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와지의 숲/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반지의 제왕 인물 리뷰 14. 에오윈
땅별
2006. 6. 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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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라스의 백색 숙녀
로한의 여전사 (Shield-maiden of Rohan : 방패-처녀 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Shield-maiden은 본디 바이킹의 여전사들을 지칭하는 집합적 고유명사다. 물론 마술사왕 앞에서 세오덴의 방패가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방패의 처녀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므로, 아마 톨킨은 중의적 표현으로 썼던 듯.)
세오덴의 선왕 셍겔 왕은 결혼을 대단히 늦게 했다. 그의 아내는 곤도르의 롯사르나흐 출신으로 이름은 모르웬이라고 했다. 슬하에 세오덴을 비롯해 2남 2녀를 두었고, 그들은 궁정에서 주로 로한의 언어 대신 곤도르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신하들이 많았다.
에오윈은 제3시대 2995년 마크의 총사령관 이스트폴드의 에오문드와 셍겔 왕의 딸 세오드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오드윈과 남매간인 세오덴 왕은 그녀의 외삼촌이 된다. 에오문드는 대단히 열정적인 장수여서, 적이 나타났다는 소문만 있으면 주변에 있는 소수의 부하들만 모아서 득달같이 말을 달려 적을 잡아 없애곤 했다. 그러다 3002년, 에뮌 무일 경계에서 매복에 걸려들어 죽음을 당한다. 에오윈은 겨우 일곱살이었다. 얼마 후 세오드윈까지 병으로 죽게 되자 에오윈은 오빠 에오메르와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왕자 세오드레드와 형제처럼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자라나며 세오덴과 그의 황금 궁전에 어둠이 드리우는 것을 보아야 했다. 뱀혓바닥 그리마의 추파를 견뎌내면서, 말도 잘 안통하는 하인들과 부하들과만 접해야 하는 삶은 지독한 외로움,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빠인 에오메르의 추방과 세오드레드의 죽음으로 절정에 다다른다.
"이미 혼자가 아니던가? 오열하는 널 누가 위로해주지? 밤은 싸늘하게 널 감시하고 있고, 화려했던 네 인생은 무척이나 초라하도다. 침실의 벽들은 네 숨통을 틀어막고, 자유를 꿈꾸는 널 감금하도다."
살아가는 일에 지쳐갈 때쯤 나타난 아라곤은 그녀에겐 신비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 셍겔 왕과 함께 전장에 나서 야만인들을 멸하기도 했다는, 전설로만 전해듣던 장수의 축복을 입은 두네다인 족장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아버지나 다름없는 왕을 되살린 간달프와 함께.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엔 자신과는 비할수 없이 고귀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고, 에오윈은 사랑하는 왕의 곁에 함께 설수 없던 것처럼, 아라곤의 곁에도 설 수 없었다.
"검이 없는 사람도 검때문에 죽어요. 전 죽음도 고통도 두렵지 않아요."
그녀는, 아르웬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딸들을 대변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고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가족들은 그저 그녀를 보호하고자 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언제나 그녀는 남자들을 떠나보내고 그들의 등을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고, 그 결과로 어린 시절에는 낳아준 아버지를, 자라서는 친형제나 다름없던 세오드레드를 잃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예정된 죽음을 향해 떠나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자신처럼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뒤에 남겨져 버린 메리와 함께 생애 최대의 전투를 향해 나아갔다.
"어떠한 남자도 나를 죽일 순 없다."
"난 남자가 아니다."
간달프조차 어찌할 수 없는 가공할 힘을 지닌 마술사왕도, 그에게 걸린 강한 수호 마법의 유일한 구멍에 걸려 영원히 세상을 떠나갔다. 아홉 반지를 가진 누메노르의 왕과 마법사들중 그 누구도 여자가 전장에 나서서 그들의 대장인 마술사왕과 상대할 경우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또 사랑하는 가족 - 세오덴 왕 - 을 영원히 떠나보내야 했고, 슬픔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병상에서 또다시 아라곤을, 오빠 에오메르를, 그리고 수많은 로한의 전사들과 할머니의 조국 곤도르의 용사들을 떠나보내고 이제는 그들이 가는 뒷모습조차 바라보고 서 있을 수도 없게 되자, 그녀는 역시 전장에서의 상처로 병상에 있던 파라미르에게 선처를 부탁한다. 동쪽을 향해 창문이 난 방으로 옮겨달라고. 의료소 정원에서 그들은 여러 번 만났고, 검은 문에서의 전투 경과를 기다리며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텄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항상 뒤에 남겨져야 했던 여인과, 사랑받고 싶어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갔던 남자. 둘 사이엔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을까.
파라미르는 후에 이실리엔의 영주가 되어 에오윈은 그와 함께 오래도록 미나스 티리스와 오스길리아스가 모두 바라다보이는 에뮌 아르넨에서 살았다. 함께 말을 달렸던 마크의 홀드위네, 메리아독 브랜디벅과의 우정도 결코 잊지 않았고, 사나운 로한 여자라며 경원시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는 달리 에도라스에서 온 백색 숙녀를 이실리엔의 영민들은 모두 우러러 칭송했다고 한다. 더이상 그녀는 아무도 떠나보내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다. 파라미르는 비록 그 후에도 종종 전장에 나갔지만 그들 사이에는 다시 만날 것이란 굳은 믿음이 있었으므로.
사랑을 이유로 자신을 구속하려는 부모님께 단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인 세상의 모든 딸들. 에오윈은 바로 그런 그녀들의 대표였다.