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메카린 이야기에 바침*
-지키는 것의 의미-

"네가 츠뮤니?"
알수없는 귀기와 위압감 정도는, 나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사람을 닮아있다. 하지만 이쪽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 대신 단단한 갑주로 얇은 몸을 감싼 이 여자는 좀더, 좀더 훨씬...
"아, 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동생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다. 잘해보자."
파피 언니의 사정이 있어 오늘 하루 검 수행을 대신 해주러 온 여자. 그녀는 그 말만 하고는 짧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기며 투구를 쓴다.
"뭐해. 얼른 따라와."
"네? 여, 여기서 하는게 아닌가요?"
"응."
"어, 어디로?"
"이봐요 귀하신 몸."
한 손으로는 들 수도 없을 것 같은 긴 검날이 어느새 목에 와 닿아 있다. 반응도 하지 못한채 나는 굳어버렸다.
"난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아. 나한테 검을 배우고싶어? 따라 와. 싫으면, 집에 가세요."
뭐,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하지만 난 검을 배워야 해.  이런 수모같은건 저 잘난 왕궁이란 곳에서 당하는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생각하는 사이 그녀는 휘적휘적 어깨에 검을 둘러매고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짧은 다리로 줄달음쳐 그녀에게 달려갔다.

"한심하긴."
여자의 말에 무어라 반박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숨이 턱에 닿는다. 이렇게 험악한 마수들이 길길이 날뛰는 계곡으로 데려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날개달린 마수들이 주위를 맴돌며 커다란 칼을 휘두르지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우리 둘을 다 갈갈이 찢어버릴 것 같은 이 상황에서 저 여자는 초연히 서서 내가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암살일까? 후계자를 베기 위해서 보내진 여자 아닐까? 그럼 대체 누가? 어머니가 이런 여자의 존재를 묵과할리는 없을 텐데, 혹 나를 유인해 놓고 그 사이에 츠키를? 그런 식으로 쉽게 처리할 리가 없는데, '그녀'는 절대 그렇게 일을 쉽게 진행하지 않아.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 아무리 느려도 단계를 건너뛰지 않는다.
그게 내가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 그녀의 방식이야.
하지만 이 여자는 달라.
대체 이 곳에 날 데려와서 어쩌겠다는 거지? 역겨움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이스 볼트 정도의 마법으로는 어떻게 막아낼 수가 없는 적들은 검으로 베어야 했고, 그 선뜩한 느낌이 날 미치게 만들만큼 계속해서 와 닿았다. 주위의 풍경은, 내가 만든 시체의 벌판은 도저히 구토를 참을 수가 없을 만큼 끔찍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저 여자는 긴 검을 어깨에 걸친 채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벌써 지쳤어?"
"당신! 도대체 내게 뭘 바라고!"
"가르쳐주는 거야."
"대체 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잖아!"
"지금은 아직 가르침을 줘도 소용 없어. 넌 아직 준비가 안됐어."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이딴 살육행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더 외칠 기운이 없어 마수의 피가 흐르는 그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그녀가 다가와 긴 검 끝으로 내 턱을 들어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잘 들어요. 공주님. '그딴 살육행위'에 인생을 걸고 있는 여자도 있어. 우습게 생각하면, 애초에 배우려 들지를 마."
말과 동시에, 우리들을 향해 달려드는 커다란 마수들이 보였다. 나는 엉겁결에 눈을 감으려 했지만, 여자가 크게 외쳤다.
"똑바로 눈 뜨고 봐!"
그리고, 뿌득, 강하게 이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그 긴 검이 내 머리 위로 완전한 원을 그리며 한바퀴 휘둘러졌다.
아름다운 곡선이다. 긴 궤적을 따라 피와 뼈와 살이 흩날리는데도, 열 몇마리 마수들이 순식간에 갈라진 고깃덩이가 되어 날아가는 데도 그 한순간의 동작의 아름다움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자는 다시 검을 어깨에 둘러맨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 있었고, 그 한번의 일격으로 우리 주위에 살아남은 마수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검은 이렇게 쓰는거야."
단계 같은건 깔끔하게 무시한다. 이런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정말 무식한 여자다. 저런 식으로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게 더 신기하다.
"아, 아직 나에겐 무리에요."
고개를 숙이는 내게 다가온 그녀는 이내 한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이봐요. 검은 왜 배우지?"
이 힘든 수행을 시작한 뒤로 수없이 나 자신에게 되물은 질문. 대답은 늘 같다.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
"지켜? 네 주제에?"
여자는 피식 웃었다. 기분나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모든 가치를 깔아뭉개는 저 웃음.
"지킬 수 있어요!"
"퍽이나."
그녀는 일어나더니 느닷없이 검을 들어 내 머리위로 바로 찔러들어왔다. 엄청난 속도다. 이제 검술을 막 시작한 내가 반응도 할 수 없는 그런 속도로, 하지만 찔린 건 내가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아직 살아남은 마수 하나가 내 목을 노리고 둥글게 휜 검을 치켜든 채 목이 꿰뚫려 있었다. 그녀가 검을 위로 쳐올리자, 마수는 저 멀리 날려가 쓰러져버렸다.
"지키는 건 말야. 대신 아파하는게 아냐."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녀는 부드럽게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냈다.
"못 알아듣는구나. 츠메카린 츠뮤. 오늘 수업은 그만."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그녀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내려가다 멈추었다.
"니니언니! 무슨 짓한거야! 이런델 데려오면 어러케! 저 애는 우리 같은 무가의 여식들하곤 다르단 말야!"
"아니 그래도 저기..."
"언니 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르지 말래두!"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파피언니. 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에, 나는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대신 아파하는게 아니라고."
검을 쥐었던 두 손바닥에 피물집이 잡힌다. 아프다.
하지만 그럼 지키는 건 뭐지.
계곡 사이로 보이는 좁은 회색 하늘이 나를 향해 히죽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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