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발랄한 이야기를 쓰다보면 어쩐지 진짜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서 참 바람직하지만, 문제는 써놓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 별로 즐겁지도 발랄하지도 않은 것 같아 심각하게 무안해서 무지무지무지무지X200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내가 할줄 아는 건 이것 뿐인데 그나마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싶어서 웅얼웅얼웅얼...
"꺄아악!" 건조한 공기가 책냄새로 꽉 들어찬 왕궁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높은 비명 소리에 츠키에테는 왠 어린 아이가 다 이런 곳에 와 있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걱정스런 눈길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경악하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죠, 그 어린 아이는 바로 우리 공주님이 아니겠습니까. "누님! 누님! 어디예요! 무슨 일이에요!" 대형 서적 서고로 뛰어든 츠키에테는 바닥에 넘어져 있는 커다란 마법서를 밟을 뻔하다가 간신히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 여기야아." "누님?" 츠키에테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마법서를 훌쩍 들어올렸고, 그 아래에는 먼지투성이 츠뮤가 엎드려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이, 이런 건 말도 안돼. 정말 말도 안돼! 으흐흑!" 가늘게 떨리는 작은 어깨에 츠키에테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쥐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그런데 왕자님은 작은 공주님의 어깨를 짚으며 위로를 해준다는 것이, 그만 츠뮤가 움직이는 바람에 커다란 손으로 작은 붉은 머리카락 위를 턱 짚고 말았습니다. 울음이 뚝 그칩니다. 잠시 당황하는 사이 공주님이 고개를 들자 긴장한 손이 흘러내려 볼을 쓰다듬어버립니다. 화들짝. "야." "누, 누님?" "내가 고양이냐!" 퍼억! 격통이 배를 한번 울려줍니다. 왕자님은 각별한 아픔을 간신히 참아내면서, 뒤집혀 눕혀진 마법서를 보기 위해 몸을 돌려 그 위에 올라 앉는 츠뮤를 바라보았습니다.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려다가 짧은 팔이 커다란 책장을 넘기지 못해, 결국 다른 손이 올라갑니다. 츠키에테는 얼른 책장을 붙잡아 줍니다. "츠키. 누나 혼자 할 수 있거든?" "하지만 츠뮤가 너무 걱정...억!" "누나라고 불러!" 다시 한번 퍼억! 왕자님은 풀썩 옆으로 쓰러지고, 허리에 두 손을 짚고 선 공주님은 야수의 눈길 같은 금빛 눈동자로 발밑에 뒹구는 흑장발의 청년을 내려다봅니다. "작아졌다고 자꾸 무시하는 거야? 난 네 누나고, 넌 내 동생이야. 지금 내가 갑자기 이렇게 됐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홱 돌아서려던 찰나, 끄응,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런, 너무 거칠었나요. 몸집이 작아서 파워가 제대로 안나오겠거니 하고 있는 힘껏 내질렀드니만, 생각보다 너무 쎘나봅니다. 아무리 작아졌다 해도 본질은 그 무시무시한 얼음공주님인걸요. "츠키, 괜찮아? 내가 너무 심했니? 일어날 수 있어? 잡아줄게." "으으, 누님 기준으로 너무 심한 공격은 보통 사람이면 죽는다고요." 츠키에테는 손을 뻗어 작은 츠뮤를 잡아봅니다. 하지만 끌어당긴다고 몸이 일으켜질 리가 없지요. 도리어 츠뮤가 딸려가, 폭, 안겨버렸습니다. 에구에구. "야, 야! 안되겠다. 파피엘 언니라도 데려올게. 놔봐." 응? 손에 힘이 오히려 더 들어갑니다. "잠깐만, 그냥 이러고 있어줘요."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놔!" 품에서 폴짝 뛰어나오는 츠뮤를 쫒아 츠키에테는 벌떡 일어납니다. 그 순간 다시금,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초리에 츠키에테는 섬찟해집니다. "장난이었지?" "하, 하지만 지금 누님이 뭘 해도 진짜 아프, 악!" 발등에 작렬하는 커다란 책등.
