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상한 세르반도니가

진주만 감독판 VS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

땅별 2006. 11. 28. 08:18
경고 :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의 미리니름이 많습니다.
영화가 어째서 2시간 내외라는 분량 제한이 정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 등을 제외하고 일반 상업 영화의 대세는 2시간 라인인 듯 합니다. 그래서 감독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수많은 장면들이 "Cut the chase!(추적장면만 남기고 잘라!)" 라는 편집자의 외침에 잘려나가곤 하지요. 다행히도 요즘 세상에는 DVD 발매라는 편리한 수익성 사업방향이 있기 때문에, 잘려나간 장면을 영영 볼 수 없었던 1933년 <킹콩>의 시대와는 달리 편집당한 장면에 있던 배우들도 더 이상 안타까워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완전판 DVD에는 사루만의 최후에 대한 피터 잭슨 팀의 재해석 장면이 담겨 있지요. 극장판에서 이 긴 장면이 잘려나간 걸 알게 된 크리스토퍼 리는 시사회 참석을 거부할 만큼 실망했다지만, 그래도 우리는 언제라도 볼 수 있잖아요?

자, 오늘 비교해볼 영화 둘은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세밀한 고증을 거쳐 아름다운 화면으로 재탄생한 보석같은 영화들입니다. 먼저 이 두 영화를, 특히 <진주만> 같은경우는 혹평이 자자하지만 저는 모두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오늘의 비교는 '감독판'에 한정된 겁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 은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이벨린의 발리안이라고 거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완전히 허구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히말라야에선 박쥐남자를 가르치고 옛날 옛날 먼 옛날 저 먼 은하계에선 '협상자' 케노비 장군을 가르치더니 나니아에선 핀칠리에서 온 피터 페번시를 가르친 리암 니슨이 이번에는 이벨린의 곳프리 역을 맡아 함정임이 뻔한 곳에 아무 생각없이 뛰어드는 천연바보기사의 피가 흐르는 발리안을 가르쳤습니다.
한때 기마병으로 전장을 달렸지만(극장판에서는 언급이 없던 설정) 이제 대장장이가 되어 사제가 된 배다른 동생의 꾸준한 압박에도 불구하고(역시 극장판에 언급이 없던 설정) 성실히 살고 있다가 토끼같은 아이와 여우같은 아내를 잃은 발리안. 곳프리는 후계자가 없기에 고향에 돌아와 환영을 받았지만(역시 극장판에 없...), 아픈 상처를 계속 건드리며 떠나게 만들려는 동생을 죽이고 도망쳐버린 발리안이 그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자마자 추적자가 따라붙고, 결국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맙니다.
발리안은 속죄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지만 더한 혼돈의 땅만 보게 되지요. 광신적인 십자군을 이끄는 기 드 뤼지앵과 악당 레이날드는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애쓰고, 그들을 막아 평화를 지키려는 예루살렘의 국왕과 그의 여동생 시빌라는 어떻게든 발리안을 이용해 기 드 뤼지앵을 내치려 하지만 발리안의 순수한(이라고 쓰고 '천연바보라서' 라고 읽습니다) 마음은 이용당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 여기서부터 감독판만의 이야기.

킹덤 오브 헤븐, Dts.


시빌라에겐 아이가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인 국왕은 어린 시절 촛농을 손등에 떨어뜨리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걸 곳프리에게 들켰었고, 곳프리는 부왕에게 그 사실을 울며 고했댔지요. 예루살렘의 국왕은 그 천형을 짊어진 채 내내 가면을 쓰고 살다 젊은 나이에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고, 이 소년이 위에서 보듯 국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시빌라가 발리안을 그토록 원했던 것은 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줄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죠. 이벨린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흙투성이가 되어 메마른 땅에서 수맥을 찾아 뛰어다니던 발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빌라의 시선은 아이 아빠를 찾는 엄마의 것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이 역시 나병을 가지고 있었어요. 촛불에 손을 얹었다가 손바닥이 검게 타는 장면, 인장을 찍기 위해 명령서에 납을 흘리다 손등에 떨구고도 아무렇지 않은 장면들을 보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요. 시빌라는 평생 지켜본 오빠의 고통을 아이가 감내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만 독으로 자기 아이를 죽이고 맙니다.
레이날드 : "아이는 천국으로 갔소?"
극장판에서는 왕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인 것처럼 편집되었던 대사가 제자리를 찾는 거지요. 이후는 모두 같습니다. 반지의 제왕 완전판 DVD와 달리 액션 장면이 더 추가된 것도 없으며, 결말도 같습니다만, 시빌라와 발리안의 결합은 단지 '동방의 순수에 의한 결합'이 아니라 둘 다 아이가 있었기에 좀더 설득력이 더해집니다.


