게 달려서 전부 흩어버렸습니다. 몹들이 귤이를 인식하면서 하나 둘 서로를 밀치고 계곡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등 뒤에 잔뜩 몹을 달고 전력 질주로 도망오는 귤이를 보며 니니엘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검을 뽑아들어 일격에 첫 몹을 베어버립니다. 한번에 한 마리씩. 어려울 것 없는 싸움이네요. 등 뒤에서 귤이는 얼른 죽은척합니다. 몹들 인식이 전부 니니엘로 옮겨왔어요.
"이거나 저 인간들이나 뭐가 다른데?"
"이건 마망 실력이고 저건 쟤네들 스킬빨이잖아요!"
다시 한번 베고, 찌르고, 또 베어내니 나머지 몹들은 공포심이 생겼는지 주춤 하고 물러납니다. 그러는 사이 등 뒤에서 쫒아온 뉴비들이 니니엘을 손가락질하면서 다시 몹에게 인식을 끌어 데려갑니다.
"오래 했음 다야!"
"뉴비도 돈좀 쉽게 벌어보자는데 방해나 하고!"
"니가 그렇게 잘났음 너도 파티맺고 몹 몰아다 쓸어!"
한숨이 나오는 소리들. 니니엘은 귤이를 슬쩍 돌아봅니다.
"잘하는 짓입니다? 따님?"
"에이, 그래도 저사람들 쉽게 쉽게 돈버는 건 보기 싫어. 우리 첨에 얼마나 고생고생하면서 스킬 올리고 옷사입고 그랬어요."
"전력질주랑 죽은척만 마스터 레벨까지 올리느라 참 고생했지요."
"컨셉이라니깐 컨셉!"
귀여운 이모티콘 웃음 때문에 니니엘은 또 웃으며 넘기지만, 금방 표정을 굳힙니다. 아까의 그 노인이 살기등등한 눈길을 보내며 천천히 등 뒤에 수많은 뉴비들을 달고 걸어오고 있어서요.
"칼질 하는거 보니 꽤 한참 하셨나본데, 둘이서 이 많은 뉴비들 고생한걸 헛일로 돌리고도 잘했다고 생각하나?"
"잘못한 것도 아니죠. 그리고 고생이란건, 그런걸 고생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퀘스트 망해서 흉터도 생겨보고 혼자서 던전 돌다가 함정에 빠지고 그러는 걸 고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니니엘은 검을 들며 일어났다.
"호오. 난 이 게임 오픈베타때부터 했어. 어지간한 스킬은 다 마스터했고. 그런 나와 싸우시겠다?"
"오픈베타 때부터 하신 분이 그래 이 게임 본질은 잊어먹고 뉴비 지원한다는 핑계로 돈이나 모으고 그걸로 또 생명약 시세조작하고. 잘하는 짓입니다. 결혼도 안했죠? 호감도가 쌓여야 결혼을 하지. 원."
"즐기는 방법은 여러가지야."
"내가 보기엔 당신이 그 여러가지 중 오직 한가지만을 사람들한테 퍼트리는 걸로 보이네요."
"더 이상 못참겠군!"
노인으로부터 전격이 날아들어서 니니엘은 몸을 굴려 피하며 앞으로 뛰어듭니다. 노인이 스태프를 들어 검을 막는것과 동시에 몸을 뒤집어 발로 노인을 차내고, 절벽 뒤로 노인이 떨어집니다. 몹들이 모여 있었고, 노인을 향해 동시에 달려듭니다. 끄아악 하는 비명소리. 살려줘 하는 애처로운 이모티콘.
옆을 돌아보니 뉴비들이 다들 웅성거리며 서로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너 부활 스킬 있어?  아니 없는데. 아직 못배웠어. 난 배웠는데 한번도 안써봐서 비활성화야. 누구 부활스킬 있는사람? 아무도 없어? 니니엘은 또 한번 피식 웃었습니다. 누구나 제일 먼저 배운게 부활스킬인데 하여간 요즘 뉴비들이란.
"가요. 마망."
"부활 시켜 주고 갈까 말까."
"뭘 부활시켜줘요. 저기서 시체 녹을때까지 누워 있어봐야 저런 작자들은 정신차려요."
"그래도 정신 못차릴거 같은데."
니니엘은 귤이에게 이끌려서 걸어가다 아직 루팅 안시킨 시체를 보고 멈춰섰습니다. 귤이가 얼른 시체를 열어 아이템을 꺼냅니다. 비싸고 예쁜 프릴 원피스가!
"와! 나 이거 갖고 싶었는데! 마망 최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니니엘은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PvP 승리 때문에 좀 사회레벨이 깎이긴 했지만 뭐 그정도야 늘상 있는 일.

다음 날 귤이가 접속하자마자 방긋 웃으며 맞이합니다.
"마망! 오늘 또 몹몰이 깨고 놀자. 뎅군도 데려왔어요! 오늘은 남자옷 이쁜거 안나오려나? 응응?"
딱 보니까 거의 질질 끌려온 분위기인 귤이의 남편 데이티아군. 본명보단 늘 '뎅'군이라고 불려서 참 불쌍한데요. 니니엘은 모여있는 몹을 향해 다시 전력 질주를 시작하려는 귤이 어깨를 덥썩 집으며 나직히 말했습니다.
"부부 동반 퀘스트부터 깨고 와야 하지 않겠어요? 바로 요 옆 동굴이잖아요?"
"마마아앙! 그거 무섭,"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방긋 웃으며 윙크하는 금색 눈동자 위로 퀘스트 파티 창이 찰카당,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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