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8. 데네소르
곤도르의 섭정 데네소르 2세
거진 26대 동안 곤도르를 다스린 것이 왕이 아니라 끝까지 섭정이었던 이유는, 물론 정통성을 가진 그들의 왕족이 왕국을 떠나 귀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있지만, 곤도르의 중기 역사 중에는 왕가의 내분으로 인한 뼈 아픈 상실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수의 축복을 입은 누메노르 혈통의 왕이 단명하는 하위 인간들과 혼인하고 그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왕족 카스타미르는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별의 도시 오스길리아스는 화염에 휩싸여 저 멀리 누메노르 왕국 시대부터 전해내려온 왕가의 기보인 '팔란티르' 역시 안두인 강물에 빠져 대양으로 사라졌다.
물론 그들은 곧 정권을 잃었고, 전쟁에 패해 움바르로 달아난다. 본디 남쪽의 아름다운 섬이었던 움바르는 이 때 곤도르의 통치로부터 벗어났고, 반역자 왕족들은 해적이 되어 그 후손들은 하라드인에게 굴복한 뒤 결국 사우론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움바르는 먼 훗날까지도 끝까지 곤도르와 항전하다가 반지 전쟁의 시기에 북방에서 내려온 두네다인 순찰자와 그의 괴상하고 공포스런 군대에 의해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서야 다시 곤도르의 영토가 되었다.
지혜로웠던 엑셀리온 2세 섭정 시대에 곤도르는 로한의 셍겔 왕이 보내준 재능있는 지휘관이며 충실한 섭정의 조언자였던 이방인 '소롱길'의 충고와, 섭정의 아들 데네소르의 무용과 용맹으로 점점 모르도르의 공격에 대해 굳건한 방비를 갖추게 되었다. 소롱길은 움바르를, 데네소르는 이실리엔을 각각 공략하여 곤도르의 영향력을 크게 넓혔던 것이다. 소롱길과 데네소르는 곤도르가 가진 수많은 문제에 대해 많은 점에서 같은 해결방안을 제시하곤 했으나, 오직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소롱길은 엑셀리온이 그 열쇠를 내어 준 아이센가드의 쿠루니르(=사루만)보다, 방랑하는 미스란디르의 조언을 따르길 원했지만, 데네소르는 쿠루니르같은 위대한 지혜자의 풍모 대신 떠돌이 참견꾼 같은 외모를 가진 이 회색의 방랑자를 결코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곤도르인들은, 엑셀리온 2세마저도 대체로 데네소르보다도 소롱길을 좋아하고 따랐으나, 그의 본명과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용맹하면서도 예민하고 선견지명이 있으며 통찰력이 깊었던 데네소르는 아마도 그의 출신을 미루어 짐작하고는, 미스란디르와 그가, 자신이 차지해야 할 '통치섭정'의 지위를 넘보기 전에 어떻게든 소롱길을 떠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데네소르는 물론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다 가졌지만, 그 자신감과 책임감으로 인해서 세월이 흐를 수록 점점 자신만이 곤도르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게끔 되어버렸다. 천여년이나 왕좌를 비우고 돌아오지 않는 엘렌딜과 이실두르의 후손들을 그는 믿지 않게 되었고, 왕은 더이상 귀환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이 왕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곤도르엔 왕이 없어. 그딴건 필요도 없어."
데네소르의 아들 보로미르 역시 그러한 아버지를 꼭 빼닮았고, 그리하여 데네소르는 단명한 아내보다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이 큰아들을 몹시도 사랑했다.
즉위한 다음에야 늦은 결혼을 한 데네소르2세 섭정은 남쪽 지방 출신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몹시 사랑했는데,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 순수한 여인은 결혼한지 12년만에 굳건히 방비된 도성 미나스 티리스에서 꺾여온 꽃처럼 시들어 죽고 말았다. 데네소르의 아내 사랑은 아마도 자신만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섭정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면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경쟁자 소롱길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만 했던 그는, 이해와 보살핌보다는 정복과 통치에 더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은 아마 자신의 아내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성 싶다.