자, 그런데 <진주만>의 감독판을 볼까요.

플라스틱 재질인 속 케이스에 기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는 정도일 뿐인 다소 평범한 킹덤 오브 헤븐 케이스와는 달리, 진주만 감독판의 케이스는 상당히 화려합니다. 일단 단순한 박스형이 아니라 마치 미 육군 항공대의 보급품이었던 가죽 장정된 다이어리같은 외형에, 주요 등장인물을 메인으로 삼고 2차대전 당시의 징병 포스터를 패러디한 우편엽서도 들어있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짤막한 선전포고 결정 연설문도 프린트되어 담겨 있고, 일부 스크린샷도 상당히 좋은 화질로 프린트되어 있어요. 네 장의 디스크는 각각 비닐팩에 담겨 한장 한장 종이 슬릿에 들어가 있고요. 딱 열어봤을 때 '우와'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지요. 그런데,

그게 다예요.
경고2 : 어떤 분들에게는 아마 감당하기 어려운 잔인한 스크린샷이므로 접어둡니다.
극장에서 위와 같은 장면을 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저 잘려나간 신체 부위는 극장판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폭격장면에서는 제로센의 기관포에 찢겨지는 수병들의 모습, 콕피트 안에서 터져버리는 일본군 조종사의 모습, 동맥 출혈을 일으킨 한 장교의 목 부위 상처 등 섬세한 잔인함이 감독판에서는 모두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날, 1941년 12월 7일의 참상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듯 느낄 수 있게요. 이건 참 다행이에요. 쿠퍼 감독의 <킹콩>에서, 협곡 아래서 거대한 벌레들에게 잡아먹히는 선원들의 모습은 너무 잔인해서 잘려나갔고 이젠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에서 재해석된 그 장면을 통해 상상할수밖에 없지만 말이죠.

그러나 그게 전붑니다.

뭐 레이프와 에블린의 로맨스는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복원하는 좋은 시도였지만 말이죠. 가장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츤데레(응?)레이프와 대니의 공식대로 가는 로맨스(응?), 대니와 에블린의 주말연속극처럼 뻔한 로맨스에 대해서도, 베티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심지어 흑인 최초로 미 해군 십자 훈장을 받은 실존 인물 도리 밀러(쿠바 구딩 주니어가 연기)에 대한 이야기나, 침몰한 USS애리조나 안에 갇혀버린 승무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더 자세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그대로예요. 심지어 가장 호평을 받았던 격렬하고 아름다운 공중전 장면에도 추가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화 상영 시간의 길이는 물론 원래도 거의 3시간에 달할 만큼 굉장히 길긴 했지만 더 길어진 것 없이 그대로였지요. 이래서야 감독판으로 편집한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요.

물론 DVD에는 서플먼트라는 것이 있고, <진주만> 감독판의 서플먼트는 2개의 디스크에 나누어 담긴 만큼 제법 풍성한 편이었습니다. 극중에서 알렉 볼드윈이 열연했던 실존인물 두리틀 중령이 책임을 맡았던 도쿄 공습 작전과 그 작전에 참전했던 실제 용사들의 향방에 대한 서플먼트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였습니다마는, 메인 타이틀은 본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편집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화면을 만드는데 급급한 나머지 발생했던 수많은 옥의 티도 전혀 수정없이 그대로 남아있고 말이죠. CG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진주만 공습이 있기도 전의 장면에서 벌써 애리조나 기념관이 살짝 보이는 그런 짧은 장면조차 수정을 안했다는 건 정말이지.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을 영화를 통해 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DVD는 극장보다 훨씬 내밀하게 그런 이야기를 담기 좋은 매체입니다. 영화에서 못다한 이야기도 담아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원래 그리 더 많지 않았다면 굳이 감독판이라는 이름을 달아줄 의미가 없는 거지요. <킹덤 오브 헤븐>은 감독판이 아니라 완전판이라는 이름마저 아깝지 않지만, <진주만>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아쉬운 타이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