벌써 백 서른 권째. 마지막권은 크기가 작아서 츠키에테가 책장을 넘겨주지 않아도 되네요. 조금도 지치지 않은 눈으로 열심히 고대어를 읽어나가고 있는 츠뮤를, 츠키에테는 빤히 바라봅니다. 갑자기 책을 탁 덮고 츠뮤는 쌓여있는 크고 작은 책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역시, 왕궁에 있는 저주 관련 서적은 이게 다지? 이 백 서른 권 안에 사람을 다시 어린 아이로 만드는 저주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어. 그럼 저주가 아니거나,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중요한 서적을 감춰놓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응?" 츠키에테의 시선을 느끼고 츠뮤는 얼굴을 돌립니다. "왜 그런 눈으로 자꾸 보고 그래?" "그, 그야." "뭐." 어린 아이의 얼굴에 떠오르는 저 얼음공주같은 표정마저도 어쩜 그리 귀여운지 말을 하려니 츠키에테는 아까의 통증을 떠올리며 도로 입을 다뭅니다. "뭔데. 말좀 해봐라."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실래요 누님?" "내가 왜?" 잠시 멍해진 얼굴의 츠키에테가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귀여워져버리는 츠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어둑어둑해진 저녁까지 단 둘이 이러고 있으니 기분이 또 이상해집니다. 정신좀 차리자. 지금은 이 저주에서 풀려나는게 먼저다. 라는 생각에 츠뮤는 으음, 목을 가다듬고 동생을 올려다보며 묻습니다. "좋아. 안때릴테니 말해봐. 뭐 중요한거 알아내기라도 했어?" "아니, 그런게 아니고, 정말 안때리는 거죠?" "그렇다니까." "으음. 그니까, 지금의 누님이 너무, 귀여우셔서." "뭐? 아하하. 어디가 어떻게?" "그, 그렇게 물어보면," 츠키에테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생긋 웃는 츠뮤의 표정이 너무 매혹적이라서 슬그머니 작은 손이 옆구리로 다가오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요. "그니까, 눈은 스물 일곱군데가 귀엽고, 코는 서른 여섯 군데가 귀엽고, 귀는 마흔 네군데가 귀엽고, 입술은 아흔 여섯군데가... 크악!" "정신 좀 차려라. 난 니 누나야. 누나한테 작업하니? 으유우우! 너 어린 여자아이 좋아하는 그런 애였어? 누나가 널 잘못 키웠구나! 응? 응!" "으아아악 누님! 제발 그만!" 작은 손이라도 겨드랑이를 힘껏 꼬집는데 츠키에테는 온몸을 비틀며 용서를 구했지마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는 츠뮤는 놓아줄 줄을 모릅니다. 금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찔끔 떨어질 만큼이 되어서야 츠뮤는 작은 손을 살포시 놓았고, 겨드랑이를 쥐며 허리를 숙인 츠키에테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습니다. "자. 착하지? 누나 말 잘 들어. 혹시 도서관에 누군가 출입한 적이 없는지 한번 알아봐줘. 누나는 이 몸으로는 함부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수가 없으니까는. 알았지? 그 여자 오기 전에 기록을 봐둬야 해." 진지와 바보를 순식간에 오가는 남매였습니다. 츠키에테는 간신히 아픔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자꾸 어린애 취급하면 죽어!" 먼저 도서관을 나가다 말고 주먹을 흔들어보이는 츠뮤. 츠키에테는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 츠뮤는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지만 잘 닿지를 않습니다. 츠키에테가 다가가 츠뮤를 물러나게 합니다. "열어줄게요." "나도 열 수 있다니까!" "하지만 키가 안닿잖아요. 열어줄게요." 주먹을 치켜들면서도 물러서는 츠뮤. 츠키에테가 얼른 문을 열어주려던 순간, "공주님!"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들어오다 그 서슬에 츠키에테와 한덩이가 되어 넘어졌습니다. 저런. 누굴까요. 금색 눈동자에 짤막한 금색 머리칼. "스승님?" "니니엘?" "왕자님?" 바닥에 누운 츠키에테를 깔고 엎드려 있는건 니니엘. 그리고 그 옆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는 건 츠뮤. "아, 실례를!" 벌떡 일어서는 니니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전장의 여왕 답지 않게 저런 얼굴이라니. 츠뮤는 또 뒷머리를 긁적이며 멍하니 일어나 앉는 츠키에테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니니엘이 먼저 손을 뻗자 그만둡니다. "왕자님, 항상 경계를 하셨어야죠. 제가 아니라 자객이었으면 어쩌시려고요." "네. 스승님. 주의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츠뮤.... 누님이 옆에 있었으니까 괜찮았을 거예요." 니니엘의 손을 잡으며 일어나는 츠키에테를 보며 츠뮤는 뒤로 몇걸음 물러나 입을 샐쭉 내밉니다. 말뿐이라도 고마워라. 칫. "그런데 무슨일로?" "여왕이 지금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오고 있어요." "에?" 츠키에테와 츠뮤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 여자가 왜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