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상한 세르반도니가
보통, 개미는 '여자'다.
땅별
2006. 10. 13. 10:23
(먼저 이 글은 채널예스 예스칼럼, 듀나의 투덜투덜 최근 연재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개미>, <벅스라이프> 모두 '개미'를 소재삼은 3D 애니메이션입니다. <1984년>을 떠올리게 하는 <개미>, 그리고 어릴적부터 자주 들었던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변용한 <벅스라이프>에 이어, 이제는 아득한 옛 영화가 되어버린 <아이가 줄었어요> 를 생각나게 하는 최근작 <앤트불리>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들은 '개미'라는 소재상의 공통점 이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개미 사회에 대한 집요한 왜곡이에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데뷔작 <개미>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좀더 잘 와닿을 겁니다. 개미 사회에서 수컷은 오로지 생식을 위해서만 태어나고 길러지는, 여왕개미 후보생을 제외하면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비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특이한 소수 집단입니다. 그들은 그 한 순간의 빛나는 비행을 위해 일생동안 게으름피우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지요. 싸우고 일하며 개미 사회를 존속시켜 나가는 건 모두 생식능력이 배제당한 암컷 개미들 뿐입니다.
그런데 위 애니메이션들에서 보여지는 세 개의 개미 군락들은 어찌된 일인지 수컷 개미들이 날개도 없이 전투에도 나갈 뿐더러 노동에 종사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평범한 개미'로 묘사되고 있는 <벅스라이프>와 <개미>의 주인공들은 둘 다 남자이며 모든 행동에서 남성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아름다운 히로인까지 기다리고 있죠. 우리 모두가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히로인, '공주님' 말이에요.
실제의 여왕개미는, (계층 나누는 걸 좋아하는 인간들이 이름지어줬기에) 이름만 여왕일뿐 자신이 일군 사회에 속한 모든 개미들의 어머니일 뿐입니다. 정치적인 권력은 전혀 없죠. 개미 사회의 모든 개미는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에선 모두가 여왕개미를 떠받들어요. 게다가 위의 두 영화에서 여왕은 늘 무력하며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음모에는 놀랄 정도로 무심하고 무지합니다. 그 가련한 할머니들을 지키는 건 언제나 우리 주인공 남자 개미들. 여성은 고귀하나(정말?)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걸 눈에 띄게 역설하는 두 이야기가 아이들을 위한 것인양 홍보되었다는 것이 더욱 무서운 일입니다. 열 세살짜리 아이들이 '여자는 먹는 거야.' 라고 아무 죄책감도 위화감도 없이 말할 수 있는 이 사회를 만들어낸 건 이런 이야기들이에요.
최근작 <앤트 불리> 역시 이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마법사 개미와 그 여자친구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은 '남자가 무엇인가 해내고, 여자는 그것을 돕거나 방해한다' 는 공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처럼 "전쟁이란게 워낙 지독한 것이라야 말이지." 라는 변명조차 아무도 하지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는 여자를 보조적인 위치에 내려놓습니다.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이야기가 흥행에 성공한 예는 거의 없지요. 언젠가 들은 거지만 '여성 주인공이거나 여자 작가이름이거나 표지에 여성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은 관련 출판사에서는 되도록 취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팔려나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판타지소설의 주 소비층인 10대 남자들에게 전혀 어필할 수 없다는 거죠. 비단 장르소설만일까요? 최근 국내에서 가장 큰 대중예술 시장일 영화 쪽을 봅시다. 요즘 이글루스에서 자주 떠도는 한국 영화 50선 에서 처음 10개 리스트만 보겠어요.
1위.괴물(2006) ---> 12,965,700명
2위.왕의 남자(2005) ---> 12,302,831명
3위.태극기 휘날리며(2004) ---> 11,746,235명
4위.실미도(2003) ---> 11,081,000명
5위.친구(2001) ---> 8,181,377명
6위.웰컴 투 동막골(2005) ---> 8,008,622명
7위.쉬리(1999) ---> 6,209,898명
8위.투사부일체(2006) ---> 6,105,431명
9위.공동경비구역 JSA(2000) ---> 5,830,228명
10위.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2005) ---> 5,635,266명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10위 <가문의 위기> 뿐입니다. 그나마도 여자는 시집을 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깔고 있는 상황이에요. 세상에. 그래요, 6위 <웰컴투 동막골>도 어느정도 인정은 해줄 수 있겠습니다만, 결국 장애를 가진 그녀는 죽어야 했습니다. <왕의 남자>요? 공길의 여성성은 그의 예술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인간 사회는 물론 개미 사회와는 다릅니다. 인간은 개미처럼 의식적인 결혼비행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번식하고, 날때부터 생식능력이 배제된 신분층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의 수컷은 개미의 수컷보다 훨씬 할 일이 많습니다. 네 인정해요. 드라마 내적 요구사항을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것 정도야 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수많은 동물학자들이 다른 사회를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사회에서 부족한 것을 다른 사회에서 발견하기 위함이지, 결코 인간 사회가 그 쪽 사회보다 우월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조차 인간사회의 기본형에 맞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는 <앤트 불리>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서 만났던 두 영화 <개미>와 <벅스라이프> 에서 저지른 실수를 좀더 완벽하게 저지르고 있는 스토리라인을 가진 <앤트 불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덧붙여서 주변에 이 영화를 자녀들에게 보여줄 계획을 가진 부모가 있다면 뜯어말리고 싶습니다. 차라리 좀 오래된 소설이긴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쥐어주는 편이 '아이들 교육'에 좀더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