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와지의 숲/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4. 페레그린 툭

땅별 2006. 6. 9. 21:22


팔라딘의 아들 페레그린
사인 페레그린 1세

1500여년 전에 샤이어 땅에 호빗들이 이주해 왔을 때 그들은 당시엔 아직 건재했던 아르노르 왕국의 국왕으로부터 샤이어에의 영주권을 획득했고, 이후 줄곧 국왕의 신하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왕국이 멸망하던 최후의 전투에도 앙그마르의 마술사왕에 대항하기 위해 소수의 호빗 궁수들이 참전했다는 기록도 알려져 있다.
아르노르 왕국이 멸망하고나서는 그들 중 유력한 족장 중에서 '사인'이라 칭하는 국왕의 대리자를 스스로 선출했는데, 툭 집안은 대대로 이 사인의 자리를 이어받아왔다. 여전히 호빗들은 스스로 국왕의 신하라고 여기고 있으며, 오크나 고블린, 트롤 등의 '점잖치 못한 족속들'을 일컬어 '국왕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라고도 불렀다.

그들이 살고 있는 턱버로우는 샤이어에서 가장 큰 호빗굴집으로, 빌보의 백엔드나 브랜디벅 집안의 브랜디 홀도 대저택이지만 이 턱버로우에 비하면 오두막이나 다름없다. 십수세대에 걸쳐 계속해서 증설되고 내부로도 확장을 계속한 끝에 큰 입구만도 여러개인 이 거대한 굴집은 사인의 궁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샤이어의 명소 중 하나이다. 피핀은 바로 이곳에서 자라났다. 곤도르에서 사람들은 피핀을 '에르닐 이 페리안나스(=반인족의 왕자)'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는데, 이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피핀에게 어울리지 않을 호칭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게 전통 있는 명문가의 자제이긴 해도, 그의 생활이란 보통의 호빗청년들과 전혀 다를 게 없어서 여섯끼 식사를 한번이라도 거르면 곤란하고, 맥주와 연초를 너무나 사랑하며 온갖 장난질은 다 하고 다니는 대표적인 꾸러기 중 하나였다. 아침은 두번 먹어야 하고, 아점과 점심이 있고, 새참과 저녁 만찬을 모두 챙겨 먹는 것은 일반적인 호빗의 삶이지만, 피핀에게는 특히나 더 중요해서, 곤도르에 있을 때 하루 세번 빵과 물과 버터만 먹던 그 시간은 피핀에겐 가장 암울했을 것이다.
"예의바른 이들이 사는 곳이라면 맛있는 음식과 괜찮은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주막이 당연히 있을 걸로 생각했는데요."

그의 집안 선조들 중에는 과거 혹한의 겨울 시기에 고블린들이 샤이어에 침입했을 때 적장의 머리를 몽둥이 한번으로 멀찌감치 날려버린 유명한 반도브라스 툭(황소울음꾼 툭)이 있는데, 피핀도 그 용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고 (누구나 그랬듯) 매우 동경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 닥친 모험에는 고블린 같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모르도르 오크나 우르크하이, 트롤, 아니 심지어는 나즈굴 같은 무시무시한 것들이 가득했으니, 그가 용감했던 선조의 피를 선보일 기회는 거의 없었던 것도 어쩌면 안타까운 일이다.

호기심이 많은 것은 사실 꽤 많은 젊은 호빗들의 버릇이다. 샤이어 안에서라면 호기심이란 조금 야단을 맞을 거리이긴 해도 크게 위험할 것은 없었으나, 피핀은 그 호기심 때문에 대형 사고를 두번이나 치고 만다.
"다음엔 네가 직접 뛰어들어라! 그러면 더이상 걱정할 일도 없을테니까!"
"바보지만, 아직은 정직한 바보야."
두번이나, 그 신중하고 용맹하며 현명하고 위대한 마법사 간달프를 간떨어지게 했으니 이정도면 피핀의 호기심은 반도브라스 툭의 용맹 만큼이나 기록에 남을 법하다.

장난도 심하고 음식을 사랑하며 호기심이 많긴 하지만, 아주 철없는 어린아이는 아니어서(원정 당시의 그의 나이는 27세인데, 인간으로 치면 18세 가량에 해당한다) 자신 때문에 죽은 보로미르를 떠올리며 그 값을 해보려 애 쓰고, 그에 따라 곤도르의 기사가 되며 파라미르의 목숨도 구하게 된다. 더욱이 봉화대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호빗들은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소년기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굉장한 용기를 보여주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검은문 전투에서는 모든 서방 자유민들의 입장을 대표하기 위해 샤이어 호빗들의 대표로 뽑혀 아라곤과 나란히 나가 섰으며, 이때만큼은 그도 저 반도브라스 툭을 앞설 만큼 용맹하게 싸웠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나스티리스에서 친해진 한 병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르도르의 트롤을 상대로 급소를 찔러 죽이는 위업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그의 재능 중에선 극히 일부분이다. 음식과 연초와 맥주를 즐기는 만큼, 그는 노래도 무척 즐겼으며, 부르기만 해도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을 만큼 즐겁고 신나는 우스운 노래들을 수 없이 알고 있고, 지어부르기도 했다. 이따금 만취해서 감상적이 되어 집에 돌아올 때는 우울하고 서정적인 노래를 부를 때도 있었겠지만, 그건 '절망이 유예될 수 있는 한 희망은 딱히 필요치 않은' 쾌활한 호빗인 그에게 일상적인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이 눈앞에 오고, 웅장한 왕궁 안에서 몰락을 눈앞에 둔 강대한 영주가 노래를 청했을때 그의 마음에는 생전에 겪었던 그 어떤 슬픔보다도 깊은 아픔이 깃들었을 것이다.

"이 쬐끄만 놈들아. 네놈들이 우리한테 뭘 어쩌겠다는 거야. 국왕이 돌아오면 모를까."
샤이어를 망치고 있던 깡패들이 앞에 나선 프로도를 조롱하자 피핀은 당당하게 검을 빼들고 나선다.
"내가 바로 그 국왕의 친구다. 넌 지금 서방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에게 까불고 있는 거야."
이후의 일은 물론 약간의 요란함과 함께, 엉망이 된채 도망치는 일단의 깡패들과 의기양양해 하는 호빗들로 마무리 된다.

이 샤이어 역사의 마지막 전투로 인해서 피핀은 집안에서도 크게 인정받게 되고(툭 집안만큼은 턱버로우를 근거지로 끝까지 그 깡패들에게 저항하다가, 마침내 메리와 피핀이 호비턴에서 버클랜드까지의 모든 주민들을 봉기시키자 사인의 권리를 다시 되찾았다.), 위로 형이 셋이나 있지만 아버지 사인 팔라딘 2세의 뒤를 이어 사인 페레그린1세가 된다. 샘이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 (정말로 얼마 안돼서)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고, 그들의 아들은 파라미르의 이름을 땄으며, 역시 사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노년에 이르러서 그는 메리와 함께 샤이어에서의 모든 자리를 내놓고 남쪽으로 떠나간다. 새집이나 뒤지며 말썽만 부리던 꼬마가, 구국의 영웅이자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아무 미련없이 떠나가는 모습, 대대로 샤이어에 전해져 '가장 훌륭했던 사인'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