어둠이 곤도르를 뒤덮고 있었고, 데네소르의 시대에 그의 두 아들은 곤도르의 대장으로서 사우론의 잔당들과 수없이 전투를 벌여 승리했지만 데네소르는 오스길리아스에서, 움바르에서, 이실리엔에서, 안두인 강 너머에서 적의 군세가 약화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암흑탑의 군주는,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백색탑의 영주를 단 일격에 내치고 서쪽의 자유 종족들을 멸할 준비를. 데네소르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루만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팔란티르를 본 것이다.
팔란티르는 누메노르 왕조 시대에 서녘의 요정들이 전해준 선물로, 위대한 보석 실마릴을 빚은 장인 페아노르의 작품이며 모두 일곱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들은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을 볼 수 있으며, 서로 다른 곳에 있는 팔란티르끼리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누메노르 왕조가 몰락하고 바다가 갈라져 세상이 휘어지면서 이 돌들은 엘렌딜의 배에 실려 가운데땅으로 왔고, 엘렌딜과 이실두르의 시대에 이 돌은 각각 미나스 이실, 오스길리아스, 미나스 아노르, 오르상크, 포르노스트 등 북왕국과 남왕국의 요지마다 하나씩 놓여 있어 왕족들은 이 돌을 통해 서로 연락함은 물론 가운데땅의 모든 곳을 보고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미나스 이실이 정복되어 미나스 모르굴이 되면서 팔란티르도 잃게 되었고, 이 것이 사우론의 손에 들어가자 후대 곤도르의 모든 왕과 섭정들은 팔란티르를 보지 않게 되었다.
데네소르는 팔란티르를 보았다. 그는 사루만처럼 강대한 권능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인간 중에서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강직했다. 그리하여 사루만처럼 사우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마음은 먹지 않았으나, 인간답게 사우론의 권세를, 하나 하나 눈으로 확인하고 자신과 비교하게 되었다. 사우론이 가졌으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우론이 절실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것을 과연 자신은 손에 넣을 수 있는가.
"팔란티르는 위험한 물건이야. 내가 이쪽에서 보는 동안에, 저쪽에서 누가 또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르지 않나."
사루만에 대한 간달프의 충고는 너무 늦었지만, 그나마도 데네소르에게는 닿지도 못했다. 데네소르는 회색의 순례자 미스란디르를 거의 만나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데네소르는 팔란티르를 통해 곤도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은 물론이고 더 먼 곳의 일도 면밀하게 예지함으로써, 가신들과 백성들을 매일 놀라게 했다.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오? 당신은 현명하다고 불릴 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오. 백색탑의 눈이 먼 줄 아시오? 난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소."
그러나 그 댓가는 컸다. 매일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사우론의 붉고 커다란 외눈과 의지를 겨루면서, 데네소르는 장수를 약속받은 누메노르인의 후손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빠르게 늙었다. 그는 아라곤과 비슷한 연배에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육신이 늙었다는 것은 그의 정신도 그만큼 쇠락하였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약해진다고도 하지 않던가. 소중한 그의 곤도르를 지키기 위해 장수의 축복을 희생하면서까지 팔란티르를 보았건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곤도르가 곧 파멸되리란 예측 뿐이었다. 그는 이제 북방에서 나타났다는 '이실두르의 재난'을 자신의 손에 넣기 전에는, 그 어떤 준비도 소용없을 것이라 여겼다.
"내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지만 통치에는 실패하셨고, 내가 곤도르를 부흥시키길 원하고 계시오."
그러나 소문의 그 '이실두르의 재난'을 찾으라고 보낸, 사랑하던 큰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오직 뿔나팔만이 두동강나 안두인 강을 따라 두동강나 떠내려오고 말았다. 암흑탑의 권세는 하나 하나 백색탑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힘없는 인간 데네소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곤도르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였던 그는 이제 곤도르를 구할 길이 없어지자 절망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다. 섭정의 지위도, 아직 살아있던 둘째아들의 목숨도 모두 버리고, 그는 백색탑의 영주를 위대하게 만들었으나 암흑탑의 군주에게 굴복하게 만든 팔란티르를 품에 안고는 불길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필요 이상의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때로는 위대한 지혜자들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샤이어의 호빗 청년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때로는 용감한 요정 전사보다, 아무 힘 없어 보이는 샤이어의 정원사가 더 강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법이다. 인간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힘으로 인해 곧잘 파멸하는 법이다. 왕이나 왕이 아니었던 데네소르는 그러한 불운의 희생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