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상한 세르반도니가

루루슈를 위한 변명

땅별 2007. 3. 24. 04:29
코드기어스 - 반역의 루루슈 제 22화를 보고

(미리니름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절대로 읽지 마십시오.)

이글루스 애니 밸리도 그렇고 네이버 블로그들도 그렇고 온갖 곳에서 루루슈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일본 특구'라는 취지 좋고 호응 좋고 전례없는 행사를 처음부터 망가트리기 위해 그 곳에 갔다는 것부터, 어이없는 실수로 유피를 살인마로 만들고는 주저없이 유피를 적으로 선언하며 죽이라고 명령하는 등, 욕먹을 짓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22화의 가장 가련한 피해자는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한 일본인도, 학살의 주범으로 전락해버린 유피도 아닙니다.

이제 계속 발동하는 자신의 기어스를 통제할 수 없게 된, 영영 제로의 가면을 벗을 수 없게 된 루루슈입니다.


제 22화 마지막 장면. 영영 꺼지지 않을 기어스의 불꽃 아래 흐르는 눈물.

네. 이제 루루슈는 가면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맨얼굴로는 이제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것, 곧 루루슈 란펠지의 삶, 덧붙여서 루루슈 비 브리타니아의 삶도 이제 영원히 끝장났다는 겁니다.

어렸을때 저는 슈퍼맨 영화를 TV에서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저런 힘을 가지고 뭐하러 저렇게 무보수 봉사활동만 해야 하는 거지. 나라면 차라리 저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겠어. 악당으로 몰려 전 세계로부터 탄압? 내가 지배하는 게 더 세계를 위하는 것인양 그 힘으로 꾸미면 돼. 그래서 부모님도 삐까번쩍하게 살 수 있게 해드리고, 친구들하고도 최대한 재미있게 놀거야. 어렸을 때니까 가능한 생각이죠. 지금 소중한 것을 그대로 가진 채 아무도 그걸 빼앗지 못하게 세계를 바꿀 수 있다. 남자애들은 이따금 하는 얘기입니다. 왜 이런 개인사적 얘길 하냐면,

루루슈, 겨우 고등학생이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전투가 체스처럼 진행될거라고 믿다가 실전을 수도없이 겪은 코넬리아에 의해 간단히 격파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를. 그리고 제로와 흑의 기사단이 발족했을때의 그 퍼포먼스. 그 분위기. 다분히 아이다운 발상 아닌가요? 아니 그보다, 기어스 능력자가 되었다는 걸 안 그 순간 '여동생 나나리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타도 브리타니아를 부르짖으며 행동에 들어갔다는 것부터가 다분히 아이나 할 법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영화 <스파이더맨> 중에서


어느날 갑자기 슈퍼 거미에게 물린 피터 파커에게는 아버지처럼 키워준 삼촌이 있었습니다.피터 파커는 어린애처럼 메리제인에게 잘보이려고 차를 사기 위해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는 프로 레슬링 알바를 뜁니다. 하지만 레슬링 관계자는 돈을 주지 않았고, 복수심으로 그는 레슬링 사무실을 턴 강도를 놓아줬다가 그 결과로 소중한 삼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그는 여러분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되었죠. 어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루루슈는 어떤가요. 어머니는 죽어버렸고 아버지는 그를 방목해버렸습니다. 세계 자체인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도 루루슈는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집니다.(그리고 이 점에서, 황제는 루루슈를 제대로 평가했습니다. 정말로 루루슈는 약한 인간이었으니까요) 그의 주변에는 지켜줘야 하는 여동생 나나리 뿐이었어요. 자신도 어린 아이면서 어른의 흉내를 내야 했던 이 소년에게 어느날 갑자기 기어스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한번도 자라볼 기회가 없었던 아이 루루슈는 마음껏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피터 파커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요. 그리고 그 결과로 소중했지만 몰랐던 이들을 전부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22화 지금.

좀더 끔찍한 것은, 루루슈는 자신이 기어스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기어스가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은 힘은 힘이 아니라 재앙일 뿐입니다. 기어스는 재앙입니다. 쥬라기 공원의 공룡들처럼.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처럼. 타이타닉의 빙산처럼. 모든 이야기에서 재앙이 언제나 그렇듯 기어스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은밀하게 아는 사람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서서히 재앙은 영향을 퍼트리기 시작합니다. 비렛타와 우리 불쌍한 '오렌지' 경을 비롯해 루루슈, 그리고 제로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 21화 중 한 장면. 유페미아 황녀의 예고없는 등장으로 대혼란에 빠진 학교에서 혼자만 계속 기어스 명령대로 벽에 표식을 남기는 소녀.


루루슈에게 주어진 기어스에 대해 다시 한번 짚어봅시다. 루루슈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을 실험 대상으로 연구한 스펙을요.

1. 한 사람에게 단 한번만. 철회는 불가능.

2. 당사자는 해당 행동에 대해 기억상실.

3. 발동 시간은 무제한. 조건이 달성되면 끝난다.

처음부터 기어스는 사용은 할 수 있지만 통제는 할 수 없는 겁니다. 통제란,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한다 안한다 뿐 아니라, 그 결과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을 말해요. 한번 시작되면 철회할 수 없고 중단시킬 수도 없다. 그런게 바로 재앙이죠. 루루슈라는 방출구를 갖게 된 재앙이 서서히 퍼져나오다가 마침내 유페미아 앞에서 폭발한 겁니다. 이건 우연한 일도, 예견할 수 없었던 일도 아닙니다.

우린 이미 무한으로 발동하는 기어스 때문에 미쳐가는 마오를, 그의 죽음을 보았잖아요.

루루슈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 마오와 같은 파멸 뿐입니다. 이미 소중한 것을 많이 잃고 나서야 진정 옳은 것을 하게 된다는 스파이더맨의 선택지는 그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는 '전부' 잃었으니까요.

아름다운 이상을 품었던 순수한 소녀 유페미아의 끔찍한 최후에 건배를.

죽어버린 루루슈와 그를 삼켜버린 제로에게 애도를.

그들을 죽인 것은 어느 누군가 한 인간의 의지가 아닌, 기어스라는 이름의 재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