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상한 세르반도니가

야수 VS 공공의적1,2

땅별 2006. 7. 4. 22:13

*주의 : '야수'에 대한 치명적인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안보신 분은 스크롤을 내리지 마세요.
설경구라는 배우의 힘으로 완성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개의 '공공의 적' 시리즈입니다. 형사 강철중은 시종일관 약한 이들을 괴롭히고 범인 잡는데는 딱히 열성적이지 못한 불량 형사지만 자기 투자 이익을 지키려고 부모를 죽이는 반인륜적 범죄 앞에 분노하며 날뛰지요. 2편의 검사 강철중은 그렇게까지 불량하진 않지만 다들 등 뒤에선 한마디씩 할 정도로 답답한 사람입니다. 고교시절부터 악연을 맺은 부잣집 둘째아들이 역시 가문의 재산을 노리고 형을 해치려 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에 분노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포에 나섭니다. 두 영화 모두, 좋게 끝나지요. 정의로운 주인공은 승리하고 공공의 적은 결국 잡히고 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외로운 싸움의 끝에 승리가 오는 그 카타르시스가 두 영화의 골조예요.

이제 '야수'를 보겠습니다. 범인을 체포하는 것보다 두들겨 패는게 먼저인 폭력형사 장도영. 그리고 나쁜놈 잡아쳐넣기 위해 가정도 아내도 소홀히 한채 매달리는 검사 오진우. 마치 공공의 적 1, 2편에 나온 두 강철중이 한 자리에 모인 것만같은 이들의 회합은, 폭력조직의 우두머리 유강진을 잡아넣기 위한 연합이었죠. 그는 '공공의 적'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반인륜적 범죄 같은건 저지른 적이 없지요. 오히려 가정에 충실하고 종교활동도 하고, 겉보기에는 완전히 교화되어 사회 봉사활동까지 성실히 하는 기업의 회장님이십니다. 정계진출까지 노리고 계세요. 그는 우리 사회에서 행복의 지표로 여겨지는 것을 다 가졌습니다. 그림으로 그린듯한 가족과 믿고 따르는 부하 직원들, 그들의 기업체. 사회적 선망까지.
반면 우리의 두 주인공은 어떨까요. 검사 오진우는 농촌에서 자라 간신히 출세했지만 일에 매달리는 사이 아내는 결별을 선언하고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지방으로 한참 뺑뺑이까지 돌았죠. 형사 장도영의 어머니는 몸져 누웠고, 자신이 직접 감방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다른 동생은 어머니 수술비 때문에 유강진의 조직에 손을 벌리다가 '제껴' 지죠. '공공의 적'에서 두 강철중이 가졌던 믿고 따라주는 소수의 동료조차 그들에겐 없습니다. 오진우는 검찰의 위신을 생각하는 동료나 선배 검사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장도영은 폭력적인 체포 방식 때문에 정직처분 당합니다. 말 그대로 '야수', 버림받은 이들입니다.

"헤어져?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최소한 악화되지는 않아!"
"나도, 행복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주말에 갈비도 뜯고 말야."

유강진은 적이라기엔 너무나 강했습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간신히 모든 증거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순간, 유강진의 하수인들은 손바닥 뒤집듯 그 것들을 박살내고 오히려 두 사람을 피의자 인권 유린의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만듭니다.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나본데, 그거 알아? 이기는게 정의야."

오진우는 모든 삶을 걸고 있던 검사 신분을 박탈당하고, 장도영은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살던 어머니를 잃고 맙니다. 그들에겐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야수'를 궁지에 내 몰면, 발악하며 사냥꾼을 무는 법. 그들은 주저없이 유강진을 향해 총을 쏩니다. 법이라는 무기도, 수갑이라는 무기도 이제 더 필요 없습니다. 그 무기는 더이상 그들에게 아무 힘도 되어주지 못하니까요.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을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두 야수는 그렇게 결말을 짓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로.
형사였던 장도영은 유강진을 향해 총을 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죽고, 검사였던 오진우는 국회의원 유강진 살해범이 된 채로 영화가 끝납니다.

그렇습니다. '공공의 적'과 같은 해피엔딩은 없습니다.
두 명의 강철중은 '공공의 적'에게 승리하여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적들은 '공공' 의 적이라는 점이에요. 누구라도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적들이었죠. '인물'이었습니다. 유강진은 이 영화에서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한 권력을 대변하는 하나의 운명이죠. 마치 고대 그리스비극의 영웅들처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향해 두 야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고, 그리하여 파멸했습니다.

인간은 한 인간과 투쟁하여 이길 수는 있지만, 운명 앞에선 한없이 무력합니다. 하지만 운명과의 투쟁은, 그 것 자체로도 그 인간을 고귀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파멸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을 자신의 방법으로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른 이들처럼 그저 세계가 그들에게 부여한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거죠.

행복하지 않을 지 몰라도, 의미있다면 그것으로 그 삶은 충분합니다.
그것이 '공공의 적' 을 잡아 행복하게 자신의 존재를 지킨 두 강철중과, 야수처럼 표효하며 모든 것을 불사르고 사라져간 오진우, 장도영의 차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