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배경은 19세기 중엽의 유럽 같은 세계. 어느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사라져버린 아내를 그리워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던 미스터 로빈슨. 소녀 취향이 심한 아들을 위해 쇼핑을 나섰다가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인형사에게서 두 인형의 구입을 권유받고는, 하얀 머리칼에 파란 눈을 가진 공주 인형과 녹색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진 소년 검사 인형 사이에서 고민하다 공주 인형을 구입하게 됩니다. 아들에게 그 인형은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지요. 그 역시 아들에게 둘도 없는 친구인 인형에게는 더 없이 자상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마치 딸이나 며느리라도 되는양 말이죠.

"아빠, 하그가 또 이랬어."
"응. 그랬니. 참 잘했구나. 고맙다. 하그나스."

아들은 자신의 인형에게 너무 친절하게 접근하는 아버지 로빈슨에게 미묘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는 인형 '하그나스(...)'가 어디까지나 아들의 것이라는 걸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늘 그녀를 위한 옷을 부지런히 주문하며, 아름다운 이브닝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에게는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신청하는 퍼포먼스까지 할 정도였지만 말이죠. 하지만 하그나스와 춤을 춘 것은 물론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부유했던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꽤 많았는데, 그는 단호히 모든 청혼을 거절하기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늘 같이 술을 마시는 친구들이 오히려 더 소중했으니까요. 두 주에 한번씩 모여서 서민들처럼 거칠게 맥주를 1000ml 잔으로 들이부으며 피와 영광이 가득했던 군 복무 시절을 회상하다 아침이 올때쯤엔 토사물과 안주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뻗어버리는 그런 광란에 가까운 파티를 벌이는 남자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평소엔 모두 말쑥한 젠틀맨들이었지만요.

어느날 그렇게 뻗어있다가, 그는 아들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위층으로 올라가니 아들과 연인처럼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건 그 소녀 인형이었어요. 너무나 놀란 그는 술기운으로 헛것을 보나 하고 당분간 술을 끊기로 합니다. 거기에 도움을 준 건 로이디안 미망인. 그녀는 사라진 아내를 생각나게 할 만큼 따스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었고, 로빈슨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고 대해주었지만 인형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믿어버릴 만큼 조금 지나치게 바보같은 성격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를 따라 가게 된 어느 강연에서 로빈슨은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연설자가 그때의 그 인형사였기 때문이에요. 그는 사람의 혼을 인형에 담는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최근의 성공작을 하나 선보입니다. 그건 아내의 인형. 누가 보아도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내를 꼭 빼닮은 그런 인형이었습니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드, 나와 같이 영원히 살아요."

그는 이렇게 단호히 답하고 맙니다.

"거절하겠어. 당신은 더 이상 내 아내가 아냐. 인형일 뿐이지. 인형이 되어 영생하느니, 200리터의 흑맥주 속에 빠져 죽겠어."

인형이 된 그녀를 단호히 뿌리치고 나온 로빈슨을 친구들은 엄청난 환영으로 맞으며 또 다시 광란의 파티로 인도합니다. 진짜로 200리터의 흑맥주를 그를 위해 준비한 거죠. 그야말로 난장판. 삶을 긍정하는 환희의 찬가와 함께 그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쭉 뻗어버립니다.

깨어났을때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로이디안 미망인.  

"미스터 로빈슨. 제가 당신 아내의 대신이 될 순 없는 건가요. 전 살아있는 사람인데.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 돈이 아니라, 이렇게 술조차 이기지 못하는 여린 당신 마음을 사랑하는데. 지켜주고 싶은데."
"당신은 좋은 여자요. 내겐 너무 과분해. 이런 엉망진창인 내겐, 차라리 저 인형 하그나스가 더 어울리는 짝일 지도 모르겠소. 그래서 내 아내도 인형이 되고 만 거요. 모두 내 책임이오. 날 떠나시오. 두번다시 나타나지 마시오. 당신은 훌륭한 여자요. 더 좋은 상대가 있을 거요."

그 때 하그나스의 눈동자가 그의 아들을 향해 잠시 돌아갔다는 것은 아마 그는 보지 못했을 겁니다.

분노에 찬 로이디안 미망인은 그가 집에 없는 틈에 하인들 몰래 들어와 그의 아들이 안고 자고 있는 하그나스를 빼앗아듭니다. 칼을 들어 거칠게 목을 잘라버리려 하자 하그나스는 미약하나마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비명을 지르고, 아들은 연습용 레이피어를 집어들고 미망인을 공격하지만 어린 소년의 힘으로는 미친 여자의 거친 손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그나스의 머리는 잘려나가 정원 연못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너 없인 더 살수가 없어! 난 오직 너 뿐이야!"

절규와 함께 아들은 연습용 레이피어의 끝으로 자기 눈을 찔러 자살하고, 로이디안 미망인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2층 발코니에서 목을 매고 맙니다. 그녀가 죽자마자 허술하게 묶인 줄은 곧 떨어지고, 시신은 연못에 빠집니다. 슬프게 웃고 있는 하그나스의 머리가 미망인의 뒤틀려 꺾여버린 목 위에 둥둥 떠올라, 사람의 얼굴인 것처럼 그렇게 흘러 낙옆이 가득한 연못 구석으로 밀려갑니다.

Part 2.

걸핏하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누나에게 기습 키스를 하는 등 장난이 심한 남동생을 둔  로이디안 공국의 공주 이난나는 어느날 남매를 태운 마차가 고장나버려 잠시 길거리에 내려섰다가, 자신들의 마차가 지나가던 인형사를 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발굽과 마차바퀴에 처참히 짓밟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녹색 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진 소년 검사 인형만이 그 곁에 똑바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난나는 그 인형을 가지고 궁으로 돌아옵니다.

밤이 되자 인형은 깨어나서 자기 검을 뽑아들고 이난나의 앞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 때문에 너무 놀란 공주 이난나는 처음엔 두려워했지만, 곧 그의 순수함과 바보같은 단순함에 조금씩 마음을 풀게 됩니다.

"이름이 뭐야?"
"사이버트."
"좋아. 나의 기사 사이버트. 넌 앞으로 날 지켜줘. 보답으로 내가 줄 건 최고의 명예."
"감사합니다. 이 몸이 부서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잠든 그녀의 침대 곁에 늘 칼을 들고 서서 밤을 지새우는 사이버트. 궁 안의 사람들은 그저 공주가 겨우 여자애다운 취미를 붙인게 하필 기사 인형이냐면서 몰래 비웃곤 했는데, 그건 이난나 공주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검술 훈련을 하고 승마와 사냥에 몰두했기 때문이에요.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남동생에 비하면 훨씬 강단이 있는 공주님이었지요.

남동생 리시스는 처음에는 누나의 인형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략결혼한 나이 많은 아내에게는 처음부터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그의 눈에는 어릴때부터 함께 있던 누나만이 가득했지요. 그 옆에 있는 인형은 그저 새로 생긴 장식품이겠거니 할 뿐이었습니다. 외국 사절과 만나는 자리에서 누나에게 기습 키스를 해버리는 바람에 냅다 뺨을 맞아버린 그 날까지도.

"이게 무슨 창피야! 넌 왕족으로서의 자각도 없어? 우린 더 이상 어린 애가 아니야. 이런 짓거리 한번 더 했다간 정말로 내쫒겠어. 아니, 죽여버릴 거야. 리시스."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못하고, 누나에 대한 마음만 불사르던 리시스는 결국 밤에 몰래 누나의 침실에 숨어들었습니다. 마취약을 들고 말이죠. 인형 사이버트가 붉은 눈을 빛내며 서 있는 것이 굉장히 거슬렸지만, 그 시선이 닿지 않게 돌아가 누나를 덮치고 마취약이 묻은 수건을 입에 덮어버릴 때까진 좋았습니다.(대체 뭐가)

"리시스! 으읍!"
"포기해. 누나, 아니 이난나.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누난 결국 날 사랑하게 돼. 왜냐고? 내가 누나를 사랑하거든. 오늘 밤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게 될거야."
"으으읍!"

마취약 기운으로 몸에 힘을 잃은 그녀의 옷을 벗기려다, 목에 서늘한 기운을 느낀 리시스는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사이버트와 눈을 마주칩니다.

"감히 인형 주제에!"

분노한 리시스는 곁에 있던 누나의 검을 집어들고 그 인형을 내리칩니다. 하지만 인형은 가볍게 그 검을 막고는 나직하게 중얼거립니다.

"공주님을 해치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인형 사이버트는 날카롭게 날이 선 자신의 검을 휘둘러 단 일격에 리시스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사이버트?"

간신히 약기운이 풀린 이난나는 자신의 몸 위에 떨어진 리시스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어째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동생의 피로 온몸이 젖은 그녀는 사이버트를 다시 바라봅니다.

"무슨 짓이야!"
"공주님을 지켰습니다."
"인형 주제에 이 나라 왕위 계승자를 죽였어!"
"공주님을 해쳤을 겁니다."
"닥쳐! 앞으로 움직이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곧 사람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인형이 그랬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어요. 사이버트는 여느 인형처럼,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거든요. 공주는 혈육을 죽인 죄로 체포되었고, 리시스의 아내였고 대제국의 귀족 출신인 로이디안 부인(이제 미망인)의 분노를 살까 두려웠던 공국의 사법부에선 결국 무기 징역을 내렸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단 하나만을 가지고 갈 수 있었는데, 공주님은 사이버트를 선택했습니다. 거긴 아무도 탈옥할 수 없지만, 대신 아무도 그 안을 통제하지 않는 곳이었지요. 여자가 들어온 것은 아마 처음이었을 겁니다.

"자, 여기서나 날 지켜줘."

하지만 사이버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수십년동안 여자를 본 적이 없던 죄수들은 공주를 향해 탐욕스런 눈빛을 빛내며 다가왔고, 이난나 공주는 온 힘을 다해 그들에게 저항했지만 몇 놈을 때려눕힌 뒤에 결국 그들에게 철저하게 짓밟힌 그녀를 사이버트는 여전히 붉은 눈을 빛내며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대체 왜 아무 짓도 안했어? 대답해."
"공주님이 원하신 겁니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것. 저는 오직, 공주님의 명령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이난나는 사이버트를 안은 채 감옥 경계 밖으로 달려갑니다. 거길 통과하면 반드시 살해하게 되어있는 그 선을 넘어서자 모든 간수들의 총구가 그녀를 향했고, 그녀는 그렇게 인형과 함께 산산조각나 감옥 밖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지극히 냉정했고, 이난나의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인형은 폐기물로 간주되어 버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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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군에게는 미안. 근데 진짜 이런 꿈 꿔버렸음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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